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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다산의 '경세유표' 연구서 출간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조선은 통계 부실, 포퓰리즘으로 망했다” 

글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ins.com
정약용, 국가의 근간인 토지·과세제도 혁신에 안간힘… 세종 비롯한 역대 군왕과 백성의 현실 안주 자세가 몰락의 뿌리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경세유표]를 조선왕조에 속하는 역사적 문헌으로 냉철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 후기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쇠락해가던 조선왕조를 재건하고자 <경세유표>를 저술했다. 국가와 사회의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위한 방안과 원칙을 담았다. 이 책이 1표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로 대표되는 다산 경세론(經世論)의 맨 앞에 자리하는 배경이다.

<경세유표>가 다산의 국가 개혁 방안을 담은 중심적 저술이기 때문에 그가 추구한 개혁의 기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더 진행돼야 한다고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81)는 강조한다. 안 교수는 “<경세유표>에 서술된 분야별 국가 개혁 방안에 관해서는 다소 연구가 이뤄졌으나 그 방안들을 관통하는 개혁의 기본체계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그가 이 작업에 10년 넘게 매달린 끝에 노작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를 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안 교수는 국가 개혁에 대한 해답으로 ‘체국경야 설관분직(體國經野 設官分職)’을 제시했다. 체국경야란 국정과제인 도성(都城)을 건설하고 들을 구획하는 일이며, 설관분직은 이 국정과제를 수행할 관료기구를 정비하는 작업이다. 체국경야 설관분직은 중국 주(周)나라의 관직과 제도를 집대성한 <주례(周禮)>에 나오는 국가 체계의 기본 뼈대를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추석 연휴 직전 경기도 의왕시 자택 인근에서 만난 안 교수는 “정약용이 관찰한 조선시대 관·민의 행동양식과 현대 한국인들의 행동양식 사이에 유사점이 발견된다”면서 다산이 제시한 국가 개혁 과제가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했다.

연구를 해보니 <경세유표>를 저술할 즈음의 다산 심경이 와 닿던가?

“제가 10여 년간 <경세유표>를 검토하면서 받은 느낌은 다산이 맹자의 ‘어진 정치’ 즉 ‘인정(仁政)’에 마음의 행로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진 정치는 토지를 다스려 구획하는 ‘경계(經界)’에서 시작된다는 게 맹자의 가르침이다. 토지의 경계가 바르게 되면 농민들에게 경작지의 분배가 고르게 되고, 관료에게 지급되는 녹봉도 다스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폭군과 탐관오리는 토지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려 한다. 다산은 당대의 모순이 집약된 토지제도를 바로 잡아 국가 개혁의 동력으로 삼고 퇴락해가는 조선의 기틀을 다시 세우고자 한 것 같다.”

<경세유표>의 핵심이랄까 본질적 가르침을 정리한다면?

“<경세유표>에서 ‘유표’는 임종에 임박한 신하가 임금에게 남기는 부탁의 글, 즉 유서라고 하겠다. 1762년에 태어난 다산은 환갑이 되던 해인 1822년 그 두 해 전에 편집을 완료한 <방례초본>을 <경세유표>라 명명했다. <경세유표>는 체국경야 설관분직을 요체로 한다. 이를 알아내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다산은 조선의 경전(經田) 제도인 ‘결부제(結負制)’가 토지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님을 구명(究明)하고 ‘정전제(井田制)’로의 전환을 추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전법, 방전법, 어린도(魚鱗圖, 토지의 경계를 물고기 비늘 같이 그려 넣은 토지대장) 등 토지를 정확하게 측량할 수 있는 기법에 다산이 몰입한 게 아닐까.”

다산의 상비군(常備軍) 확보 꿈


▎다산 정약용 영정. 다산은 조선 후기 이완된 제왕의 통치권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정전제를 구상했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어떤 게 제시됐는가?

“다산이 생각한 국가 개혁의 기본 목표는 ▷정전제 도입을 통한 국가적 토지소유 확립 ▷전지구획(田地區劃)을 통한 논·밭의 넓이 측량[양전(量田)] ▷9분의 1세의 징수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한마디로 토지를 다스리는 일(經田, 경전)을 자기 시대의 최대의 과제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전지에 대한 9분의 1세만으로는 재정수입이 부족할 것을 염려해 부공(賦貢, 공물 징수)을 거둘 수 있는 세원(稅源)을 개발하고자 임업, 어업, 광업 및 상공업도 장려하려 했다. 이를 통해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하고 상비군(常備軍)을 확보함으로써 부국강병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조선 토지제도의 근간을 갈아치우는 일 같은데?

