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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12)] ‘굴욕 체결’의 결정판 강화도조약 

조선 영해, 사실상 일본이 접수하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근대 세계에 무지한 탓에 수많은 독소조항 인식 못해…쇄국·개국 국내 여론마저 갈리는 등 내우외환에 시달려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재구성한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의 삽화. ‘조선산 보호 새’란 팻말을 붙인 조롱 속에 갇힌 닭(조선)이 주인(일본)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있다.
1875년(고종 12, 메이지 8) 음력 12월 10일(이하 음력),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군함 7척을 이끌고 시나가와(品川)항을 출항해 부산으로 향했다.

구로다의 공식직함은 특명전권 변리대신이었고, 이노우에는 특명부전권 변리대신이었다. 그들은 출항에 앞서 운요호 사건을 명분으로 무력과 협박을 이용해 조선을 개항시키라는 메이지 천황의 명령을 받았다. 구로다와 이노우의 임무를 보좌하기 위해 최고의 조선 전문가로 손꼽히던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가 동행했다.

당시 메이지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앞서 12월 2일에 있었던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과 주청특명전권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와의 회담을 통해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은 조선 개항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다만 조선 정부가 호락호락하게 일본 요구를 수용할지는 미지수였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운요호 사건의 피해자는 조선이었다. 그런데도 적반하장 격으로 일본이 사과와 재발 방지, 배상, 개항 등을 요구한다면 강력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럴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메이지 천황은 구체적인 훈령(訓令)을 줬다.

조선이 구로다 일행을 인정하지 않고 모욕을 가하거나 무력으로 축출하려 할 경우에는 일단 대마도로 후퇴하라고 했다. 당시 구로다가 인솔하는 병력은 약 400명의 해군으로 큰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것을 명분으로 병력을 증강시켜 침공한다는 계획이었다. 반면 조선이 모욕을 가하거나 무력으로 축출하려 하지는 않지만 공식사절로 인정하지 않고 교섭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 보복으로 협박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조선이 화친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에 보고해야 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끄는 경우에는 군대를 한양에 주둔시키고 강화성을 점령하겠다고 협박하라고 일러뒀다. 이 경우는 조선이 일본 군함에 공포감을 느낀 것이 분명하므로 더더욱 강경하게 나가라는 훈령이었다. 즉 메이지 천황 훈령의 핵심은 조선이 강하게 나오면 약하게 대응하고 거꾸로 조선이 약하게 나오면 강하게 대응하라는 것이었다.

메이지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이런 준비를 했지만 정작 조선 정부는 무대책이었다. 일본이 청나라와 어떤 외교협상을 벌이는지, 조선을 무력침공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해군력을 동원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19일 구로다가 인솔하는 일본 군함 7척이 부산 흑암 앞바다에 도착했다. 당시 부산 훈도(訓導) 현석운은 한양에 가서 부재중이었다.

이에 따라 별차 이준수가 현석운 대신 조사를 맡았다. 이준수는 관수왜(館守倭) 대행 아마노조 유조(山之城祐長)로부터 일본 사절이 강화도로 간다는 사실을 통고받았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왜관의 일본인들이 사전에 난출을 예고한 셈이었다. 문제는 이번 난출은 땅이 아니라 바다를 통해 감행된다는 사실이었다. 기왕의 난출은 육로를 통해 동래부사에게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부산 첨사나 동래 부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다를 통해 강화도까지 가겠다고 했다. 방해하려면 해군을 동원해야 했지만 불가능했다. 일본의 군함은 근대 군함이었지만 조선이 보유한 군함은 전통 목제 군함이었다. 속도나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마노조의 통고 중에는 ‘만약 나와서 접견하지 않으면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는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말이 ‘한양으로 올라갈 것’이지 실상 조선의 수도 한양을 무력 침공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허둥지둥 조선 조정, 무풍가도 日 함대


