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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그림과 단편소설의 환상적 콜라보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소설로 써서 묶은 놀라운 기획… 스티븐 킹, 조이스 캐럴 오츠 등 정상급 작가 17인의 단편 수록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는 20세기 미국의 가장 중요한 현실주의 화가 중 한 명이다. 텅 빈 도시의 풍경과 같은 고립된 것에 대한 각별한 안목이 돋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물질적 현실이 복사가 아니라 해석될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림에 반영된 그의 독창적 현실 해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가 평생 광고 미술과 삽화가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다는 점에 그 해답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그는 리얼리스트로서 삶의 표상과 거기에 내재하는 스토리에 주목했다.

그의 작품을 통해 받는 가장 강렬한 충격은 가슴을 에는 ‘적막감의 정조’다. 1925년에 발표된 그의 첫 번째 출세작 <철길 옆의 집>이 그렇다. 현대 산업의 상징인 철길이 빅토리아 풍의 저택 앞을 가로지르고 있는 풍경으로, 미학적 변혁의 시기에 자신만의 화법을 드러냈다. 이때부터 호퍼는 미국의 현실을 그리는 사실주의 작가로 미술 애호가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60년 대 추상표현주의가 쇠퇴하고 팝아트가 떠오르자, 그는 팝아트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미친 선구자로 여겨졌다. 그의 작품은 알프레드 히치콕,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영화감독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호퍼의 작품은 소설가와 시인에게 특히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그의 그림이 일상의 한순간을, 어떤 이야기든 탄생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화폭에 담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놀라운 기획의 책이 출간되었다.

바로 호퍼의 그림 하나하나를 소설로 써서 묶어보자는 시도다. 콘셉트만으로도 큰 기대를 모으게 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다.

이 프로젝트는 로런스 블록의 주도로 성사됐다. 미국 추리작가협회 최우수 작품상을 다섯 차례 수상하고 그랜드 마스터상, 그 외 다수의 상을 받은 거장이다. 그는 이 책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후 함께하고 싶은 작가들의 명단을 만들었고, 거의 대부분이 그 초대에 응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 항상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조이스 캐럴 오츠, ‘잭 리처 시리즈’의 리 차일드, <본 콜렉터>의 제프리 디버, ‘해리 보슈 형사 시리즈’를 쓴 마이클 코널리, 퓰리처상 수상 작가 로버트 올렌 버틀러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작가들이 모였다. 각자 한 점씩 호퍼의 작품을 선택한 후 그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소설을 써내려 갔다.

그 결과 스릴러, 드라마, 범죄, 미스터리, 환상문학 등 작가들의 면면만큼이나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 모였다. 그 17편의 소설이 바로 이 작품집 <빛 혹은 그림자>로 탄생했다. 책에는 각 소설에 해당하는 호퍼의 그림이 컬러 도판으로 수록돼 있다. 어떤 이야기는 작가가 선택한 그림과 맞아떨어져 캔버스에 곧바로 튀어나온 것만 같다. 또 어떤 이야기는 그림이 계기가 됐으나, 캔버스에 살짝 비껴 모호한 각도로 맞고 튀어나온다. 장르가 다양하지만, 어떤 작품은 기존의 장르에 포함되지 않는 독창적인 형식을 지녔다. 그림을 소설이란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가기 좋은 한국의 화가를 생각해본다.

거대한 서사를 쓰기엔 이쾌대가 제격이고, 이중섭의 그림에선 최인호가 쓴 <가족>과 같은 애틋한 연작 소설이 탄생하지 않을까.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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