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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올해 노벨문학상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세계 

좌절의 순간을 빛나게 하는 성찰의 힘 

김남주 번역가
인간과 세계의 연결, 그 심연을 발굴해온 작가…담담하고 평이한 문장에 깊고 강한 울림이 내재

이시구로에게 있어서 장르상의 실험은 필연적인 것이다. 삶의 요체가 완성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것을 그는 확인한다. 자기정화의 물결이 일렁이는 호수는 아무리 작아도 고인 물이 아니다. 위대함은 자기 변혁 안에 있다는 믿음, 바로 이시구로가 추구하는 문학의 본령이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일본계 영국인인 그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기억의 문제를 작품의 주요 소재로 채택했다.
노벨상 수상 후 이시구로를 인터뷰했던 영국 BBC 방송의 편집자 윌 곰퍼츠는 이시구로에 대한 모든 비평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중요한 말을 했다. “모든 작가는 스토리를 쓴다. 이시구로는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쓴다.” 이시구로 문학의 특징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다른 차원’이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떤 새로운 경향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그의 본질적인 관심이 다만 문학, 저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플로베르, 카프카, 루쉰, 겐자부로에 이르는 문학의 본령에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 의외의 인물을 부상시켰던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다시 문학으로 돌아왔다. 노벨상 위원회의 종신 사무총장 사라 다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위트 있는 말로 이시구로 문학을 소개한다.

“제인 오스틴과 프란츠 카프카를 섞은 다음, 거기에 마르셀 프루스트를 조금 더해 가볍게 저어라.” 시대풍속과 심리 묘사의 대가 오스틴을 기억하는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카프카 문학은? 그리고 기억의 보물창고로 들어가는 푸르스트를 토핑으로 얹자. 이제 당신은 가즈오 이시구로를 맛볼 준비가 되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5세 때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해 1983년 영국 국적을 취득했다. 켄트 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서 문예창작 과정을 공부했다. 음악을 좋아해 싱어송라이터나 기타리스트를 꿈꾸기도 했다.

1982년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전쟁의 상처를 다루고 있는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이 발표되자 <옵저버>는 “최근 여러 해 동안 발표 된 많은 작품을 통틀어 가장 돋보이는 소설”이라고 평했다. “화자의 기억을 따라 원자폭탄 사건 이후에 시작되지만 원자폭탄 사건이 중심에 자리 잡은 이 작품”(<뉴욕 타임스>)은, 그렇지만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아비규환, 처절한 비명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깔끔하고 절제된, 조용하게 심금을 울리는 ‘문 앞에 철쭉이 피어 있는 작은 집’을 연상시킨다. 주인공 에츠코는 그렇게 담담하고 나직하게 과거를 불러온다. 그녀가 서랍장을 열자 맨 밑에 넣어둔 가족사진에 오후의 빛살이 한순간 머문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받았다.

두 마리 토끼 잡은 ‘절대음감을 지닌 소설’


▎국내에 번역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들. 이시구로는“모든 작가가 쓰는 스토리를 다른 차원에서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6년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발표하고 이 작품으로 휘트브레드 상, 이탈리아 스칸노 상을 받았고 부커 상 후보에 올랐다. 로버트 맥크럼(<가디언>, 2015)은 이 작품이 이시구로의 여러 소설 중에서도 그의 일본적인 유산을 표출하는 동시에 영어로 된 산문의 미묘함과 아름다움을 포착해낸,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절대음감을 지닌 소설’이라고 평했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특이하게도 신뢰할 수 없는 일인칭 화자의 내면적 복잡성을 탐구해왔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그런 기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일본적이지만, 그 주제의 많은 부분 곧 비밀, 회오, 은밀함, 위선, 상실 등은 20세기 영국소설이 천착해온 주제다. 그의 다음 소설이 <남아 있는 나날>이 된 것이 당연하다.”

