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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7)] 레바논 베이루트의 빛과 그림자 

인류문명의 시원에서 눈물 흘리다 

김미루 사진작가
방글라데시 출신 가정부 리나를 통해 본 중동(中東) 사회의 이면…인종차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억압의 현장 목도

종교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보편주의를 선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구원을 외치면서 인간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동방의 인문주의가 오히려 더 보편주의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절실하게 느낀 종교의 역설이다.


▎레바논 브샤레의 카디샤 계곡(Qadisha Valley). 이곳에는 인도의 아잔타 석굴을 연상시키는 마론파 수도승들의 석굴이 있다. 매우 영험스러운 계곡이며 수량도 풍부하고 3000m가 넘는 레바논 산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심원한 몽골리아 사막으로의 유니크한 체험이 마감된 바로 그해 여름, 나는 나의 배낭에 3개월 생존할 수 있는 생필품들을 꾸겨 처넣고 또다시 뉴욕을 떠났다. 이번에는 서구문명의 한 시원지라 할 수 있는 레방트(Levant: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인데 지중해의 동쪽 연안지역 나라들을 가리킨다)의 나라, 레바논(Lebanon)이었다.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있는 한 패밀리의 가옥에 내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다는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5월 초 플로리다에서 열린 국제사진전에서 젊고 매우 재능을 지닌 한 사진가, 레바논 청년을 만났는데, 그와 곧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됐다. 그는 유모어 감각이 있는 예술가였는데, 그의 엄마와 함께 플로리다에 왔다. 나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Beirut)를 레방트 지역과 이집트 지역을 탐구하는 베이스로 활용할 생각을 했다.

2012년 7월 말, 나는 매우 조용한 기독교인들의 주거지역(레바논에서는 기독교인들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가 나뉘어져 있다. 서로 잘 왕래하지 않는다)에 정착했다. 그들의 가옥은 베이루트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동쪽으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가족의 환대 덕분에, 나는 레바논 상류층 사람들의 삶을 체험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토착적 특색이 있는 맛있는 가정요리를 먹으면서, 첫 3주 동안 도시의 곳곳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철저히 탐방했다. 나는 결국 앞으로 2년 동안 지속될 운명이 되고 만, 새로운 여행의 베이스 캠프로서 활용할 수 있는 이상적 장소를 발견한 셈이었다.

베이루트라는 도시는 ‘중동의 파리(the Paris of the Middle East)’라는 별칭을 자랑스럽게 과시한다. 무엇보다도 그 도시에는 문자 그대로 프랑스풍의 문화 색조가 짙게 깔려 있다. 레바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그 지배 영역에서 벗어나자, 1920년부터 공식적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1946년에 프랑스 군대가 완전 철수할 때까지 26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물론 이 두 나라의 문화적 관계는 18세기 초 제수이트들의 활동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베이루트는 동서를 잇는 문화의 가교였고 지중해 상업 교역의 대문이었다.

식민지적 고풍의 매혹과 이국적인 오리엔탈의 뒤섞임


▎베이루트 시내의 거리낙서. “레바논을 위한 세속주의”라는 이 낙서에는 종교적 전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젊은이들의 항거가 담겼다.
베이루트 시내에는 프랑스 스타일의 카페, 불어로 쓰인 간판, 식민지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그리고 재건축된 다운타운의 한 지역은 거리 전체가 파리의 뤼드 리볼리(Rue de Rivoli: 파리의 가장 유명한 거리 중의 하나. 1797년 나폴레옹의 승전 리볼리 전투-the battle of Rivoli-로부터 그 이름이 왔다. 전통과 현대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업지구)의 아치형 전면(前面)을 그대로 빌려 왔다. 베이루트에서는 모든 유럽의 고급사향의 부티크나 멋쟁이 사치품들을 다 발견할 수 있다. 서구의 식민지적인 고풍의 매혹과 이국적인 오리엔탈의 느낌이 뒤섞인 일종의 짬뽕문화는 나 같은 방문객에게는 매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베이루트라는 도시와 점점 친근해짐에 따라, ‘중동의 파리’라는 별명이 매우 구체적이고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한때 파리가 세계의 미술과 지성의 허브 노릇을 했듯이, 베이루트 또한 오리엔트에서 그러한 기능을 달성하고 있었다. 베이루트의 예술과 음악의 장면들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활기가 넘치는 왕성한 것이었다. 갤러리, 이벤트, 콘서트가 풍요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때 유럽의 힙스터(hipster: 유행의 첨단을 쫓는 젊은 사람들) 예술의 천국이라고 불렸던 베를린! 그 베를린 못지않게 베이루트에도 건물 벽 낙서와 거리예술이 어디서나 참신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베이루트 할러데이 인 호텔 건물. 전체가 빈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악명 높은 베이루트 밤의 문화로 기어들어 가보기 시작했다. 베이루트는 세계적으로 데카당트한 클럽과 바가 융성하기로 이름 높다. 환상적인 패션디자이너들, 젊은 보헤미안들이 밤의 열기 속에서 마치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파티의 광열을 돋우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은 1980년대 뉴욕 소호의 열광에 비교돼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마치 내일이 없는 듯이’라는 표현은 베이루트의 일상에서는 매우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동안 끊임없는 전쟁이 참혹한 파괴를 자행해왔다. 1975년에 발발해 1990년까지 지속된 레바논내전(Lebanese Civil War)은 12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었으며, 7만 6000명이 집을 잃었고, 최소한 100만에 이르는 사람이 레바논을 탈출해 국외로 망명했다. 이 내전은 기본적으로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가 이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을 때는 종파 간에 이권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균형자 역할을 수행했지만, 독립이 되면서 종교 간 충돌은 적나라하게 맞부딪히게 됐고, 불만의 씨는 증폭돼 갔다.

