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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10)] 인도 속의 포르투갈 

디우(Diu)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대항해시대 인도양 무역거점으로 번영 누려… 옛 영화는 사라지고 지금은 시간이 박제된 옛 성채와 성당만 남아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대항해시대 양대 열강이었다. 그런 포르투갈이 인도양에 영향을 투사할 교두보로 키워온 섬이 바로 디우 섬이다. 때문에 1961년 인도공화국의 디우 수복은 제국들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기도 했다.


▎디우 섬의 중앙광장. 회색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난 기념탑과 폐점한 지 오래된 이슬람 상점들이 눈에 띈다. 식민제국의 영화는 간데 없고 좌판을 깔고 소매하는 상인들만 남았다.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 아마다바드(Ahmadabad)에서 비행기를 타고 뭄바이 공항을 거쳐 다시 에어인디아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로 갈아탔다. 육로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이내 디우(Diu) 섬이 보인다. 물안개 속에 가늘고 긴 섬이 형체를 드러낸다. 섬 북단이 긴 다리로 구자라트 본토와 연결돼 있다. 섬은 긴 모래톱으로 형성됐다. 왼쪽으로 아라비아 해의 거친 파도가 포말을 일구면서 모래톱에서 으깨진다. 오른쪽으로는 연이어지는 소금밭이다. 디우는 구자라트 본토를 마주보는 동서 11㎞, 남북 3㎞의 디우 섬과 본토의 2개 지구로 이뤄져 있다.


구자라트에 면한 섬 북부는 습지와 염전으로 가득하며 남부해안은 석회암 절벽과 동굴, 모래사장이 있다. 섬사람들은 어업·관광업·술과 소금판매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대추야자 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가운데 핑크빛, 연초록빛 따위의 파스텔톤 살림집이 예쁘게 서있다. 인도 같지가 않다. 포르투갈에서 익히 보았던 색깔들이 섬을 인도와는 분리된 이질적인 곳으로 만들어낸다. 디우 공항 자체가 연분홍빛이다. 디우는 인도-포르투갈(Indo-Portuguese) 건축술의 현장이기도 하다.

켐베이 만 길목 양쪽에 포진한 디우


▎힌두식으로 붉게 칠해진 가운데 가톨릭 조각이 새겨져 있는 잠빠문의 모습. 섬 문명다운 자유분방한 기풍을 대변하는 듯하다.
영국령 인도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포르투갈령 인도가 1961년까지 지속됐다는 사실은 조금 놀랍게 다가온다. 중국 대륙에 마카오가 있었다면, 인도 대륙에는 디우와 다만(Daman), 고아(Goa) 세 도시가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상륙 이래로 포르투갈은 450여 년의 세월 동안 인도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다.

디우는 다만, 고아와 더불어 1961년 포르투갈에서 ‘간신히’ 벗어나서 인도령으로 편입됐다. 인도 군대가 무력으로 수복했다. 포르투갈은 1974년까지 이곳의 인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식민제국의 집착이 그만큼 강했다. 포르투갈 지배기에 다만과 디우는 고아 주에 속했지만, 지금은 ‘다만과 디우 연방직할지(Union Territory of Daman & Diu)’로 독립했다. 연방직할지는 주(州)에 상당하는 행정자치권을 가진다.

포르투갈은 유독 디우와 다만에 집착했다. 두 요새가 켐베이 만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켐베이 만 안쪽에는 인도 직물공업의 오랜 중심지였던 수라트(Surat)과 아마다바드가 있었다. 포르투갈은 켐베이 만 양쪽에 식민도시를 포진시키고 자체 무역기지이자 군사적 요새로 키워냈다. 역사적으로도 아라비아해 인도양의 무역로에 중요한 항구였다.

