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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마을이 답이다’(9)(마지막 회)] ‘오피셜’ 아닌 ‘소셜’에서 답을 찾다 

골목에서 발견하는 ‘혁신 방법론’ 

글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공석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지역과 청년이 함께 갈 때 4차 산업혁명 가능… 정부는 단기성과 집착 버리고 인내심 가져야

우리는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에 익숙하다. 목표가 분명하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창의와 혁신은 목표 자체를 찾는 여정이다. 리더 1인보다 공동체가, 수직보다 수평적인 소통이 중요한 이유다. 한·중·일 3국의 스타트업 현장을 찾아 ‘지속가능한 혁신’의 길을 모색했다.


▎수평적인 협력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단기 성과 위주인 관주도 정책이 매번 실패하고 마는 이유다. 베를린의 스타트업 공유공간인 ‘베타하우스’에서 입주자들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07년 국제개발협력학회를 창립할 때다. 청년들로부터 해외 비영리기구(NGO)와 관련한 문의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사회가 국제개발협력(ODA)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청년을 해외로 보내 미래의 ‘민간 외교관’으로 육성시키는 게 전도유망한 ‘블루오션’으로 비춰졌다. 이에 부응해 많은 청년이 개발협력 현장으로 뛰어들어 저개발지역 주민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이들은 길게는 2년간 봉사활동을 하며 전 지구적 빈곤과 불평등, 그리고 환경과 인권 불의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했다. 현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에 좌충우돌했다. 청년들이 현지인들을 계몽의 대상이 아닌 이해와 연대의 대상으로 보게끔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열정을 완전히 소진한 채로 귀국하는 청년들을 셀 수 없이 목격했다.

국제개발협력과 비슷한 맥락에 4차 산업혁명과 청년 일자리가 있다. 사물인터넷(IoT)·클라우드(Cloud)·빅데이터(Big Data)·모바일(Mobile) 총 네 분야에서 기술혁신이 상호 연결되며 놀라울 정도로 현실에 빠르게 적용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 파괴력 탓인지 네 분야의 이니셜을 따 ‘ICBM’이라고도 부른다. 소셜벤처나 스타트업 같은 슬로건이 또다시 청년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불어넣는 형국이다.

그러나 기술혁신은 정규직 일자리를 파괴하고 수많은 개인사업자를 만들어낸다. 개인사업자라고 해서 거창한 게 아니다. 과거와 비슷하거나 단순해진 업무를 근로계약이 아닌 도급계약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사회보장을 받지 못한다는 차이뿐이다. 부(富)는 인공지능이나 3D프린터 등 생산수단을 지닌 소수에게 더욱 집중될 것이다. 이른바 ‘임시직 경제’(Gig economy)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4차 산업혁명의 위협에 맞서 어느 때보다 청년을 호명하고 있다. 기업, 정부 그리고 청년들의 관심과 이해가 모이면서 공동의 대안을 찾고자 다양한 실험이 시작되고 있다. 이른바 ‘지역이 청년을 부르고 있고, 청년은 지역에서 답을 찾는 과정’이다.

‘중국판 실리콘벨리’로 성장한 베이징 ‘중관춘’


▎올해 4월 열린 중관춘 투자 유치 행사에서 한국 스타트업 관계자가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추상적인 단어나 지원 프로그램으로 청년을 현혹하고 있는가? 과거 정부가 엄청난 자원을 동원하며 정책적으로 추진한 국제개발협력 및 사회적기업 프로그램처럼 4차 산업혁명이란 화두도 청년에게 ‘실체 없는 블루오션’으로 전락되지 않기 위한 성찰이 필요하다.