초기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평형이 유지됐지만 이스라엘의 탄압을 받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람들이 대거 피난 와서 무슬림파의 세력이 확대되자 평형이 깨지게 된다. 1982년에 이스라엘 군대가 레바논을 침공해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리더십 베이스인 베이루트 서쪽지구를 장악해 1만 8000명을 죽이고, 3만 명을 부상 입혔는데, 이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2006년에는 레바논 시아파 무력단체인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다시 전쟁이 발생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헤즈볼라와 정부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난다.

하여튼 마론파 기독교(Maronite Christians), 드루즈 유니태리안종파(Druze Unitarians), 수니 무슬림, 시아 무슬림, 팔레스티니안 난민세력, 헤즈볼라 등등의 세력이 얽혀있는 이 내전과 대 이스라엘 전쟁의 실타래는 여기서 내가 풀어내기에는 너무도 복잡하다.

베이루트에 사는 사람들은 전쟁은 항상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운명적 그 무엇이라는 것을 기정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 같다. 곧 들이닥칠 듯한 죽음의 그림자가 도처에 보인다. 시내 안의 훌륭한 건물이 반쪽이 파괴된 채 그냥 방치돼 있는가 하면, 멀쩡한 건물의 벽에도 폭탄의 파편자국이 어지럽게 수를 놓고 있다. 거리에는 도처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다. 바로 이러한 사회의 암면이야말로 젊은 파티광들이 그토록 공격적으로 몰입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맨해튼을 떠난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루트의 격렬한 전쟁의 상흔들은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그런 인간세의 어리석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온갖 극단적 종교적 독선에 시달리는 레바논


▎카디샤 계곡에 남아 있는 몇 그루 안 되는 백향목 숲. 백향목은 레바논의 상징으로 국기에 들어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서에 해박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나안(Canaan)’이라는 말을 익히 들어 안다. ‘가나안’이라는 말의 정확한 어원을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셈족 언어로 ‘낮은(to be low)’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나안 자체가 레방트의 ‘저지대(lowlands)’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팔레스타인 지역보다는 현재 레바논 지역이었다. 이곳은 레바논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 사이의 풍요로운 곡창지대와 지중해 해변의 무성한 백향목 지대가 길게 늘어져 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없이는 솔로몬의 성전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존재할 수 없었다. 거대 석조건축에는 반드시 대량의 목재가 소요되는 것이다.

가나안 문명을 이어서 개화한 문명이 바로 페니키아 문명(Phoenician civilization)이었다. 레바논은 페니키아 문명의 적손이다. 페니키아라는 말은 희랍어의 ‘붉다’라는 뜻을 가진 ‘포이닉스(phoinix)’에서 유래됐는데,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뼈고동 패류(Murex mollusc)에서 채취되는 자홍색 염료의 수출지로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과 왕래했는데 대체로 BC 1500년에서 BC 500년까지 융성했다. 이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바로 알파벳 문자의 발명이다.(BC 1050년 경)

