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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취재] 커리어 외교관 푸대접에 외교부 ‘부글부글’ 

청와대가 강경화 패싱? “우리가 적폐 대상인가?”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외교부 장관 재임 150일 되도록 재외 공관장 인사 ‘0’… “순혈주의 없앤다더니 논공행상 하느라 시간 끄나” 비난 받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의 공기는 무겁다. 청와대의 커리어(직업) 외교관 홀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탓이다. 한 실무급 직원은 “차라리 전(前) 정부 때가 일하기에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왜 그럴까? 대놓고 말은 못하고 부글부글 끓는 외교부 공무원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6월 18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서 신임장을 받고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진통을 겪은 강 장관에게 문 대통령은 “반대했던 분들에게 실력으로 보여주시라”고 격려했다.
주한(駐韓) 4강 대사 중 한 명은 지난 추석 연휴 직후에 대사관 직원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한국) 외교부하고만 소통해서는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 정책을 직접 움직이는 인사들을 파악하고 접촉해 보고하라.”

주한 외교가의 복수 소식통이 월간중앙에 밝힌 내용이다. 이들은 “외교부는 실무 진행 선의 일만 하고 실제 현안에 대해선 ‘모른다’는 말을 자주 한다” “외교부의 현안 장악력이 떨어지고 청와대의 눈치를 본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입을 모았다. 현 정부의 외교 정책을 주도하는 게 외교부가 아니라는 평가다.

특정 국가의 외교관 입에서만 나온 비평일까? 종합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국가 외에 다른 주한 4강 대사관의 핵심 인사도 “이럴 바엔 청와대와 직거래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외교의 문제는 ‘코리아 패싱(미국이 한국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교부 패싱’이라는 말이 나올 법한 상황이다.

지난 11월 7~8일 한·미 정상회담 전후 이런 ‘외교부 패싱’ 장면이 생중계됐다. 청와대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환영 만찬상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독도 새우’라는 단어를 쓰면서다. 반상에 놓인 잡채의 재료였던 새우에 청와대가 의미를 부여해 부각시킨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를 만찬에 초대해 트럼프 대통령과 깜짝 포옹하는 장면을 연출하도록 주도한 것도 청와대 측이라고 알려졌다. 외교부와 사전 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과 미리 협의하고 대일 외교 부담을 지는 것도 외교부임에도 결정 과정에서 외교부는 배제된 셈이다. 국내적으로 휘발성이 강한 독도·위안부 이슈를 청와대가 외교 무대를 계기로 유리하게 활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외교부도 이 결정 과정에서 배제됐음을 시인했다. 임성남 외교부 1차관은 정상회담 직후인 11월 1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 “일본의 항의를 사전에 예상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런 메뉴가 화제가 될지는 아무도 예상 못했다”고 답변했다. 거듭 “외교적 고려 없이 준비한 것인가”란 질문에도 “네”라고 답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처음 외교부가 받아 정상회담 전 미국 측에 통보한 메뉴에는 ‘Japchae(잡채)’라고만 적혀 있었다. ‘독도 새우’라는 말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교수 출신으로 외교통상부 2차관으로 발탁됐던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은 “궂은 일은 외교부가 하고 청와대는 빛만 보려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이렇게 청와대가 혼자 앞서나가면 나중에 외교적 문제가 불거질 때 책임도 혼자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잡음은 계속 나왔다. 만찬 바로 다음날인 8일엔 미국이 주창해 한·미 정상회담 공동 언론발표문에 들어간 ‘인도·태평양(Indo-Pacific) 지역’이란 개념에 청와대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엇박자를 낸 것이다. 먼저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는 기존 ‘아시아·태평양 지역’ 용어 대신에 일본이 주창했고, 트럼프 행정부도 중국 견제를 위한 자국 이익에 부합하는 터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골자는 미국이 일본·인도·호주 등과 협력을 강화해 중국의 군사적 부상을 견제하자는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갈등을 봉합하는 게 대중국 외교에서 중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미 정상회담 공동언론발표문 1항엔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미 동맹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 안정과 번영의 핵심축임을 강조했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공동발표문은 한·미 양측이 글자 하나, 쉼표 유무까지 미세하게 조정한 결과여야 한다. 그러나 이 문구 뒤엔 한국 측이 우려를 표했다거나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다는 식의 설명이 없다. 발표문만 놓고 보면 한국이 트럼프 행정부의 이 개념을 지지했다는 함의가 행간에 담긴 셈이다.

