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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보고] 시진핑 ‘1인 천하’ 인맥 완벽정리 

시진핑이 35년 공들여 구축한 친위부대 ‘시자쥔’(시진핑 사단) 

베이징=예영준 중앙일보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당 중앙판공청 주임, 당 중앙조직부장· 선전부장 등 요직 독점…베이징과 상하이·톈진·충칭, 광둥성 등 중요 5개 당서기도 장악

시진핑은 제19차 당대회를 통해 전임자들을 훨씬 뛰어넘는 위상과 권력을 확보하며 ‘1인 천하’를 구축했다. 당 정치국 25명 가운데 과반수를 넘는 14명이 시자쥔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사다. 시진핑의 1인 천하를 작동시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시진핑이 트럼프를 위해 준비한 자금성에서의 ‘황제 의전’은 트럼프를 기쁘게 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황제급으로 끌어올리는 일이기도 했다. / 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울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 10월 8일은 공교롭게도 힐러리 클린턴과의 혼전 끝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지 꼭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 트럼프를 위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최고의 선물을 준비했다. 명(明)·청(淸) 700년의 영욕이 서린 황궁 자금성(紫禁城)에서의 ‘황제 의전’이었다. 두 정상은 자금성 달빛 아래 차와 식사를 즐기고 황제들이 거닐던 공간을 되밟으며 밀담을 나눴다. 입이 귀에 걸린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다 “생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만끽했다”고 썼다.

과연 이날의 황제는 누구였을까? 대선 승리 1주년 기념일에 성대한 국빈 대접을 받은 트럼프였을까, 아니면 그를 자금성으로 불러들인 시진핑이었을까. 중국 권력자가 자금성에서 국빈을 맞은 건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황위를 내놓은 이래 초유의 일이다. 공산혁명에 성공하고 1949년 신중국을 건국한 뒤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고 경외의 대상이 됐던 마오쩌둥(毛澤東)조차도 자금성에는 발을 들이는 걸 삼갔다. 만민평등을 지향하는 공산혁명의 지도자가 봉건의 유물인 황제의 공간에서 군림한다는 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비록 자신의 초상화가 지금까지도 자금성의 정문 격인 천안문에 걸려 있긴 하지만 어쨌든 마오가 자금성 경내에서 외빈을 접대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시 주석은 마오 이후 중국의 통치자들에게 줄곧 이어져 내려온 터부를 과감히 깨뜨렸다. 10월 하순에 폐막된 제 19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 폐막 후 처음으로 중국을 찾은 국빈에 최고 격식의 의전을 베푼다는 게 그 명분이었다. 이는 트럼프를 기쁘게 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황제급으로 끌어올리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는 또한 시 주석이 19차 당 대회를 통해 전임자들을 훨씬 뛰어넘는 위상과 권력을 확보하며 ‘1인 천하’를 구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인 천하’를 구축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연합뉴스
시진핑의 1인 천하가 됐다는 것은 시진핑 혼자서 천하를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아니다. 황제의 시대에도 그 황제를 움직이는 신하나 장수가 있는 법이다. 실제로 시진핑의 1인 천하를 작동시키는 사람은 그 아래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측근들, 시진핑의 절대 신임을 받고 시진핑에게 절대 충성을 다하는 참모들이다. 이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 시진핑의 권력도 사상누각이다.

‘시진핑의 사람’들을 일컬어 중화권 언론들은 ‘시자쥔(習家軍)’ 이라 부른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시진핑 사단’쯤 되는 용어다. 최근에는 더 줄여 ‘시파이(習派)’라 부르기도 한다.

19차 당대회 결과를 보면 단연 시자쥔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권력 정점인 7명의 상무위원 중 시자쥔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리잔수(栗戰書)와 자오러지(趙樂際) 정도다. 하지만 25명으로 구성되는 정치국으로 확대해 보면 얘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25명 가운데 과반수를 여유 있게 넘는 14명이 시자쥔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사들이다. 이렇게 정치국이 최고권력자의 측근 일색으로 채워진 건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이래 유례 없던 일이다.