이 페니키아 문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글의 원형이 됐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중동 고문명의 설형문자에 비해 쉽고 정확하게 인간의 언어를 기술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이들의 업적은 희랍어 문자로 계승돼, 인류문명의 찬란한 한 피크인 희랍 고전시대를 개창한다. 이 희랍문명을 전 세계로 전파한 이가 바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건설한 제국에 의해 고대 근동 문명의 아이덴티티는 해체되고 서양의 고대세계(Ancient World)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레바논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류문명의 매우 중요한 한 핵심적 시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도 레바논 지역을 왕래하며 예수운동을 전개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예수운동의 초기 원형적 성격이 레바논 문화에는 남아 있다. 그 한 줄기가 바로 마론파 기독교인데, 이 마론파 기독교의 심오한 측면을 잘 대변해주는 20세기 초반의 인물이 하나 있다. 그가 바로 사상가, 작가, 시인, 화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이다. 지브란이 마론파 신부의 외손자로 태어나고 자란 카디샤 계곡의 브샤레라는 마을을 가보면 지금도 그 영험한 종교적 서기가 곳곳에 서려있다.

그의 <예언자: The Prophet>는 믿음이나 구원을 추구하는 책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있다. 지브란은 인간에게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가치,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자유와 속박, 출발과 도착, 영혼과 육체, 무한과 유한, 사랑과 증오, 선과 악, 부와 빈, 인성과 신성…. 이 모든 상반되는 두 개의 얼굴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서로를 껴안을 때, 평화는 이루어지고 자유는 획득된다고 말한다. 불교의 열반이나 해탈사상과 비슷한 측면이 있으나, 궁극적으로 자유의 저항을 추구하는 서구적 정신의 맥을 잇고 있다. 초기기독교가 지향했던 때 묻지 않은 해방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전통도 레바논에 오면 심오한 드루즈 철학이 되는데, 드루즈 신앙은 유일신관과 아브라함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한다. <지혜서한: Episteles of Wisdom>이라는 성경을 주요경전으로 삼는데, 이슬람,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피타고리아니즘, 힌두이즘을 다 포섭한다. 뭔가 레바논 토양의 오리지널한 영성을 개방적으로 융합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영성의 레바논이 온갖 극단적 종교적 독선에 시달려 전쟁의 포화가 끊이지 않고 있는 현황은, 정말 문명과 종교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베이루트에서 근원적으로 떠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분열된 종교당파나 전쟁의 위협이나 밤의 열기의 광란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내가 그 사회의 저변에서 해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비극, 그것은 너무도 추악하고 너무도 명백한 레이시즘(racism), 즉 인종차별주의였다. 레바논에서 인종차별주의는 클라시즘(classism), 즉 계급주의와 매우 밀접히 관련돼 있다. 이 현상은 그 나라에 편재하는 외국인 가정부 무역에서 유래되는 것인데, 이것은 내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노예무역 이외의 딴 것이 아니었다.

가정부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공인된 제도는 가정이라는 밀폐된 환경 속에서 자행되는 통제되지 않는 학대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인구가 겨우 500만 밖에는 되지 않는데 외국에서 이주한 가정부가 20만 이상이나 된다.(전체 인구의 4% 정도) 레바논의 상류, 중상류, 그리고 중류 가정조차도 대부분이 에티오피아, 케냐,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지에서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행 때문에 가장 저열한 사회적 신분을 특정한 외관이나 국적에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스리랑칸(Sri Lankan: 스리랑카 사람)’이라는 말은 곧 레바논 특수어로 ‘하녀’를 의미한다.

