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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미학(20)] 전국 유림의 독립청원서 초안 작성한 회당(晦堂) 장석영 

만국평화회의에 청원서 보내 파리장서운동 이끌다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객원기자
김창숙 등과 137명의 서명 받아 상하이를 거쳐 파리로 발송…한인의 이주 지역인 간도 현지답사 통해 처참한 실상 알리기도

▎회당의 현손인 장세민 주손이 녹동서당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가공할 6차 핵실험을 둘러싸고 나라 안팎이 뒤숭숭하다. 북한과 미국은 상대 지도자를 향해 ‘말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월 19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한의 완전 파괴”를 언급한 데 이어 지지자 연설에서 “(전직 대통령들이 김정은을) 진작에 처리했어야 했다”고 압박했다. 북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9월 23일 유엔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정신이상자’로 몰아세웠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은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대북 압박에서든 인도적 지원에서든 어정쩡한 처지가 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대한제국 말기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을 때 이 땅의 지식인은 세계에 어떻게 호소했을까. 안목이 동양에 머물렀던 선비들은 민족의 위기를 나라 밖에서 어떻게 풀려 했을까. 이제 한 선비를 통해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국외로 눈을 돌린 방식을 돌아본다. 지금도 시사점이 있다. 먼저 그가 남긴 일기를 편다.

검사와 통역이 한 명씩 나란히 앉아 나로 하여금 탁자 아래 서게 했다. 그가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조선의 독립을 청한 적이 있소?” 묻기에 내가 “있소”라고 답했다. 그가 “‘통고도내문(通告道內文)’을 짓고 ‘총독부장서’를 쓴 적이 있소?” 물어 내가 “있소” 했다. 그가 “그 내용은 무엇이오?” 다시 묻기에 “지금 그 글을 외울 수는 없으나 대체적인 뜻은 이러이러하오”라고 대답했다. 그가 “인심을 선동하고 국법을 위반해도 되오?” 하기에 “내 스스로 우리나라 일을 했는데 귀국의 법을 위반했는지 어떤지는 내가 알 바 아니오”라고 응수했다.

일기를 쓴 사람은 경북 칠곡 녹리( 里)의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6) 선생이다. 이 부분은 3·1독립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16일 기록이다. 장석영은 그해 유림(儒林)이 프랑스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인 장서의 초안자이자 서명자였다. 그는 그 일로 3월 9일 성주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고 대구교도소로 이송된다.

9월 18일 선생의 마을을 찾았다. 회당의 현손인 장세민(50) 주손은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녹동서당( 洞書堂)’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녹리·녹동은 이 마을의 별칭이다. 이 지역은 여헌 장현광의 증손인 장만중 4형제가 이거한 이후 인동 장씨 세거지가 된 곳이다. 마을 앞으로 가야산 줄기가 지나고 인근에 경북과학대학이 있다. 칠곡군청이 있는 왜관보다 성주가 가기 더 편한 위치다.

“바로 저 방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주손이 서당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녹동서당은 장석영이 외지 생활을 마치고 1926년 각산으로 귀향했을 때 여러 지기의 권유로 설립한 강학 공간이다. 창건 당시는 ‘만서정(晩棲亭)’이었다. 그는 말년을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회당은 정자를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투옥 후에도 292일의 옥중일기 남겨


▎회당과 그 아들이 쓴 만서정기 편액.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장석영은 성주에서 활동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대표적 문인이다. 참찬(參贊) 벼슬을 지낸 면우(勉宇) 곽종석(郭鍾錫) 등과 같이 배웠다. 면우가 회당보다 다섯 살 연장(年長)으로 한주의 수제자 역할을 했다. 장석영은 3·1운동 직후 면우의 제자로 국내외 정세에 밝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0 등과 협의를 거쳐 파리만국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한다. 회당은 그 일과 만세운동 등으로 징역 2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때 일을 <흑산록(黑山錄)>이라는 옥중일기에 남겼다. 1919년 2월 4일부터 그해 11월 1일까지 292일간의 육필 기록이다.