포르투갈은 1531년 이 섬을 손에 넣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535년 구자라트 술탄 바하두르(Bahadur)와 무굴 황제 후마윤(Humayun) 사이의 싸움을 틈타 마침내 이 섬을 장악했다. 포르투갈과 무굴족의 압박에 지친 바하두르는 포르투갈에게 디우를 주면서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협정은 곧 무시됐고 바하두르의 강력한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디우섬과 본토의 일부가 포르투갈에게 넘어갔다. 이후 한 세기 동안 디우는 포르투갈의 중요한 무역중심지이자 해군기지로 기능했다.

17세기 차세대 해양강국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등장하면서 디우는 전략적 가치를 잃어갔다.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아니었다. 1961년 인도로 편입될 때까지 빈약한 무역으로 고립된 포르투갈에 디우는 소중한 인도양 전초기지였다. 덕분에 인도의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와 달리 포르투갈 식민도시 계획을 원래의 특성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멈춰버린 포르투갈의 시계


▎육중한 성벽에서 디우 섬의 전략적인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바닷물이 흐르는 해자를 사이에 두고 보이는 포르투갈 요새.
도심으로 들어가는 잠빠문(Zampa Gateway)은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져 힌두 느낌이 난다. 사자·천사·성직자 조각이 문 위에 올라있으며 이들도 모두 붉은색을 뒤집어쓴 상태다. 문 바로 안쪽에는 1702년에 만들어진 성상이 있는 자그마한 예배당이 있다. 흰색 타일을 붙이고 파랑·노랑·빨강 등 화사한 타일기둥을 세운 특이한 구조다. 성당 바로 옆에 술집이 붙어있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술을 공개적으로 금지하는 힌두사회에서 디우 섬은 그만큼 알코올 문화에 너그럽다는 반증일 것이다.

골목에는 어김없이 소들이 어슬렁거린다. 소 등이 혹부리처럼 튀어나왔다. 거리는 빈곤 그 자체다. 곳곳에서 손을 내미는 아낙이나 소녀들을 만나게 된다. 물이 귀한 섬인 데다가 수도 시설이 불비해 머리에 물동이를 얹은 여인들을 자주 만난다. 곳곳에 힌두사원이 즐비하다. 잠빠문 안쪽의 골목이 대체로 원주민이 모여 사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빠문을 벗어난 외곽에는 이슬람 공동묘지도 있다.

바닷가의 포르투갈 요새로 이어지는 포트로드(Fort road)가 시작되는 지점에 섰다. 1906년 포르투갈 정부가 건립한 기념문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200여 평 되는 중심광장에는 백색의 기념탑이 하나 서 있고 이슬람풍 건축의 상가가 둘러싸고 있다. 상점 안에는 소소한 옷가지, 신발 등을 팔고 있다. 광장에 면한 남루한 2층집들은 레스토랑과 호텔로 쓰이는데 영업을 멈춘 지 오래다. 시간이 멈추어진 광장. 포르투갈이 철수한 1961년 이래로 시간은 그 정도에서 멈췄다. ‘호텔 모잠비크 바’란 간판이 보인다. 모잠비크 호텔에 머물던 포르투갈인이 테킬라 한잔을 마셨을 것 같은 그런 간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시장의 낮은 담벼락은 각색 타일로 장식돼 있는데, 문득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타일벽이 떠오른다. 타일벽은 해변도로로 길게 이어진다. 이층집으로 된 허름한 레스토랑 몇 개가 해변을 바라보며 손님을 끈다. ‘PORTUGUESE FOOD PLAZA’란 간판에서 멈춘 시계지만 여전히 째깍거림을 느낀다. 꽃나무로 치장된 순교기념공원 건너편에 관광센터 건물이 있다. 마당에 오래된 포르투갈 대포가 예쁜 은빛으로 포장돼 있다. 경찰서 마당에도 포문을 가져다 놨는데 포신을 빨갛게 칠해놓았다. 여기 사람들은 무기를 장난감이나 예술품으로 만드는 데 소질이 있다.