1989년 발표된 <남아 있는 나날>은 이시구로에게 부커 상과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 소설은 대중적 성공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동시에 받는 작품으로 그를 일약 오늘날 세계 문학을 끌어갈 작가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해놓았다. ‘일괄거래의 한 품목’으로 새 미국인 주인에게 양도된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스는 홀로 떠난 여행 여섯째 날에 석양을 누리는 대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이 저녁이라는 시간은 그 가느다란 기대로 해서, 그리고 혹시 또 실패한다고 해도 이번에는 그리 오래 회오에 시달리지 않고 삶을 마감하게 되리라는 역설적인 기대로 해서 이중의 희망으로 작용한다.

도리스 레싱은 이 작품을 두고 “아주 유쾌한 동시에 기억하는 한 가장 슬픈 이야기”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95년 나온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환상과 사실이 교차하고 경험세계와 정신세계가 뒤섞이는 카프카적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문제작이다. 번역자 김석희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실험의 극한까지 밀어붙인’ 장편이다. 이 작품에 대해 이시구로 자신은, “한 자도 고칠 생각이 없다. 그건 그때의 나 자신이니까”라고 말한다.

언제나 순문학의 영토 벗어나지 않아


▎2015년과 2016년에 각각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왼쪽)와 밥 딜런. 올해 노벨위원회는 순수 소설에 생애를 바치고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2000년 발표된, 20세기 초 상하이를 배경으로 추리기법으로 씌어진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고아로서의 운명’을 품은 이들이 세상과 대면하는 방식을 담은, 어쩌면 작가의 가장 사적인 소설이다. <뉴욕타임스>는 “평이한 문장과 나직하고 운율 있는 해설을 통해, 독자에게 정체성과 기억의 문제를 이중으로 환기시킨다”고 평했다. 맨 부커 상 후보에 올랐던 이 소설에서 주목할 것은 요컨대 “말하는 방식(the way he tells it)”(클로에 디스키, <가디언>)으로, 책을 덮으며 독자는 어쩌면 낙원을 잃은 이후 인간은 모두 고아일 수 있다는 자각에 가 닿는다.

2005년에 발표된 <나를 보내지 마>(2005)는 SF 소설의 얼개를 취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수작이다. <타임스> 선정 2005년 최고의 소설, ‘현대 100대 영문소설’에 선정됐다. 사색의 결을 살린 이시구로 특유의 문체에 담긴 유년의 정서, 우정과 애정의 엇갈림, 나아가 인간과 문명에 대한 숙고에 닿게 된다. “대상을 다루는 이시구로의 솜씨는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피터 캠프, <타임스>)

여섯 권의 장편 소설에 이어 처음으로 나온, ‘음악과 황혼에 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집 <녹턴>은 시냇물처럼 잔잔한 문장으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실패에 관한 것이지만, 여기서 다루어지는 실패에는 품격이 있다.”(마거릿 드래블) 최근작 <파묻힌 거인>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브리튼 족의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망각의 안개가 내린 고대 잉글랜드의 평원을 무대로 기억을 찾아간다. “기억이 망각에, 역사가 현재에, 판타지가 현실에 어떻게 관련하는가를 탐사한 작품”(노벨상 위원회)으로 “기억과 죄책감에 대해, 우리가 집단 차원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회상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있게 파헤친다. (…) 기억의 의무에 충실하려는 사람과 빨리 잊으려는 사람에 관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다.(<가디언>)

이시구로의 작품은 어떤 장르상의 다양성을 갖더라도 언제나 순문학의 영토를 벗어나지 않는다. 제1, 2차 세계대전이 주된 소재라고 해서 <창백한 언덕 풍경>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이 역사소설이 아니며, 탐정이 미스터리를 파헤친다 해서 <우리가 고아였을 때>가 추리소설이랄 수 없고, 대체 현실을 다루고 있다 해도 <나를 보내지 마>는 기존의 의미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며, 도깨비와 용이 등장한다고 해서 <파묻힌 거인>이 속속들이 환상 소설일 수 없는 이유다.