당시 대구교도소는 글을 쓰는 것이 엄격히 금지됐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일기를 남겼을까? <흑산록>을 국역한 장세곤(59) 현손은 “아들(장우원)이 교도소를 면회할 때마다 들려준 이야기를 적었고 회당은 출옥 뒤 그 기록을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어서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일기의 제목인 ‘흑산’이란 표현이 궁금하다. 회당의 설명은 없다. <흑산록>을 학계에 처음 보고한 정우락(53) 경북대 교수는 “당나라 장수 배행검이 돌궐을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장소가 흑산”이라며 “이와 연계해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보면 장석영의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격한 필치로 파리장서를 초안하다


▎전긍재 편액이 보이는 녹동서당 내부.
“한국 유생 곽종석과 장석영 등은 파리 회중에 절하며 글을 올립니다. 종석 등은 망국의 비천한 유생으로 남은 목숨에도 죽지 못하고 10년 동안이나 혀를 감추며, 감히 천하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한 것은 타인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감히 품고 있던 마음을 만국평화회의 자리에 스스로 펴지 않겠습니까. (…) 엎드려 바라건대 군공대인(群公大人)께서는 세밀하게 상황을 살피시고, 시모노세키조약과 유럽의 통첩 사례에 따라 우리에게 예전과 같은 독립자주권을 허락해 주시고 일본의 그물에서 벗어나 세상의 동포들과 나란히 서게 한다면 작은 나라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천하 만방의 공의(公義)일 것입니다. 만약 종석 등이 무정한 말로 만국을 무고한다면 일본 의원들과 회의석상에 나란히 앉아 그 곡직을 질정해 말이 궁해지면 기망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천만 번 살피소서.”

장석영은 이렇게 글을 써두었다. 그때 김창숙이 서울에서 내려와 곽종석에게 파리로 보낼 청원서를 요청한다. 곽종석은 나이가 많아 글을 쓸 수 없다며 장석영을 찾으라고 한다. 이후 장석영은 지어 놓은 글을 곽종석이 있는 거창 다전(茶田)으로 보내 의견을 듣는다.

여기서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곽종석은 “이 글이 너무 과격하다”고 평했다. 언어가 거세고 직설적이어서 외교문서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일까? ‘갑신년에 우리 황제를 겁박해 물러나게 하고, 우리 대신을 도살했으며 을미년에는 병사를 잠입시켜 우리 황후 민씨를 시해했다’는 등이다. 장석영은 상황을 그만큼 절박하게 인식했다. 나라 잃은 유생으로 세계만방에 처해진 실상을 가감 없이 알리는 게 당시로선 최상의 방법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장석영이 쓴 초안은 외교문서로서 결격이 지적돼 최종본이 되지 못했다. 대신 곽종석·장석영 본에 충청도의 김복한 본이 합쳐져 최종본이 다시 만들어진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짓는 파리만국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해 독립을 이루자는 뜻으로 추진됐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김희곤(63) 안동대 교수는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이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만들고 서명을 받아 중국을 거쳐 파리로 보낸 것”이라고 성격을 규정한다.

이 운동을 추진한 인물은 광무황제(고종) 장례로 상경한 몇몇 젊은 유림이었고 이들의 활동이 경북과 충남으로 확대되며 청원서 작성과 서명자 확보, 상하이 이송과 번역, 그리고 파리로 보내는 단계로 진행됐다. 여기서 장석영은 장서를 초안하고 곽종석은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린다. 김희곤 교수는 “파리장서는 작성과 전달 과정에 다양한 주장과 견해가 있어왔다”며 “당시 정황을 따져 보면 파리장서는 (회의에) 상정될 수 없었다”며 한계를 아쉬워했다.

일제 경찰은 독립청원서의 낌새를 알아채면서 관련 인사를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김창숙은 안동 등지를 돌며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때까지 독립청원서가 상하이에 도착하고 파리로 발송된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는 단지 추진 사실을 추적하고 관련 인물을 검거하는 단계였다. 장석영이 경찰에 불려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칠곡 녹동서당 뒤에는 장석영의 생가가 있었다. 뒷산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했다. 장세민 주손이 사당으로 안내했다. 참배를 마치자 사당에 모셔진 회당의 초상화를 공개했다. 흑건에 심의를 입고 오른손에는 검은 깃털 부채를 들고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71세 만년의 표정이다. 초상화 왼쪽에는 평생 교유한 곽종석과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의 찬사가 적혀 있다.

