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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6)] 콩고린 엘스여! 안녕 

캄캄한 어둠에 내뱉다, 그리고 깨닫다 

김미루 사진작가
이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배낭 속에 책을 집어넣지 않았다. 진정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둘러보고 기다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너는 왜 이토록 사서 고생을 하는가? 너의 예술도 부질없는 하나의 사치가 아닌가?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리라! 나는 오직 "사람 되기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비암바 게르의 전경을 보여주는 좋은 사진이다. 게르는 뒷산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반대편으로 엄청난 모래언덕 사막과 고산의 병풍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그 운전사가 나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간 후로, 나는 나의 ‘패밀리 스테이’에 관한 약속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아무것도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캠프에는 작동하는 전화가 없었다. 나중에나 그의 이름을 알게 됐지만, 비암바(Biamba)라고 불리는 나의 호스트는 전화수신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텐트 밖에 TV채널을 수신하기 위한 위성중계접시가 설치돼 있기는 했지만, 전화가 되고 안 되고는 그의 삶의 영역 밖의 문제였다. 한 시간가량이나 됐을까, 참기 힘든 어색함 속에 어물쩡거리다가,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 자신을 바삐 움직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무언 속에 찾아내는 것은, 비암바가 하는 일을 관찰하다가, 내가 어떤 일을 따라 하는 시늉을 해 그에게 괜찮겠냐고 손짓 몸짓으로 동의를 구하는 방식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하듯이 이런 사막의 생활에서 외부인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마른 똥딱지를 줍는 일이었다. 땅바닥에는 염소와 양이 오랜 세월 동안 갈겨댄 엄청난 양의 똥이 다져져서 두꺼운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삽으로 그 똥을 떠내 작은 조각으로 부수어 텐트 안으로 가져오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작업이었다. 그 똥딱지는 훌륭한 연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암바가 요리양념으로 쓰기 위해 마른 고기를 썰고 있다.
나는 앞서 바얀작에서 낙타똥이 장작나무의 보조연료로 쓰이는 것을 목격했지만, 이렇게 많은 똥딱지가 연료의 주재료로서 쓰이는 상황은 처음 보았다. 사실 어찌 생각해보면, 동물의 똥을 연료로 쓴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주로 풀을 뜯어먹는 동물이 내장을 경유하여 배출하는 음식물은 결국 섬유질일 것이고, 그것이 강력한 사막의 태양 아래 마르게 되면, 별로 냄새도 나지 않을 뿐 아니라 타기도 아주 잘 타며 또한 화력도 좋다. 완벽한 자연의 선순환일 것이다. 이러한 냉철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똥덩어리를 집 안방에 들여와 그 화력으로 음식을 장만한다는 것이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더구나 비암바는 그 똥딱지들을 영원히 씻지 않은, 때묻은 손으로 만질 뿐 아니라, 그 손으로 또다시 밀가루를 반죽하고 마른 고기들을 자르는 것이다.

완벽한 이방인과 함께 있는 나, 미루


▎초원 위 멀리 떨어져 있는 양과 염소 떼를 바라보고 있는 필자.
저녁밥상이 다 마련됐을 때, 나는 잠시 밥그릇을 째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이것은 끓인 것이다! 똥에 묻었던 균들은 다 돌아가셨다! 그리고 순간 수제 칼국수를 입에 넣고 지역민들이 하듯 고기국과 함께 후루루룩 소리를 내면서 꿀꺽 삼켰다. 그렇게 저녁식사를 끝냈을 즈음, 나는 비암바와 좀 편한 관계가 됐다. 그는 매우 자상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하루 일상의 일과를 전혀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수행했다. 그는 자연에 가까운 존재였다.

저녁을 먹은 후에 그는 텔레비전을 보고, 파이프를 피우고 보드카 한 잔을 들이키고 난 후 그냥 곯아떨어졌다. 나는 텐트 저편에 있는 침대를 취했다. 내 물건들을 침대 주변으로 파수꾼처럼 늘어놓고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화학섬유담요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놀랍게도 나는 깊은 잠은 잤다. 아마도 여독에서 생긴 피로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아침에 잠을 깨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자고 있었는지, 완전히 망아의 상태에 있었다.

