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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살롱] 칠곡에서 보낸 작가 김훈과의 1박2일 

“70년 한국현대사 적폐, 무 뽑듯 청산하긴 어려워”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na.kwonil@joongang.co.kr
가을 초입에서 소설가 김훈을 만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훈과 함께하는 소설낭독캠프’에 참여했다. 김훈은 “내가 살아온 현대사는 언제고 무너지고 마는 가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 위태로운 공터였다”면서 “공터를 살 만한 숲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미래세대의 몫”이라고 했다. 이 글에는 김훈의 강연도 있고 기자와 나눈 대화도 녹아 들었다. 우리 시대의 대표작가 김훈에게는 시대의 맥을 짚는,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것들이 있다.

● ‘남한산성’에 들어가 문 닫아걸고 있으면 안 돼… 성 밖에서 활로 찾아야
● <삼국유사>에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무너질 수 없는 인간의 꿈 담겨
● 이념적·추상적이지 않고 삶의 일상성·구체성 담은, 군더더기 없는 글쓰기
● 지난겨울 ‘촛불’은 현대사 지탱해온 가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
● 적폐 만들어낸 사회악 토대는 여전… 정치권력 교체됐다고 바뀌지 않아


김훈(69)은 말을 아꼈다. 묻는 말에만 겨우 답하는 정도였다. 그의 에세이집 <밥벌이의 지겨움>처럼 그는 이제 ‘말하기의 지겨움’에 지친 듯했다. ‘김훈과 함께하는 소설낭독 캠프’에 참석해 강연하는 자리에서도 “말하는 것은 말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연 속에서 말없이 즐기면 되는데, 말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라고 주저하던 그였다.

낭독캠프에서는 단연 영화 <남한산성> 개봉 소식이 화제였다. 김훈이 원작자인데다 영화의 기획·제작을 맡은 김지연 이든픽쳐스 대표가 김훈의 딸이기 때문이다. “영화 봐달라고 주위사람들에게 하고 홍보도 하고 그러셔야...” 김훈이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영화는 내가 몰라. 그리고 영화 얘길 하려면 나 말고 감독을 인터뷰해야지.”(웃음)

소설의 작법과 영화를 만드는 공정은 많이 다르다. 원작자인 김훈의 이름값이 최상의 영화 홍보일 수 있다. 그는 무위(無爲)로써 이미 할 일을 한 셈이다. 김훈이 무심하게 말했지만 추석 연휴에 개봉한 이 블록버스터는 벌써 300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순항 중이다. 여야 대표도, 대통령 비서실장도 영화를 관람하고 후기를 남겼다. 10년 전 김훈이 쓴 <남한산성>은 70만부나 팔렸다.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원작을 충실하게 영상으로 재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47일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은 청(淸)과의 화친을 통해 훗날을 기약하자고 왕을 설득한다. 주화파(主和派)인 그는 어떤 치욕을 겪는다 해도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살아남는 길이 더 중요하다고 호소한다. “한 나라의 왕이 어찌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은 꾸짖듯 왕에게 간한다. 척화파(斥和派)인 그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명분과 대의를 내세우며 끝까지 결사항전을 외친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인조는 두 사람의 말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작품 속의 진짜 전쟁은 말과 말의 싸움이다. 치열한 설전(舌戰)을 통해 전쟁이 아닌 인간의 심리를 심도 있게 묘사했다.

인조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올랐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줄타기 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한 서인 세력은 기울어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가 우선이었다. 병자호란은 외교에 어두웠던 ‘사대부의 나라’ 조선의 내부에서 불러들인 참화였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의 군영을 찾아가 ‘말길’을 열어 ‘살 길’을 개척한 최명길의 고군분투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더 큰 참화에 휩싸였을 것이다. 역사 속의 최명길과 김상헌은 청나라에 끌려가 북경의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화해한다. 병자호란으로부터 38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도 당시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지정학적인 운명은 여전하고, 북핵 위기의 해법을 두고 여전히 척화와 주화가 대립한다. 역사는 희극과 비극으로 되풀이된다. 하지만 비극이 반복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김훈은 말했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작품 <공터에서> 작가후기) 그의 작품들이 대개 그렇다. <남한산성>에도 영웅이 없다. 제각기 살길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을 뿐이다. 영의정 김유는 척화론에 섰다가 주화론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한다. 노비 출신으로 용골대의 통역관이 된 조선인 정명수도 생존을 위한 처신일 뿐이다. 남한산성을 지키는 수어사로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무관 이시백의 기상이 생소해 보일 정도다.