회당은 <흑산록>에 파리장서를 둘러싼 동지들의 움직임도 기록했다. 자신의 항소가 진행되던 6월 하순에는 안동 출신 이만규·류필영·류연박 등이 잡혀 들어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자신을 속박했던 대구교도소의 내부도 묘사했다.

“감옥 가운데는 1감, 2감, 3감이 있고 병원과 긴 회랑이 몇 천백 간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감은 모두 16개 방으로 돼 있다.(…) 방 한 모퉁이에 물통을 비치해 두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물을 받아둔다. 한 모퉁이에는 똥통을 두고 똥과 오줌은 모두 통 위에서 누며 (…) 먹을 때는 반드시 꿇어앉아야 하고 또 서로 등지고 앉아야 하며 말을 하거나 흘깃 보아도 안 된다(…).” 투철한 기록이다.

<흑산록> 앞서 만주 돌아본 뒤 <요좌기행> 남겨


▎생가의 사당에 모셔진 회당의 초상화.
장석영은 형조참판을 지낸 장시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해 향시에 입격한 뒤 국자감시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과거를 그만둔다. 28세에 이진상의 문하에 들어가 선생의 아들 이승희와 함께 공부했다. 하겸진은 장석영의 묘갈명에 “성품은 강개하면서 모나지 않고 조화하면서도 무리에 휩쓸리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는 대구 도동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등의 초대를 받아 강학하고 <의례집전(儀禮集傳)> 등 예서를 남겼다.

회당은 파리장서 추진에 앞서 1912년 남만주를 거쳐 하얼빈 동쪽 밀산(密山)까지 100일간 기차 여행을 한다. 빼앗긴 나라를 떠나 새로 정착 중인 한인 거주지역이 살 만한 곳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 기록이 <요좌기행(遼左紀行)>이다. 1월 19일 기차를 타고 왜관 석전진을 출발해 4월 28일 돌아오는 여정이다.

조선인들의 만주 이주는 1900년대 초부터 광복까지 그 수가 200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가 있다. 당시 북간도(두만강 북쪽 지역)와 서간도(압록강 북쪽)는 살기 좋다는 소문이 조선 전역에 파다했다고 한다. 장석영은 2월 4일 중국 안동현에 도착한다. 그날의 일기는 이렇다.

“기차역부터 현에 이르기까지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노인 부축에 어린이를 이끌고 오는 사람으로 도로가 가득 매워졌다. 모두 한인으로 서간도로 이주하려는 행렬이었다. 태반이 영남인이고 관동인과 호서·호남인이 많았다. (…) 이미 강은 건넜고 양식은 떨어져 진퇴할 수 없어 울음소리가 길에 가득했다. 아! 하늘이 우리 백성을 여기에 이르도록 곤궁하게 하는구나!”

그는 현장을 확인한 뒤 간도가 살기 좋다는 풍문이 허구임을 밝힌다. 그로부터 12일 뒤 도착한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인 교계(交界) 한인촌에서는 더 실망스러운 현실을 목격한다. 2월 16일 일기를 보자.

“남쪽으로 몇 리를 가서 한인 전위장의 집에서 묵었다. 전 씨는 술주정으로 미친 듯이 날뛰며 집안 물건을 때려 부수고 그의 며느리 송씨를 때렸다. (…) 조금 있다가 그의 아들 명옥이 들어와 문에 걸터앉더니 어미에게 ‘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아버지가 죽지 않으면 맹세코 돌아오지 않겠다’며 나가버렸다. 나는 그를 불러 부자의 인륜으로 꾸짖으며 여러 가지로 일깨웠다. 한참 만에 명옥은 밖으로 나가 회초리 하나를 들고 아비에게 죄를 청하니 아비 또한 노여움이 조금 풀어졌다.”

북간도도 서간도도 우리 살 곳 아니더라! 회당의 눈에는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일제에 강점된 한반도가 더 이상 도리를 추구하는 사대부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는 도덕과 윤리를 지키면서 살 만한 곳을 찾아 만주로 떠났지만 현실은 이렇게 참담했다.

장석영은 4월 2일 만주와 러시아 일대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던 사돈이자 지기인 이승희를 신치(新峙)에서 만난다. 눈물의 상봉이었다. 이들은 16일간 함께 하며 위안스카이(袁世凱,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게 연명으로 편지를 보내 문명사를 논하고 떨어진 옷을 바꿔 입기도 했다.