‘이색적 외관’이 핸디캡이 되다


▎칼릴 지브란이 태어난 브샤레 마을 전경. 빠알간 기와로 덮인 이 마을의 인간적 경관은 문명과 자연의 조화가 극치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됐다.
독자들은 내가 베이루트의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어떤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누군가의 필리피노 하녀로서 심부름 나온 사람으로 즉각적으로 취급됐다. 매우 크고 모던한 한 식료품 가게에서 올리브를 사기 위해 나는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두 늙은 백인 앞에 서 있었는데, 나를 제치고 그들을 먼저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이 구매한 후에야 비로소 올리브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계산대에 있는 노인은 나에게 마치 개에게 명령하듯이 그의 손으로 ‘기다려’ 하고 손짓할 뿐이었다. 내가 불만을 토로하자, 입에 손가락을 대면서 ‘쉿’ 할 뿐이었다. 명백한 줄의 순서를 어기는 행위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체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의 단순한 외관 때문에 내가 나에게 던져지는 그토록 낯 뜨거운 레이시즘을 체험한다는 것은 진실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동아시아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다. 나의 얼굴이 보통 아시아 사람보다 다크 스킨 톤인데다가 눈이 크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레바논 사람들은 전형적인 일본인이나 중국인, 한국인 관광객을 더 못사는 나라로부터 온 까무잡잡한 가사노동자들로부터 구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나를 보면 좀 이색적이라고 칭찬 비슷한 말을 던지곤 하는데, 바로 이놈의 ‘이색적 외관’이 이 레바논 지역에서는 전적으로 핸디캡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피부가 좀 더 하얗고 눈이 옆으로 찢어지고 광대뼈가 불거졌다면 나는 돈 많은 일본관광객으로 취급됐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레바논 사람들은 나를 공경스럽게 대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나의 체험을 말하자, 한 레바논 친구가 이렇게 변호하는 것이다. “여기 사람들이 특별히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말할 것은 없지. 그들이 판단하는 것은 사회적 계급이야. 네가 부자처럼 보이면 사람들이 널 잘 대접할 거야.” 나는 이 새로운 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머리 꼭대기로부터 발끝까지 ‘100만불 여인’처럼 치장을 화려하게 하고 밤에 나가보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결코 먹히지 않았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바를 갔는데, 신분증을 보자고 한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나 혼자만 유색인종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줄곧, 내가 아무리 옷을 잘 입더라도 나 혼자만 체크당하는 수모를 계속 당해야만 했다. 여러 번 나는 문간 경비 어깨들이 내 미국여권을 보자마자 그들의 태도를 180도 바꾸는 사태를 체험했다. 약자에게 비열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중동문화의 한 측면을 나는 강렬하게 체험했다. 종교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보편주의를 선사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구원을 외치면서 인간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동방의 인문주의(East-Asian Humanism)가 오히려 더 보편주의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매우 화가 났다. 그래서 이 가정부 문제를 보다 깊이 탐구했다. 그리고 많은 이민자 가정부가 그들을 고요한 가정에서 못 견디고 가출을 하게 되면 결국 길거리에서 매춘이나 천직에 불법 고용돼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됐다.

베이루트에는 가정부 조달 에이전시가 많이 있다. 누구든지 가정부를 고용하고 싶으면 조달소에 나타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다. 에티오피아 가정부를 2년 계약으로 고용하는 데는 서류작성과 비행기 표를 포함해 대략 2000 달러가 든다. 그리고 방글라데시 식모를 구하는 데는 대략 1500 달러가 든다. 그러나 이 돈은 양국의 에이전트들이 다 먹는 것이며 가정부 본인과는 무관하다. 본인은 그 나라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신청할 뿐이다. 그리고 계약대로 가정부가 도착하면 매월 샐러리가 지급되는데, 에티오피아 여자에게는 200 달러, 방글라데시 여자에게는 150 달러, 필리핀 여자에게는 250 달러 등등의 가격이 매겨져 있다.

그런데 이 소녀들이 공식기구를 통해 돈거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녀를 고용한 패밀리가 전적으로 모든 관리를 담당하기 때문에 가정부들의 여권과 서류를 고용주가 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월급조차도 고용주의 변덕에 따라 보류되기도 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국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일체의 노동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는 무제한의 혹사와 학대를 허용한다. 가정부들의 자살이 흔치 않게 보도된다. 소녀들이 가정으로부터 도망치면, 그들은 여권을 포함한 모든 서류를 상실하기 때문에, 매춘과 같은 불법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집 안의 부속품처럼 취급된 가정부 리나


▎‘신과 가장 가까웠던 인간’이라 불리는 레바논의 작가 칼릴 지브란. 조각가 로댕의 제자이기도 했던 그는 48세로 요절했다
레바논 가정의 고용주들이 월급을 꼬박 주었는데도 가정부가 도망쳤다고 투정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사태의 원인을 규명해 불만과 불행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그 자리를 새로운 가정부로 대치할 뿐이다. 그들은 소비성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가정부 조달 에이전트들은 그들의 가정부에 대해 이런 광고를 써 붙이곤 한다. “신중히 선택된 메이드, 우울증에 걸리지 않음.”