그에 반해 작가의 애정이 배인 듯한 대장장이 ‘날쇠’(고수분)는 민초의 상징이다. 생존 본능이 체득된 그는 벼슬아치들을 믿지 않는다. 그 지혜로움이 그의 목숨을 살린다. 반면 김상헌을 착실히 남한산성 가는 길로 인도한 늙은 뱃사공은 청군에 얼음길을 알려줄 것을 의심한 김상헌의 칼날에 속절없이 스러진다. 늙은 뱃사공의 남루한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핏물이 얼어붙은 눈밭을 적신다. 그 시대 민초들의 삶이 대개 그러했을 것이다.

4대 강국에 둘러싸인 데다 북핵문제로 경색된 지금의 정세가 남한산성에 묘사된 때와 같다고 한다. 어떤 자세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할까?

“여름 내내 틀어박혀 책만 읽은 사람한테 그런 어려운 얘기를 묻다니.(웃음) 보기에 따라서는 지금의 상황이 병자호란 때의 남한산성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우리 민족이 다시는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성안으로 들어가 문 닫아건다는 건 죽는 길이다. 성 밖에서 열강과 싸우면서 버텨야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나로서는 그 얘기밖에 못하겠다.(웃음)”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책을 읽은 김득신


▎김훈은 칠곡의 송정휴양림 나무 그늘 아래에서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 사진:유영희
김훈은 올여름 내내 글쓰기는 잊고 방에 틀어박혀 책읽기만 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조선 선조시대 김득신(1604~1684)이라는 선비에 대한 글을 읽었다. 안동 김씨인 이 선비는 미관말직에 머물렀지만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시를 비평했다. 두보(杜甫)의 시를 2000번, 반고의 <한서(漢書)>를 5000번, 사마천의 <사기>를 1000번 읽었고 <백이전>(백이숙제 평전)은 1억 번을 읽었다고 한다. 책을 읽을 때는 보통 억이나 만 번씩 읽어서 자기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었다. 현종 때인 1670년 무렵, 2년에 걸쳐 기근이 들어 인구 500만 명 중 100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득신은 이 기근 속에서도 많은 책을 읽었다. 그가 쓴 글의 한 대목에 ‘어떤 사람이 그때 나에게 와서 묻기를 금년에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는데 죽은 사람 숫자와 당신이 읽은 책 중 어느 것이 많은가, 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는 대체로 조롱하는 것이었다’라는 부분이 있다.

이 대목을 읽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팔도에 기근이 들어 인구의 5분의 1이 굶어죽는 비참한 현실에서 책을 억만 번씩 읽는 독서가의 시선이 있다. 그 비극 속에 들어앉아 책을 읽는 자를 조롱하는 또 다른 지식인이 있다. ‘저 놈이 나의 책읽기를 조롱하고 있구나’ 하는 김득신 자신의 시선도 있다. 여러 가지 시선이 이 짧은 문장 속에서 교차하며 비극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김득신은 책을 읽다가 화적들에게 끌려가 살해됐다. ‘책읽기’와 ‘현실’ 사이에서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책읽기와 글쓰기와 인간의 현실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이 문장과 김득신의 삶이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밖에 또 어떤 책들을 읽었나?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읽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등이다. 그 책을 보니 전쟁이 아닌 역사는 없었다. 고대에 부족과 부족이 싸우면 전원이 나와 싸우다 전원이 죽는다. 씨를 말리는 전쟁이다. 문명이란 교역을 통해 이뤄지는 것인데 인간의 교역은 약탈과 구별이 되는 게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역은 기본적으로 약탈의 구조를 갖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과 약탈, 살육이 이뤄졌다. 이런 역사서들을 읽다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나는 (현실에 무관심한 채) 김득신처럼 읽고 글을 써야 하는가, 내게는 어떤 길이 있는가?”