도심건물들의 색채가 현란하다. 디우 시내는 낡아빠질 데로 낡았지만 전형적인 유럽 도심과 비슷하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과 밝은 색 건물이 도심을 채운다. 빤지와띠(Panchwati)에서는 나가르 세트 하벨리(Nagar Sheth Haveli) 같은 멋스런 건물도 볼 수 있다. 대체로 초록·파랑·빨강·노랑 등을 과감하게 원색 그대로 노출시켰다. 단아한 집들은 은은한 파스텔 톤의 하늘색에 짙은 블루라인을 넣어서 침착하게 포르투갈의 색조를 재현하고 있다. 디우고등중학교로 무작정 들어갔더니 학교건물 역시 특유의 블루라인으로 청량감을 더해준다.

1㎞가량 떨어진 작은 암초 위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교도소를 지었다. ‘포르띰 도 마르(For-tim-de-Mar)’는 바다 위에 있는 배 모양 건물이다. 건물 바깥으로 나가면 그대로 바다인지라 탈출이 불가능하다. 제국의 통치에는 감옥이 필수다. 감옥의 크기가 손바닥만한 것으로 미뤄 크나큼 반란과 투옥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등대를 세워서 뱃길 안내를 맡고 있으며 해안에서는 이따금 관광선이 한 바퀴 돌고 간다.

옛 성채의 주름 사이로 고목만 무성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은 고딕 양식 위에 아치형 구조를 더한 ‘마누엘 양식’을 창안했다. 포르투갈 요새의 무너진 건물에 남아 있는 마누엘 양식.
포트로드가 끝나는 지점에 포르투갈 요새인 디우 포트(Diu Fort)가 나타난다. 1535년에 건축된 요새에는 무려 1960년까지 수비대가 진주했다. 성벽은 석회암을 반듯한 벽돌 크기로 잘라내서 빈틈없이 쌓아 올렸다. 진입로 양쪽이 바다인 탓에 요새 침입이 쉽지 않다. 병사들이 지키던 위병소 건물이 좌우 양측에 서 있다. 포르투갈은 물론이고 태평양 괌의 스페인 위병소와 동일한 이베리아 양식이다.

거대한 포르투갈 요새는 한때 강한 힘을 과시했지만 지금은 방치돼 있다. 요새는 크고 장중하고 첨예한 형상이다. 섬 모퉁이 돌출한 지점이라 성 주변은 절벽으로 바다와 연결된다. 지형적으로 디우 섬에 딸린 자그마한 무인도를 성채로 바꾼 것 같다. 3층 빌딩 정도의 높이인데 깎아지른 성벽 아래는 바닷물이 해자로 기능하고 있어 난공불락이다.

좁은 성문을 통과하면 한 번 방향이 꺾이면서 침공하기 어렵게 설계됐다. 성 안에서 보자면 바다로 향하는 작은 문으로 방파제가 보인다. 성문 밖으로 50여m 길이의 접안시설을 내밀었다. 제국의 노선은 멀리 리스본에서 여기까지 오로지 배를 통해서만 연결됐기 때문에 접안시설은 전략적으로도 중요했다. 방파제는 순전히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고전적 축조 방식이다. 콘크리트 없이 기단을 모두 돌을 썼기 때문에 매우 험난한 공사였을 것이다. 방파제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옛 대포 하나가 썩어 가고 있다. 이 역시 지나간 포르투갈 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소도구로 느껴진다.

요새는 생각 이상으로 치밀하다. 항구 쪽의 성문을 통과해도 또다시 본래의 성문을 하나 더 통과해야 되게끔 설계됐다. 천천히 층계를 따라서 요새 위로 오른다. 해안가로 겹성이 하나 더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중 방어막을 쳤던 것 같다. 아라비아 해를 따라서 둥글게 성벽이 흘러가며 성벽 안쪽으로 방어포대가 놓여 있다.

