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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재판 거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벼랑끝’ 포석 

역사투쟁으로 반전 모멘텀 잡을까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측근의 이탈, 친박계의 외면, 자유한국당 제명 등 엎친 데 겹친 격…옥중투쟁으로 돌아서도 재판 길어지면 사면 가능성은 더 멀어질 수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10월 1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공판에서 법원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비판했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0월 16일 자신에 대한 재판을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이라고 단정한 대목과 관련해 한 변호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재판정에서 “이제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란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절절한 심경을 토로했다. 나아가 “향후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다”고 말해 더 이상 재판정에서 유무죄를 다툴 의향이 없음을 내비쳤다. 재판을 거부하고 옥중 투쟁으로 돌아선 것이다.

박근혜-최순실로 이어지는 국정농단 관련 사건의 변호인으로 참여 중인 이 변호사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 전 대통령은 그냥 정글로 내던져진 신세와 같아 차라리 모멘텀을 바꿔서 해보자는 계산이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글에 던져진 신세? 이 변호사는 “진보 정부로 정권이 넘어가서 진행되는 재판에서 뭘 빼주거나 봐주거나 하는 게 전혀 없다”면서 “제도상으로는 (어떤 승산이나 배려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박 전 대통령과 변호인단이 깨달은 것”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아마도 박 전 대통령 측근들은 법원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보면서 ‘다 끝났다’고 체념했을 것이다. 재판과 제도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변호사들이 ‘이건 아니다’라고 건의하고, 박 전 대통령은 받아들였다고 봐야 한다. 답은 하나다. 재판을 보이콧하고 옥중 투쟁으로 가는 길 말이다.”

지난해 촛불 민심에 불을 지른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 PC 보도 이후 박 전 대통령을 악몽과 같은 시기를 가로질렀다. 자신의 공식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도 지난해 9월 13일 올린 ‘2016년 박근혜 대통령 추석 명절 인사’ 동영상이 마지막이다. 그 뒤로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쏟아졌다. 지난해 12월 국회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찬성 234표, 반대 56표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가결했다. 헌법재판소도 지난 3월 최종 선고에서 8대 0이라는 헌법재판관 전원 일치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최장 180일까지 가능한 탄핵 심판 법정심리 기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0일 만에 모든 절차가 종결되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을 법하다. 탄핵 직후 법조계는 법치주의의 원칙이라며 승복을 강조했다. 이어 3월 31일 구속돼 국정농단 관련 형사 재판을 받아오던 박 전 대통령은 10월 13일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며칠 뒤 재판 거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보석에 대한 기대가 깨지다


▎국민의례를 하는 홍준표 대표 등 자유한국당 지도부.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출당 조치했다. / 사진·연합뉴스
10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심리로 열린 속행 공판에서다. 박 전 대통령은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지길 바란다”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사법절차에 반기를 들었다. 사흘 전 법원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로 구속이 연장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데 대한 심경을 밝힌 것으로 풀이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이제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란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그는 “향후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다”고 언급, 더 이상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툴 의향이 없음을 내비쳤다. 나아가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와 책임은 제가 지고 가겠다”면서 “모든 책임은 저에게 묻고 저로 인해 법정에 선 공직자와 기업인에게는 관용이 있길 바란다”고 말을 마쳤다.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 7인도 박 전 대통령의 발언 후 재판부에 사임계를 제출했다. 박 전 대통령이 유일하게 소통한다던 유영하 변호사는 “재판부의 추가 영장 발부는 사법부의 치욕적인 흑역사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무죄 추정과 불구속 재판이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이 힘없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변호인들은 피고인을 위한 어떤 변론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모두 사임하기로 했다.” 형사 피고인과 변호인이 일제히 법정을 보이콧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유 변호사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피를 토하는 심정을 억누르면서 살기가 가득 찬 법정에 피고인을 홀로 두고 떠난다”고 결기를 보였다. 이에 앞서 법원은 10월 13일 검찰이 청구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추가 구속영장(SK와 롯데로부터의 뇌물수수 혐의)을 발부했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이 언론 인터뷰 등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변호인 사임과 재판 거부의 배경을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사임계를 제출했지만 한때 박 전 대통령의 7인 변호인단에 속했던 도태우 변호사는 10월 17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87년 헌법정신은 적법 절차라고 생각된다”고 전제 “이번 사태의 핵심은 충분히 존중돼야 할 적법절차 부분이 너무 무시되고 좌절됐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번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보면서 그런 심증을 더 굳혔다는 의미다. 도 변호사는 특히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사법부의 독립을 소중히 지켜줄 것으로 믿고 진행해온 (박 전 대통령 재판) 과정”이라며 “금번 추가영장 발부는 그 믿음이 굉장히 흔들리게 만든 사건”이라고 정권에 책임을 돌렸다. 특히 박 전 대통령 추가 구속영장 발부 전날인 10월 12일 청와대가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상황보고 일지를 사후 조작한 정황이 담긴 파일을 발견했다고 밝힌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음을 시사했다. 도 변호사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캐비닛 문건이라며 특별 브리핑을 했는데 이런 부분이 전혀 영장(추가 발부)을 생각지 않고 이뤄진 것일지 의심이 된다”고 쏘아붙였다.