시자쥔 세력이 상무위원회보다 정치국에서 두드러진 이유는 시진핑의 지방 근무 시절 상하관계를 맺었던 옛 부하 출신들이 시자쥔의 주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 지방에만 오래 머물러 있던 향관(鄕官) 출신들은 상무위원이 되기에는 경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상무위원 전 단계인 정치국에 대거 포진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가 5년 후 상무위원으로 올라가고 그중 나이가 젊은 누군가가 언젠가는 물러날 시진핑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포스트 시진핑을 점치려면 상무위원 명단이 아니라 정치국원 명단을 잘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시 주석은 당대회 폐막 직후 단행한 후속 인사를 통해 시자쥔의 주축 인물들을 중앙과 지방의 핵심 요직에 배치했다.

기자가 트럼프 방중 때의 황제 의전 화면을 보면서 주목한 사람은 딩쉐샹(丁薛祥·55)이었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자금성 회동은 소수의 인원만 수행하는 가운데 진행됐다. 이때 딩은 시 주석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이는 딩이 당 대회 후속인사에서 중앙판공청 주임 보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중앙판공청 주임은 우리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부속실장의 역할을 모두 합쳐놓은 것 같은 막중한 역할이다. 시진핑의 일정 조정은 물론, 기밀서류를 포함한 문서 선별과 보고, 당 내외와의 연락 업무 등이 모두 중앙판공청 주임의 손을 거쳐 이뤄진다. 딩의 전임자였던 리잔수가 이번에 서열 3위의 상무위원으로 발탁돼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될 것이 확실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자리가 갖는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리잔수의 전임자 명단을 훑어보면 마오쩌둥 시절의 양상쿤(楊尙昆)과 왕둥싱(汪東興), 장쩌민(江澤民) 시절의 원자바오(溫家寶)와 쩡칭훙(曾慶紅), 후진타오(胡錦濤) 시절의 링지화(令計劃) 등 역대 지도자의 신임이 가장 각별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시진핑에 의해 실각한 링지화를 제외하면 모두다 국가주석이나 부주석, 총리, 상무위원 등의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자금성 회동 이튿날인 10월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과 10월 11일 베트남 다낭으로 자리를 옮겨 열린 한·중 정상회담, 중·일 정상회담 때 딩쉐샹은 시 주석의 오른쪽에 앉았다. 왼쪽에는 경제브레인으로 알려진 류허(劉鶴) 중앙재경영도소조 주임이 앉았다. 앞으로 시진핑 주석의 모든 정상회담에서 이 두 자리는 딩과 류 두 사람의 고정석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시진핑 1기 시절의 리잔수-왕후닝 콤비가 두 사람의 상무위원 승진에 따라 딩쉐상-류허 콤비로 바뀐 것이다.

딩쉐샹(丁薛祥), 지난 5년간 시진핑을 그림자 수행


▎중앙판공청 주임 딩쉐샹. 중앙판공청 주임은 우리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부속실장의 역할을 모두 합쳐 놓은 막중한 역할이다. / 사진제공·바이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시 주석이 집권하기 전 딩쉐샹과 알고 지낸 기간은 불과 7개월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였다. 졸업 후에는 줄곧 기계공업부 산하의 상하이 재료연구소 연구원으로 배치된 뒤 17년간 근무한 끝에 연구소장이 됐다. 1999년 그를 눈여겨보고 정·관계로 끌어들인 사람은 역시 엔지니어 출신인 쉬쾅디(徐匡迪) 상하이 시장이었다. 딩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는 상하이 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을 시작으로 구청장, 상하이 조직부 부부장 등을 거쳐 상하이 당위원회 판공청 부주임으로 승승장구했다. 16세 때 대학에 합격할 정도의 명석한 두뇌와 공학도로서 터득한 논리적 사고, 범상치 않은 문필력 등이 그의 장점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의 이력은 전형적인 상하이 지방관료였다. 그의 운명을 바꾼 건 2006년에 터진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서기의 실각 사건이었다. 저장(浙江)성 서기이던 시진핑이 2007년 3월 천의 후임 상하이 서기로 부임해온 것이다. 시진핑으로서는 그해 가을의 17차 당대회에서 차기 지도자 감으로 낙점받기 직전의 마지막 시험대였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시기, 그를 도울 최고의 인재가 절실했던 시진핑은 몇 차례의 짧은 만남에서 딩의 자질을 꿰뚫어보고 당위원회 비서장 겸 판공청 주임으로 발탁했다. 시진핑이 딩과 함께한 시간은 불과 7개월, 시진핑은 그해 10월 상무위원으로 발탁돼 베이징으로 올라가면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딩은 시진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5년 뒤인 2012년 최고권력자가 된 시진핑은 잊지 않고 딩을 중난하이로 불러올렸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중앙판공청 부주임 겸 총서기판공실 주임, 즉 시진핑만을 위한 비서실장 격이었다. 그 뒤로 5년 동안 딩은 그림자처럼 시진핑을 수행했다. 사막 한복판의 위성발사장이나, 변방의 군부대를 시찰할 때에도 늘 시진핑과 함께했던 그가 이번에 중앙판공청 주임 자리에 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딩은 아직 나이가 젊어 미래가 창창하다. 그에게 부족한 건 단 하나, 지방 성·직할시의 서기를 맡아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시진핑이 향후 5년간 줄곧 판공청 주임으로 곁에만 둘지, 아니면 지방으로 내려 보내 지도자 경험을 쌓고 부족한 경력을 보충하게 할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는 당의 직속 조직을 어떻게 장악했는지 살펴보자. 공산당 중앙에는 크게 4개의 핵심 부서가 있다. 중앙조직부, 중앙선전부, 중앙통일전선공작부, 중앙대외연락부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을 고르라면 단연 인사와 조직관리를 총괄하는 중앙조직부와 언론매체, 사상, 문화 분야를 관할하는 중앙선전부다.