“그렇다. 논·밭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결부제를 폐지하고 실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정전제의 도입을 주장한 것이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다시 세우자면 그와 같은 획기적인 혁신이 절실했던 것이다.”

결부제는 생산량에 따라 토지를 6등급으로 구분해 1등전 1결은 약 3000평, 6등전 1결은 약 1만2000평 식으로 파악하는 경전 제도다. 하지만 수확량을 경전의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토지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된 결부 정보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아 현실과 겉돌았다는 게 다산의 분석이다. 그 결과 이를 관리하는 지방 관청의 하급 관리와 지주들은 결수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등 부패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다산은 토지 면적 산출제도가 갖는 결함 탓에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다고 보고, 토지의 절대면적을 기준으로 경전하는 정전제의 도입을 모색했다. 토지 제도의 개혁을 국가 개혁의 본령으로 본 셈이다.

결과적으로 결부제는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았다는 말인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조에 걸친 제도인 결부제는 한 번도 토지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한 일이 없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 왕조에서는 단 한 번도 넉넉한 재정을 확보하고 상비군을 둔 적이 없는데 그 원인도 바로 결부제에서 비롯됐다.”

대안으로 제시된 정전제는 진일보한 조세제도라고 할 수 있나?

“정전제는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해 평지의 비옥한 논·밭은 ‘우물 정(井)’ 모양으로 9등분으로 가른다. 그리고 가운데 9분의 1은 그 수확물이 국가에 귀속되는 공전(公田)으로 정해 농민들이 공동 경작케 하고, 나머지 9분의 8의 토지 생산물은 농민이 가져가는 제도였다.”

그것만으로 국가재정이 증가할까?

“다산은 농민과 전지에만 국가의 세원이 집중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다. 정전제 시행과 병행해 광업·어업·상업·임업·공업 등을 진흥하고, 거기에 과세하는 부공제를 도입하려고 했다. 농민의 부담은 줄이면서도 국가 재정 확충이 가능한 방도였던 것이다. 정전제의 바탕 위에 상공업 분야도 장려하고 거기서 추가 세원을 발굴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정전제의 공전(公田)에서 거두는 9분의 1세와 부공을 국가 재원의 양대 산맥으로 활용한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죽기살기 식의 경쟁 없는 나라의 말로


▎다산이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500권이 넘는 저작을 남긴 다산초당. 다산은 이곳에서 연못도 파고 채소도 길렀다.
다산의 <경세유표> 개혁방안이 실행됐다면 조선은 망국을 피해 갈 수 있었을까?

“나라의 흥망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할 수 없지만, 국가 재정이 반석에 올라 관료 체계가 안정화되고 상비군을 확보하면서 외침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단정할 근거는?

“조선 후기 결부제 하의 조선 농민은 토지 생산물의 4분의 1을 세금으로 빼앗겼음에도 중앙정부에 들어오는 재정수입은 전체 토지 생산물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중간에 관리들에 의해 착복되거나 유실되는 상황이 일상화된 것이다. 부실한 경전 제도와 세금 제도로 인해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는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빈곤에 허덕였다. 이런 상황이 누적돼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에 처했다는 게 조선 후기에 대한 <경세유표>의 진단이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국가적 토지소유 제도 확립을 꾀했다고 안 교수는 평가한다. 당시의 현실은 국가(왕)-지주-백성 등 3단계로 이어지는 토지 소유 및 경작 구조였지만 이를 왕-백성 2단계로 단순화하는 게 목표였던 것이다. 군주가 백성에게 토지를 배분하는 권한을 가져야 백성들이 군주를 위해 목숨을 다해 봉사한다는 게 다산의 지론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 후기 이완된 제왕의 통치권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정전제를 구상했다는 게 안 교수의 결론이다. 안 교수는 “다산은 토지가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소유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토지를 ‘왕토(王土)’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왕조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분석된다. 먼저 왕의 리더십 부재를 꼽을 수 있다. 왕권이 미약한 탓에 국가적 토지 소유를 실현하고 백성을 장악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통치자나 피통치자가 모두 무규율 상태에 빠져있었다. 둘째는 양안(量案, 토지대장)이 토지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세금을 제대로 징수할 수가 없었다. 셋째는 조세의 명목과 그 수취 방법이 복잡해 부정부패가 창궐했다.”

