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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물건(3)] 중화요리 대가 이연복의 ‘운수대통 국자’ 

“힘든 시절 함께 이겨낸 동반자죠” 

글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김상근 객원기자
울퉁불퉁 상처투성이지만 묵묵히 일하는 그의 삶과 닮은꼴 “사고뭉치로 오해받던 시절의 경험 덕분에 더 이 악물었어요!”

많을 땐 하루에 수백 통의 예약 주문전화가 밀린다는 곳. 서울 연희동의 중식당 ‘목란 (木蘭)’이다. 목란을 이끄는 사부(師父·중식 주방 총책임자) 이연복 씨는 JTBC <냉장고를 부탁해>로 더 유명해졌고, 그의 요리는 홈쇼핑과 백화점에서 섭외 대상 1순위로 꼽힌다. ‘스타 셰프’라는 수식이 붙은 게 5년 남짓 됐지만 그가 불 앞에서 땀 흘린 세월은 50년. 그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 궁금했다. 지난 9월 초 그와 만난 날, 주저 없이 꺼내 보인 것은 시간의 때가 켜켜이 쌓인 못생긴 국자였다. 그는 애정 어린 목소리로 그것을 “이 아이”라고 불렀다.


▎중화요리계의 대가로 꼽히는 이연복 씨. 주방에 있는 그의 손에서 국자가 떨어질 틈이 없다. 그에게서 국자 선물을 받는다면? 그가 “너는 나의 애제자”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얘랑 같이해온 게 1992년부터예요. 그 전에는 주방에 있는 거 대충 쓰다가 일본에서 내 가게를 열면서 내 손에 맞는 국자를 만났죠. 그 뒤로 함께 고생하며 정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전에는 참 힘든 시절을 보냈는데, 이 아이를 만나면서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됐죠.” 그에겐 고생 끝에 행운을 안겨준 복덩이인 셈이다.

국자를 찬찬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내구성이 강한 스테인리스스틸 재질로 만들어졌는데도 여기저기 울퉁불퉁하고, 오른쪽은 유독 까무잡잡한 데다 움푹 파여 있다. 왼손잡이인 그가 25년의 세월 동안 손에 쥐고 사용하면서 생긴 영광의 상처일 터다. 처음에는 반듯하게 생겼을 몸통이 웍에 수없이 맞아 파이고 불에 그을린 자국들이다. 이씨도 보기 딱했던지 이젠 그 국자를 매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은퇴를 준비 중”이다. 주방에 출동하지 않을 때면 상자에 담겨 목란 3층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 가장 안쪽에 소중히 보관된다. “수명이 다 됐다면 버릴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아이와 영원히 같이 가고 싶어요. 나중에 정말로 못 쓰게 되면 따로 액자에 담아 보관해둘 생각입니다.”

중식 셰프들에게 국자는 각별한 조리 도구일 수밖에 없다. 불에 달군 웍(둥글고 속이 깊은 중식 팬)에다 식재료를 넣은 뒤 섞고 볶고 익혀 갖가지 산해진미를 만들어내는 데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이씨에게도 국자는 그 이상의 존재다. 주방에 있을 때 한시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중식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10대 시절에는 이 국자로 얻어맞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씨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허허’ 웃는다. “사부님들이 ‘이놈아 그것도 못 하느냐’며 핀잔을 주실 때는 어김없이 국자가 머리로 날아왔죠. 한 대 맞으면 띵하죠, 별도 보이고요.”

지금이야 웃으며 하는 얘기지만 젊은 시절은 아픔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대만계인 그가 다닌 화교학교는 당시엔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해 등록금이 꽤 비쌌다고 한다. 그의 집안 형편으론 부모님이 3남2녀 형제들의 등록금을 한꺼번에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등록금을 못 낸 학생들을 호명해 창피를 줬던 선생님에게 야속한 마음을 품었다. 결국 13세의 소년 이연복은 학교를 그만두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기로 마음먹게 된다. 하지만 화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중식당에서 배달 일을 하면서 사회와 부딪히게 된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컸던 만큼 성공에 대한 열망도 컸다. 묵묵히 일을 배운 덕분에 그는 당시 중식당의 최고봉으로 통했던 사보이호텔의 호화대반점 주방에 ‘입성’하는 꿈을 이루게 된다.

대사관 주방장으로 중화요리 최고 요리사 등극

지금은 마음 좋아 보이는 미소가 트레이드마크가 됐지만 젊은 시절의 이씨는 꽤나 날카로운 성격이었다고 한다. “제 키가 1m68㎝인데 몸무게가 48㎏밖에 안 나갔을 정도로 성격이 예민하고 날카로웠어요. 그 시절에는 사고도 많이 쳤죠.” 사보이호텔에서 근무하던 때는 유난히 패싸움이 많았다. “싸움판을 벌인 이들은 따로 있었는데 그런 친구들은 꼭 중간에 싹 빠져나가더라고요. 선배나 친구를 위한답시고 싸움판에 끼면 결국 제 평판만 안 좋아지는 거예요. 저만 꼴통으로 오해받고, 그 사람들은 잘나가고. 원망도 많이 했는데, 그게 결국 독보다는 약이 됐어요. ‘내가 너보다는 잘되겠다’고 이를 악물었거든요. 힘겨운 젊은 시절, 제가 클 수 있는 자양분이 됐죠.”