시진핑 집권 이후 조직부는 더 중요해지고 더 바빠졌다. 반(反) 부패 드라이브 때문이다. 당 중앙기율검사위(기율위)가 부패 공직자를 적발하면 그 후속 작업은 조직부의 몫이다. 낙마한 부패 공직자의 후임을 뽑고 인사 배치를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전 조직부장이던 자오러지가 상무위원으로 승진하면서 왕치산(王岐山)의 후임으로 기율위 서기를 맡게 된 것은 그런 업무 연관성 때문이다.

천시(陳希) 당 중앙조직부장과 황쿤밍(黃坤明) 선전부장


▎중국 공산당 요직을 차지한 천시(陳希) 당 중앙조직부장과 황쿤밍(黃坤明) 선전부장. / 사진제공·바이두
시진핑은 그런 막중한 자리인 조직부장에 천시(陳希·64) 부부장을 승진 임명했다. 부부장 시절 실질적인 파워는 부장보다 더 세다는 소리를 듣던 그가 결국 조직부 수장이 된 것은 이미 부부장으로 조직부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예정된 인사였다고 할 수 있다.

천시는 시자쥔 가운데 다소 예외적인 존재다. 시진핑의 옛 부하 출신이 아니란 점에서다. 하지만 시진핑과의 인연은 그를 따를 자가 없다. 칭화대학 화공과 동기동창인데다 같은 기숙사의 위아래 침상을 쓰면서 동고동락한 사이다. 시진핑이 산시(陝西)성 벽촌 량자허(梁家河)에서의 하방 생활을 마치고 공학병(工學兵=노동자·농민·군인) 추천 케이스로 칭화(淸華)대학에 입한한 게 1975년이니 시와 천은 벌써 40년을 넘긴 지기다. 천을 공산당에 입당시킨 것도 먼저 당원이 돼 있던 시진핑이었다. 학창 시절 성적은 천이 더 우수했다.

단짝이던 두 사람은 졸업 후 가는 길을 달리한다.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에 들어가 공직의 길을 걸었다. 반면 천은 학교에 남았다. 하지만 학문의 길을 간 게 아니라 칭화대 내의 공산당 조직을 관리하며 학생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그는 칭화대 당위원회 서기로 있던 2001년 푸젠(福建) 성장으로 가 있던 시 주석이 칭화대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데도 도움을 줬다.

줄곧 대학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도 공산당 엘리트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기회가 뒤늦게 찾아왔다. 2007년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절친’ 시진핑의 후광이었다. 그는 2008년 교육부 부부장으로 발탁된 데 이어 랴오닝(遼寧)성 부서기, 중국 과학자협회 서기(장관급) 등을 지내며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 나갔다. 그리고선 2013년 중앙조직부의 상무부부장으로 옮겼다. 줄곧 공청단 출신의 손에 장악돼 있던 조직부의 실권을 시진핑이 쥐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신임 선전부장으로 임명된 황쿤밍(黃坤明·60) 역시 천시와 마찬가지로 해당 부서 부부장으로 있다가 승진한 케이스다. 그 역시 부부장 시절부터 부장이던 류치바오(劉奇葆)를 능가하던 실세였다. 류치바오는 원래 정치국원이었다. 그런데 이번 당대회를 거치면서 정치국원 자리를 내놓고 중앙위원으로 내려앉았다. 당 고위간부급에선 전례가 없는 강등인사가 이뤄진 것이다.