정부와 기업들의 다양한 지원정책 및 프로젝트는 창의 청년들을 위로부터 부르는 실험이다. 중국 중관춘(中關村) 육성정책, 일본 도쿠시마 지방정부의 창의기업 유치 전략, 그리고 경기도의 스타트업 캠퍼스는 위로부터 청년을 부른다는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차이점에서 우리 사회가 성찰할 만한 지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텐센트, 알리바바 등 굴지의 ICT업체를 키워낸 중관춘은 ‘중국의 실리콘벨리’로 불리기도 한다. 중관춘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우선 중국 공산당 주도로 시작된 베이징의 중관춘 프로젝트는 창의 청년을 위로부터 부르는 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에선 2012년을 기점으로 아이디어형 창업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2015년 1월부터 4개월간 매일 1만 개 기업이 생길 정도로 창업 열풍이 불고 있다. 중국 IT기업 빅3인 ‘BAT(Baidu·Alibaba·Tencent)’ 덕이 크다. BAT의 성공 신화를 중국 청년들에게 공산당 간부로 출세하는 길 외에 창업으로 성공하는 방법이 있음을 알려준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 역시 ‘대중창업 만인혁신’을 천명하며 창업혁신을 통한 경제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중관춘 전자거리는 1980년대 초반 베이징 대학 근처에서 움텄다. 1988년부터 당국은 중관춘 입주기업에 기술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창업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현재 2만 개가 넘는 하이테크 기업이 중관춘에 자리 잡고 있다. 베이징대·칭화대·중국과학원과 같은 국책연구기관과 다양한 창업지원센터 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창업 클러스트 생태계로 성장했다. 공산당의 주도하고 있지만 동시에 민간투자도 그 속도를 더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중관춘 클러스터 육성정책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강력한 지원과 동시에 벤처기업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점이다. 아시아의 많은 개발도상 국가가 국가 주도로 혁신사업을 추진하는 탓에 민간부분은 수동적이며 정부지원에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 공산당은 새로운 접근 방식, 즉 공생모델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매년 900만 명씩 사회로 나오는 대학졸업자에게 어떻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인가? 성공에 대한 기대가 충만한 청년들에게 공산당원이 돼 정계에 진출하는 길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못하다. 이른바 ‘혁명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정부는 금융과 제도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고 민간투자를 적극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다. 산학연계 협력은 기본이고 민간 기업이 청년들에 대한 창업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배려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공생 모델을 취하고 있다.

일본 지방정부의 생존전략으로서 창의기업 유치 전략도 매우 흥미롭다. 시마네 현의 오난정(邑南町)은 깊은 오지에 있는 탓에 인구절벽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1만2000명에 불과한 인구 가운데서도 40%가 65세 이상 고령자다. 새로운 동력을 찾아나선 오난정 주민들은 소셜 비즈니스에 주목했다. 로컬푸드에 기초한 ‘맛 자랑 마을’ 그리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울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을’을 모토로 도시민이 마을로 돌아오도록 유도했다. 지역 토속음식을 개발하는 데 투자하는 한편, 아동 의료비와 보육료를 전액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시마네 현은 처음부터 그럴듯한 사업을 해보겠다고 욕심부리지 않았다. 사업성·사회성·공공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사업이 무엇일까를 두고 주민들과 함께 활로를 모색했다. 귀촌한 청년, 젊은 부부 그리고 싱글 맘도 자신들이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느슨하게 관계를 맺어가면서 지역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일이 생기는 것이다.

‘외딴섬’이 돼버린 경기도 스타트업 캠퍼스


▎2016년 3월 성남시 판교테크노벨리에 문을 연 ‘스타트업 캠퍼스’에는 현재 119개 스타트업이 둥지를 틀었다. 입주한 스타트업 직원들이 작업하는 모습.
지금의 청년들은 소유보다 연결과 공유 경험을 중시한다. 연결은 온·오프라인에서 공히 이뤄진다. 청년들은 SNS에서 즉각적인 가상의 관계를 즐기면서도, 동시에 지역에 기초한 ‘얼굴 있는 관계’ 역시 갈구한다. 미국에서 새로운 사회집단으로 등장한 ‘창의계층(creative class)’도 마찬가지다. 창의 계층은 일과 여가를 확연하게 구분하지 않고 유연하게 오가면서 새로운 개념이나 기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 역시 하버드대 학생들 간에 사교를 원활히 할 목적으로 ‘페이스북’을 고안했다.