정부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박 전 대통령 보석에 대한 기대도 깨진 것으로 보인다. 도 변호사는 “법과 제도를 잘 활용했다면 접근금지와 같은 제한 조건을 달고 조건부 재량 보석이 가능했을…”이라며 “그런 보석이 이뤄지지 않았다”고도 아쉬워했다. 이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박 전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나 변호인의 사임계 제출은 예정된 수순이라는 게 변호인단의 시각으로 읽힌다. 도 변호사는 “(변호인단) 사의 표명이라든지 박 전 대통령 말씀은 전혀 즉흥적인 부분이 아니다”라고 확인했다.

채명성 변호사의 <뉴시스> 인터뷰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3월 말 구속된 이래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변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면회하지 않았다. 가족과 정치인들의 면회 신청이 있었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가 수의를 입은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박 전 대통령, 마음 돌이키는 일 없을 것”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들.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1비서관(왼쪽부터). / 사진·연합뉴스
채 변호사의 말을 따라가면 재판 결과 대한 깊은 좌절과 회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의 꼭두각시였다는 프레임이었다. 그래서 국정 농단이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라며 재판과정에서의 힘든 점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최순실이 받은 돈은 곧 대통령이 받은 거라고 연결 짓는다. 처음 언론이 이런 프레임을 만들었고 검찰과 헌법재판소가 따라가고 지금은 법원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한 푼도 받지 않은 대통령을 이렇게까지 엮을 수 있는가?”

“변호인들의 숱한 이의제기에도 주4회 재판을 강행했는데 구속기간 연장 결정마저 나는 걸 보고 이번 재판은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별건으로 구속 영장을 발부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건 형사소송법 교과서에도 나오는 상식이다. 구속 연장 결정 전날 청와대에서 세월호 문건을 발표하고 구속 연장 결정을 금요일 오후에 발표한 것도 의도적인 것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에 연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박근혜 정부에서 초대 주중대사를 역임한 권영세 전 의원도 “1심 재판에 임해본 결과 이미 정해놓은 길로 가는 게 보이니까 더 이상의 재판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권 전 의원은 2012년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 위원장 시절 사무총장으로 가까이서 호흡을 맞춘 적 있다. 그는“박 전 대통령이 정치 재판을 예단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일단 결심한 이상 절대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 발언은 정치권에 격랑을 불러왔다.

자유한국당은 강효상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여권과 법원을 싸잡아 질타했다. 강 대변인은 “무죄 추정과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정면 위배한 이번 결정은 법원이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한 것에 다름아니다”면서 “여기엔 인권도, 법도, 정의도 없었으며 사법부에는 조종이 울렸다”고 반발했다. 법원의 결정으로 박 전 대통령 구속 기간은 최장 6개월 더 연장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강 대변인은 “정부·여당이 박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전 정권에 대해 전방위적인 정치보복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를 내년 지방선거까지 정략적 목적으로 활용하려고 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맞서 민주당 박완주 수석대변인은 현안 브리핑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발언에는 변명과 선동만 있고, 지지자들의 결집만을 유도하는 데 급급한 모습만 보였다”면서 “국민의 마음에 실망과 분노만 안겨주고 말았다”고 역공을 가했다. 국민의당 김철근 대변인도 논평에서 “1700만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고,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탄핵된 국정농단의 최정점에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 운운은 적반하장”라고 가세했다.