왜 부부장과 부장의 운명이 엇갈렸을까? 황은 푸젠성과 저장성 두 곳에서 시진핑과 인연을 맺은 시자쥔인데 비해 류는 시진핑 집권 이후 찬밥으로 전락한 공청단 출신이란 점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황쿤밍과 시진핑의 인연은 특히 흥미롭다. 공직 입문이래 줄곧 푸젠에서만 근무하던 황은 1999년 저장성으로 옮겨갔다. 과성(跨省)교류, 즉 지방 간 인사교류를 권장한 중앙의 방침에 따라 푸젠성과 저장성이 지방 간부를 두 명씩 맞바꿨기 때문이다. 당시 황과 동시에 저장으로 옮겨간 사람은 차이치(蔡奇) 베이징 당서기다. 황과 차이 두 사람은 저장성으로 옮겨간 지 3년만인 2002년, 역시 푸젠에 있다 저장성 서기로 승진해온 시 주석과 재회했다. 시 주석과의 친밀도는 갑절로 깊어졌다. 푸젠에서 저장으로 옮긴 두 사람은 시 주석 집권 이후 출세가도를 달려 이번에 정치국원이 됐다. 반대로 시 주석의 동선과는 역방향으로, 즉 저장에서 푸젠으로 옮겨간 두 사람의 공직생활은 평범했다.

리창(李强) 상하이 서기와 리시(李希) 광둥 서기


▎리창(李强) 상하이 서기와 리시(李希) 광둥 서기는 시진핑이 지방근무 시절 만든 인맥들이다. / 사진제공·바이두
중앙에 이어 이번엔 지방 당서기를 살펴보자. 중국의 미래 지도자는 현재의 지방 당서기 중에서 나온다. 시진핑이 그랬듯 지방 말단 단위인 현(縣)서기에서 시작해 시(市)서기, 성(省)서기 혹은 직할시 서기를 거치면서 예비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검증받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중앙 무대에 진출해 지도자로 발탁되는 게 불문율이다. 물론 대부분의 중하급 당원이나 공직자들은 일생 동안 한 지방에서만 근무하다 공직을 마감하며 순환 근무와는 거리가 멀다.

31개 성·직할시·자치구 가운데 정치적 위상이 높은 곳이 몇 군데 있다. 수도 베이징과 상하이·톈진·충칭 등 4대 직할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광둥(廣東)성 등이다. 시 주석은 상하이와 광둥의 일인자를 당 대회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측근으로 바꿔 앉혔다. 리창(李强·58) 신임 상하이 서기와 리시(李希·61) 광둥 서기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 모두 5년 전 중앙후보위원에서 이번에 정치국원으로 두 단계 뛰어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들의 임지인 두 지역은 각각 상하이방과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등 다른 계파의 색채가 짙었던 곳이다.

신임 상하이 서기 리창은 시 주석이 저장(浙江)성 당서기로 재직하던 시절의 비서였다. 그의 상하이 입성으로 먼저 임명돼 있던 잉융(應勇) 시장과 함께 상하이의 1, 2인자는 모두 시자쥔으로 교체됐다. 이는 상하이방의 안방을 시파이가 접수한 격이다. 1990년대 이후 당내에서 강고한 세력을 구축해 온 상하이방(幇) 혹은 ‘장파이(江派·장쩌민 계파)’는 텃밭인 상하이마저 내놓고 말았다. 상하이방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은 한정(韓正) 상무위원을 제외하면 이번 19차 당대회에서 궤멸에 가까울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실은 한정도 시 주석이 상하이 서기이던 시절 그 아래서 시장을 했던 인물이라 절반쯤은 시 주석의 사람이라 해도 무방하다.