착란의 순간, 나는 내가 나의 뉴욕 아파트에 편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내가 내 등 밑에 있는 것은 포근한 퀸 사이즈 매트리스가 아니라 딱딱한 나무판대기 위에 카펫 한 장을 깐 것이었는데, 내 몸 하나 겨우 얹어놓을 만한 짧은 길이였다. 그리고 내가 덮은 묵직한 화섬담요는 온갖 죽은 세포와 마른 땀으로 딱딱하게 쩐 것이었다. 새로 빤 면 커버가 씌워진 오리털 솜의 이불이 아니었다. 온전하게 정신이 회복되면서 현실은 나의 존재감을 고비사막의 고독한 한 중심으로 돌변시켜 놓았다. 아무런 소통의 수단을 지니지 못한 완벽한 이방인과 함께 있는 나, 미루였다. 패닉의 한순간이 찾아왔다. 집으로부터 너무도, 너무도 멀리 있다는 격절감, 완벽한 불확실성 속에 상실된 자아의 몇 가닥들이 패닉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텐트 밖으로 나가자마자, 콩고린 엘스의 장쾌한 파노라마는 그러한 불안감을 일시에 쓸어가 버렸다. 나는 또다시 침착한 분위기 속에 안정을 되찾았다.


▎게르 안 부엌상 위에 놓인 응결조각 치즈와 비스킷. 아아루울 (Aaruul)로 불리는 이 유제품은 모든 유목민 가정에 아무런 덮개가 없이 소복이 쌓여 있다.
비암바는 염소집 울타리를 고치고 있었다. 울타리 고치는 일을 끝내고 나서 비암바는 나보고 그의 옛 실버 중형차 있는 데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옳거니 하고 바로 비디오 카메라를 집어들고 그와 함께 떠났다. 그는 내가 대부분의 관광객이 그러하듯 모래언덕 구경하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샌드 듄으로 가는 길에 비암바는 갑자기 차를 멈췄다. 그리고는 재빨리 나에게 쌍안경을 건네주며, 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광경을 손으로 가리켰다. 쌍안경을 통해서 나는 들에서 뛰놀고 있는 가젤(길게 뿔이 난 영양의 일종)의 한 떼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정말 운 좋은 첫날 행차였다. 우리는 모래 언덕이 시작되는 밑바닥에까지 차를 대었다. 그리고는 모래언덕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는 푸른색의 면스카프로 머리를 휘감아야만 했다. 그리고 모래 속을 걷는데 이골이 난 비암바를 따라갔다. 비암바는 꾸준히 같은 속도로 걸었지만 하나의 보폭이 매우 넓었다. 나는 그를 따라가면서 촬영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담으려 노력했다. 강력한 사막바람은 모래언덕을 스치며 한 층의 모래구름을 형성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비로소 왜 모래언덕이 그렇게 높게 형성되는지를 실감했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리드믹하게 굽은 날카로운 용마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20분가량을 걸었을 때, 비암바는 한 20마리가량의 브라운색의 낙타들이 모래계곡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가리켰다. 나는 비암바가 그 낙타들에게 걸어가서 그 군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촬영했다.

그 낙타는 일견 주인 없는 야생의 낙타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낙타떼는 비암바의 낙타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낙타에게 접근하면 낙타들은 예외 없이 겁먹고 달아난다. 그러나 비암바가 접근했을 때는 그를 반기는 눈치였다. 어떻게 그 넓은 무분별의 천지에서 방목이 가능한지,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소재를 파악하는지, 도무지 나에게는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래봤자 늦은 아침이었다. 비암바는 또다시 염소우리의 문을 열고 많은 염소떼와 함께 사라졌다. 또 하나의 일과가 시작된 것이다. 어디론가 데려가서 풀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

하루 종일 나는 텐트 안과 주변을 어슬렁거려야만 했다. 나의 문제 상황이란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다양한 사물을 관찰하고, 밖에 있는 낙타와 교섭하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밖에는 네 마리의 어린 낙타만 묵인 채 남아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기만 하면 그들은 겁에 질리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접근을 삼가야 했다. 대신 나는 우리에 갇힌 두 마리의 다 큰 낙타에게 갔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건초를 먹여주기도 하고, 또 지루해지면 낙타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이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배낭 속에 책을 집어넣지 않았다. 진정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둘러보고 기다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내가 스마트하다고? 내가 유명하다고?


