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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11) 분재기(分財記)] 이승의 사람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16세기까지 상속은 남녀 구분 없이 균등하게 이뤄져…토지나 노비 등 유형의 재산뿐만 아니라 가르침·가치관 등 ‘무형의 가치’까지도 포함돼

▎이승에서의 마지막 선물이 유산이다. 저 세상으로 가려는 사람이 주는 선물은 그만큼 귀하고 고맙다. 농촌에서 상여를 앞세운 전통방식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다.
긴 여행을 이제 마무리하려 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마주하는 순간, 바로 죽음이다.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길,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기나긴 인생길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일을 경험하지만, 죽음은 누구나 한 번 겪는다. 그 경험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그것을 끝으로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기 때문에 실제로 어떠한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간혹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의 임사(臨死) 체험이 과연 죽음에 근접한 것인지조차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평생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무엇을 떠올릴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를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들을 생각하지 않을까. 회한과 복수를 떠올린다면 내 삶은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오히려 고맙고 소중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비록 찰나의 순간이지만 나는 행복함 속에서 죽음을 대할 것 같다.

한동안 유언장을 써보는 열풍이 불었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 있는 내가 죽음을 목전에 둔 마음으로 쓰는 글이라서 그런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지금의 내 삶을 반성하거나 결의를 다지는 마음가짐을 만들 수 있었다. 꼭 그 목적만은 아니었지만, 유언장을 작성해보는 방식의 글쓰기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죽음에 관련된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만큼 죽음은 모든 인간이 마주해야 할 숙명이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근원적인 공포나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 사건에 당면해서 혹은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는 것이 바로 유언장이다.

개인의 성향, 공간적 배경, 문화권마다 다르겠지만 유언장에는 그것을 작성하는 주체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들어갈 수도 있고 이승에서의 자신을 정리하는 것들이 간결하게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재산 문제다. 자신이 이승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서 한동안 영향력을 행사할 것들이 바로 재산이다. 그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유언장 속에 포함하기 마련이다.

물론 재산이 거의 없는 가난한 사람은 굳이 재산 처리에 대한 내용을 쓸 필요가 없겠지만, 어쩌면 가난한 사람이 남기는 유언장은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부분의 유언장은 재산과 관련된 이런저런 사정을 정리하려는 목적에 큰 의미를 두게 된다.

노비 119명을 나눠가진 율곡 형제들


▎조선 중기 가사문학을 꽃피웠던 면앙정 송순이 직접 쓴 분재기(分材記). 아들딸 차별하지 않고 골고루 재산을 나눠준 점, 이두(吏讀)를 사용한 점 등은 송순의 생각과 당시 시대상 등을 잘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분재기(分財記)라는 문서가 있다. 근대 이전에 작성된 분재기가 상당량 남아 있고, 우리는 그 문서를 통해서 한 시대를 읽어낸다. 그동안 많은 양의 분재기를 통해서 우리는 선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재산이 넘겨질 때 어떤 방식으로 분할됐는지 논의해왔다.

예컨대 16세기까지는 남녀 구분 없이 형제들이라면 균등분배 방식으로 재산이 상속됐다. 그런데 17세기 이후에는 장자에게 더 많은 재산이 상속되면서 봉제사(奉祭祀)의 의무가 함께 부과되는 과정을 분재기 기록으로 증명해왔던 것이다. 법적으로는 아들과 딸 사이에 재산 상속의 차별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관행처럼 아들에게 더 많은 재산을 남긴다든지, 아들 중에서도 장자에게 더 큰 몫을 남기는 사회적 관행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형성됐는지를 논의하는 중요한 자료였다.

처음 분재기를 만난 것은 바로 율곡 형제들의 것이었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李元秀, 1501~1561)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자녀들이 유산을 나눠가지면서 남긴 문서가 바로 ‘이이남매화회문기(李珥男妹和會文記)’(보물 제477호)였다.

흔히 율곡 이이 선생가의 분재기로 알려진 문서로, 건국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율곡 이이의 7남매가 합의해서 만든 분재기 영인본(影印本)이기는 했지만, 이 문서를 접하면서 참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재산의 대부분이 토지와 노비였던 것이다.