성 안에는 다양한 건축물이 남아 있는데, 역시 시간이 멈춘 채 뼈대만 남았다. 그러나 아치형 세련된 건축양식에서 포르투갈의 첨단적 건축술이 이곳 인도에 선보였음을 짐작케 한다. 아치형 통로 곳곳에 성모마리아는 반드시 좌정하고 있으며 국왕의 휘장과 왕관을 배치했다. 제국의 권위가 신의 권위를 업고서 현현(顯現)되는 순간이다.

포르투갈 병사들이 불과 반세기 이전에 사용하던 무기류가 곳곳에 산재한다. 최고급 쇠붙이로 만든 튼튼한 무기이기에 앞으로도 1000년은 그대로 갈 것 같은 느낌이다. 아라비아 해를 향하던 포신들도 한결같이 제 자리를 지키며 서쪽을 향한다. 1961년 그 순간까지 쓰여졌던 성당도 그대로 멈춰 섰다. 이 황량한 폐허에 나무만이 생명력을 이어가며 번성해갔다. 그나마 세월이 흘러흘러 고목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성자를 안치한 무너진 성당은 사자문양과 화려한 장식성 기둥으로 꾸며져 있다. 말 탄 장군의 기개가 비루먹은 듯한 말 덕분에 우스꽝스럽게 다가온다. 성 정상에 오르면 당연히 사위가 한 눈에 들어오고 성벽의 좁은 문으로 아라비아 해의 거침없는 파도가 몰려온다. 성벽 중간중간에 해자와 같은 계곡이 얼기설기 엮어져서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만만치 않은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입지다.

요새는 멈췄지만 등대는 움직인다. 등대야말로 이 시간이 정지된 요새에서 나무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작동되는 생명체일 것이다. 적진을 감사하고 방어하던 위치에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등대가 어선과 상선을 마중하는 역할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요새의 가장 높은 곳에 등대가 있는데 불빛을 32㎞까지 비춘다.

요새는 간단하게 이어져온 것이 아니다. 1539년과 1546년 두 차례에 걸쳐 켐베이 왕국 군대의 포위에 직면한다. 두 번의 포위 공격이 있은 후, 디우는 17세기 후반 무스카트 아랍인과 네덜란드인의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강화됐다. 18세기부터는 봄베이(Bombay, 현재의 뭄바이) 개발로 인해 디우의 전략적 위상이 추락했다. 이슬람 동양과 기독교 서부 세력 간의 투쟁에서 상업적 및 전략적 보루의 상징으로 축소됐다.

중국에는 마카오, 인도에는 디우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진 성 바울 성당 모습.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문양들을 돋을새김했다.
포르투갈이 진출하기 전만 해도 아시아에서 다수의 대포로 중무장한 상선으로 무역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16세기경 포르투갈은 동남아프리카 모잠비크 소팔라에서 일본 나가사키까지 40여 개소 이상의 요새와 거류지를 구축했다. 거대 중국시장을 겨냥해 마카오 식민지를 만들었다면, 유럽에서 보다 가깝고 직접적 수요가 있는 인도에 디우가 만들었다.

디우는 언제나 터키·페르시안·아라비안·아르메니안,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나라 사람이 드나들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유럽으로 직접 물건을 갖고 가기보다 최단거리인 페르시아무역과 홍해무역, 즉 메카로 가는 무역에서 많은 수익을 냈다. 그러나 시장환경은 네덜란드, 영국 등이 등장하면서 차츰 변해갔다. 다음은 영국 상인 랄프 피치(Ralph Fitch)가 16세기 말에 디우를 스쳐가면서 남긴 기록이다.