최근에는 형사 사건과 별개로 국정원 특수활동비 유용 건이 박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을 옥죄어 오는 형국이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재만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이 2013년부터 3년여 동안 40억원가량의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뇌물로 받은 혐의가 있다며 두 사람을 체포했다. 두 사람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국고손실 혐의 등으로 구속됐고, 검찰은 이들에 대한 영장을 청구할 당시 박 전 대통령을 공범으로 적시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의 청와대 전달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은 박근혜 정부 전직 국정원장 3인(남재준, 이병기, 이병호)도 청와대의 요구에 매달 일정액(5000만원~1억원)의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보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인할 수 없는 구조에서도 대통령 입에 올리면 안 돼”


▎지난해 10월 25일 JTBC 태블릿 PC 보도 이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최순실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대국민사과를 했다.
지금은 피의자 내지 관계자들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단계여서 실체적 진실을 예단할 수 없는 시점이다. 하지만 일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혐의점은 박 전 대통령에게 극히 불리한 쪽으로만 쌓여간다. 보수 진영은 특수활동비의 사용처가 규명돼야 진상이 드러나므로 특정인의 일방적 진술만으로 죄상을 예단해서는 안 된다고 견제구를 날린다. 어디까지나 칼자루는 검찰이 쥐고 있어 불똥이 어디로 튈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변호인단도 사임계를 내고 재판에서 물러선 지금 박 전 대통령의 세상은 적막강산 그 자체다. 주변은 철저히 무너져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 국회 등원 이래 20년 간 근접 보좌해온 이른바 ‘문고리 권력 3인방’(정호성 전 부속1비서관, 이재만·안봉근 전 비서관)도 박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문고리 권력 3인방 중의 한 사람인 이재만 전 비서관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국정원 특별활동비를 받았다고 진술했다는 보도가 대표적이다. 이와 관련해 자유한국당의 한 TK 중진 의원은 “그렇게 말한 게 사실이라면 (이 전 비서관이) 너무 일찍 불었다”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전직 국정원장 3명이 국정원 특수활동비 건 등으로 모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헌재의 탄핵 심판 과정에서부터 문고리 3인방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인 듯하다. 채명성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세상 인심이 무섭더라”며 “탄핵 심판 때 변호인들이 문고리 3인방에게 증언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끝내 나타나지 않더라. 정치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후 국정원 특수활동비 논란이 불거졌다. 이들 3인방 일부 인사의 국정원 특수활동비 관련 진술이 박 전 대통령을 더 어렵게 하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이에 대해 채 변호사는 “지금 자세한 언급은 하기 어렵지만 문고리 3인방에 대해서는 저뿐만 아니라 탄핵 (심판) 당시에도 여러 가지 기사가 나왔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검사 출신의 권영세 전 의원도 문고리 3인방의 행보에 유감을 표했다. 권 전 의원은 “권력의 무상함, 냉엄함을 절감한다”고 혀를 찼다. 그는 “설령 검찰이 국정원 특수활동비와 관련해 명확한 증거를 들이댄다고 해도 자기 입으로 (대통령 지시라고) 시인하는 것은 인간적 차원에서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다”고 했다. 권 전 의원에게 문고리 3인방은 박 전 대통령 곁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권세와 혜택을 누린 당사자들로 각인된다. 그래서인지 권 전 의원은 “전직 국정원장이든 3인방이든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구조에서도 증거대로 처리하라고 버티는 게 옳지 스스로 박 전 대통령의 관련성을 언급하는 건 적절치 않은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3인방 변절 운운은 호사가의 억지 논리”