▎최초의 근대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묘사한 그림.
이런 통고를 받은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 그리고 경상 좌수사는 구로다를 막아야 했지만 그럴 힘도 없었고 방법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루속히 이 소식을 고종에게 알리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보고도 빠르지 않았다. 고종이 동래 부사를 통해 소식을 들은 시점은 1876년(고종 13) 1월 2일이었다. 부산에서 아마노조의 통고를 받은 12월 19일로부터 무려 보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구로다가 탄 군함의 속도가 동래 부사의 보고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사이 구로다는 아마노조가 예고한 대로 강화도로 접근해왔다. 그때 구로다는 군함 3척은 부산에 남겨두고 4척의 함대만 인솔했다. 구로다는 남해를 돌아 서해로 북상했다. 조선군이 구로다 함대를 관측하고 고종에게 보고한 시점은 12월 26일이었다. 부산을 떠난 지 7일 만이었다. 장소는 남양 부근의 바다였다. 남양 다음은 인천이고 그 다음은 강화도였다. 구로다 함대는 부산을 떠난 지 7일 만에 강화도 가까이까지 접근했던 것이다. 그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남양 부사의 보고에는 단순히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났다고만 했다. 이에 따라 고종은 어느 나라 군함인지, 또 정확이 몇 척이나 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단지 몇몇 이양선이 남양 인근에 출현했다는 것만 알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고종을 비롯해 조정 중신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지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기억 때문이었다. 게다가 몇 달 전에는 운요호 사건도 있었고, 부산에서 일본인 난동도 있었다.

고종과 조정 중신들은 이번 이양선은 일본 군함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렇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일본어 역관과 중국어 역관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이양선 출현을 보고받은 12월 26일에 고종은 일본어 역관 현석운과 중국어 역관 오경석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초량 왜관 담당인 현석운은 마침 한양에 왔다가 차출됐는데 당시 최고의 일본 전문가로 꼽혔다. 오경석 역시 청나라에 수 차례 다녀온 중국 전문가였다. 이날 현석운과 오경석은 강화도로 출발했다. 남양 인근의 이양선들이 강화도 쪽으로 올 것으로 예상해서였다. 아울러 고종은 강화도 주변의 해양 경계를 대폭 강화했다.

그런데 남양 인근에 도착한 구로다는 며칠 동안 그 부근에서 맴돌 뿐 강화도로 접근하지 않았다. 본국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을 떠날 때 구로다는 2개 소대 약 400명의 해군만 인솔했다. 일본 정부에서 더 많은 병력을 인솔하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이 정도 병력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양 인근에 도착한 구로다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직감했다. 강화도 주변의 경비가 예상외로 강했던 것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을 거치면서 조선정부는 강화도·통진·인천 지역의 해양 방어를 크게 강화했다. 이에 구로다는 2개 대대 약 2000의 병력을 추가 요청했다. 그 사이 2척이 합류해 구로다 함대는 총 6척으로 늘었다.

구로다가 남양 인근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1876년 1월 2일에 동래 부사의 보고서가 한양에 도착했다. 이에 따라 고종과 조정 중신들은 남양 인근의 이양선들은 일본 군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울러 강화도에 대신을 보내 접견하지 않으면 한양으로 무력 침공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고종이나 조정 중신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일본의 요구대로 대신을 강화도에 파견할지 아니면 거절할지 둘 중 하나였다.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의 협상


▎김포군 대명리와 초지대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초지진은 성곽의 둘레가 500m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이다. 조선 말 한양으로 향하는 적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을 거치는 등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다.
1월 3일 고종은 대신들에게 의정부에 비상 대기하도록 명령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의정부에 모인 대신들은 이유원을 필두로 박규수·이최응·김병국·홍순목 등이었다. 고종은 이들과 협의해 대책을 마련할 셈이었다.

1월 4일 구로다는 기함 맹춘호(孟春號)를 강화도 가까이로 접근시켰다. 조선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맹춘호가 강화도의 내양(內洋) 즉 영해 가까이 접근하자 강화 유수 조병식은 수군에 대응 출동을 명령했다. 판관 박제근과 군관 고영주가 수군을 이끌고 출동해 맹춘호를 맞았다. 비록 조선 수군은 목제 군함이었지만, 맹춘호는 조선 수군의 지시에 순순히 응했다. 맹춘호에 탑승한 박제근과 고영주는 즉각적인 퇴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조선이 대신을 파견해 접견하지 않으면 6척의 군함으로 한양을 공격하겠다는 답변만 들었다. 박제근과 고영주의 조사는 당일로 한양 조정에 보고됐다. 이제 고종과 중신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강화도에 대신을 파견하고 전쟁을 피할지, 아니면 거부하고 전쟁할 지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고종이나 중신들은 전쟁을 할 준비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다. 이에 따라 일단 전쟁을 피하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대신을 파견해 접견하기로 했다. 이런 대응은 사전에 준비된 대응이 아니라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1월 5일 고종은 신헌을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 삼아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강화도에 가서 구로다를 접견하게 했다. 신헌이나 윤자승은 근대외교에 문외한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로다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도 몰랐다. 이처럼 전혀 준비되지 않은 신헌과 완전히 준비된 구로다 사이에 협상이 시작됐다.