그러나 이 공개발표문이 나온 뒤, 청와대가 공개적으로 이를 뒤집었다. 공개적으로 브레이크를 건 이는 청와대의 김현철 경제보좌관이었다. 김 보좌관은 문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순방 중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거기(인도·태평양 지역 구도)에 편입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이나 외교부 소속이 아닌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외교 현안에 목소리를 낸 것이다.

엇박자는 이어졌다. 마침 같은 날 오후 잡혀 있던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다. 노규덕 대변인은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미국이 새로 제시한 인( 도·태평양) 전략은 우리 정책 방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며 “한·미가 긴밀히 협의하면서 필요하고 가능한 협력 방안 등을 모색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발표문 문안 교섭의 실무를 맡았던 외교부가 다른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정례 브리핑이 끝나고 약 2시간 뒤, 외교부 당국자는 기자들에게 익명을 전제로 브리핑을 실시했다. “(인도· 태평양 부분에서는) 좀 더 협의가 필요하다고 판단돼 공동 발표문에 미국 측 설명만 명시하기로 합의했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청와대도 같은 입장을 담은 자료를 냈다. 결과적으로 외교부가 청와대 경제보좌관에 밀려난 모양새가 됐다. 외교부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외교문서 행간의 의미는 복잡하다”며 “적어도 발언 전에 외교부와 상의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었다.

“현직 커리어 외교관, 험지 발령 따 놓은 당상?”


▎11월 8일 한·미 정상회담 후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에 오른 ‘독도 새우’
현안 갈등도 문제지만, 외교부의 사기를 꺾는 가장 큰 문제는 인사(人事)다. 외교부 인사의 꽃으로 불리는 4강 대사 인선은 문재인 정부의 커리어 외교관 불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4강 대사 인선에 커리어 외교관이 낄 자리는 없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5개월이 지난 뒤에야 겨우 인선을 마쳤을 정도로 고심했던 4강 대사 진용은 주미 대사 조윤제(서강대 교수), 주중 대사 노영민(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러 대사 우윤근(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일 대사 이수훈(경남대 교수)으로 짜였다. 조윤제·이수훈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이고, 노영민·우윤근 전 의원도 여당 의원으로 문 대통령의 당선을 지원했다.

일부 커리어 외교관의 이름이 그나마 주미·주러 대사 후보로 거론됐지만 하마평에 그쳤다. 이름이 거론됐던 외교부 한 핵심 관계자는 대사 인사 발표가 나기도 전에 기자와의 통화에서 “난 아니다. 현재 (문재인 정부) 분위기에선 커리어 출신인 내가 될 리 없으니 두고 봐라”고 했다. 그의 말은 들어맞았다.

임명된 뒤 조윤제 주미 대사가 밝힌 소감에선 문재인 정부가 커리어 외교관들에게 갖는 불신의 일단이 드러난다. 조 대사는 “한·미 정상 간 정직한 메신저가 되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의 ‘정직한’ 소통을 위해서는 커리어 외교관이 아닌 인물이 적합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외교부 주류 관료 사회에 대한 불신이 엿보인다.