지금도 부동산이 유산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토지의 상속은 충분히 수긍이 갈 만했지만, 노비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이 나눠가졌던 노비의 숫자는 무려 119명, 7남매와 그들의 서모(庶母)가 각각 나눠가졌고 봉사(奉祀)와 묘직(墓直) 몫으로 떼어놓은 것을 합치면 적지 않은 수의 노비가 흩어진 셈이었다. 그 사실이 나로서는 낯설기도 하고 심지어 불편한 마음까지 생겼다. 그만큼 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근대인이었던 모양이다.

율곡 집안의 분재기는 순서대로 어떻게 재산을 나눴는지를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됐다. 그런데 이 문서는 이원수의 유언장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유언장을 작성한 적이 없다. 이원수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쯤 지난 1566년 5월 21일에 만들어진 것이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상속 관련 법규를 따른 것으로 보이는 분재기는 남자 형제들의 수결(여자들은 수결하지 않았다)로 끝을 맺고 있다. 부친이 졸세(卒歲)하면 3년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재산 분배는 이뤄지지 않는다. 상을 치르는 기간이 지나면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재산을 어떤 방식으로 나눌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경국대전>이 근거로 삼았던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재산이 분배돼 있지 않은 경우에는 3년상을 치른 뒤에 분배해야 하고, 그 이전에 하면 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분재기는 유언장이 아니라 이승에 남아 있는 자녀들의 논의와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런 형태의 분재 방식을 ‘화회(和會)’라고 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작성된 분재기를 ‘화회문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분재기가 화회문기의 형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유언을 하면서 거기에 분재의 내용을 덧붙이는 경우도 꽤 있었다. 16세기 중반 전라도 부안 지방에 살았던 김석필(金錫弼) 가문의 문서를 예로 들 수 있겠다.[이후에 다루는 분재기의 내용은 <부안김씨우반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에 수록돼 있는 것이며, 전경목 선생의 논문 <분재기에 나타난 조선시대 생활 풍속의 변화>(<대동사학> 제1집, 대동사학회, 2002)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이 가문에는 상당량의 분재기가 전하는데, 그중에서 김석필의 손자인 김경순(金景順)이 강주신(姜周臣)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숙부인 강주보(姜周輔) 내외를 모시고 살았다.

조카딸 부부에게 유산 물려준 강주보


▎조선시대의 노비문서. 노비문서도 조선시대 중요한 유산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던 까닭에 이들은 정이 깊이 들었고, 죽음을 앞두고 있던 강주보는 1564년 이렇게 유언장을 남긴다. “내 나이 50세가 되니 병이 든 데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김경순의 처(조카딸)를 데려다 함께 살았노라. 여러 가지로 효성스러운 봉양을 받아서 정의(情義)가 깊고 중했다. 이에 내가 갈아먹던 논 16마지기를 남겨준다.”

적지 않은 토지를 질녀(姪女)에게 주면서 쓴 내용은 참 감동적이다. 노년의 병과 쇠약함으로 자신의 삶이 이제 곧 끝나리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고, 자신을 지성으로 봉양해준 조카딸 부부에게,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토지를 나눠준다는 글을 남긴 것이다.

이 글에서 내 눈에 깊이 들어온 것은 ‘정의심중(情義深重)’이라는 표현이었다. 자식 없이 홀로 살아가는 숙부를 위해 조카딸 부부가 온갖 정성으로 자신을 봉양해준 것,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그들에게서 느꼈을 고마운 마음이 저 네 글자 안에 오롯이 스며 있다고 느껴졌던 탓이다. ‘정과 의리가 깊고 무겁다’는 표현이 일견 관용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분재기가 담고 있는 문서로서의 성격 때문에 딱딱하게 표현됐을 수는 있지만, 문맥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강주보의 따뜻한 마음이 여기에 스며 있는 듯했다.