장석영은 일제의 시련 속에서 민족의 새로운 만주 정착지를 찾았지만 결론은 실패였다.

위안스카이와 문명사를 논하다


▎1999년 녹동서당 앞에 세워진 회당 사적비.
일제의 강점으로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도 윤리가 파괴돼 있었다. 만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땅에서 넘어간 동포 역시 그랬다.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관계는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떠돌았으며 때로는 일본의 하수인이 되어 동포를 괴롭히고 있었다.

녹동서당이 있는 칠곡 녹리는 20여 호 작은 마을이지만 배움의 기운이 이어진다. 녹동서당 왼쪽으로 또 하나의 서당이 있다. ‘녹리서당( 里書堂)’이다. 4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고 예학(禮學)과 경학(經學) 관련 저술을 남긴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 선생이 이끌던 서당이다. 사미헌은 회당의 재종숙이다. 녹리서당 오른쪽은 ‘아헌정사(我軒精舍)’와 함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아늑한 마을이다.

중국 옌볜의 김승종(54) 시인은 지난해 백두산을 오르며 북한의 핵실험이 그 지역에 얼마나 큰 고통이 되는지를 들려줬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마다 큰 진동 때문에 주민들이 극한의 공포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핵실험이 자칫 백두산을 활 화산으로 폭발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한다고 했다.

남북한에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계와 손잡고 평화를 되찾고 지키는 노력은 이어져야 할 것이다. 또 한반도는 갈라져 있지만 여전히 한민족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다. 회당은 이 땅과 민족의 소중함을 먼 길을 돌아 일러주고 있다.

[박스기사] 조선 선비의 좌충우돌 중국·러시아 여행 - 말 통하지 않는 데다 차표마저 도난 당하는 낭패의 연속


▎녹리에는 녹동서당과 함께 사미헌 장복추 선생이 세운 ‘녹리서당’이 있다.
1912년 조선 선비의 중국·러시아 여행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기차 여행에서 소통의 수단은 오직 한자 필담이었다. 한자 글자와 중국어 말은 많이 달랐다. 창춘(長春)에서 교계(交界)로 가기 위해 러시아 기차를 갈아타면서는 중국어에 러시아어까지 필요해졌다. 동행한 천준배도 외국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위는 러시아인 아니면 만주인이었고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은 조선인 둘 뿐이었다. 하얼빈역에 내렸을 때 당황스러운 경험은 일기에 이렇게 남아 있다.

“우리 두 사람은 어떤 기차를 타야 하는지 차가 언제 떠나는지 알지 못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았다. 묵묵히 있으면 앉은 채로 기차 시간을 놓치게 될 것 같고 어디에서 차비를 내는 지도 몰랐다.(…)”


▎[회당집]을 찍기 위해 새긴 목판으로 총 770판이 전하고 있다. / 사진제공·한국국학진흥원
용케도 러시아어와 한자 두 가지를 이해하는 중국인을 만나 낭패를 모면할 수 있었다. 장석영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하얼빈의 귀신이 되었을 것”이라고 다행스러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교계행 기차 안에서 차표를 도난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의 일기를 보자.

“새벽녘에 순검이 차표를 검사했다. 주머니 속에 차표를 넣어 두었으나 주머니를 베어가 단지 끈만 조금 남아 있었다. 잠들었을 때 도둑놈이 주머니의 끈을 잘라 간 것이다. 순검에게 남은 끈을 보여 주었다. 순검은 놀라며 앉아 있는 여러 만호(滿胡, 만주인)를 주시하더니 한 사람을 잡아 어디론가 데려갔다.

곧 기차가 서고 마침내 나도 차에서 내리게 한 뒤 데리고 갔다.(…)”

소매치기로 추정되는 만주인이 잡혀가고 장석영 또한 기차가 서자 공관에 불려갔다. 이때 회당은 “청컨대 만 리를 가는 나그네가 길에서 죽지 않게 해주시오”라고 애원했고 관인은 작은 글씨를 써서 순검에게 주면서 편의를 봐주었다. 이후 장석영은 차표를 검사할 때마다 남은 주머니의 끈을 들어 보였고 순검은 웃으며 지나갔다. 이를 두고 한 중국인은 회당이 나이가 많고 풍모가 남달라 특별히 봐준 것이라고 했다. 언어불통으로 생겨난 해외여행의 해프닝이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객원기자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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