1인당 GDP가 1만 9000달러 정도 되는 나라, 그런데 불합리한 종교의 교리가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나라, 그리고 오랜 내전으로 국가 조직의 통제력이 와해된 나라, 모든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인간불평등의 부조리에 아무런 기준이 서질 않는다는 사실도 쉽게 이해가 간다. 우리 동아시아문명의 대체적인 개화의 방향이 세계문명의 기준에서 볼 때, 정도(正道)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비교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머물고 있던 기독교 가정에도 이미 2년 동안 일하고 있었던, 방글라데시에서 온 19세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나(Rina)였다. 리나는 방글라데시의 어느 시골 작은 마을에서 살았는데, 아주 어린 나이에 임신을 했고 임신시킨 남자는 도망가버렸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리나는 자신의 아기를 언니 집에 맡겼고 자신은 양육비를 벌기 위해 에이전시에 취직을 부탁한 모양이다. 에이전시는 리나가 단 한마디의 아랍어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임의적으로 레바논에 배정했던 것이다.


▎레바논에도 지구 도처에 있는 마리아 컬트의 장소가 있다. 일종의 성황당이다. 그 옆에 가정부의 복장을 한 동양여인이 보인다. 필리핀 가정부임을 알 수 있다.
리나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주 작고 어여쁜 얼굴을 한 매우 조용한 소녀였다. 그녀는 항상 수심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와 감정을 소통하려고 접근하면 때때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매일 새벽 일찍부터 저녁식사 후 설거지 때까지 하루 종일 일했다. 그런데 나에게 그토록 잘해주는 패밀리의 엄마, 다시 말해서 리나의 보스조차도 끊임없이 그녀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그 집안의 아이들, 이미 성년이 된 아이들이었지만, 그들도 허파가 터질 듯이 리나의 이름을 불러댔다. 벗어놓은 양말이 없어졌다든가, 자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셔츠가 사라졌다든가 하면서.

물론 리나의 처지는 레바논 대부분의 가정부보다는 처지가 더 좋은 것으로 간주됐지만, 나는 그녀가 로봇이나 집 안의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모습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 도무지 소화해내기 어려웠다. 그녀는 결사적으로 휴식이 필요할 때는 꼭 장롱 하나처럼 생긴 작은 그녀의 방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레바논의 가옥에는 식모 방이 그렇게 코딱지만 하게 설계돼 있다. 나에게 그토록 친절하고 관대한 엄마, 나를 한가족처럼 생각해준 고마운 그 엄마도 나에게 여러 번 리나에 관해 불평을 토로했다. “우리는 리나가 여기 오기까지 모든 비용을 댔고, 매달 월급도 꼬박꼬박 줬지. 리나는 매달 언니집으로 송금을 해. 그 돈은 방글라데시에서는 큰돈이라구. 나는 리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지. 지금은 아랍어까지 알아들을 수 있어. 그런데도 리나는 너무 멍청해! 아직도 항상 실수를 저지르고,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모른단 말이야!” 언젠가 리나가 부엌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벽을 쳐다보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남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글라데시 집에서 먹는 것처럼 밥을 손으로 꾹꾹 눌러 입에 넣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패밀리의 엄마는 그녀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저것 좀 보라구! 쟤는 개처럼 먹고 있잖아!” 문화적 관습에 대한 근원적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관용이야말로 보편주의의 기본원칙이라는 것을 전혀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는 그 집에 존경받는 게스트였고, 주제넘게 주인의 인식체계를 교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주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방글라 뮤직’듣고 환호했던 리나의 표정 못 잊어


▎내가 묵고 있던 집에서 일했던 방글라데시 출신의 가정부 리나. 억압과 차별을 묵묵히 참았던 조용한 소녀였다.
이 패밀리의 한 친구인 젊은 레바논 청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리나는 참 운이 좋아! 이 패밀리는 나이스해. 리나를 때리지는 않으니까.” 그 무의식적인 말인즉슨, 레바논에서 가정부에 대한 체벌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너무도 충격을 받아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그 청년은 말을 이었다. “레바논의 가정부 상황은 일반적으로 정말 좋지 않아! 많은 소녀가 학대받고 있지. 예를 들면 우리 집 옆의 패밀리가 얼마 전에 바캉스를 떠났어. 그런데 그들의 메이드를 음식과 물도 공급해주지 않고 방에 감금해버렸단 말야. 그래서 내가 매일 가서 창문으로 먹을 것을 공급해줬지.”

그 청년의 언어는 내 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내가 그 잔학무도한 장면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아무튼 리나의 정황을 쳐다보면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되씹지 않았던 오래전의 감정, 내 존재의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었던 그런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내가 영어단어를 매일매일 외우면서, 계속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나날들의 추억이 나를 휘감았다. 언젠가 나를 놀리고 멍청하게 만드는 아메리칸 키드들보다 내가 더 훌륭한 인물이 되고야 말리라라는 굳은 맹세가 생각난 것이다. 그때 나는 불과 열세 살이었다. 영어 한 단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캘리포니아의 오렌지카운티에 홀몸으로 왔던 것이다.