▎만찬에 초대된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할머니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깜짝 포옹을 하는 장면. 이용수 할머니의 등장과 독도 새우의 홍보는 외교부가 아닌 청와대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 측 외교부 불신의 뿌리는 깊다. 시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핵심은 소위 자주파와 동맹파 간 갈등이었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한·미 관계 재정립과 자주적인 대미 외교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지면서 갈등이 점화됐다. 당시 외교부 이종헌 조약과장의 별명은 ‘노사모 외교관’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그를 공개 지지했고, 노 대통령 측근들과 가까워지게 된다. 이 과장이 리더격이었던 외교부 내 자주파 그룹의 타깃은 북미국이었다. 일명 ‘워싱턴 스쿨’로 불리는 외교부 핵심 엘리트층이 포진한 북미국은 한·미 동맹을 외교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해 외부에선 ‘동맹파’로 불렸다. 참여정부 출범 전까지는 굳건한 외교부 내 주류 세력이었다. 그러나 소위 ‘자주파’는 “북미국은 숭미(崇美)국”이라며 공격을 개시했고, ‘외교부 탈레반(반미 무슬림 극단주의 무장세력)’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참여정부 출범 1주년을 한 달 남짓 앞둔 2004년 1월, 위성락 당시 북미국장과 조현동 당시 북미3과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조사를 받는다. 당시 민정수석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민정수석실의 조사 결과, 북미국 모임에서 조 과장 등이 주축이 돼 자주파를 성토하는 발언이 나왔는데 “윤 장관이 청와대 이너서클에 밀려 힘이 없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젊은 보좌진에 노 대통령이 휘둘린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북 미국 소속이지만 자주파였던 김모 외무관이 이 같은 내용을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한다. 청와대는 이 모임에서의 내용을 대통령 폄하 발언으로 규정해 위 국장은 대기 발령, 조 과장은 보직 해임 조치를 했다. 그리고 약 1주일이 지난 1월 15일,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은 재임 1년도 안 돼 전격 경질됐다. 당시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윤 장관의 경질 배경을 놓고 “외교부 일부 직원이 과거의 의존적 대외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참여정부가 제시하는 새로운 자주적 외교 정책의 기본정신과 방향을 충분히 따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자주파의 완전한 승리였다. 그러나 이후 자주파는 NSC 기밀 문서를 여당의 최재천 의원에게 유출하며 갈등의 진앙지로 남았다.

문재인 정부에도 참여정부 시절 ‘자주파 vs 동맹파’ 갈등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워져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적어도 문재인 정부에 정통 루트를 밟아 성장해온 외교관들에 대한 부정적 정서가 깔려 있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외무고시 출신이 아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임명되고, 북미국이 아닌 통상교섭 분야에서 주로 근무했던 정의용 전 의원이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인선된 것도 그런 결과였다. 한편 ‘자주파의 맹주’격이었던 이종헌 전 과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석 달 후인 지난 8월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TCS)의 수장인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이런 상황에서 4강 대사의 임명은 정통 외교관에 대한 청와대의 불신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청와대가 ‘커리어(직업 외교관)’는 무조건 배제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임명된 대사들의 일부 발언도 논란을 불렀다. 조윤제 주미 대사는 10월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저도 제가 왜 낙점이 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됐으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해 외교관들의 어깨를 더욱 처지게 만들었다. 외교가 소식통은 “거시경제 전문가인 조윤제 대사는 사실 한국은행 총재를 희망했으나 청와대에서 주미 대사로 밀어붙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나마 조 대사는 영어 구사에 문제가 없으나 이수훈 주일 대사는 일본어 소통이 어렵다는 점이 큰 문제로 지적됐다. 10월 25일 기자간담회에서 이 대사는 관련 질문을 받고 잠시 침묵한 뒤 “외교를 하는 데 있어서는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반드시 통역을 쓴다. 큰 문제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영어로 밥 먹고 학교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을 대표해 일본으로 부임하는 대사로서 적절하지 못한 언행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노영민 주중 대사는 “롯데(마트)가 중국에서 철수한 이유는 중국 사드 보복 때문이 아니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순 없다”는 발언(9월 29일 기자간담회)으로 구설에 올랐다.

“대사는 영어나 현지어 중 하나는 할 줄 알아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7월29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도발과 관련해 긴급 간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강 장관이 6월18일 임명장을 받은 뒤 한 달 여가 지난 시점이지만 강 장관 좌우의 임성남 1차관, 조현 2차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간부들이 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 임명된 인사들이다.
외교부의 속앓이를 대신해 발언한 인사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다. 참여정부 시절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그는 한국안보문제연구소 비공개 강연에서 “초대 4강 대사로 외교 경험이 없는 인사를 임명했는데, 대사는 영어나 현지어 가운데 반드시 하나는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미국처럼 국력이 뒷받침되는 강대국은 부동산 업자가 대사로 나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될 게 없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현 정부 인사들이 비판을 쏟아냈다. 그중 문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뉴시스와 통화에서 “적절치 않은 비판”이라며 “(반 전 총장) 말대로라면 결국 외교부 출신으로 임명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4강 대사 인선에서 외교부 출신은 배제해야 한다는 현 정부의 인식이 선명하게 드러난 발언이었다.