이 집안의 분재기 중에 감동적인 문서가 또 있다. 김명열(金命說)의 처 전주이씨의 경우다. 그녀는 원래 이방춘(李芳春)의 딸인데, 숙부인 이시춘(李時春)이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자 그의 수양딸이 됐다. 김명열과 혼인한 것은 양녀가 된 이후의 일이다. 김명열과 그의 처 전주이씨는 혼인 이후 양부인 이시춘 부부를 성심껏 모셨을 뿐 아니라 이시춘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제사까지 도맡아 지내는 등 친자식처럼 모든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양모에게서 노비 10여 명을 받게 되는데, 이때 작성된 분재기가 남아 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해 우리 부부가 서로 마주보며 통곡하고 지낼 때 네가 비로소 태어났다. 세 살이 되기 전에 내 무릎에 앉히고 너와 더불어 벗이 됐으니, 그 정은 깊고 사랑은 중해 내가 낳은 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가옹(家翁, 남편)께서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너는 지극 정성으로 잘 치러줬다. 또 오늘에 이르도록 40여 년 동안 효성이 지극해 살아 있는 나를 봉양하는 일과 죽은 가옹의 제사를 받드는 일을 세월이 갈수록 더욱 부지런히 했다. 나는 그 마음에 감탄해 매번 고마운 정을 표시하려고 했다.”

분재기의 전문은 아니지만, 위의 글을 읽어보면 어떤 연유로 재산을 물려주게 됐는지 소상하게 나타난다. 양부모인데도 친부모처럼 지성으로 봉양했고, 세상을 떠난 남편의 상례와 제사를 부지런히 해줬다. 40년이 넘도록 그는 홀로 늙어가는 한 여인의 삶을 충실히 지키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을 것이다.

앞의 분재기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지만, 이 분재기에서도 ‘정심애중(情深愛重)’, 즉 정은 깊고 사랑은 중하다는 말이 등장한다. 분재기라는 글의 성격상 아주 딱딱하고 메마른 글이어서 특별히 어려운 표현을 쓰기는 어렵다. 어쩌면 그런 조건 때문에 나에게는 평범한 저 구절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승에서 인연 떠올리며 고마움과 회한 교차


▎한 촌부(村老)가 반계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이 작성한 토지 거래 문서를 살펴보고 있다.
가까운 친척 관계였으니 충분히 모시고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자기 부모 모시기도 바쁜 세상에 친척 어른을 모시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조선의 유학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서, 유교 윤리가 본격적으로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다. 일상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유교 윤리가 새로운 삶의 기준으로 제시됨으로써 지식인들은 생활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은 이를 위해 오륜을 비롯한 유교 윤리의 초보적인 조항들을 중심으로 역사 속에서나 현실 속에서 좋은 사례들을 발굴해서 널리 알리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고, 그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예교(禮敎)의 패러다임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본격적으로 끼치게 됐다. 그렇다 해도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과의 관계가 험악한 상황을 연출하기 일쑤인데, 평생을 함께 살아가면서 나의 의지처가 된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 고마움의 표기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결국은 전답과 노비 같은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이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떠나려는 순간이다. 이승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고마움과 회한이 교차하면서 착잡한 심정이 된다. 그중에서도 정말 고마웠던 사람은 누굴까. 아마도 내 옆을 지키면서 함께 인생의 수많은 굴곡을 걸어온 사람일 것이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러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그 순간이 있다. ‘그에게 선물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많은 경우 유산을 나눠주는 분재기는 이런 맥락에서 작성되는 문서다. 이승에서의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 그것을 우리는 유산이라고 부른다. 소중한 가르침이나 무형의 가치와 같이, 유산이라고 해서 반드시 경제적 가치가 있는 물건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재기가 작성되는 유산은 모두 경제적 가치를 지닌 유형의 물건이다. 그 물건을 선물함으로써 평생 마음속에 간직해왔던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표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전답이나 노비(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이 끔찍하긴 하지만 그 시대의 관행에 따라 표현하면 유산으로서의 대상이 된다) 등을 주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천박한 짓이 될 수도 있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의 손에서 나오면 그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는 상관물이 되기도 한다. 고마운 마음을 어찌 재물로 표현할 것이냐는 비난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게 아니면 무엇으로 드러낼 것인가.

게다가 전답과 노비는 선물을 주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승에서의 긴 삶을 지탱하게 해준 물적 토대였다. 경제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선물로 받는 사람에게는, 이제는 이승에 없는 사람을 추억하고 그에 대한 고마움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들이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할 뿐, 원래 선물은 경제적 교환이라는 점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보면 저세상으로 가는 사람이 전해주려는 마지막 선물은 얼마나 귀한 것이며 고마운 행위란 말인가.

※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 [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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