‘장파이’의 중진이던 장춘셴(張春賢) 당건설공작 영도소조 부조장은 공청단 출신의 류치바오 전 선전부장과 마찬가지로 정치국원에서 중앙위원으로 강등됐다. 장 부조장은 장쩌민 계열로 분류되며 정치적 비중이 큰 신장(新疆)자치구 서기로 있었으나 지난해 봄 신장 자치구 정부가 관할하는 인터넷 매체에 ‘시진핑 퇴진촉구 서한’이 게재되는 사건이 발생한 뒤 지금 자리로 옮겼다. 그의 정치적 운명은 이때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쩌민 집권 이후 약 30년 가까이 중앙 무대에서 일대 세력을 형성한 상하이방의 영화는 이번 19차 당대회를 지나며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

상하이를 접수한 리창은 시진핑 옛 부하 출신의 전형적 시자쥔이다. 그는 저장에서 태어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한 이래 줄곧 저장에서만 공직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2004년부터 시진핑 당시 저장 서기를 보필하는 당위원회 비서장을 2년간 맡았던 게 오늘날의 관운으로 이어졌다. 5년 전 18차 당 대회 때까지만 해도 저장성 부서기에 머물렀던 그가 그 사이 장쑤(江蘇) 서기를 거쳐 정치국원 자리를 차지하고 상하이 서기로까지 고속 승진을 거듭한 것이다. 나이로 볼 때 차기 상무위원을 노릴 수 있는 ‘포스트 시진핑’ 후보군 가운데 한 명이다.

광둥성 서기가 된 리시는 시 주석이 30대 초반이던 시절부터 친분이 두텁다. 광둥은 중국에서 역내총생산(GRDP) 1위인 개혁개방 1번지로 정치·경제적 비중이 큰 곳이다. 또한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가 1980년대 개혁개방 초기의 특구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은퇴한 뒤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은 공청단파로 분류되는 왕양(汪洋)과 후춘화(胡春華)가 잇달아 서기를 지냈다. 그런 곳에 시 주석의 측근인 리시를 내려 보낸 건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포석이다.

리시와 시진핑의 인연은 다소 특이하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리시가 리쯔치(李子奇) 간쑤(甘肅)성 서기의 비서를 할 때부터다. 리쯔치는 시 주석 부친인 시중쉰 전 부총리의 혁명운동 시절 동료다. 아버지의 옛 동료의 비서였던 리시와 젊은 시절 친분을 맺은 뒤 그 인연을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왔다는 얘기다. 리시는 2006∼2011년 옌안(延安)시 서기를 지낼 당시 시 주석이 하방 생활을 했던 량자허 촌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차이치(蔡奇)와 천민얼(陳敏爾), 그리고 리훙중(李鴻忠)


▎충칭 당서기 천민얼(陳敏爾)은 구이저우 당서기 시절부터 국내 인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시자쥔으로 분류되는 차이치(蔡奇) 베이징 당서기와 리훙중(李鴻忠) 톈진 당서기. / 사진제공·바이두
리창과 리시의 발탁으로 차이치(蔡奇· 62)의 베이징, 천민얼(陳敏爾· 57)의 충칭, 리훙중(李鴻忠· 61)의 톈진과 함께 중국 31개 성·직할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방 5곳 모두를 시진핑 주석의 핵심 측근들이 차지하며 친정체제를 굳혔다. 덩샤오핑 이래 그 어느 집권자도 이루지 못했던 일이다. 차이치와 천민얼 역시 저장성 시절의 옛 부하로 5년 뒤 상무위원도 가능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의 인물 스토리는 여러 차례 국내에 보도됐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시진핑 측근들의 당·정 요직 독점 현상은 시진핑이 집권하던 2012년 무렵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당시 시진핑에겐 이렇다 할 당내 인맥이 없었다. 젊은 시절부터 줄곧 지방에서만 근무한 까닭에 인맥을 구축할 틈이 없었던 것은 물론, 공청단이나 상하이방처럼 든든한 정치적 배경도 없었다. 그런 그가 2007년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내정되고 2012년에 무난히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상하이방과 공청단,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물러난 뒤에도 막후에서 상하이방 출신 상무위원들의 힘을 빌어 상왕(上王) 역할을 하던 장쩌민은 리커창(李克强)을 미는 후진타오에게 시진핑 카드를 꺼내 관철시켰다. 때문에 시진핑이 집권한 뒤에도 상하이방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란 게 대부분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시의 집권 초기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호랑이(고위직)든 파리(하위직)든 부패 분자는 모두 때려잡겠다”는 취임 일성을 신호로 반(反)부패의 타깃이 된 상하이방과 공청단 세력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대신 시 주석은 지방 근무시절 끈끈한 관계를 맺었던 옛 부하들을 차례로 발탁해 올렸다.