“1583년 11월 5일에 우리가 도착한 첫 번째 인도 도시는 디우였다. 이 도시는 캄비아 왕국에 속해있으며, 강력한 마을들은 포르투갈이 점유하고 있다. 도시는 작은 규모이지만 창고에 물품이 충분히 보관돼 있다. 여기서 상인들은 메카나 오만, 그 밖의 장소로 물건을 선적해 보낸다. 이들 물건은 무어족이나 기독교도 손으로 내보내는데, 무어족은 포르투갈의 패스포트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기록은 당대에 네덜란드와 영국이 등장하던 조건에서 포르투갈의 힘이 쇠락하던 단계를 설명한다. 강력한 도시였던 디우가 쇠락해 포르투갈-인도양 세계에 물건을 보내는 거점 정도로 내려간 상황을 말한다. 17세기 말 미국의 정치사상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이미 포르투갈 요새 안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4분의 1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밀턴은 여전히 무역 거점으로 흥성했던 장면들도 소개한다. 디우 섬이 5~6개의 훌륭한 성당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오늘날의 골조만 남은 모습과는 판이했음을 알 수 있다. 성에는 200여 명의 포르투갈인이 성과 성밖 도심에 살고 있었으며, 나머지 인구는 대부분 상인들이었다. 해밀턴은 상인 수가 무려 4000여 명에 달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과장된 것으로 이보다는 적은 수였을 것이다. 그는 이 섬이 유럽인의 손으로 넘어오면 인도 해안가의 최상의 상거래도시가 될 것이라고 서술했다.

디우는 종교박람회장


▎디우 시내에서 만난 무슬림 노인. 포르투갈령이던 디우가 인도로 돌아온 지는 채 60년이 되지 않았다.
성 바울 성당(St.Paul Church)은 1600년 예수회가 지은 후 1807년에 재건됐다. 디우 섬 안의 마누엘 식으로 지은 세 개 성당 중의 하나로, 건축양식의 품격이 뛰어나서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흰색의 웅장한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의자나 장식 등이 고졸한 느낌을 준다. 1807년 재건할 때 마련한 가구나 장식을 그대로 쓴다는 인상이다. 바울 성당에서 언덕을 조금 내려가면 토마스 성당(St.Thomas church)이 나온다. 1598년에 건립된 이곳은 바울 성당에 비하면 조금 엉성하게 지어진 듯하다. 현재는 교회 기능을 정지하고 디우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가톨릭 성인의 성상 때문에 매년 11월 1일에 많은 사람이 몰려와 미사를 드린다.

디우에서 가장 오랜 성당은 1593년에 축성된 아시시 성 프란시스 성당(Church of St.Francis of Assisi)이다. 이곳 성당 역시 병원으로 개조됐지만 가끔 미사가 열리기도 한다. 옛 포르투갈인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있어 현지인은 자신들의 거주지와 구분해 특별히 ‘외국인 구역’이라 부른다.

포르투갈은 16세기 전반에 디우를 점령했지만 거센 도전을 받다가 1600년경에야 안정적 지배기를 맞이한다. 거류민이 늘어나고 상품교역량도 증가했다. 포르투갈은 젊은 포르투갈 남자를 현지 여성과 혼인시키는 정책을 구사했다. 포르투갈 혼혈이 양산되면서 이들 역시 가톨릭 신자로 인입됐다. 식민제국의 위세를 과시할 겸 대대적인 성당 건축이 1590년 대에 집중적으로 전개돼 3개의 성당이 비슷한 시기에 축성되기에 이른다.

원주민 거주지에 작은 규모의 힌두사원이 여럿 있다. 자이나교 사원의 흔적도 있고, 길거리에서는 이슬람교도도 자주 만난다. 그렇지만 디우에서 특별한 것은 조로아스터 불의 사원(Zoroastrian fire temple)이다. 해안 근처 푸담(Fudam) 인근에는 시바를 모신 간게스바라(Gangesvara) 바위사원이 있으며, 근처에 두 개의 조로아스터 ‘침묵의 탑(Dakhma)’이 있다. 두 개 탑 중 하나는 잘 보존돼 있어 다크마 건축과 디자인을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사례를 제공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장례식은 고대부터 주목받았다. 화장이나 장례보다는 ‘침묵의 탑’으로 알려진 다크마에 시신을 올려서 새의 먹이로 노출시켰다. 다크마는 교도는 물론이고 시체 운반자를 제외하고 모두에게 금지돼 있기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지금에 와서는 전통이 단절됐지만 디우에 있는 침묵의 탑은 이란 본토에서도 사라진 독특한 유적으로 인정된다.