조선의 역대 왕과 측근들은 이런 맹점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과단성을 발휘하지 않았나?

“조선 왕조는 일본의 봉건제와는 달리 중앙집권 국가로서 죽기살기 식의 경쟁이 없었기 때문에 권력다툼은 강했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누구나 알았지만 바꿀 엄두를 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토지 조사를 해서 제도를 바루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걸 정부 재정이 허락하지 않으면 임금이 내탕금(內帑金, 개인 금고)을 풀거나, 관료들의 녹봉의 일부를 떼서라도 밀어붙였어야 할 사업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일을 하려 하지 않은 게 점점 나라를 질곡으로 빠져들게 했다. 당장은 사탕이 달다고 아무도 그런 비용을 흔쾌히 염출하려 들지 않으니 동력이 생길 리 없다. 심지어 개혁을 가로막는 움직임도 있었다.”

늘 개혁에는 방해세력이 존재하는 법이다.

“다산이 일찍이 <경세유표>에서 조선 개혁의 어려움을 개탄했다. 다산은 ‘우리나라에서는 조금만 경장(更張: 제도를 바꿔 새롭게 함)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의 떠드는 소리가 뜰에 가득하고, 길가 행인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이 사람 저 사람의 의견이 달라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다’고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심지어 성군인 세종대왕 시절에도 정책이 여론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보수·진보 진영 일류국가 전략에 합의해야


▎다산이 국가 개혁의 동력으로 삼고자 저술한 [경세유표](왼쪽). 안병직 교수가 10년에 가까운 집필 끝에 펴낸 저서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오른쪽).
세종대에도 그랬다니 뜻밖이다.

“조선의 결부제는 세종 때 ‘공법(貢法)’의 제정을 계기로 법제화됐다. 공법이란 종래의 3등급으로 하던 전국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으로 세분화해 징수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자면 토지 실태 파악이 필수적인데 일부 농민들이 이에 반기를 들었고, 중신들의 의견도 엇갈렸다. 논란이 분분하자 조정은 세종의 지시를 받아 위로는 고관대작부터 아래로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총 17만여 명에게 찬반 의견을 물었다. 절반이 넘는 9만8000여 명이 찬성했고 결국 공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누구에게나 엄청난 부담이 되는 과세제도를 이해 당사자들에게 물어 시행한다면 올바른 정책 수립이 가능했을까? 법률 제정이 의미 없는 여론조사에 휘둘렸다는 점에서 세종대의 정책 결정 과정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 사례는 조선왕조의 군주가 가진 재정과 군사력의 취약성을 잘 대변한다고 본다. 신하와 백성의 반대를 물리치고 올바른 제도를 실시할 수 있을 만큼 왕권이 강력하지 못했던 것이다.”

민심이 개혁을 이루는 압력수단으로 작용하긴 어려웠을까?

“농민은 토지 실태 조사를 반대했다. 토지를 구획하여 그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세제도를 합리화한다면 수탈을 덜 당하고 그들에게 이로운 게 사실이지만 당장 세금을 부과당한다는 게 싫은 것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수탈이 일상화하면서 조세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심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게 쌓여 조선 왕조의 멸망의 원인으로 이어진 건가?

“조선의 패망은 단순히 군왕의 리더십이나 제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국가 구조 자체가 정치를 행할 수 없었던 환경과도 연결된다. 이 와중에 뒤를 봐주던 청이 청일전쟁에서 지면서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욕망이 조선을 넘보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패망은 제국주의 역학구도의 산물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다. 단순히 일본의 좋고 나쁨을 따지기에 앞서 당시의 국제 권력질서를 직시해야 한다.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해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일본의 지배구조 속으로 조선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정세였던 셈이다.”

이번 저서에서 “정약용이 극복하려 했던 조선후기의 역사적 과제와 오늘날 한국 현대사가 당면한 역사적 과제 사이에 어떠한 유사점이라도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연구 목적의 하나”라고 밝혔다. 어떤 유사점을 찾아냈나?