▎방안 장롱 위에 놓여 있는 비암바의 가족사진. 접히는 곳 하단 왼쪽에 아기를 안고 있는 인상적인 미모의 여인이 얼마 전에 사별한 그의 부인이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좀 지나자, 자연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 무엇인가 끝내야만 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냥 있는 것’ 그것은 나에게 ‘평화’의 새로운 감각을 주었고, 삶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게 해줬다. 도대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왜 내가 지식이든, 돈이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남에게 과시를 해야만 할까? 내가 스마트하다고? 내가 유명하다고? 남보다 어린 나이에 일찍 성공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견한가? 쉼 없이 트위트 하고, 사진을 올리고, ‘라익스(likes)’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이게 다 뭔 소용인가?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별 위에서 먹을 것도 많고 마실 물도 많이 있고 생존을 위해 그토록 경쟁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왜 그렇게들 안달하며 살아가야 할까? 어느 스님이 ‘해탈’은 그냥 ‘멍때리기’라고 말했다는데, 그것은 실로 아주 무책임한 말이 아니면 아주 높은 경지를 획득한 자의 혜안일 것이다.

늦은 오후, 나는 게르 안에 앉아서 집안의 다양한 오브제를 관찰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낮은 부엌상 위에 놓인 응결조각 치즈와 비스킷이었다. 모든 유목민 가정에는 항상 한 줌의 이 마른 유제품이 아무런 덮개가 없이 소복이 쌓여 있게 마련이다. 나는 그걸 정말 먹으라고 놓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 응결조각 치즈는 생김새가 매우 다양했다. 어떤 것은 작고 하이얗다. 어떤 것은 감아 올린 똥모양(나선형)이었고 어떤 것은 크고 베이지 색깔이었다. 꽃 모양도 있고, 부정형으로 잘린 조각들도 있었다. 나는 이것들이 물론 발효된 밀크로부터 응결된 것이거니 했다. 첫눈에 그것은 어렸을 때 보았던 가게에 진열된 작은 사탕같이 보였다. 그래서 그것 하나를 집어 꽉 깨무는 실수를 범했다. 하마터면 내 이빨이 조각날 뻔 했다. 그것은 진실로 차돌맹이보다 더 단단했고 빙초산처럼 시었다. 그리고 끝에는 농가의 헛간 앞마당에서 나는 사향 비린내 같은 맛이 기분 좋게 감돌았다.

나중에나 알게 됐지만 이 위장을 휘젓는 치즈조각들은 ‘아아루울(Aaruul)’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은 반드시 장시간 입에 넣고 불리면서 부드럽게 변하면 조금씩 물어 뜯어먹는 몽골의 주요 식품에 속한다. 아아루울은 몽골 유목민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이 다양한 비타민과 미네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아루울 덕분에 몽골사람들은 건강한 치아를 유지하기도 한다 했다. 칼슘도 많고 갉아먹기 때문에 잇몸에 좋은 모양이다. 그리고 아아루울은 도무지 유효기간이라는 게 없다.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도무지 알 바가 없다. 나는 개가 갉아먹듯이 갉아먹는 시도를 계속했다. 몇 개를 먹고 나니까 그 맛을 좀 알 듯도 했다. 그러나 엔조이할 수준은 못됐다.