일본 기업들도 이에 주목해 청년들이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결과물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근 IT와 영화 산업을 중심으로 젊은 인재들이 모여드는 도쿠시마 현의 가미야마정(神山町)이 대표적이다. 고풍스런 저택을 고쳐 사무실 공간으로 활용하는 한편,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서버도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로자들은 먹먹한 기분일 때 잠시 뒤뜰의 텃밭에서 농작물을 가꾸기도 하고, 나무에 걸린 침대에서 잠시 오수(午睡)를 즐기기도 한다. IT 스타트업 업체들이 고즈넉한 지방 마을에 회사 사무소를 내도록 인프라를 마련하고, 풍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창의 청년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가?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에 조성된 ‘경기도 스타트업 캠퍼스’는 분명 청년들이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판’을 제공하고 있다. 판교에 위치한 경기도 스타트업 캠퍼스는 현대적인 8층 건물 2동과 5층 건물 1동이 멋스럽게 연결돼 있다. 이곳에는 창업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24개의 지원기관과 함께 총 119개의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다.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비즈니스 역량을 가르치고 관심 주제별로 실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시그니처코스’도 운영한다. 16주간 무료교육을 끝낸 뒤에 우수 졸업생은 스타트업 공간에 입주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경험에 비춰볼 때 지원 규모나 프로그램 부분에서 결코 뒤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수직적인 교육관계가 강하게 느껴졌고, 기획된 교육 프로그램대의 산출물이 바로바로 나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 느낌이다. 한마디로 ‘기획’이 여전히 강한데, 이는 지방정부의 조급함과 과대 투자의 결과로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가치를 품게 해야 하고 그 가치 위에서 솔루션을 창의적으로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짧은 시간 안에 쥐어짠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만남의 자리, 넓은 회의실, 집중적인 토론과 작업 공간 등은 매우 매력적이지만 이것은 여전히 판교벨리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그곳에서 모든 답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곳은 여전히 섬에 불과하다. 성남시로, 경기도로 경계를 넓혀 지역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역과 관계를 맺으며 연결망을 넓혀나갈 때 창의도 가능하다. 지방 정부는 시간에 관대해져야 한다.

지금 창업 관련 지원금과 프로그램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의 공통된 의견이다. 문제는 청년을 부르는 이들이 여전히 중앙에 있다는 점이다. 지역에서 불러야 하고 청년들은 지역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아쉽게도 청년들도 여전히 지방이 아닌 중앙으로 관심을 쏟고 있다. 돈과 사업을 향하기보다는 지역 속에서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주민들과의 느슨한 연계를 통해서 창의적 개념과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 스스로 창의적 활동을 기획한 청년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성수동 혁신골목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수동 골목에 뿌리내린 혁신 생태계


▎‘위드 마이’ 민승기 대표는 동물성 기름을 넣지 않은 치약 ‘비건’을 기획했다. 민 대표가 헤이그라운드에 입주한 소감을 말하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사진·공석기
‘소셜 벤처’란 사회적기업에 스타트업을 더한 개념이다. 사회 문제를 겨냥한 창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업을 진행한다. 홍대앞거리에서 성수동 골목으로 이주한 청년들이 같이 생활하며, 함께 고민하고 궁리한 끝에 소셜 벤처를 시작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을 이용해서 인테리어 소품을 제작하고, 노숙자들을 고용해서 포장배송을 하는 식이다. 소셜 벤처에 투자하는 ‘인큐베이팅’ 업체들도 성수동 골목에 입주해 창업 인프라도 부쩍 개선됐다.

최근 성수동 골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벤처 인큐베이팅 업체인 ‘루트임팩트’에서 소셜 벤처들이 더욱 활발하게 연계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인 ‘헤이그라운드(Heyground)’를 마련했다. 소셜 벤처 창업자들은 이곳에서 작업 및 휴식공간을 제공받고, 동료 기업가와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루트임팩트는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의 장남인 정경선 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10월 26일에 헤이그라운드에서 소셜 벤처를 경영하고 있는 민승기 ‘위드 마이(WITH MY)’ 대표를 만나 이곳의 운영 메커니즘을 들었다.