4강 대사 인선은 시작에 불과하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6월 19일 취임식에서 ‘외교부 혁신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지시했다. 강 장관은 취임사에서 “인사가 만사임은 모든 조직의 기본이고, 내가 국제기구에서 고위관리자로서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며 “보다 다양한 배경과 역량을 가진 인적 자원의 확보를 통해 조직 역량을 확충하고 인사 혁신도 추진할 것”이라 말했다. 외교부의 순혈주의를 타파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기조와도 궤를 같이한다. 장관 직속 TF는 석 달 후인 9월 29일 ‘혁신 로드맵’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특임 공관장’ 보임 비율을 30%까지 늘리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것이 골자다. TF측 인사는 “특정 라인의 인사 부서 간부 독점 관행을 타파하는 동시에 비(非) 외시 출신 인재들을 적극 발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혁신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강 장관은 월간중앙 12월호 발행일인 11월 15일자로 재임 150일을 맞지만, 14일 현재 첫 번째 공관장 인사를 발표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이는 외교부 내의 인사 적체로 이어졌다. 외교부 특성상 재외 공관장 인사는 실·국장급 고위직 인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그러나 ‘외부 인사 30%’ 원칙으로 인한 검증 등에 시간이 걸리면서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인사들이 ‘영혼 없는 근무’를 계속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필 북한이 제6차 핵실험(9월 3일)과 미 본토를 사정권으로 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관련 도발을 계속하며 ‘한반도 전쟁설’까지 나돌아 일촉즉발인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 교체 이전의 인사들이 요직에 앉아 있으면서 미묘한 분위기도 연출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임명된 한 대북 관련업무 커리어 외교관은 “우선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100% 업무에만 매진할 수 없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고 호소했다. 최근 퇴임한 외교부 고위직 출신 인사는 “정권 교체 후 인사가 이렇게 늦어지면 전 정부 시절부터 계속 있는 사람은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고 허수아비 취급을 받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재외 공관에 나갈 차례를 기다리던 외교관들은 속이 타지만 드러내놓고 얘기할 수도 없는 처지다. 한 고위 외교관은 “우리 ‘커리어’들 사이에선 ‘험지 발령은 우리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아프리카 대륙 중에서도 그나마 주거 환경이 나은 사하라 사막 이북인지 아닌지를 놓고 저울질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다른 외교관은 “커리어 외교관들이 무슨 적폐라도 되는 것처럼 매도되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결과는 곧 나온다. 11월 10일 외교부 국장급 인사가 단행됨에 따라 공관장 인사도 곧 발표될 예정이다. 관례로 볼 때 국장급 인사를 발표했다는 것은 공관장 인선 작업도 마무리됐다는 뜻이다. 지난봄에 출범한 정부가 겨울에 이르러서야 공관장 인사를 하는 셈이다. 공관장 인선 과정에 밝은 외교가 한 소식통은 “청와대와 외교부는 외부 인사를 20여명 영입하고 싶어 했으나 영어나 현지어 구사력 등의 검증에서 통과하지 못한 인사들이 꽤 있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이번 공관장 인사에서 박근혜 정부 당시 고위직에 있었던 몇몇 인사는 격이 매우 낮은 공관으로 가는 경우도 있을 거란 소문이 돈다. 외교부 입장에선 분위기가 어두울 수밖에 없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은 “이번 정부는 유독 커리어 외교관에 대한 편견이 심한 것 같다”며 “나도 일부 편견을 갖고 외교부에 들어갔지만 일선에서 함께 일을 해보니 사실과 많이 달랐다. 커리어 외교관을 적폐 세력으로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스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외교부 공무원들이 장관 안 보고 청와대만 본다”