▎촛불과 만다라. 비암바는 촛불이 밤낮으로 24시간 계속 타오르게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또 하나의 물체는 장롱 위에 놓여진 가족사진의 디스플레이였다. 두 판넬로 접혀지게 되어있는 나무 프레임 속에는 16개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젊은 비암바가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엄마, 아버지, 그리고 어떤 웃고 있는 비즈니스맨과 함께 서있는 색 바랜 옛 사진이 있었다. 정감이 서렸다. 비암바가 게르 앞에서 한 여인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커다란 모피 모자를 쓴 그의 아이들이 털이 많이 난 아름다운 브라운색의 낙타를 타고 있다. 친지들의 그룹사진도 몇 개 있었다.

도대체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비암바가 진실로 혼자 사는 사람인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의 부인은 어떻게 되었나? 그의 자식들은 어디로 갔나? 그렇다면 비암바는 왜 도시에서 살지 않고 홀로 사막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사진들은 떠다니는 퍼즐 조각들처럼 나의 의식을 맴돌았다. 며칠 후에 비암바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 퍼즐들은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낙타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


▎양과 염소떼를 낙타 위에서 지휘하는 비암바. 호쾌한 유목민이 연출해내는 목가적 풍경이다.
저녁 7시경, 비암바는 어김없이 그의 염소와 양떼를 데리고 귀가했다. 오자마자 그는 동물떼를 우리에 몰아넣었다. 우리문을 닫자마자 그가 하는 첫 업무는 죽어가는 촛불을 다시 살리는 것이었다. 그는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젖빛의 딱딱한 물체를 잘게 잘라, 냄비에 넣고 불 위에서 투명한 액체로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알지를 못했다. 그가 솜 조각을 비벼 한 가닥의 스트링을 만들 때 비로소 나는 그가 촛농과 심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촛불봉헌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몰랐지만, 비암바는 촛불이 밤낮으로 24시간 계속 타오르게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가 촛불을 다시 켤 때 무엇인가 장엄한 슬픔 같은 것을 감지했다. 아마도 혼백이 떠나가 버린 사랑하는 사람에게 봉헌하는 촛불이었을 것이다. 어디서나 비극적 정조(情調)는 우주적 느낌을 수반한다.

저녁은 보통 빨리 지나간다. 비암바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같이 먹고, 또 그가 밤에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을 쳐다본다. 한 텐트 안에 낯선 사람과 단둘이서 갇혀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매우 어색하기는 했지만, 둘째날부터 나는 공존에 좀 익숙해졌다. 게르 안에서 한 가족이든 한 공동체이든, 같이 생활하는 가장 생소한 측면은,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든, 몸을 씻든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몸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근지러운 속옷을 갈아입는 일 이외로는, 이 두 가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 세수만 이틀에 한번 정도 고양이 세수로 대신했다. 샤워도 없었고, 변소도 물론 없었다. 게르 밖에 나가 아무데나 적당히 골라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싸면 되는 것이다. 해결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두루마리 화장지였다. 그것만은 꼭 가지고 나가 큰 것을 해결하기 위해 파둔 구덩이에 같이 묻어버리는 것이다. 약간의 비가 올 때 결국 그 페이퍼를 분해시키리라는 희망을 안고. 그리고 저녁부터는 될 수 있는 대로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지혜도 터득했다. 몹시 추운 밤에 밖에서 오줌을 누는 것이 지극히 괴롭고 불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나는 비암바와 그의 가축을 따라 나섰다. 먼저 비암바는 다섯 마리의 큰 낙타를 풀어주었다. 이 낙타들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그들은 반드시 집으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기낙타들이 캠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매우 강하게 보이는 또 하나의 낙타는 하루 종일 비암바와 같이 머물렀다. 비암바가 키우는 가축의 규모는 진실로 장난이 아니었다. 염소와 양을 합쳐서 한 300마리 가까운 거대한 떼였다.