한편 1월 9일에 현석운과 오경석은 항산도(項山島) 부근에서 구로다 함대에 승선할 수 있었다. 그때 현석운은 모리야마 시게루에게서 “귀국에서 파견한 대관이 강화도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인천의 지방관에게서 들었으며, 접견하는 절차와 날짜는 우리가 내일 강화성으로 들어가 유수와 만나 면담한 다음 결정하겠으니 이것을 강화 유수에게 알리고 군사와 백성들을 타일러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라는 통고를 들었다.

이에 현석운은 “접견 절차와 날짜는 우리 대관이 결정할 것이니 강화에 가서 논의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또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조정의 명령이 있은 다음에야 논의할 수 있습니다”라고 항의했지만, 모리야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쫓겨나듯 하선한 현석운은 그 길로 강화도로 향했다.

현석운과 모리야마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구로다는 대화와 협상보다는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로 나왔다. 조선이 접견대관을 파견했다는 것은 곧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표시였고, 그것은 곧 전쟁준비도 안 됐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반면 구로다는 전쟁 각오까지 한 상황이었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밀어붙일수록 주도권은 구로다가 쥘 수 있었다.

1월 10일 일본 군함 4척이 강화도에 접근했다. 현석운을 통해 보고받은 강화 유수는 속수무책이었다. 혹 보고를 받지 않았다고 해도 접견대관이 파견된 상황에서 포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일본 군함은갑진(甲津)에 정박했고 몇몇 일본인들이 상륙해 강화성으로 들어왔다. 강화 유수와 만난 자리에서도 일본인들은 일방적으로 나왔다. 그들은 구로다가 강화도에 상륙할 때 400명의 병력을 대동할 것이니, 미리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통고하는가 하면, 조만간 2000명의 일본군이 인천과 부평 사이에 상륙할 것이니 역시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통고했다.

‘문외한’ 신헌 칼날을 잡다

말이 통고지 협의를 빙자한 협박이었다. 그러나 강화 유수나 조선 정부는 대책이 없었다. 거부할 경우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질 것인데, 조선은 전쟁할 의지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1월 16일 구로다는 400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강화도 남문 앞에 상륙했다. 다음날 신헌과 구로다 사이에 1차 협상이 벌어졌다. 장소는 서문 안의 연무당이었다. 1차 협상에서 신헌과 구로다는 운요호 사건 책임과 국서 접수 거부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구로다는 운요호 손해배상과 책임자 처벌 나아가 국서 접수를 요구했다. 반면 신헌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신헌은 사태무마와 우호관계 회복에만 치중했던 것이다. 그 당시 신헌은 변명이 아니라 추궁해야 했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의 침공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헌은 만국공법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군사적인 뒷받침이 없었기에 변명하기 바빴다. 협상에서의 변명은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1월 18일에 속개된 2차 협상에서도 구로다는 국서 문제와 운요호 사건을 추궁했고 신헌은 변명했다. 뿐만 아니라 동석한 모리야마까지 구로다에 가세해 신헌을 몰아붙였다. 모리야마는 일본의 협상대표가 아니기에 발언하면 안 되는데도 외교 관행을 무시하고 불쑥 튀어나와 국서 문제의 자초지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구로다와 모리야마의 합동 추궁에 신헌은 더더욱 궁지에 몰렸다. 기회를 잡은 구로다는 “귀국 조정의 확실한 대답을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직무이므로, 조정에 전달해 우리들이 돌아가서 보고할 말이 있게 해준다면 아주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했다.