디우는 파르시(Parsi) 교도가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도망쳤을 때 처음 도착해서 19년간 머물던 곳이다. 조로아스터교는 고립된 지역, 특히 인도에서 번성했다. 발상지인 이란이 이슬람화된 후 642년경에 아랍인에 의한 성전 파괴가 벌어졌고, 특히 8~10세기에 대대적 박해가 일어나 개종이 강요됐다. 조로아스터 교도들은 이란을 떠나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를 거쳐 북서인도에 정착했다. 인도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후원으로 외려 ‘파르시’ 또는 ‘파르세’로 불리는 이란 조로아스터교도 이주자 후손이 다수 존재한다.

북쪽 끝에 가면 고기잡이 마을인 바나끄바라(Vanakbara)가 나온다. 남단의 켐베이만 길목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촌이 지극히 서양적이라면, 바나끄바라는 동네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인도 서북부에서 활약하던 전통적인 대형 인도다우선이 줄지어 정박해 있으며, 그 앞쪽으로 중간배, 작은 보트 등이 부지런히 오간다. 인구가 넘쳐나는 어촌에는 하릴없이 담배를 피어 물고 수다를 떠는 남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전통적인 디우 어촌이다.

각양각색의 배가 정박해 있는 항구 주변은 오전 7~8시 사이에 생선시장이 열린다. 붙박이 수산시장도 하나 있어 소소한 생선 무더기를 놓고 소매하는 여인들을 만날 수 있다. 바나끄바라에는 이슬람사원과 성당(Church of Our Lady of Mercy)이 공존한다. 바다 건너에서 강하게 밀려왔던 이슬람의 영향이 남아있는 것이며, 아울러 강하게 불어왔던 가톨릭 전통도 잔존한 셈이다.

바나끄바라에는 니르말라 마타(Nirmala Mata) 영어학교가 있다. 디우 사람들이 오늘날 영어를 공식언어로 쓴다지만 청년들을 빼놓고 노인 중에서 영어를 알아 듣는 이는 의외로 없다. 식민지 기간 동안 영토의 공식 언어였던 포르투갈어도 노인들 사이에서나 집안에서 쓰는 말로 쇠락했다. 그럼에도 성 바울 성당의 미사를 참관해보니 가톨릭 신자들의 예배는 전적으로 포르투갈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여전히 디우와 다만에서 약 1만 명의 사람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

식민항구의 글로벌적 마누엘 양식


▎학교에 가는 무슬림 아이들. 디우 청년들은 포르투갈어를 모르고, 노인들은 영어를 알지 못한다.
디우 같은 식민 항구도시는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라 경제·정치·사회문화적 힘이 결집되는 복합적 시스템으로 바라봐야 한다. 항구도시와 크고 작은 해안도시의 발흥은 해상자본과 무역의 동력에 관계됐다. 포르투갈의 항구도시에서의 건축적 행위는 당 시대의 경제적 ‘황금시대’를 반영했다.

포르투갈 해양팽창과 황금시대는 16세기였다. 종교적 건축, 시청사나 병원·세관·방어시설·항구시설 등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경제적 이득을 반영했다. 그 결과 미학적 건축적 패턴은 마누엘(Manueline) 양식과 관계가 있다. 마누엘 양식은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황금기인 16세기에 꽃핀 건축양식이다. 마누엘은 포르투갈 대항해시대 전성기의 왕 마누엘 1세(1495∼1521)에서 유래했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원천으로 해 포르투갈의 국력을 과시하는 건축군이 속속 들어섰는데 리스본의 제로니모스 수도원, 벨렘탑 등이 대표격이다.