▎가축에게 물을 주려고 펌프질을 하는 비암바.
그러기 때문에 비암바는 낙타등 위에서 이 떼를 관리해야만 했다. 그가 낙타등 위에서 가축 떼를 지휘하는 모습은 몽골유목민의 완벽한 목가풍의 장면을, 장쾌한 모래언덕과 짙은 색깔의 산들을 배경으로 하면서 연출해내고 있었다. 이 장쾌한 전원시의 풍경을 잡아내기 위하여 나는 두 개의 카메라와 트라이포드를 들고 몇 시간 고생스럽게 사막 속에서 비틀거렸다. 날카로운 돌멩이들이 깔린 사막들판에서 뛰어다닌다는 것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울란바토르에서 티제이와 함께 산 가죽장화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날 하루에 이미 내 신발과 발을 함께 다 망가뜨렸을 것이다.

비암바가 가축을 데리고 제일 먼저 간 곳은 가축들이 먹기 좋아하는 떨기나무와 풀로 가득한 광대한 초원이었다. 비암바는 멀찌감치 낙타 옆에 앉아서 그의 가축떼가 풀을 열심히 뜯어먹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 장비를 들고 계속 찍어댔다. 몇 시간이 지나자 비암바는 모든 가축 떼를 남김없이 휘몰아, 30분가량 산꼭대기로 올려 보냈다. 그 장면은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데리고 다니는 시나이 광야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현금 돈뭉치가 사라지다!


▎구유에서 다투어 물을 먹는 양과 염소.
그 언덕 꼭대기에는 샘이 있었다. 샘 자체는 나무 뚜껑으로 덮여있었지만 옆으로 펌프가 장착돼 있어, 손으로 펌프질을 하면 물이 옆으로 길게 나있는 구유로 쏟아졌다. 그 여물통에 일시에 아가리를 처박고 물을 먹을 수 있는 가축의 수는 20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축떼가 일시에 다 몰렸을 때 물을 선취하려고 달려드는 혼란스러운 경쟁자들의 모습은 매우 재미있는 광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역시 센 놈들은 염소였다. 강자들은 억척스럽게 타자의 등 위를 밟고 올라가 주둥이를 여물통에 먼저 처박고야 만다. 평화로운 목가적 장면에도 다윈의 법칙은 엄존한다.

우리가 집에 도착할 즈음 벌써 석양이 뉘엿뉘엿 지평 위로 가라앉고 있었는데, 어미 낙타들이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언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기 낙타들이 고음조의 절규하는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미 낙타들이 멀리서 길고 늘어진 목소리로 그 부름에 반향을 했는데, 그것은 마치 바이킹영화의 안개 낀 바다에서 거센 물결을 타고 들려오는 아련한 긴 뿔고동 소리 같았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한 아리아 명장면보다도 더 잊을 수 없는 감동이 나를 전율시켰다.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고, 순결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킨다는 것은 진실로 나의 심신을 건강케 만들고 있었다. 내가 어쩌다가 당면케 된 지금 이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갖기 시작했을 때, 패닉의 한순간이 나를 엄습했다. 봉투에 잘 싸서 내 가방 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현금 돈뭉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상당한 거액의 뭉치였다. 드라이버의 전체 비용, 그리고 패밀리 스테이에 관한 비용, 그리고 비상용의 엑스트라 현금을 포함하는 나의 전 재산이었다. 갑자기 나는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게르 안의 타자밖에는 없었다. 나보다 강하고, 나에게는 전혀 생소한 이 지역에 익숙한 그 사람!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매우 불길한 망상들이 따라 들어왔다. 비암바가 돈을 꼬불쳤다 치자! 그럼 그는 얼마든지 나쁜 짓을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나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어쩌나? 도망갈 데도 없다! 도와줄 사람도 없다! 소리쳐봐야 허공에 묻히고 만다! 나의 상상력은,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아무도 나의 시체조차 발견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슬픈 사연에까지 미쳤다.

자아! 이제 비상탈출의 계획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이때 부엌권역에 놓인 작은 도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 저기 무거운 가마솥도 있다. 누가 덤비면 저거라도 세차게 던지면 되겠다! 아~ 저기 밧줄도 있구나! 저걸로 목을 조르면 되겠군! 너무도 많은 호러 무비를 보았기 때문일까, 나의 망상은 그칠 줄을 몰랐다.