김훈은 30년을 기자로 일했다. 기자는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냉철히 기록해 알리는 직업이다. 게다가 김훈은 지독한 책벌레다. 잡식성이다. 동서양의 고전은 물론이고, 헌법과 형법, 중장비운전 교재, 소방사와 항해사 자격시험 문제 등등 필요에 따라 닥치는 대로 읽는다. 1박2일 동안 칠곡의 송정휴양림 나무 그늘 아래서도 그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를 귀로 들으면서도 시선은 늘 책에 머물러 있었다. 김훈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김훈과 책이 한 몸으로 달라붙어 나온 것처럼 보였다. 김훈과 김득신은 다르지 않았다.

마음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 일연의 꿈


▎9월 1~2일 경북 칠곡군 송정자연휴양림에서 열린 ‘김훈과 함께하는 소설낭독 캠프’에서 ‘문학과 인생’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김훈. / 사진:유영희
우리나라 역사서들도 즐겨 읽는 것으로 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자주 읽는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전쟁과 약탈과 살육, 왕조의 흥망성쇠에 관한 기록이다. 신라가 고구려를 쳐부술 때 피가 흘러 개울을 이루었고. 당나라 병사들의 방패들이 비에 떠내려갔다고 씌어 있다. ‘적 3000을 베었다’ ‘5000을 베었다’ 페이지마다 이렇게 사람이 죽은 기록이 나온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는 다르다. 몽고가 고려를 침략한 시기에 몽고군이 우리나라 남해안까지 침입했다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왔다갔다하기를 무려 일곱 번을 했다. 국토가 다 결딴이 났다. 일본 원정을 갈 전선 500척을 만들라는 몽고의 명령을 받아 고려가 포항 일대에서 배를 만들었다. 이것이 지체되자 독려한다고 왕이 경주에 왔는데 그때 일연이 왕을 수행했다. 황룡사가 불타고 잿더미가 된 경주를 봐야 했을 일연의 마음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 황룡사가 잿더미가 됐고 어디어디가 부서졌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우리가 황룡사를 구상할 때 가졌던 평화와 화해의 비전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썼다. 황룡사를 만들 때 어떻게 인도 같은 데서 시주가 들어왔는지, 온 나라가 어떻게 우리의 포부를 지원했는지 하는 이런 얘기를 쓴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일연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전쟁에 의해 무너질 수 없는 인간의 꿈을 거기에 써놓았다. ‘마음(꿈과 희망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스님이 보여주었다. 그러니 마음이 역사를 이룰 수 없다는 역사학자들의 말은 공허한 것이다. 짓밟혀진 조국을 보면서, 짓밟힐 수 없는 황룡사의 꿈을 쓰려고 일흔 살이 넘은 그 일연이 자료를 챙겨들고 인각사(경북 군위군 소재)로 들어가는 모습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런 것들이 요즘 나의 고민이다. 세상의 일에 무관심한 채 책만 읽는 김득신도 나의 모습이다. 내게는 괴로운 존재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그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썼다. 내 내부에서 두 가지 자아가 분열을 일으키고 대립한다. 내게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일상의 구체성을 보여주는 작품 좋아해