이 양식은 고딕이 퇴조하고 르네상스양식이 싹 트기 전 나타났다. 고딕의 직선기둥에 반해 나선형 기둥이 등장했고, 포르투갈의 영화(榮華)가 건축물에 그대로 현현했다. 1490년부터 약 50년간 포르투갈에서 지속된 이 양식은 고딕을 기반으로 하되 문과 창에서 아치형이 두드려졌고, 팔각형의 주두(柱頭)가 자주 선보여졌다. 대항해시대에 일상적으로 접하던 조개 껍질·해초·산호 같은 해산물, 돛·천구의·밧줄 같은 항해용구, 자신들이 선교하려던 십자가 기독교 상징, 새로 발견한 땅의 상징, 월계수 가지 같은 식물적 소재 등을 망라했다. 포르투갈 글로벌 해양 진출의 결과가 표현된 것이다.

마누엘 양식에 충실한 편인 디우의 건축군이 일제히 1590년대를 전후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디우의 가장 화려한 성 바울 성당의 경우, 상부의 좌우를 조개 껍질 문양으로 장식했으며, 지나칠 정도로 장식적인 문양을 돋을새김했다. 성당 내부에는 문과 창문 위에 일제히 조개문양을 선보이고 있다. 건물 본체의 기둥도 사각이나 원형이 아니라 장식성이 강한 다면체로 만들어졌다. 성당 앞의 십자가도 나선형 기둥과 조개문양으로 설계됐다.

이제 ‘다만과 디우 연방직할지’의 다른 쪽인 다만(Daman)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간다. 디우에서 켐베이만을 건너가면 다만이고, 다만에서 해안을 따라 북상하면 직조공업의 본산지이자 최초의 영국 동인도회사가 있던 수라트가 나오며, 다만에서 남하하면 동인도회사의 본부였던 뭄바이가 나온다. 다만의 전략적 위상이 지리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다만도 디우와 동일 방식으로 계획 설계됐다. 왼쪽으로 아라비아해가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다만 강가(Ganga) 강이 흐르기 때문에 사실상 섬과 같이 고립된 구역이라 방어에 유리하다. 1599년 축성된 모띠(Moti) 다만 요새는 무려 30만㎢의 면적을 둘러싼다.

알폰스 드 알부르크의 최후


▎디우 원주민 거주지역에 위치한 힌두사원. 거리에는 비쩍 마른 소들이 유유히 걸어다닌다.
성문 근처에는 포르투갈 시인 보카주(Manuel Bocage)가 살던 18세기 저택도 남아 있다. 디우 성채에 등대가 올라있는 것처럼 모띠에도 등대가 자리 잡았다. 정상에서 보면 건너편에 다만 시가지가 굽어 보이고 강 하구에 선착장이 있어 배들이 번잡하게 오간다. 1603년에 건립된 봄지저스 대성당(Church of Bom Jesus)은 장중하면서도 화려한 문, 정교한 실내장식 덕분에 ‘인도의 이베리아’로 불리기도 한다. 화려한 문과 기둥장식을 둘러싸고 겹으로 건축물을 축조해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봄 성당에서 바라보자면 바로 건너편에 나니 다만(Nani Daman) 요새가 자리 잡고 있다. 강 하구의 양 어귀에 성을 배치해 협공하는 형식이다. 나니 다만의 성문은 매우 독특하다. 아치형 문루 위에 가톨릭 성상이 좌정하는데 문 좌우에 벽사신장(壁邪神將) 같은 장군 두 명을 독특하게 배치했다.

1535년 알폰스 드 알부르크(Alfonso de albuerque)가 28척의 선단을 이끌고 인도에 처음 무혈입성했다. 427년 뒤인 1961년 같은 이름의 포르투갈 함선이 인도함선과 조우했다. 인도 공군기까지 동원된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패퇴했고, 마침내 디우는 인도령으로 되돌아갔다. 제국이 무너지는 세기적 사건이 켐베이 만 길목의 디우 섬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훨씬 뒤인 1999년, 마카오 중국반환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공식적으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 주강현 -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 <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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