▎자유한국당 내 친박계 의원들은 9월 28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불구속 수사를 법원에 촉구했다.
하지만 문고리 3인방을 오래 겪어본 이들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기도 한다. 2007년, 2012년 두 번에 걸친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친박계 원외 인사는 “문고리 3인방의 입장이 바뀌었다느니, 박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느니 하는 얘기는 호사가들의 입방아거나 억지 논리일 수도 있다”고 발끈했다. 박 전 대통령과 3인방의 관계 설정 방식을 잘 아는 이들일수록 그런 추측에 공감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인사는 이렇게 유추했다. “이재만, 안봉근 전 비서관이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이나 형사 재판 증언에 나서지 않은 것을 탓하는데 그들이 재판정에 나가본들 박 전 대통령의 혐의만 더해지지 않았을까. 박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법정 출두를 피해 잠적했을 가능성도 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 조달의 책임을 박 전 대통령에게 돌렸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이 인사는 “특수활동비와 박 전 대통령은 무관하다고 엄호해본들 박 전 대통령의 형량에는 이렇다 할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현실론을 폈다. 이를테면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국정농단 관련 형사재판에서 드러난 혐의나 여타 관계자들이 받은 형량, 여권의 동향에 견줘봤을 때 중형을 피하기는 어렵다는 논리다. 박 전 대통령이나 변호인단이 재판 거부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도 이런 정황의 산물이라는 것. 결국 남은 것은 정치적 사면 정도가 전부인 셈이다. 이 인사는 “문고리 3인방의 특수활동비 진술이 박 전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입혔으면 배신이라고 하겠지만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일부 시인을 갖고 등 돌렸다고 하는 건 과한 질책”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정상참작론에도 불구하고 야권 일각에서는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심각한 사안으로 간주하는 시각도 고개를 든다. 그 사용처의 폭발성 때문이다. 혹시나 사적 용도로 전용한 게 드러난다면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의 심리적 지지의 마지노선을 허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공기업 임원진으로 있는 한 야권 인사는 우려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에 흘러나오는 내용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부 특수활동비가 미용이라든가 개인 치부에 들어갔다면 박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자유한국당 등 보수 진영에도 엄청난 국민적 반감을 안기게 될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특수활동비 논란의 후유증이 보수 진영에 엄습할까 경계심을 곧추 세운다. 자유한국당 정치보복대책특위 장제원 대변인은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쓰였다면 철저히 규명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서도 “문재인 정부는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의 진술만을 토대로 국정원 활동비를 뇌물죄로 몰아가는 정치보복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정치적 동기를 의심했다. 장 부대변인은 “역대 정부에서 치외법권 지대로 통했던 국정원 특수활동비에 대해 현 여권이 입맛에 맞는 부분만 뽑아 단죄하고 여론몰이 하는 것이 바로 정치보복”이라고 진보 정부의 특수활동비도 함께 들여다보자고 맞섰다.

출당 조치에서 알 수 있듯이 박 전 대통령은 보수 진영에서도 거추장스러워하는 인물로 치부되고 있다. 심지어 보수의 적자를 자임하는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이 자유한국당과 갈라서야 재판이 유리하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판국이다. 홍 대표는 11월 10일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이 우리 당하고 묶여있으면 더 어려움에 처해진다”면서 “자연인 박근혜에 대한 재판을 하게 되면 재판장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라고 출당의 배경에 사법적 고려도 가미됐음을 강조했다.

옥중 투쟁과 사면이 양립 못하는 이유

상황이 이러함에도 박 전 대표에게 정치적 빚을 진 친박계는 ‘꿀 먹은 벙어리’ 신세나 다를 바 없다. 지난해 20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자유한국당 의원 상당수는 친박계로 분류된다. 이들 중 박 전 대통령의 재판에 법리적 문제가 있다며 동조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다. 하지만 ‘정치보복’이라는 주장과는 대부분 한 발 떨어져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적폐 세력으로 찍혀 출당된 박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 때문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서성교 바른정치연구원장은 “자유한국당 친박계조차 궁극적으로 박 전 대통령이라는 변수가 증발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고 논평했다.

대구·경북 등 보수 진영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을 꼬인 매듭을 푸는 하나의 해법으로 간주한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나 바른정당 유승민 대표 모두 이에 대한 생각은 공유한다. 지난 5월 대선에 나선 홍 대표는 자신이 당선되면 박 전 대통령 사면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유 대표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후 국민통합 차원에서 정치적 결심을 해야 한다”며 운을 띄웠다. 이는 어디까지나 재판의 조속한 종결을 전제로 한 구상이다.

박 전 대통령이 옥중 투쟁에 나서면서 일이 꼬인다는 견해가 대두된다. 더불어민주당 중진인 설훈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법정 투쟁을 포기하고 정치투쟁으로 전환한 배경과 관련 “자신은 잘못이 없고 무죄라는 생각에 추호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설 의원의 해석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눈으로 보는 현실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와 다를 게 없다. “박 전 대통령은 기본 생각이 틀렸음에도 그걸 바꾸기가 어려운 분이다. 따라서 징치(懲治)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 언급하는 사면도 오리무중으로 간다는 게 설 의원의 판단이다. 특별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형이 확정된 경우에 한해 가능한 제도다. “사면은 형이 확정되고 국민 여론을 봐서 하는 것인데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이 무죄를 주장하면 1심 재판이 끝나도 검찰이 항소할 것이다. 어쩌면 박 전 대통령 쪽도 할지 모른다. 이렇게 되면 2, 3심으로 가야 하는데 결국 대법원으로 가는 거다. 재판을 조기에 종료하는 게 사면과 가까워지는 길이지만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옥중 투쟁과 사면은 양립하기 힘든 사안이라는 말이다. 채명성 변호사는 “이 모든 결정은 박 전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했다.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 박 전 대통령의 고독한 싸움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터널 속으로 가고 있다.

-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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