어려운 문제라고 했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같았다. 일연 스님처럼 무너질 수 없는 인간의 꿈에 대해 쓰고 싶은 것이 김훈이 본질적으로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은 요즘 “혼자서도 잘 논다”고 했다. 망원경을 가지고 다닌다. 집에 망원경이 다섯 개나 된다고 했다. “망원경은 멀리 보는 것, 크게 보는 것, 가까이 당겨서 보는 것들이 있다. 멀리 밭에 있는 농부들이 일하는 것을 당겨서 본다. 부부인데, 지켜보면 일하면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한다. 일하면서 말이 필요 없는 사람들, 말을 떠난 사람들 같다.(웃음) 관찰하면서 그런 느낌을 깊이 간직한다.” 그는 망원경으로 강가에 나가서 새를 보고, 노을을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혼자서 논다고 했다. 김훈은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관찰하며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글쓰기로 풀어내는 작가다. 그가 근래 관찰한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얼마 전에 울주 반구대 암각화 있는 곳을 가서 하루 종일 유심히 들여다봤다. 태화강 상류가 흘러내려 울산 앞바다에 이르는 그곳에 1만 년 전 그림이 있다. 호랑이를 창으로 찍는 그림, 보트를 타고 물줄기를 따라 동해바다에 가서 고래를 작살로 잡는 그림이다. 고래는 종류가 수십 가지인데 돌고래, 귀신고래, 여우고래 등 수십 종의 고래 특징을 그대로 그려놨다. 십여 명의 남자가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고래를 잡으러 가는 그림도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울산 앞바다를 갔더니 아직도 고래가 드글드글하더라.(웃음) 만 년 전 고래가 아직도 솟구치며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신바람이 났다. 암각화 그림은 전쟁이나 살육이 없고 노동에 의한 생산. 생산에 의한 분배, 노동에 의한 생활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의 구체성을 보여주는 순결한 그림이다. 고구려 벽화도 마찬가지다. 씨름하고, 곳간에 고기가 걸려 있고, 귀부인들이 외출하는 생활과 밀착한 그림이다. 은하수, 견우와 직녀, 카시오페이아, 큰곰자리 등 별자리가 지금이랑 똑같이 그려져 있다. 별들이 무리를 이뤄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그려놓은 것이다. 그림이 이처럼 실제적이고 생활적인 순결한 구체성을 갖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일상의 그림이 점점 추상화되어서 도형과 기호, 이념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나는 반구대 그림을 보면서 저런 생생한 삶의 모습을 쓰는 것, 소설과 삶을 밀착시켜 가는 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행복한 생각이지만 그것을 원고지에 옮기는 것은 고통스럽다. 때때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김훈의 글쓰기는 실제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을 처음에 “버려진 섬들마다 꽃은 피었다”로 했다가 “버려진 섬들마다 꽃이 피었다”로 바꾸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조사 하나만 바꾸었을 뿐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김훈은 “‘꽃이 피었다’는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꽃은 피었다’는 물리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감성을 넣은 것이다”고 했다. 그는 조사 하나를 사용하는 데도 몇 날 며칠을 고민한다. 김훈은 지금도 연필을 깎아 원고지에 쓴다. 온몸의 힘이 연필 끝으로 들어오는 살아있는 그 ‘육체감’을 좋아한다. “손으로 글을 쓸 때,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작동되는 몸의 힘이 원고지 위에 펼쳐지면서 문장은 하나씩 태어난다. 육체의 현재성 없이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 손의 육체감은 특별하다. “마포에서 한강 수상구조대 일을 하는 스물여덟 살 젊은 소방관을 만났다. 자살하려고 뛰어든 사람, 죽어가는 사람의 손목을 잡았을 때의 느낌을 나한테 말해주더라. 그 느낌으로 단편 ‘손’을 썼다”고 말했던 그다. 김훈의 글쓰기는 온전한 육체노동이다. 말 그대로 ‘수제(手製) 소설’이다.