“조선 후기의 중요한 국가적 과제들이 눈앞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관·민의 포퓰리즘에 가로막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점은 큰 교훈으로 와 닿는다. 당대의 기본 과제였던 양전(量田), 즉 토지 실태 파악이 불발에 그치고 말았듯이 오늘의 한국 또한 국가의 기본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 문제에 대한 국가적 합의를 도출해야 하나?

“대한민국은 저개발국가에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룩한 일류국가로 발전하는 도상에 있다. 지금은 보수든 진보든, 우파든 좌파든 일류국가를 평화적으로 만드는 방법에 대한 합의가 절실한 시점이다.”

1965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를 역임한 안 교수는 뉴라이트 운동을 대표한 사상가로도 알려져 있다. 2006년 보수주의 이론지 <시대정신> 이사장, 2007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는 등 2008년 보수 정권 출범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평가가 따른다. 그는 1970년대까지 사회주의 계열의 학자로 분류됐고, 서울대 운동권 인사들의 대부로도 일컬어졌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1980년대 한국의 경제 발전양상을 관찰한 끝에 한국 경제가 선진국을 향해간다는 ‘중진 자본주의론’으로 선회한다. 해방 이후 한국은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과 군사적 물리력을 가진 정부가 있었기에 산업화와 재정자립, 나아가 민주화까지 선순환 구조로 발전했다는 게 그의 한국 현대사 고찰 결론이다.

다산은 혁명가 아닌 왕도정치 회복 갈망한 충신


▎안 교수는 한국은 이미 성공한 나라이므로 굳이 역사에서 메시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10년 동안의 <경세유표> 연구도 한국 사회 현주소를 진단하는 작업의 일환인가?

“다산을 원래 있던 자기의 자리로 돌려주자는 생각에서 연구에 뛰어들었다. 기존의 다산 관련 연구는 조선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의 연원을 다산에게서 찾으려는 의도에서 진행된 게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선 학자들의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 또한 거기에서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아를 찾는다는 자세로 진행된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다산의 저서와 가르침은 근대 들어 나라를 구할 만한 사상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걸 혁명적 사상이라고 강변해서는 곤란하다. 다산은 원래 충실한 조선왕조의 신하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안 교수는 <경세유표에 관한 연구>에서 기존 연구들과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번영하는 자립적 국민국가를 이룩한 오늘날 이루어지는 <경세유표> 연구는 과거의 연구와는 자세를 달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화두를 던졌다. 종전의 연구가 <경세유표>에서 조국의 자주적 발전과 사회주의적 건설의 계기를 찾아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처하는 메시아 추구적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연구는 <경세유표>를 조선왕조에 속하는 역사적 문헌으로 냉철하게 파악하는 방향으로 전개돼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테면 “정약용이 낡아빠진 조선왕조라는 국가를 재건하고자 어떤 개혁 방안을 제시했는가를 탐구하는 일”이 연구의 골간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다산의 이념적 좌표를 설정한다면?

“그는 성인(聖人)들의 뜻을 받들어 철저하게 중국 고대의 왕도정치의 회복을 꿈꾼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조선을 개혁해서 제대로 된 ‘왕의 나라’를 구현하는가에 골몰했고, 중국 고대 왕정을 조선에 실현하는 게 목표였다. 핵심 주제로 경전, 즉 토지 실태 파악을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경세유표>에서 혁명 정신을 찾겠다?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았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나? 또 현재의 한국사회 발전 단계는 메시아나 혁명적 이념을 필요로 하는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 진보진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정한다. 그를 대신할 메시아를 찾는 것 같다. 저는 메시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미 한국은 잘 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근대 국민군대 체계를 확립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통해 자립국가로 가는 길을 닦았다. 이런 맥락에서 제 연구는 엉뚱한 자리에 놓인 <경세유표>를 제자리에 갖다 놓은 일에 해당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와 결을 완전히 달리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이 기존 다산 연구자들의 반발을 불러오진 않을까?

“기존 학계에서 문제를 제기해주면 해줄수록 고마울 따름이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조선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생했다고 주장해온 자본주의 맹아론자들은 제 연구 결과에 반론을 제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혹 이단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의문이 커지는 게 학문이다. 문제와 논점을 정확히 제기해주면 해줄수록 저로서는 환영이다. 논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경세유표>도 제자리를 찾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 글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ins.com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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