미국의 공립중학교의 아이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좀 사악한 종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내 얼굴에 대고 웃거나 심술궂은 행동을 마구 해댔다. 내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아시아의 소녀라는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이모집에 머물렀는데, 내 이종사촌의 한국계 친구들조차도 나를 매우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물론 나 자신이 세련되지 못했고, 분위기를 쉽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나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나는 ‘FOB’라고 놀림을 당했는데, 그것은 ‘fresh off the boat’라는 뜻이다. 배에서 갓 내린 세상 물정을 모르는 촌놈이라는 뜻이다. 아시아계 미국아이들도 나를 ‘포브’라고 놀려만 댔던 것이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아주 이방의 먼 땅에서 완벽하게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 느낌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인자하기 그지없는 이모의 배려가 있었고 또 사촌들과 같이 잘 지냈지만,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거의 매일 밤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나의 리나에 대한 동정심, 아니 공감의 폭이 각별했다. 불과 17세 어린 나이에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이국의 땅에, 홀몸으로 내팽개쳐진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리나의 얼굴은 정말 때묻지 않은 인간의 순결함을 나타내고 있다. 잘생긴 얼굴이다. 그런데 내 얼굴은 그러한 남방계 얼굴과 대차가 없다. 얼굴 덕분에 남들이 느끼지 못한 인종차별을 체험했다.
어느 날, 나는 리나가 부엌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재빨리 나는 나의 랩톱컴퓨터를 가져다가 유튜브를 눌렀다. 나는 ‘방글라 뮤직(Bangla Music)’을 찾아, 물항아리를 나르는 전통적 시골여인들로 분장한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비디오 하나를 클릭했다. 노래가 터져 나오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의 리나처럼 환희에 찬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질 못했다. 리나는 홍조를 띄우며 흥분 속에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리나는 그 노래를 완벽하게 암송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야말로 리나가 2년 만에 자기 모국에서 온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느껴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리나에게는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일절 허용되질 않았다. 물론 스마트폰도 가지고 있질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휴대폰도 허락되질 않았다. 주인의 입회 아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지상통신선으로 집에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것도 제한된 시간범위 내에서. 뮤직비디오를 쳐다본 후에 리나는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방글라 비디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일종의 코미디쇼였다. 우리가 같이 그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는 중에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리나는 재빨리 컴퓨터로부터 멀어져 갔고, 빨리 그것 좀 꺼달라고 손짓을 했다.

그때로부터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면 리나에게 방글라 텔레비전을 틀어주었다. 물론 누가 나타나기 전에 재빨리 끌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리나는 나에게 깊은 애정을 표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2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한 인간으로부터 아무런 격 없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인간의 관계가 왜 그렇게 왜곡되어야만 하는지, 칼릴 지브란의 심오하고 아름다운 레토릭도 이 예언자의 고향에서 공허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내가 리나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을 때, 그녀의 도톰한 눈망울에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숫자가 적힌 종이 한 쪽지를 건네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방글라데시 고향에 있는 자기 연락처였을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번호로 그녀와 연락하는 데 실패했다. 국가번호도 그렇고 자릿수가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2년 후에 나는 그녀가 결국 가출하고 말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리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인류문명의 진보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레바논 지역의 위대함을 입증하는 로마 유적 바알베크 (Baalbek). 앞에 있는 건물이 쥬피터 대 신전, 뒤에 있는 건물이 박카스 신전이다.
결국 ‘중동의 파리’라는 베이루트의 추억이나 모든 기획이 나의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멀어져만 갔다. 중동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흥분되고, 가장 열광적이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음식이 맛있는 곳처럼 느껴졌던 나의 환상은 이 가정부 무역의 문제로 인하여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알고 보면 중동의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다. 예수 시절부터 ‘돌로 쳐죽이기’ 린치가 공공연한 율법으로서 자행되고, 지금도 ‘명예살인’이 사회규범으로 인지되는 그런 분위기, 결국 구약적 세계관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에게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손가?

인류문명의 진보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그러나 어찌됐든, 나의 다음 목적지 요르단에서는 나는 필리피노 하녀로 취급되는 일은 없었다. 요르단이라는 나라는 최소한 그토록 뻔뻔스러운 인종차별 주의가 설치는 분위기에 예속된 그런 문명의 나라는 아니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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