“자유경제의 바탕에는 약탈의 그림자가”


▎울주 반구대 암각화. 고래가 새끼를 업고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그물과 그물에 걸린 호랑이도 그려져 있다. 김훈은 반구대 그림처럼 펄펄 뛰는 글을 쓰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 사진제공·문화재청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고민도 많을 것 같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 구체적 일상을 듣고 싶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데, 짬뽕가게에 자주 간다. 예전에는 짬뽕값이 한 그릇에 6000원이었는데 지금은 3000원짜리, 9000원짜리 둘로 갈라졌다. 돈이 많은 사람은 9000원, 없으면 3000원짜리를 먹는다. 3000원짜리 가게에 새벽에 가보면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는 사람들, 교대해주려고 출근하는 사람들, 밤새 대기한 의경과 전경들, 모텔에서 나온 젊은이들이 많더라. 국물은 무한리필이다. 돈이 있으면 9000원짜리, 없으면 3000원짜리 먹으라는 것은 시장의 자유, 합리성, 시장경제의 건전함, 공정거래,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약육강식도 아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은 이런 것인가, 또는 이런 것이라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이 의문을 제기하는 힘이 나는 ‘인문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동네에 또 애완견이 많다. 개를 위한 병원도 많이 생겼는데 개 한방병원도 생겼다. 개를 위한 침, 부황, 보약 이런 걸 해주거나 만들어준다. 개를 위한 CT, MRI도 있다. 개를 데려와서 먹이는 식당도 3개나 생겼다. 사슴고기는 한 끼에 1만5000원, 샐러드는 유기농인데 8000원이다. 메뉴가 40가지나 된다. 하도 신기해서 식당마다 메뉴가 적힌 종이를 모아서 집에 가져다 놨다. 나도 못 먹어본 게 너무 많다.(웃음) 그 개식당 옆에 있는 골목이 사람들의 먹자골목이다. 거기에서 젊은이들이 3000원짜리 짬뽕을 먹는다. 이것이 일상의 풍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사람들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누가 채찍으로 때리지 않아도 알아서 3000원짜리를 찾아 먹는다. ‘아 나는 3000원짜리다’ 이러면서. 요즘 나는 이런 것들을 일상에서 보고 저런 걸 어떻게 소설로, 삶과 소설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김훈은 1948년생이다. 태어나던 해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북한에서는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세 살 때 6·25전쟁이 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복사판이다. 김훈은 전쟁이 끝나고 바로 서울로 오지 못하고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상경했다. 부산 피난지에서 미군 부대를 기웃거리며 초콜릿을 얻어먹었다. 어렸을 때부터 권력의 작동방식이나 세상의 부조리를 경험했다고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 대한 공포, 두려움, 억압, 비리, 부조리, 부패 이런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교실이 없어서 천막을 치고 배우는데 겨울에 조개탄이라는 걸 땠다. 천막 뒤는 찢어져서 찬바람이 부는데, 나 같은 애는 항상 거기에 앉고 어떤 아이는 항상 난로 옆이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바꿔주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다 안다. 돈을 안 갖다 주면 항상 바람 구석에 앉는다는 걸. 나는 너무 추워서 집에서 깡통을 가져와 불을 덜어 깡통에 담아 끼고 앉았다. 옆의 애들도 난로에서 불을 집어다 깡통을 끼고 앉았다. 그러자 난롯가에 앉은 애들이 불을 가져가지 말라고 했다. 운동장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전쟁 뒤라서 애들이 정말 사나워서 무섭게 싸웠다. 각목을 들고 두들겨 패고 싸웠다. 며칠 후에 나는 난롯가로 갔다.(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소년의 가슴에 정말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다.”

올해 2월, 김훈은 <공터에서>라는 신작을 냈다. 일제강점기와 현대사를 살아온 마동수와 두 아들 마장세, 마차세 등 마(馬)씨 3부자 이야기를 담았다. 김훈은 “마차세의 생애는 영웅적이지도 않고, 이념적인 지향성도 없다. 모욕을 견뎌내고,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감당하고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작가의 삶이 투영된 인물이다. 그런데 제목을 왜 ‘공터에서’라고 했을까? 이유가 있었다.