몇 년 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의 작품들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그리고 <남아 있는 나날> 세 편에 대해 “엄밀하게 말해 같은 책들이다. 나는 같은 책을 세 번 썼다”라고 말한다. 인터뷰어는 깜짝 놀라 이렇게 묻는다. 일본 나가사키(<창백한 언덕 풍경>의 주배경)에서 영국의 달링턴 대 저택(<남아 있는 나날>의 배경)으로 독자들이 환각을 일으킬 만큼 아찔하게 이동했는데도요? 그에 대해 이시구로는 자신의 경우, 그리고 대개의 경우 배경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짚는다. 세 작품 모두 “한 개인이 불편한 기억과 어떻게 타협하는지”그려내려고 했고,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와 <남아 있는 나날> 둘 다에서 “직업적인 면에서 소모적인 삶을 산 한 인간을 탐구”했다는 것이다.“때때로 인간은 틀릴 수도 있는 신념에 집착하고 그것을 자기 삶의 근거로 삼는다. 내 초기 작품들은 이런 인물들을 다룬다. (…) 그 신념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환멸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건 그저 그 탐색이 어렵다는 걸 발견한 것뿐이고, 탐색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삶의 요체가 완성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것, 문학이 영광이 아니라 아픈 좌절의 자리에서 빛난다는 걸 확인한다. 이시구로에게 있어서 장르상의 실험은 필연적일 수 있다. 그의 기본 관심이 문학의 본령이고 거대한 주제에 자발적으로 묶여 있는 만큼 끊임없는 자기변신을 통해 그것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자기정화의 물결이 일렁이는 호수는 아무리 작아도 고인 물이 아니다.

어쩌면 작가란 평생 한 권의 작품만을 쓰는지도 모른다. 다만 어떻게 새롭게 하는가, 어떻게 심화되는가가 있을 뿐. 작가로서의 위대함이란, 작품의 구성이 얼마나 기막히게 짜여 있는지, 심지어는 문장이나 문체가 얼마나 훌륭한지, 장면장면이 얼마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지 하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이 읽혔고 번역되었으며 팔렸는지와도 물론 무관하다. 스토리와 문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손에 잡히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깊숙이 다가오는 어떤 힘. 이시구로식으로 말하자면 배경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위대함을 이루는 것은 언제나 자기 변혁과 통한다.

문학에 자신의 전체를 투신하는 작가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항구도시 나가사키. 1954년생인 이시구로가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할 때까지 자랐던 곳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이시구로는 그렇지만 장르나 소재를 넘어서서 자신의 관심이 다만 ‘인간’에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인종과 계급과 민족을 넘어서서 선함을 환기시키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 “소설의 위대한 정서적 힘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연결, 그 환상적 감각 아래 묻힌 심연을 발굴해온 작가로 옆을 돌아보지 않고 문학에 자신의 전체를 투신하는 작가로, 스스로의 미학적 세계를 발전시켜왔다”(노벨상 위원회)라는 평가는 그래서 적절하다.

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다른 차원의 말하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이시구로가 차용한 방식은 일인칭 화자의 해설이다.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일본 나가사키에서 영국의 장원으로, 1900년대 초 격동의 상하이로, 다시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가상현실의 무대로 배경이 크게 바뀌면서도 일인칭 화법으로 독자에게 속삭이는 그의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첫 작품 <창백한 언덕 풍경>의 주인공 에츠코, 저자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남아 있는 나날>에서 집사 스티븐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오노,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주인공 뱅크스, 그리고 <나를 보내지 마>의 캐시 등 이시구로의 주인공들은 개인적인 회고담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면서 기억의 불완전성을 십분 활용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해야 할 경우 주인공의 기억력이 갑자기 불분명해진다. 그리하여 이런 식의 회고적인 서술이 문학적 장치로서 거둘 수 있는 최상의 효과를 자연스럽게 얻어낸다.