남들이 뒤에서 뭐라고 뒷담화를 하든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요리 기술을 연마해 갔다. 실력이 쌓여가니 자연히 길도 열렸다. 그에게 당시 대만 대사관(현 타이베이 대표부)에서 주방장으로 와달라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한·중 수교(1992년)가 이뤄지기 전인 1980년대만 해도 대만 대사관이 내놓는 중식은 중화요리의 간판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중국 대사관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매번 색다른 8가지 코스요리를 선보였다. 그 대부분이 직접 그가 고안해낸 창작 요리였다. “손님들이야 매번 바뀐다고 해도 제가 계속 같은 요리를 내놓으면 대사님은 같은 걸 계속 먹게 되잖아요. 그건 용납할 수 없었죠.” 그의 우직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은 그에게 성공의 디딤돌이 됐다. 대사관 주방장 시절 짜냈던 수많은 메뉴 중 여럿이 오늘날 목란의 대표 메뉴가 됐다. 매운 한국식 김치를 못 먹는 대사관 손님들을 위해 고안해낸 중국식 배추찜은 지금도 목란의 인기 메뉴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고민을 거듭하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면 그게 다 내 몸에 배어드는 거죠.”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대사관에서 8년을 근무하던 와중에 축농증 수술을 한 것이 의료사고로 후각을 잃게 됐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주변에서 그에게 일본 오사카(大板)행을 제안했다. 돈도 열배는 더 벌 수 있다고 했고, 새로운 곳에서 재출발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렸다. 어찌 보면 무모한 결정이었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대신 그는 철저하게 미각을 단련시켰다. 새로운 도전은 그에게 무모한 일일 수도 있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그는 일본행 짐을 쌌다.

일본에서 새로운 도전… 부드러움을 배우다


▎이연복 사부가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15분 만에 뚝딱 만들어낸 짬뽕.
“교토는 입다가 망하고(着倒れ), 오사카는 먹다가 망한다(食い倒れ)”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사카는 일본 내에서 식도락의 천국으로 통한다. 그런 도시에서 요리사로서 이씨는 어떤 세월을 보냈을까? 그에게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마음가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식당에서 으레 외치는 인사말도 생소했다. 가식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가식이든 아니든, 손님에겐 열심히 인사를 건네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부드러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생각을 바꾸기 위해선 몸부터 달라져야 하겠기에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도 하루에 2시간씩 자전거를 타는 운동을 하는데 그때 들인 습관이 계속된 겁니다.”

일본 생활이 궤도에 오르자 자신의 가게를 열고 싶었다. 마침 가게 자리가 하나 났는데, 손님이 없기로 유명한 자리였다. 여러 식당이 들어섰지만 문만 열면 폐업해 악명이 높았다. “가게 주인이 6개월 동안 월세를 안 받을 테니 가게를 직접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아내와 고민을 했는데 ‘너랑 나랑 해서도 안 되면 그 자리는 누가 해도 안 된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자’고 의기투합해 시작했어요.”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치밀한 전략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상권 분석에 들어갔다. 이 지역이 일본 현지인뿐 아니라 한국·대만·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유동 인구가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오는 손님의 입맛에 맞춘 요리를 제공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가 일본에 와서 익힌 사고의 유연성이 빛을 발했다. “한국 손님들이 오면 짜장면과 탕수육을 내놓고, 태국 손님들에겐 매콤한 맛의 요리를 내놓았어요. 제 요리에 손님의 입맛을 맞추기보다 손님들에게 요리를 맞춰 내놓았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의 식당엔 곧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문을 여는 식당마다 줄줄이 망한 자리라는 오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 오사카 시절, 우연히 주방용품점에서 구입했던 국자가 그의 ‘복덩이 국자’다.

일본에서 그렇게 번 돈으로 서울에 집도 사고 사업 자금도 마련해 현재의 목란을 열었다. 여러 곳을 거쳐 약 4년 전 연희동에 터를 잡았다. 일이 많아 그에게서 중화요리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10명 중 한 명 정도만 겨우 남는다. 그렇게 살아남은 제자들에게 그가 특별히 주는 선물이 있다. 다름 아닌 국자다.

“손에서 국자를 내려놓기 전까지는 편할 수가 없는 게 이 일이에요. 편히 이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밀려나게 되지요. 스타가 되겠다고 화려한 이력서를 써오는 사람일수록 오래가지 못하고 그만두더군요. 초심을 잃지 않고 묵묵하게, 몸으로 일해야 오래갑니다.”

그렇게 힘든 중식 업계에서 그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수차례 고사하다 주변의 권유에 못 이겨 진출한 홈쇼핑에서도 그의 중화요리는 12분 만에 완판되는 기록을 세웠고, 16회 방송 연속 매진이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그가 말하는 인기 비결은 겸손하기 그지없다. “너무 잘난 사람들, 가진 것 많고 잘생긴 사람들은 질투의 대상이 되잖아요. 저는 그냥 고생도 많이 하고 그래서 동정심으로 잘 봐주시는 거 아닐까요? 여하튼 앞으로도 손에서 국자를 놓기 전까지 계속 열심히 해나갈 겁니다.”

- 글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김상근 객원기자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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