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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DJ의 남자’ 설훈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이 본 적폐청산 국면 

“DJ는 용서하라 했지만 지금은 국민 뜻 따를 때”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농업 부문은 한·미FTA 재협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듯…내년 헌법 개정안에 농·어촌에 대한 재정지원 조항 명시할 것

▎설훈 위원장은 “한·미FTA 재협상에서 농·어업 분야를 건드리면 국민정서의 저항을 부른다”고 말한다.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정농단 관련 첫 촛불집회가 열린 이래 1년 남짓 동안 대한민국은 전대미문의 길을 걷는다. 대통령 탄핵과 대선, 정권 교체에 이어 지금은 적폐청산 작업이 나라의 주된 이슈로 떠올랐다. 국가정보원 댓글수사 은폐 혐의로 수사를 받던 현직 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여야는 극한의 대치로 치닫는다. 자유한국당은 과거사 청산작업을 정치보복으로 규정한 데 반해 더불어민주당은 적폐청산이 정상국가·선진국가로 가는 필수과정이라고 반박한다. 협치 대신 각자의 주장이 난무하는 정치권이다.

1997년 대선을 통해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라면 이런 경우 어떤 해법을 강구했을까? ‘영원한 DJ의 남자’ ‘DJ의 원내 계승자’를 자임하는 설훈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늘 용서하고 안고 가라고 했다”면서도 “지금은 국민과 함께 가야 할 때”라며 적폐청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고려대 재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설 위원장은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면서 이후 줄곧 DJ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해 온 동교동계 가신 그룹의 일원이기도 하다. 마침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연설한 11월 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설 위원장을 만나 나라를 이끄는 방법론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현직 검사의 죽음을 두고 자유한국당은 “죽음의 굿판 멈춰라”고 다그치고, 여권은 적폐청산 작업은 차질 없이 진행돼야 한다고 맞선다. DJ의 비서로서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DJ라면 이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집권했다. 호남에 대한 억압과 반대 시각이 엄존하는 상황이라 독자적 집권은 불가능했고 그래서 DJP(김대중+김종필)연대를 택했다. 39만이라는 간발의 표차로 가까스로 권력을 잡았다. 그만큼 기반이 취약했던 탓에 타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뭘 정리하고자 해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런 구조적 문제가 있는 데다 김 전 대통령은 용서하는 정치를 계속해 왔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순간에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를 회복한다. 우리가 권력을 잡더라도 정치보복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한 분이다. 집권하더라도 청산하려 들지 말고 용서하며 안고 가라고 하셨다.”

옆에서 듣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저는 굉장한 거부감을 느꼈다. 내심 ‘이게 무슨 얘긴가, 권력을 쥐면 정리할 이들은 다 정리해야 하는 것인데’라는 입장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어느 쪽이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과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바라는 바는 적폐청산이다. 과거를 바로잡고 청산하라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그걸 하는 게 맞다고 본다.”

김 전 대통령의 신념과 엇갈리는 행보 아닐까?

“그 시절은 더더욱 적폐청산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구조적 제약을 안은 데다 용서하는 정치를 철학으로 삼았기에 청산 과정 없이 왔다. 그게 결과적으로 잘한 건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김 전 대통령은 청산 없이 왔었고, 우리는 지금 정리할 것은 정리하자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나중에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그때와 지금은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는 말인가?

“다르다. 김 전 대통령은 할 수 없는 구조였고, 지금은 그걸 할 수 있는 국민적 지지가 뒷받침되는 상황이다.”

“트럼프, 국제관계 이용해 미국 이익 최대한 챙겨”


▎1994년 국회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책임자 고소·고발에 관한 기자회견에서 당시 민주당 설훈 부대변인이 고발장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같은 진보정부인데도 박정희 전 대통령 공과에 대한 평가도 다른 것 같다.

“야당 총재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어떤 게 장점인가’를 물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점은 우리 국민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걸 최고로 쳐야 한다’고 말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은 자기비하가 심했다. 스스로를 ‘엽전’이라 부르고 ‘조선 사람은 안 돼’ ‘한국인들은 글렀어’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했다. 그걸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다 싶었다. 우리 국민도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박 전 대통령이 보여준 것이다. 그에 따라 산업화 과정도 뒤를 이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평가할 것은 해야 한다. 인색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나쁜 짓도 많이 했다. 온갖 독재를 일삼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일은 엄중한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도 중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사람으로 와 닿는가?

“상업적 이해관계가 정확하다. 다시 말해 장삿속이 아주 빤한 사람이다. 국제관계를 이용해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는 스타일이다. 이번에도 수십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한국에 판다는 것 아닌가. 북한 문제도 있고 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문제를 만들어 무기를 사라고 나오는 노회한 장사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나?

“북한이 핵을 가지고 공갈을 치니까 한국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무기를 안 살 수 있는데도 사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 한국이다.”

미국 대통령의 국회 방문은 24년 만이다. 오다 보니 환영하는 인파도 있었지만 반대하는 시위대도 적지 않았다.

“모든 것은 국익의 잣대로 봐야 한다. 물론 누구나 찬·반 입장은 있겠지만 이런 때는 냉정하게 대처하는 게 맞다. 국빈을 모셨으면 최선을 다해 환영하는 게 옳다. 나중에 따질 건 따지고 할 말은 해야 한다. 지금처럼 찬·반 양쪽으로 갈리는 모양새는 좋지 않아 보인다.”

한·미FTA 재협상이 진행 중이다. 재협상으로 농·어촌이 희생되면서 더 힘들어진다는 우려가 있다.