독자는 우선 호의를 갖고 화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진술의 진위에 대한 의혹이 드러나는 과정은 느리고 암시적이어서, 매 단락이, 매 페이지가 궁금함을 품고 넘어간다. 이윽고 주인공과의 거리가 확보되면 독자는 주인공의 모습에 비친 독자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거리를 확보하는 지점은 읽는 이에게 달려 있다. 영국의 비평가 브라이언 피니는 이시구로가 기억의 불확실성을 오히려 활용하는 이런 방식을 통해 독자에게 사실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동의를 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시구로의 글쓰기 특징이 기억이 사실을 감추는, 혹은 언어가 의미를 감추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기억과 상상력과 꿈의 혼융을 통해 독자는 ‘사실주의가 단순화해온 현실의 미궁’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얼핏 평이해 보이는 이시구로의 작품은 이런 장치로 해서 ‘느끼는 만큼 보이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나를 보내지 마>에 나오는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경우가 독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화자의 어조는 나직하다. 때로는 말을 아끼고 침묵한다. 독자는 행간을 들여다본다.

“디킨스식 소설가들이 인물의 신발과 누군가가 입은 셔츠의 특별한 색과 식재료로 가득 찬 식료품실의 특별한 냄새를 묘사한다면” 이시구로는 “평이한 문장과 나직하고 운율 있는 해설을 통해, 읽는 이에게 정체성과 기억의 문제를 이중적으로 환기시키며 그윽하고 짜릿한 경험을 선사한다.”(필립 헨셔, <가디언>)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를, 어디만큼 와 있는지를 알고 기꺼이 그 너머로 가려는 데 이시구로의 작가로서의 위대성이 있다. 화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의 문장은 담담하고 평이하지만 그 저변에는 현란하고 요란한 문장이 갖지 못한 어떤 울림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나직한 어조 이상을 넘고 싶지 않았다”


▎노벨상위원회의 사라 다리우스 사무총장은 “제인 오스틴(가운데)과 프란츠 카프카(오른쪽)를 섞은 다음, 거기에 마르셀 프루스트를 조금 더해 가볍게 저어라”는 위트로 이시구로 문학을 소개했다.
프랑스어나 영어로 된 문장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이따금, 품고 있는 저변이 아주 넓은, 그 깊이가 쉽게 가늠되지 않는 그런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분명히 모든 단어를 빠짐없이 번역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듯한, 행간에서 나오는 어떤 빛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여전히 미진한 그런 때. 낮고 담담하며 은근한 이시구로의 문장들 가운데에서 그런 순간을 만나면서 ‘기본’이 얼마나 높은 차원인지를 다시 확인했다.

이시구로의 문장을 번역하면서 나는 채색 유리든 투명 유리든 간에 유리로서 문장에 끼워지는 것이 아니라 낮고 담담하며 깊숙한 그의 문장 속에서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그의 나직한 어조 이상을 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영어나 프랑스어에서 가장 갖고 싶어 하는 품사, 가장 욕심나는 ‘말’인 관계대명사가 여러 개 이어지면서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그의 문장을 몇 차례 읽고 자판을 두드리다가 행간의 빛을 들여다보기 위해 한참씩 쉬기도 했고, 한창 리듬을 탈 때면 일부러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그가 썼으리라고, 그의 문장이 흘러가리라고 짐작되는 지점으로 내 문장을 흘려보내 보기도 했지만 작품이 로만어의 큰 줄기에서 우랄알타이어의 다른 줄기로 옮겨지는 동안 이시구로의 문학 속에 있음을 잊지는 않았다.