신헌은 “조정에 알리겠습니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이 큰 실수였다. 국서 문제는 조선과 일본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책임으로 돌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조선은 기왕의 전통을 유지하려 했고, 일본은 유신 이후의 새로운 상황을 강요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양측 모두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로다는 조선 정부만의 사과 내지 해명을 집요하게 요구했고 신헌은 수락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의정부 명의의 해명서를 구로다에게 전달해야 했다. 반면 구로다는 아무런 해명서도 제출하지 않았다. 이 같은 결과로 본다면 국서 문제는 조선의 잘못으로 발생했고 그 때문에 조선이 해명한 꼴이 됐다.

국서 문제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후 구로다는 조약 책자를 꺼내 신헌에게 보이면서 “간단하게 기록한 조약 13건을 자세히 보시고 대신께서 직접 조정에 가셔서 임금님을 뵙고 보고해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본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조약 책자를 본 신헌은 “조약이란 것은 무슨 일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근대외교에 문외한인 신헌에게는 조약이란 말 자체가 생소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신헌을 비롯한 조선 양반들은 근대세계에 대해 무지했다. 구로다는 “귀국 지방에 관(館)을 열고 함께 통상하자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신헌은 “300년 동안 언제 통상하지 않았던가요? 지금 갑자기 이것을 가지고 따로 요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구로다는 “지금 천하 각국이 다 통행하는 일이고, 일본 또한 각국에 대해 이미 관을 많이 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신헌이 이것도 조정에 알리겠다고 대답했고, 구로다는 10일 안에 회답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헌이 구로다를 만나기 직전에 고종은 청나라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입수했다. 청나라 예부에서 1875년 12월 23일에 보낸 자문(咨文)이었는데 그것이 1876년 1월 11일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6일 후인 1월 17일 신헌과 구로다 사이에 1차 협상이 있었다. 청나라의 자문에는 일본의 주청특명 전권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가 1875년 12월 9일 북경에 도착한 후 총리아문 그리고 이홍장을 상대로 벌였던 외교 공작의 전모가 소상하게 실려 있었다.

따라서 1월 11일 이후 고종과 당국자들은 이번 사태와 관련된 일본의 의도 그리고 청나라의 의향까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일본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조선을 개항시키려 했고, 청나라는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의 경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도 청나라는 도울 수 없다는 암시도 있었다. 청나라의 자문은 조선이 알아서 선택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외교적 수사일 뿐, 사실상 개항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淸 종주권 부정 통해 조선의 외교 고립 도모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연무당 옛터.
1월 13일에 고종은 중요한 국제 정보를 알려준 청나라에 감사를 표시하며 일본과의 교섭 과정을 자세히 알리겠다는 회답 자문을 보냈다. 이 시점에서 고종은 개항을 결심했던 것이다. 신헌과 구로다 사이에 협상이 한창 중이던 1월 22일 청나라 칙사가 한양에 도착했다. 훗날의 순종을 고종의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청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져온 칙사였다.

칙사가 도착한 다음날부터 일본과의 수호통상을 반대하는 상소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화서 이항로를 필두로 하는 보수유림(儒林)이었다. 그들은 일본을 서양 오랑캐나 마찬가지라 주장하며 강화도에 정박한 일본 배들을 무력을 써서라도 쫓아내라 요구했으며, 전쟁을 하게 되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개항을 결심한 고종은 그들을 역적이라 질책하며 혹독한 처벌을 내렸다. 심지어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킨 최대 공로자 최익현이 통상 반대 상소를 올리자 그마저도 유배형에 처했다.

1월 25일 의정부에서는 일본이 요구하는 수호통상을 수락하자고 건의했다. 고종은 즉각 찬성했다. 마침내 2월 3일에 신헌과 구로다는 총 12조로 된 조약에 서명 날인했다. 이 조약은 병자년에 조인됐다고 해 ‘병자수호조규’라고도 하고 강화도에서 조인됐다고 해 ‘강화도조약’이라고도 했다. 이 조약으로써 조선은 메이지 일본과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게 됐다. 조약 체결을 기념해 구로다는 고종에게 회선포(回旋砲) 1문, 탄약 2000발, 전차(前車) 1량(輛), 육연단총(六連短銃) 1정, 탄약 100발, 칠연총 2정, 탄약 200발, 비단, 침(針) 등을 선물했다. 대부분 근대 무기였다. 반면 고종은 구로다에게 사서(四書) 각 1질·종이·붓·묵·비단 등을 선물했다. 고색창연한 유교 문물이었다. 조선과 일본은 상호간의 선물만큼이나 강화도 조약에 대한 인식과 입장이 달랐다.