“내가, 우리가 살아온 현대사가 마치 가건물 같다고 생각했다. 남의 가건물에 세 들어 사는 듯이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엉거주춤 살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소설가 김광주, 1910~1973)가 그러했다. 시대 속에서 좌표가 없이 우왕좌왕하고 살았다. 제목을 뭐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지난겨울 광화문에 나가보고는 제목을 ‘공터에서’로 정했다. 현장에 가보니 내가 살았던 한 시대가 또 무너지고 있더라. 한 시대가 무너지는 것이 새로운 것이 들어서는 전주곡으로서는 긍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아! 이렇게 또 무너지는구나’ 싶었다. ‘가건물이 무너지고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공터가 됐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 이육사 선생은 당대의 비극적 상황을 ‘광야’라고 했다. 한반도에 있던 지식인들은 ‘폐허’라는 말로 표현했다. 최인훈 작가는 ‘광장’이라고 했다. 나는 그냥 보잘것없는 ‘공터’여야 한다고 봤다.(웃음) 우리가 살아온 현대사가 언제고 무너지고 마는 가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 위태로운 공터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우리 나이로 70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였다. 한마디로 밥을 못 먹는 나라였다. 내가 1966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120달러였다. 지금은 3만 달러다. 나는 82만 달러부터 3만 달러까지 살아온 것이다. 내 몸 속에는 지금도 82달러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삶의 질감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나는 지금처럼 길거리에 밥이 넘치고, 자동차가 넘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 시대의 꿈은 삽시간에 이뤄졌다. <삼국사기>에 보면 해마다 밥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시대도, 조선시대도 그랬다. 우리나라 역사를 밥 먹는 시대와 밥 못 먹었던 시대로 나누면, 고조선부터 내 고등학생 때까지가 밥 못 먹어서 굶어죽던 시대였고, 그 이후부터 먹는 시대가 왔다.

그런데 밥을 먹을 수 있는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어 내면서 우리는 엄청난 실수를 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온갖 비리와 억압, 모순, 차별, 부정부패를 만들어냈다. 그 가건물이 지난겨울에 또 무너졌다. 광복 이후 70년 현대사의 적폐가 밑에 깔려 있는 셈인데, 미래의 세대가 이걸 해결해내야 한다. 문제는, 거대한 가건물이 무너졌지만 그 기초는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밥 못 먹는 세상에서 먹는 세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모든 사회적 구조악이 온존해 있다. 이게 정치권력이 바뀌었다고 해서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 밑에 완강한 토대를 가지고 있고, 그 토대 위에서 우리의 먹이 피라미드가 올라섰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 토대를 일거에 개선하거나 허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고구마 줄기처럼) 밑에서 서로 엉켜 있어서 무를 뽑아내듯이 뽑아낼 수도 없다.”

그래도 희망을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로서 공터에 건물을 세우기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작품을 써야 하지 않나.

“다음 작품 계획을 말하기는 힘들다. 또 내가 하고 싶다고 해도 내 기량이 되는지도 문제다. 우리는 지금 공터에 서 있다. 이 공터를 모든 사람이 쉴 수 있는 숲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데, 우리 밑에 깔린 업보들이 아직 너무 많다.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뽑아버릴 수도 없다. 결국은 하나씩 분해해서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격렬한 저항에 부닥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토양 위에 거대한 먹이피라미드가 건설돼 있으니까. 이것과 싸운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고난의 과정일 것이다. 나 역시 보통의 국민들처럼, 대통령이 잘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공원에서 키스하는 젊은이들이 아름답더라”


▎김훈은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관찰하며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글쓰기로 풀어내는 작가다. / 사진:권혁재
김훈의 말은 새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적폐청산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의 말대로 공터를 모든 사람이 쉴 수 있는 숲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단지 김훈의 목표만은 아닐 것이다. 작품 속에서 마차세의 아버지 마동수는 만 69세에 죽는다. 작품 속 마동수와 달리 만 69세 김훈의 얼굴에선 활력이 느껴졌다. 김훈은 캠프가 열린 1박2일 내내 낡은 모자와 펑퍼짐하고 남루해 보이는 그만의 옷차림을 고수했다. 그 낡은 모자와 옷은 오래 전부터 당대의 문장가 김훈을 구성해온 요소들인 듯 편안해 보였다. ‘스마트’하지 않은 낡은 폴더폰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김훈은 1박2일 동안 그의 팬들과, 그를 아는 문학기자들과 음풍농월(吟風弄月)했다. 뒤풀이 자리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배호와 한대수와 심수봉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증명사진을 찍고자 하는 팬들에게는 공손히 ‘네’ 라고 답했고, 책을 들고 오면 즉시 펜을 들어 정성껏 사인해주었다. 여자들에게 특히 관대했다. 요즘 말로 ‘어장관리’를 할 줄 알았다. 김훈은 나이 들었으되 젊었다.