▎2015년 12월 10일 스톡홀름 시청 블루홀에서 열린 2015 노벨상 수상식 축하 연회. 당시 만찬 참석자는 1300여 명, 40여 명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260명의 직원이 서빙했다.
노벨상 수상 후 이시구로는, “지금 세상은 무척 불확실한 순간을 맞고 있다. 노벨문학상이 이런 현재의 세상에 긍정적인 힘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자기 집 뜰의 벤치에 앉아 기자들에게 차분하고 침착하고 생각에 잠겨 소설의 힘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해 말하는 이 ‘순전함(integrity)을 지닌 작가’(노벨상위원회)는 우리 인류라는 종이 인종과 계급과 민족의 장벽을 넘어서서 아직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게 가능하다는 거대한 이야기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박스기사] 번역자가 뽑은 한 권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 - 사건을 보는 방식에 주목한 SF소설


“내가 멋대로 규칙을 어긴 때가 있다면, 토미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지 두어 주 후 실제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차를 몰고 노퍼크에 갔을 때이다. 특별히 찾는 것도 없었고, 해안 끝까지 간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들판과 거대한 잿빛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나는 한 번도 간 적 없는 길을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30분 동안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따금 내 차의 엔진 소리에 놀란 새 떼가 밭고랑에서 날아오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평평하고 평범한 들판이 이 어졌다. 이윽고 나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 한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어떤 지점을 발견하고 그곳에 가서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그 순간 거기에 서서 그 기묘한 잡동사니들을 바라보며, 텅 빈 들판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환상에 가까운 상상에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노퍼크였고, 때는 토미를 잃은 지 겨우 두어 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쯤 눈을 감고 상상했다. 어린 시절 이후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며, 이 앞에 이렇게 서서 가만히 기다리면 들판을 지나 저 멀리 지평선에서 하나의 얼굴이 처음에는 조그맣게 떠올라 점점 커져서 마침내 그것이 토미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고, 이윽고 토미가 손을 흔들고 어쩌면 나를 소리쳐 부를지도 모른다고. 이 환상은 그 이상으로 진전되지 않았다. 그 이상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 (<나를 보내지 마> 본문 중에서)

<남아 있는 나날>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라면, <나를 보내지 마>는 그가 다른 작가들과 다른 지점을 잘 보여주며 인류와 문명에 대한 순전한 문학적 대응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없었더라도 과연 이시구로는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까? 이번 노벨상의 유력 수상자로 오른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작품이 모든 이의 구미에 맞는 작품은 아닐 거라고 지적한다. “주인공들은 전혀 영웅적이지 않고 결말은 불편하다. 그럼에도 어려운 주제를 장인의 솜씨로 눈부시게 벼려낸 이 책을 덮으며 독자는 어두운 유리를 통해 바라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온라인 잡지 <슬레이트www.slate.com>)

이 작품은 SF 소설의 얼개를 취하지만 일반적인 SF 소설과는 커다란 거리가 있다. 작가가 “다만 인간에,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싶었다”고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은 소재상으로 비슷한 영화 <아일랜드>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일반적인 과학 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보는 방식에 주목하게 되고 이 작품이 SF 소설이라는 것을 잊는다. 깊은 문학적 울림을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만난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유년’의 정서, 우정과 애정, 인간과 문명의 의미에 붙들리게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스테이시 켄트가 다시 부른 <네버 렛 미 고>의 선율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나를 보내지 마>의 다음 문단이 다른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밋밋하고 담담하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시구로가 현란하고 강렬하며 짜릿하고 흥미진진함이 당연한 ‘지금 여기’ 한가운데 있다. 그를 읽는다고 해서 그런 세상이, 눈앞의 현실이 직접적으로 달라질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다.

※ 김남주 - 현대 프랑스문학과 영미문학을 주로 번역했다. 옮긴 책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녹턴> <우리가 고아였을 때> <창백한 언덕 풍경>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제임스 설터의 <스포츠와 여가>, 그리고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비롯한 로맹 가리 작품들, <행복해서 행복한 사람들>을 비롯한 야스미나 레자의 작품들이 있고, 지은 책으로 <나의 프랑스식 서재> <사라지는 번역자들>이 있다.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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