▎강경화 장관이 지난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현장에서 환담하고 있다. 강 장관의 주요 강점으로는 영어 소통 능력과 친화력이 꼽힌다. / 사진ㆍ청와대 페이스북
이런 상황에서 강 장관을 두고 부처 장악력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들려온다. 주한 외교가 한 관계자는 “강 장관이 인사안을 올릴 때마다 청와대에서 컷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결국 중요한 결정은 청와대에서 다 나온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외교부 담당 한 청와대 관계자는 “강 장관이 영어 실력이나 친화력은 좋지만 청와대 눈치를 심하게 보는 것 같다”며 “여기에다 외부 이미지만 신경 쓰는 연예인 같다고 싫어하는 목소리도 일부에선 나온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지난 10월 12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정양석 바른정당 의원이 강 장관을 향해 돌직구를 날리면서다. 정 의원은 “장관께서 외교부 1급 이상 인사를 청와대에 올렸는데 다섯 차례나 미뤄져 두 달째 임명이 안 됐다고 한다. 역대 정권 중 재외 공관장 인사도 제일 늦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의원은 또 “외교부 혁신 로드맵을 보면 ‘공관장 외부 인사 30%’ 내용이 강조됐는데, 이는 문 정권 임기 동안 생길 100여명의 특임 공관장에 대해 장관은 손대지 말라는 청와대 의지”라고 주장하면서 “외교부 공무원들이 장관을 안 보고 청와대만 본다고 한다. 이래서 외교부가 장관을 따르고 결속이 되겠느냐? 청와대가 결정을 안 들어주면 ‘관두겠다’고 하라. 결기를 안 보이면 관철이 안 되고 장관 패싱만 된다”고 말했다.

강 장관은 반발했다. “특임 공관장 비율은 (매년 30%)가 아니라 임기 내 목표가 30%이므로 총 49개 자리가 해당된다”며 “단순 숫자 문제라기보다는 자격 검증을 통해 영입하고 임기 중 무능에 대해선 즉각 소환하는 절차를 마련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안팎으로 이렇게 뒤숭숭한 상황에서 곧 발표될 강 장관의 첫 공관장 인사 발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관전포인트는 공관장 인사에서 친문 또는 친노 성향 인사들이 어느 정도 수로, 어떤 정도급의 공관에 배치되는냐다. 핵심 인사 중 한 명인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도 여기에 포함된다.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실세로 꼽혔던 박 전 비서관은 원래 미국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가 유력하다는 설이 돌았으나 청와대에서 최근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박 전 비서관 본인도 태평양 건너 미국보다는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중량감도 더한 상하이를 강력히 원했다는 후문이다. 상하이 총영사관은 중국의 경제 거점을 총괄하면서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기업만 6000여개에 달하는 거대 공관이다. 박 전 비서관 입장에선 당연히 상하이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다.

청와대에서 박 전 비서관의 희망 사항을 외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비서관이 참여정부 핵심 실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난 대선 막바지에서 문 대통령의 구원 투수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저서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참여정부가 2007년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대해 한국의 기권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이 “북한에 입장을 물어보자”고 했다는 색깔론이 불거졌을 때다. 당시 박 전 비서관이 한 메모에 ‘VIP(노 전 대통령)께서 기권으로 정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 메모는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색깔론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

이런 맥락을 두고 외교부에선 “역시 외부 공관장은 문재인 정부의 논공행상을 위한 장치 아닌가”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한 소식통은 “참신한 외부 인사를 영입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참여정부나 문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 연이 있는 사람들 위주로 검증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며 “검증도 통과하지 못할 분들도 현 정부와의 인연을 믿고 지원했다는 얘기도 들린다”고 전했다.

이런 뒤숭숭한 상황은 무엇보다 한국의 외교력을 위해서 좋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은 “외교부 북미국에 인재가 쏠리고 장관·차관들 일부가 인사를 독점해온 관행 때문에 외교부가 이런 난맥상을 자초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면서도 “그러나 실제로 북미국에 인재가 몰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중요한 것은 외교부가 스스로 인사 시스템을 개혁하고 거듭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또 “외교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대표하고, 외교관은 나라의 얼굴”이라며 “한 명의 커리어 외교관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많은 세금이 들어간다. 커리어 외교관을 홀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또 다른 혈세 낭비”라고 말했다. 외교부를 개혁한다면서 무조건 외교부의 힘을 빼는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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