강화도조약에 대한 조선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이었다. 반면 일본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근대적이었다. 조선은 상대적으로 근대문물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근대의 충격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대문물에 밝았던 일본은 근대라는 이름으로 최대한 강하게 조선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런 인식과 입장 차이는 강화도 조약의 개별 조항에 대한 인식과 입장에서도 나타났다.

예컨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해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해 일본국 도쿄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라고 규정한 제2조에 대해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조선의 경우 이 조항은 기왕의 통신사 파견과 유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즉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이 있을 때마다 양국이 서로 상대국의 수도에 사신을 파견해 문제를 해결하고, 끝나면 다시 돌아간다고 해석한 것이었다. 물론 사신의 체류 기간은 문제의 경중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고종은 강화도조약 체결을 “옛날의 우호를 회복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제2조를 기왕의 사신파견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만국공법(萬國公法)>에 규정된 상주사절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따라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만국공법>을 근거로 상주사절을 주장했고, 1877년 9월에 외무 대서기관 하나부사를 대리공사(代理公使)에 임명해 한양에 상주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은 하나부사 공사를 과거의 통신사로는 인정했지만 상주 사절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 결과 하나부사 공사는 몇 년이 지나도록 한양에 상주하지 못했다. 하나부사 공사가 한양에 상주사절로 들어간 것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나 가능했다. 조선 역시 조미수호조약 이후에야 일본에 상주사절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2조뿐만 아니라 4조와 5조에 대한 인식과 입장 역시 조선과 일본은 판이했다.

조약 체결 후에도 사태 파악 안 되는 조선


▎일본 메이지 시대 때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조선어회화 책. 한글 표현 옆에 가다카나로 발음기호를 적고 하단에는 일본어로 뜻풀이가 돼 있다. 사진은 러일전쟁 시기에 군인들이 휴대할 수 있도록 제작된 포켓용 ‘일로청한회화’· 조선어·일본어· 중국어·러시아어로 실려 있다.
4조와 5조는 부산을 포함한 세 곳에 개항장을 개설한다는 것인데 조선은 기왕의 부산 왜관을 위시해 다른 두 곳에 왜관을 더 설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게 할 경우 왜관의 운영은 기왕의 방식을 참조해서 하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일본은 전혀 다른 입장이었다. 세 곳의 개항장은 무역·통상 등에서 자율권을 갖는 자유무역항이라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강화도 조약의 각 조항을 놓고 조선과 일본의 인식과 입장이 다르다 보니 그 실행방법을 놓고도 무수한 논란과 분쟁을 불러왔다.

하지만 당시의 대세는 근대였다.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입장과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입장이 부딪칠 때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입장이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강화도 조약 제4조와 제5조는 부산을 포함한 세 곳에 개항장을 개설한다는 것인데 조선은 전통적인 입장에 입각해 기왕의 부산 왜관을 위시해 다른 두 곳에 왜관을 더 설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기왕의 부산 왜관에는 세관도 없었고 관세도 없었다.

이 같은 사실에 입각한 조선은 세 곳의 개항장에도 세관을 설치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일본 상품은 무관세였다. 당시 일본은 세 곳의 개항장이 무역·통상 등에서 자율권을 갖는 자유무역항이라는 근대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3곳의 개항장에는 세관이 있어야 했고, 일본 상품이 이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관세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전통적인 입장을 악용해 관세 문제 자체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전통적인 입장을 악용한 것은 그 외에도 또 있었다. 가령 “조선국 연해의 도서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해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해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는 7조의 규정을 근거로 일본은 조선 영해인 내양을 마음대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결과 조선 영해는 사실상 일본에 접수됐다. 이렇게 조선정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무력에 굴복해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근대세계에 무지해 수많은 독소조항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조선의 국익은 막대하게 손상됐다. 여기에 더해 쇄국과 개국으로 갈린 국내 여론이 극단적인 대결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조선은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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