“우리 정부는 농업 부문은 일단 재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 확실하다. 기존 한·미FTA 협상에서 이미 우리 농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여기서 더 개방하라는 건 지나친 요구다. 협상 실무자들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농·어업 분야를 건드린다면 국민정서의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건 우리의 희망 사항이다. 미국 내부 기류는 어떻다고 파악하나?

“미국에서도 농업 분야 재협상은 반대한다고 들었다. 미국 내 농·수산물 수출업자들의 바람이 더 이상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자면 한이 없다. 미국도 국민감정을 건드리는 위험한 전략이라는 판단을 가질 것으로 예상한다.”

“국민의당 의원 절반 정도 민주당으로 옮겨올 것”


▎지난 9월 과천 서울랜드에서 열린 제4회 ‘한돈데이’ 행사에 참석한 설훈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장(앞줄 오른쪽 셋째). / 사진·연합뉴스
정치권은 요즘 의원들의 이합집산으로 분주하다. 의원이 많이 탈당한 바른정당의 보수 개혁실험은 실패로 귀결되는 것일까?

“처음 국회의원 33명으로 출발한 바른정당에서 이탈자가 늘어났다. 정치인은 자기가 계속 국회의원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보는 습관이 있다. 그걸 극복해야 제대로 정치를 하는 건데 아직 그 틀을 못 벗어났다고 판단된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책임을 지고 새 정치를 하겠다며 뛰쳐나온 자유한국당에 다시 들어가고 있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보수당이 나오기 힘들다. 과오를 반성하고 거듭나야 국민의 지지를 얻는데, 저 상태로는 어렵다고 본다.”

유승민 의원 등 잔류파에게 미래가 있을까?

“하기 나름이다. 유승민 의원도 지적받을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개혁적 보수의 길을 가면서 세를 불리면 차차 따라올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유 의원도 지금의 어려움을 견뎌내면 결국엔 일정 정도 성공하리라 본다. 자유한국당이 저런 스탠스로 가서는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절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때는 유 의원이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을 것이다. 그 즈음에 보수가 다시 뭉치게 되지 않겠나.”

여당이 협치 노력을 등한시해 바른정당이 몰락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런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보수당 입장까지 봐 줘야 할 처지인가(웃음). (국회 차원의 협치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거 같다. 정국이 정상화되면 얼마든지 그렇게 갈 수 있고, 또 국민도 그런 요청을 할 것이다.”

바른정당 의원들을 흡수한 자유한국당은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지금은 친박계를 털어내야 할 때 같다. 극(極)보수 정치인들도 함께. 지금 홍준표 대표가 하는 것으로 봐서는 보수당의 앞날에 미래가 없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보수집단이 새로 나와야 한국 정치도 제대로 된 길로 갈 것 같다.”

그런 자유한국당에 왜 바른정당 의원들은 쏠린다고 보나?

“일단은 세(勢)가 있다고 보기에 그런 것이다. (다음 선거 등에서) 참패를 당해봐야 알 것이다. 제가 남의 당 얘기할 계제는 아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정당이 자유한국당이다. 자유한국당은 길을 잃었다. 그건 리더의 책임이기도 하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같이 일은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우선 표현을 정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누구를 흉내 내는 스타일 같은데 국민들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아주 극보수층만 홍 대표의 스타일에 대해 그걸 즐기고 잘한다고 할지 몰라도 보통사람들은 ‘저건 아니다’라는 입장일 것이다. 저는 홍 대표 같은 분을 지도자로서 뽑고 싶지 않다.”

“여야 협치는 내년 지방선거 이후에 가능”

지금과 같은 정국에서는 여야 협치는 요원하다는 지적인데.

“기본적으로 적폐는 청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자유한국당도) 동의해줘야 한다. 불법을 저지르고 국정을 농단하고 촛불집회가 일어나도록 한 잘못에 대해서는 자유한국당도 공감하지 않았나. 그 책임을 지자면 적폐청산에 동의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여당 쪽에서 노력할 것은 없는가?

“지금까지는 적폐청산이 안 된 상황이다. 그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는 (여당도) 현재의 스탠스로 가야 한다. 내년 지방선거 이후 새 지평이 펼쳐지면 여야가 협치랄까, 다른 형태의 정국이 펼쳐지리라 예상해본다.”

예산국회가 한창이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으로서 관심을 둔 현안은?

“쌀 가격과 수급의 합리화, 정상화를 바라는 농민들의 요구가 높다. 이에 발맞춰 정부는 올해 35만t의 쌀을 수매하기로 했다. 예전과 달리 서둘러 수매 계획을 발표하면서 쌀값이 일부 상승하는 등 농민 입장에서는 가격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80kg 한 가마에 12만원 선까지 떨어졌던 가격이 지금은 15만원 선까지 올랐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동의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가격 형성이 중요하다.”

농·어업 현장에서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개정을 바라는 여론이 높다고 하던데.

“김영란법을 손보자는 게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의원들 절대 다수 의견이다. 김영란법의 ‘3·5·10(음식물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 조항을 바꿔 선물 한도를 10만원으로 올리는 방안 등 의견이 다양하다. 괜찮은 제안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한들 제대로 된 한우나 굴비 선물을 하기에는 빠듯한 금액이라는 게 농·어민들의 하소연이다. 어떻게든 김영란법의 골격은 살리되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걸 고민해야 할 상황이다.”

여권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개헌을 추진할 계획이다. 개헌안에 반영돼야 할 농·어촌 관련 이익 및 현안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

“농·어촌에 대한 재정 지원을 새 헌법에 명시하는 쪽으로 협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현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농·어민에 대한 정부 지원이 일상화됐음에도 늘 왈가왈부하곤 했다. 이참에 재정 지원 조항을 못 박아 논란의 소지를 없애자는 게 농·어민들의 소망이다. 국민의 기본권 보호 차원에서 추진되는 것이라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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