“나이를 먹으니 요즘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예뻐 보인다.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공차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저 놈들을 잘 키워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그들을 자세히 관찰할 때가 있다. 여학생들은 나무 아래서 립스틱을 바른다. 한 명이 립스틱을 가져와서 네 명이 같이 바른다.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입을 들이대고 있으면 한 명이 돌아가면서 발라준다.(웃음) ‘사람의 딸들은 저렇게 아름답구나’ 싶다. 요새 젊은이들은 길에서 키스를 한다. 예전에는 담 밑에서 남녀가 끌어안고 있으면 엄마들이 물을 끼얹었다.(웃음) 공원에서 젊은이들이 키스하는 것을 보면 ‘저게 희망이구나’ 싶다. 우리나라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젊었을 때는 몰랐다.”

브레히트는 그의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이렇게 반성했다. “왜 나는 오로지 지나가는 사십대 아낙네의 구부정한 모습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지금이나 따스한데…”라고. 괴테도 <파우스트>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고 말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따뜻하다. 포유류 어미의 양수 속처럼,

<남한산성>에서 고통을 견디어낸 민초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원초적인 생명력이었다. “그해 봄 다시 민들레꽃이 피었다.” 작가는 생명을 이어가고 만들어가는 민초들의 끈질긴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김훈의 대표작 <칼의 노래>에서도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였다. 김훈은 스물두 살 무렵 우연히 도서관에서 <난중일기>를 읽은 뒤 “절망의 시대에서 헛된 희망을 설치하고 그 헛된 희망을 꿈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절망의 시대를 절망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서 통과해가는 한 인간의 모습”에 반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훈은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칼의 노래>로 구현해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약한 자의 것을 빼앗지 않는 사회’ 희망

사람들은 김훈의 작품을 읽고 나면 “헤피엔딩이 없다. 희망이 없다”고들 말한다. 김훈은 절망을,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사실적으로 서술할 뿐이다. 그것이 김훈의 장점이다. 김훈은 절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으로써 ‘희망’을 말하는 작가다. 역설의 미학이다. 김훈이 꿈꾸는 사회는 의외로 소박하다. “남한테 친절한 사회, 약한 자의 것을 빼앗지 않는 사회”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밥을 열심히 성실하게 벌고, 그 안에서 도덕을 실현하는 것”이다. 단순하다. 하지만 살아보니,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차기작은 아마도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 2월 기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진도 팽목항에 다녀왔다. 세월호 사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 다음날 자살한 교감을 떠올렸다. 인솔 책임자였는데 탈출해서 다음날 아침에 나무에 목매달고 죽었던 분이다. 이것에 대해 뭐라고 써야 하나. 그 교감선생님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은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어쩌면 종교의 영역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그가 깊은 고뇌 끝에 연필을 깎기 시작하는 날, 독자들은 사각사각 원고지에 몸으로 써내려 간 김훈의 역작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알베르 까뮈는 “작가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느끼는 바’를 ‘남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은 것’으로 옮겨 놓는 기술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우연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재능이 우연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김훈은 자신이 느낀 것을 우리들이 느끼게 하고 싶은 것으로 옮겨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가다. 그와 함께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 김훈 -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영문과를 중퇴하고 30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한국일보, 시사저널, 한겨레 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 등단, 2001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 2004년 <화장>으로 이상문학상, 2005년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문학상, 2007년 <남한산성>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하며 우리 시대의 대표 소설가가 됐다. 2017년 2월 최신작 <공터에서>를 출간했다.

-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na.kwonil@joongang.co.kr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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