시자쥔의 형성은 시진핑의 정치 행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학졸업 후 중앙군사위 판공실에서 잠간 일한 시 주석은 지방근무를 자청해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로 내려갔다. 1982년의 일이다. 이번에 서열 3위의 상무위원에 오른 리잔수와의 인연은 이때 맺어졌다. 지방 근무가 처음인 시 주석은 이웃 현 서기였던 리잔수를 선배로 모시며 많은 조언을 구했다. 시 주석은 3년 뒤 푸젠성으로 내려가 17년을 일했다. 이곳에서 차이치 베이징 서기, 황쿤밍 선전부 부장, 허리펑(何立峰) 국가발전개혁위 주임 등과 인연을 맺었다. 세 사람 모두 이번에 정치국원이 됐다. 또 쉬치량(許其亮)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 군내 인맥도 이때 넓혔다. 시 주석은 2002년 옮겨 간 저장에서 또 한번 측근 인맥을 넓혔다. 천민얼 충칭 서기, 리창 상하이 서기, 잉융 상하이 시장, 중산(鐘山) 상무부장 등이다. 이중 천 서기는 새로 부임해 온 시 주석 명의로 4년간 232편의 신문 칼럼 연재를 기획하고 책임졌다.

시 주석은 2007년 상하이 당서기로 재직한 7개월의 짧은 기간에도 측근 부하를 만들었다. 앞서 말한 딩쉐샹 중앙판공청 주임과 양샤오두(楊曉渡) 기율위 부서기가 대표적이다. 딩과 양 모두 이번에 정치국원에 올랐다.

개인적 신뢰 중시, 한 번 맺은 관계는 끝까지 유지


▎권력 정점인 7명의 상무위원 중 시진핑 측근으로 꼽히는 리잔수(栗戰書) 상무위원.(왼쪽에서 둘째) 시자쥔은 35년의 세월을 두고 구축된 인맥이다. / 사진·연합뉴스
시진핑은 10년 전의 17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으로 발탁되면서 25년간의 지방 근무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차기 지도자로 낙점된 그에게 국가부주석겸 중앙당교 교장 보직이 주어지자 당교 평교수이던 리수레이(李書磊)를 놓치지 않고 연설문 담당으로 발탁했다. 리는 14세 나이에 베이징 대에 합격해 신동으로 유명했지만 당의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리는 이후 푸젠성 선전부장, 베이징 부서기를 거쳐 이번에 기율위 부서기로 발탁됐다. 시 주석의 배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보면 시 주석의 용인술을 읽을 수 있다. 개인적 신뢰를 대단히 중시하고 한 번 맺은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는 보스 기질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과 운명을 함께 할 측근을 찾아내고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반드시 그들을 챙겼다. 7개월간 함께 일하고 헤어진 딩쉐샹을 5년이 지난 뒤 기회가 오자 베이징으로 불러 올린 게 대표적인 사례다. 요직에 발탁된 당사자들의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구별도 뚜렷한 것으로 평가된다. ‘내 사람’은 파격적인 고속 승진으로 요직에 끌어올려 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강등인사도 불사할 정도로 가차 없는 면모를 갖고 있다. 게다가 시 주석에겐 서슬 퍼런 기율위란 칼자루가 있다. 특정 세력을 타깃으로 한 표적 사정에는 정치적 의도가 빤히 보여도 호랑이와 파리를 구별하지 않고 부패를 뿌리뽑겠다는 명분에는 누구도 반대하기 힘들다.

시진핑의 1인 천하는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시진핑의 1인 권력 구축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아래에서 떠받치는 세력이 시자쥔이다. 그 세력이 강고해 보이는 건 권력자 시진핑의 뒤를 좇아 하루아침에 형성된 게 아니란 점 때문이다. 20대 청년시절부터 지방 근무를 자청하며 미래의 지도자로서 자질을 키워 온 야심가 시진핑이 35년의 세월을 두고 한 사람 한 사람씩 공들여 구축한 인맥이 시자쥔이다.

- 베이징=예영준 중앙일보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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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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