▎비암바가 타고 다니는 짙은 밤색의 낙타 두 마리와 차간테메 모자. 차간테메는 색깔이 문자 그대로 하얗지는 않은데, 백색 톤이 도는 옅은 색의 털을 입고 있다.
그러나 비암바는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오묘한 민속조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위한 특별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동물지방을 작은 사면체로 썰어 그것을 양파와 더불어 볶았다. 그리고는 약간의 건육을 첨가하여 계속 볶았다. 그것은 몽골 특유의 부즈(buuz)라 불리는 만두의 속이었다. 티베트 사람들이 모모(momos)라고 부르는 찐만두와 비슷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고기만두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비암바는 조심스럽게 밀가루반죽을 했다. 그리고 만두피에 속을 넣고 팔랑개비처럼 꼬아 올리는 그의 솜씨는 완전히 프로급이었다.

순간 나는 그의 순결한, 함박꽃 같이 웃는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의 의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순간 그토록 순결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겠는가? 아하~ 저 사람은 내가 돈이 없어진 것을 눈치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 틀림없어!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저렇게 유쾌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는 거야! 그때 정황으로는 나는 무서운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곧잘 쪄진 만두가 상 위에 올라왔다. 첫 입, 깨물자마자 단물이 흘렀다. 그 순간 모든 부정적 생각이 해체됐다. 그 만두는 너무도 맛이 있었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 다음날 아침, 나를 난처하고도 부끄럽게 만드는 신의 계시가 내려왔다. 돈뭉치를 주배낭에 숨겨둔 것이 아니라, 카메라백의 찾기 어려운 주머니에 잘 간직해뒀던 것이다. 지난 저녁 나는 너무도 피곤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탐색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좌우지간 그와 나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움의 곤경으로부터 나를 면제시켜줬다. 언어가 부재한 묵언에 대해 내가 이토록 고마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도 소통언어가 없었다면 아니 할수록 더 좋은 말뿐이었으리라! 비암바는 어제 저녁 내 얼굴의 표정이나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좀 이상했다는 것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해는 없었다. 나는 묵언 속에 그에게 정중하게 사죄를 했다. 정죄해서는 아니 될 사람에게 나는 정죄를 감행했던 것이다.

나는 비암바에게 작품사진 찍는 것을 좀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로 되돌아왔다. 한·몽 단어장의 도움으로 여러 단어를 짚으면서 결국 ‘차간 테메(tsagaan temee)’라는 말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하얀색의 낙타(white camel)’라는 뜻이다. 나는 모래색깔의 낙타를 원했다. 작품의 색조를 위해 나의 스킨톤과 환경이 잘 어울리는 그런 낙타 분위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듣고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손가락으로 ‘1’자를 상징해 보였고, 그리고 모래 위에다가 ‘100’을 썼다. 그 말인즉, 100마리의 낙타 중에서 차간 테메는 1마리 있을까 말까 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작품 활동의 측면에서도 가장 생산적인 여정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비암바 아들의 부인, 즉 비암바의 며느리. 대체로 아들은 분가해 장인과 더불어 사는 것 같다. 며느리는 정말 착하고 복성스럽게 생겼다.
하여튼 비암바는 아주 멋드러진 모래언덕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좋은 장소로 나를 데려다줬다. 쿵더덕쿵더덕 하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비암바가 튼 유일한 노래가 있었다. 카세트에 들어있었는데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다. 그 노래는 ‘아와 조리노(Aavaa Zorino)’라는 노래였는데, 매우 단순한 리듬이 유쾌했으나 또 슬픈 색조가 짙게 깔려 있었다. 군대 간 젊은이가 늙은 아버지를 염려하면서 부르는 노래라는데 그 주제가 서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효(孝)’라는 맥락에서, 몽골문화는 한국문화와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본 가족사진 속에 있었던 젊은 남자가 내가 원하는 흰 낙타와 그의 새끼낙타를 데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끼 낙타의 목에는 붉은빛 나는 쇠판이 목도리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늑대의 공격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늑대는 큰 낙타는 공격하지 못하지만, 새끼 낙타는 곧잘 공격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몽골유목민은 사나운 개들을 여러 마리 키운다.