민 대표는 뉴욕대 치대에서 치의학을 전공했다. 워싱턴 D.C.에서 치과의사로 생활하면서도, 치약과 같은 생활필수품을 다루는 사회적기업을 꾸준히 고민했다고 한다. 2013년 한국에 돌아와 사회적기업을 모색하다가 우연하게 성수동 ‘디웰하우스(d-Well House)’를 알게 됐다. 그저 예쁜 건물 1층에 카페가 있어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소셜 벤처인들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건물 2~3층을 남자 6명과 여자 6명이 공동 주거하는 ‘기숙사’로 쓰고 있었다.

위드 마이는 “나와 이웃, 환경과 모든 생명을 위해”라는 모토를 걸고 모든 생활필수품에 이러한 목표가 구현되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 그동안 사회적기업은 액세서리나 기호품을 생산하는 데만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매일 매일 소모되는 생활필수품으로 영역을 넓히면, 과거와 비할 수 없는 사회적경제 시장이 열릴 터였다. 현재 위드 마이는 동물성 기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비건(Vegun)’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 업체 가운데선 미국 ‘EWG(Environmental Working Group)’라는 비영리단체로부터 유일하게 인증받은 치약이다.

현재 창업한 지 오래되지 않아 민 대표는 직원 두 명과 함께 재택근무를 해도 무방한 상황이다. 단순히 공간을 위해서라면 임대료를 부담하면서 이곳으로 입주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민 대표가 주목한 건 공간보다 사회적기업 커뮤니티다. 민 대표는 “시각 장애인을 위해 ‘만지는 시계’를 개발한 ‘이원(Eone)’은 미국에서 크라우드펀딩으로 6억원을 모금했다”며 “이원 같은 소셜 벤처의 마케팅 노하우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입주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9월 19일에는 ‘파타고니아(PATAGONIA)’의 부사장이 헤이그라운드를 방문했다.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2위인 파타고니아는 1996년부터 모든 제품에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한 목화에서 나온 면을 사용해 명망이 높은 업체다. 부사장 방문에 맞춰 입주 벤처 가운데 5개 팀이 자신들의 구상을 소개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헤이그라운드에 입주하지 않았으면 가질 수 없는 네트워킹 기회다. 이렇게 독자적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기회를 헤이그라운드는 입주 기업에 제공한다.

영리와 비영리 사이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서울 성수동 혁신골목은 홍대앞거리에서 이주한 예술가들이 처음 터를 닦았다. 지역 커뮤니티 이벤트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는 ‘Cafe 성수’ 모습.
이러한 만남과 프로그램은 위로부터 조직되고 관리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과정이 자율적이고 수평적이다. 입주 기업들의 정기모임도 없고 조직화를 꾀하지도 않는다. 오픈 파티나 ‘헤이위크(Hey Week)’와 같은 이벤트가 수시로 진행되지만 출석 체크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입주기업 종사자들끼리 자발적으로 결성한 비공식 모임이 활발하게 운영된다. 볼링, 반려동물, 조깅, ‘혼밥 모임’ 등 참으로 다양하게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 헤이그라운드는 5인 이상 모임에 운영지원금 10만원을 제공한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양한 영역의 사람을 만남으로써 사회적 가치가 공유되는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그러나 헤이그라운드 안팎을 기준으로 소셜 벤처에서도 구별짓기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일례로 ‘체인지 메이커(Change Maker)’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이곳에 입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회운동가 수준의 도덕성과 당위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많은 사람이 전면에 나서서 판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보이기보다는 차분하게 자기 분야에서 소셜 벤처 기업을 꾸려 가는데 힘을 쏟고 있다.