나는 비암바의 성실한 노력에 감동을 받았다. 내가 누드사진작품을 시도할 때도 비암바는 이상한 눈길을 나에게 준 적도 없고 상궤를 일탈하는 어떤 행동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나를 위해서 아주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줬다. 그리고 무심하게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면서 나의 위치가 프레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성실하게 가르쳐줬다. 그리고 작업이 끝나면 곧바로 나의 몽골의상 데일을 건네줬다. 나는 재빨리 몸을 감쌀 수 있었다. 그는 아주 프로페셔널한 포토 어시스턴트처럼 행동했다. 하루의 일과가 다 끝난 후에도, 그는 나를 사막 더 깊숙이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뛰놀고 있는 말들을 보여줬다. 재수 좋게도 우리는 멀리서 여우새끼들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비암바의 아들 패밀리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의 게르는 자동차로 한 5분 거리에 있었는데도 중간에 모래언덕이 있어 안 보였던 것이다. 나를 처음 맞이한 사람은 바로 비암바 아들의 부인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아들은 매우 복성스럽게 생긴 부인과 아기와 장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비암바도 딸과 외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은 분가하면 부인집과 결합하는 것이다. 모계 사회적 풍습이 남아있는 듯했으나 그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암바의 아름다운 부인이 최근에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같이 사는 딸은 그녀의 아들이 아파 달란자드가드의 병원에 잠시 입원해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떠나기 전, 딸은 아들과 함께 돌아왔다. 비암바는 외손자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매우 명랑한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나의 작품작업을 최대한 성실하게 도와주었다. 결국 이번 몽골여행은 나의 작품활동의 측면에서도 가장 생산적인 여정이 됐다. 그리고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인간과의 조우’ 기회를 제공했다. 나는 결국 성공적으로 울란바토르공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공항에는 고철상 선생님이 보낸 바이갈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갈마는 호텔로 가는 차를 몰면서, 빙그레 웃음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와아! 진짜 몽골사람 냄새가 나네요.” 나는 시트에 폭 움츠러들면서 열흘 동안이나 목욕을 하지 않은 나의 몸에서 악취가 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를 몰래바랬다. 그랬더니 그녀는 이와 같이 자기 말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었다. “몽골의 시골사람들은 그들만이 간직하는 특별한 내음이 있어요. 그것은 악취가 아니라, 그들이 먹고 일하는 방식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향기 같은 것이죠. 미루 씨는 정말 몽골리안이 되셨네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말하는 내음이라는 것은 온갖 똥딱지의 훈훈한 연기와, 신 양치즈 냄새, 그리고 마른 염소고기 냄새가 복합된 그 무엇일 것이다. 내 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도 과히 아름다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따끈한 물을 틀어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그리고 티제이를 만나러 갔다. 티제이는 나의 성공적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그의 여자친구들과 함께 한 나이트클럽에 가는 이벤트를 준비해놓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현란한 장면의 변화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깊은 고비사막 유목민들의 삶의 잔잔한 색깔이 순식간에 1990년대 구식 요란한 디스코 그리고 하이힐과 빨간 립스틱과 보석을 걸친 레이디들의 법석으로 뒤바뀌는 기나긴 역사의 회전을 나는 목도해야만 했다. 나는 명상에 잠겼다. 과연 어떤 새로운 광적 영감, 그 모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드디어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영원히 우주적 생명을 탐구하는 실증적, 아니 체험적 연구자! 나는 이 지구환경의 모든 다양한 구석들을 쑤시고 다니는 글로브트로터(globetrotter)! 혹자는 나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너는 왜 이토록 사서 고생을 하는가? 너의 예술도 부질없는 하나의 사치가 아닌가?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리라! 나는 오직 “사람되기를 배우고 있는 중(Learning to be human)”이라고.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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