소셜 벤처 창업가들은 영리와 비영리 사이 어딘가에서 살길을 모색한다. 영리에 치중하면 정체성을 잃고, 비영리에 치중하면 사업을 지속할 수 없는 현실에 마주한다. 영리적인 일을 하지만 비영리 활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협력을 꾀하는 것처럼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보이지 않게 노력하는 분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헤이그라운드에 입주한 벤처기업 중에는 소셜벤처로 분류하기 어려운 영리기업도 있고 사회적 가치에 우선성을 두고 활동하는 비영리기업도 있다. 이런 다양한 단체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성장하는 생태계가 자연스러워 보인다.

미디어 노출을 둘러싸고 입주한 업체 사이에서도 위계가 생길 수 있다. 미디어에 소개가 많이 되는 업체에는 대기업의 후원도 몰려 업체 간의 경제적·문화적 격차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헤이그라운드 자체도 개방적인 분위기일뿐더러, 비슷한 콘셉트로 운영되는 공간들 덕분에 상호 경쟁하는 생태계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헤이그라운드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카우 앤 독(COW&DOG)’이나 ‘임팩트 스퀘어(IMPACT SQUARE)’ 같은 창업 공간이 운영되고 있다.

지역과 청년은 만나야 한다


▎올해 7월에 개관한 ‘헤이그라운드’는 루트 임팩트가 25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만든 공간이다.
그러나 헤이그라운드도 ‘섬’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헤이그라운드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진 성동구 사회적경제센터도 마찬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올 2월 사회적경제센터를 방문했을 때, 관계자는 “소셜 벤쳐와 지역 공동체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답했다. 11월 2일부터 이틀간 열린 ‘서울숲 청년 소셜벤처 엑스포’가 고민의 결과물이다. 시민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성동구 서울 숲에 홍보부스를 차리고 시민들에게 ‘소셜 벤처’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민 대표와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한 지역주민이 멀찍이 헤이그라운드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봤다. 헤이그라운드에서 일하는 청년들도 8층 건물 꼭대기에서 아래를 그저 아무런 감흥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지역과 청년의 만남이 일회성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상시적인 소통으로 이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동안 9회에 걸친 ‘리셋 코리아-마을이 답이다’ 시리즈를 통해 저자들은 한국 사회가 지역에서 근본적인 혁신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현장조사와 인터뷰에서 5가지 키워드를 추출했다. ‘리더십, 혁신, 신뢰, 민주주의, 그리고 거버넌스(지원제도)’. 이 5가지 요인이 마을에서 선순환하며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이 변화해야 한다. 사람들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은 바로 청년이다. 청년들이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에너지와 피를 제공한다. 그러나 청년들이 지역 주민들의 경륜과 전통, 역사, 문화와 가치를 존중하며 그들과 때로는 느슨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협력할 때 비로소 선순환하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영향으로 인해 한국 사회는 그동안 그 해답을 거시적 차원에서만 찾고자 반복했고 아직도 그 방식에 매여 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정부정책이 해결할 수 있는 사회문제는 점차 제한되고 있다. 그 방식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선진국에서 실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청년을 지역으로 초청하는 혁신적인 정책 대안을 우리 지방 이곳저곳에서 고민해야 한다. ‘리셋 코리아’는 이런 변화가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실험되고 구현될 때 가능하다.

※ 임현진(林玄鎭, Hyun-Chin Lim) hclim@snu.ac.kr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실련 공동대표, 사회과학협의회장, 서울대 사회과학대 학장, 아시아연구소 창립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 NGOs> <세계화와 반세계화> <지구시민사회의 구조와 역학> <뒤틀린 세계화> <글로벌 패러독스> <아시아의 부상> 등 50여 권이 있다.

※ 공석기(孔錫己, Suk-Ki Kong) skong@snu.ac.kr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경희대 공동대학원 겸임교수. 환경경운동연합 국제협력위원회와 서울시 공정무역위원회 위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 NGOs> <인권으로 읽는 동아시아> <인권사회학> <뒤틀린 세계화> 등이 있다.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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