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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화제] ‘오빠부대장’ 겨울 코트를 점령하다 

양복 입고 돌아온 그때 그 오빠들의 ‘2라운드' 

김동훈 한겨레신문 스포츠 전문기자 cano@hani.co.kr
90년대 농구대잔치·배구 슈퍼리그 인기 견인하며 ‘스타덤’ 올라…문경은·이상민·현주엽·김세진·신진식 등 감독으로 진검승부 펼쳐

1990년대 농구와 배구는 ‘절대 인기’를 누렸다. 특히 문경은·이상민·김세진·신진식 등 ‘대학생 오빠’들은 연예인 못지않았다. 이들을 흠모하는 소녀 팬들은 ‘오빠부대’로 불렸다. 90년대 겨울 코트를 쥐락펴락했던 ‘오빠부대장’들이 돌아왔다. 이제는 양복을 입은 감독이 돼 선수들을 지휘하고 있다.


▎연세대 1년 선후배인 문경은 서울 SK 감독(오른쪽 사진)과 이상민 서울 삼성 감독이 11월 1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7~18 프로농구 정규리그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삼성이 86대 65 대승을 거두며 SK의 8연승을 저지했다.
11월 1일 저녁,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는 프로농구 삼성과 SK의 시즌 첫 라이벌 대결이 펼쳐졌다. 나란히 서울을 연고로 하는 두 팀은 올해 정규리그 6차례 맞대결을 ‘S-더비’라는 이름의 라이벌전으로 치르기로 했다.

특히 이날 경기는 1990년대 연세대 ‘오빠부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SK 문경은 감독과 삼성 이상민 감독의 사령탑 대결로도 눈길을 끌었다. 이겼더라면 프로농구 개막 후 최다 연승 타이기록인 8연승을 달성할 수 있었던 문 감독의 SK는 1년 후배 이 감독의 삼성에 뜻밖의 참패(65대 86)를 당했다.

경기가 끝난 뒤엔 흥미로운 장면도 나왔다. 기자회견장을 먼저 다녀간 ‘패장’ 문경은 감독에 이어 인터뷰실에 들어온 ‘승장’ 이상민 감독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문)경은이 형이 뭐래요?”라고 기자들에게 물었다. ‘발바닥이 안 떨어져서 졌다고 하더라’는 답을 듣고는 “우리는 발바닥이 잘 떨어져서 이겼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90년대 소녀 팬들을 사로잡았던 ‘오빠’들이 최근 몇 년 새 속속 감독으로 변신하고 있다. 프로농구는 10개 팀 감독 가운데 6명이 90년대 학번이다. 농구대잔치를 열광을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SK 문경은 감독(연세대 90학번), 안양 KGC 인삼공사 김승기 감독(중앙대 90학번), 삼성 이상민 감독(연세대 91학번), 전주 KCC 추승균 감독(한양대 93학번), 창원 LG 현주엽 감독(고려대 94학번), 부산 kt 조동현 감독(연세대 95학번)이 그 주인공이다. 여자프로농구는 아산 우리은행 위성우 감독(단국대 91학번), 부천 하나외환 이환우 감독(국민대 91학번), 인천 신한은행 신기성 감독(고려대 94학번) 등이 있다.

프로배구 역시 OK저축은행 김세진 감독(한양대 92학번), 우리카드 김상우 감독(성균관대 92학번), 삼성화재 신진식 감독(성균 93학번),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한양대 95학번) 등 남자부 7개 팀 가운데 4개 팀 사령탑이 90년대 학번이다. 여자프로배구는 GS칼텍스 차상현 감독(경기대 93학번)과 한국도로공사 김종민 감독(인하대 93학번) 등 2명이 있다.

4대 스포츠 가운데 사령탑 선택에 보수적 성향이 강해 감독들의 나이가 가장 ‘고령’인 프로야구는 삼성 김한수 감독(중앙대 90학번)과 롯데 조원우 감독(고려대 90학번), 넥센 장정석 감독(중앙대 92학번) 등 10개 구단 가운데 3명이 90년대 학번이다.

다만 프로축구의 경우 K-리그 클래식 12개 팀 가운데 수원 삼성 서정원 감독(고려대 88학번), 울산 현대 김도훈 감독(연세대 89학번), 제주 유나이티드 조성환 감독(아주대 89학번), 전남 드래곤즈 노상래 감독(숭실대 89학번) 등 1970년 생이 유독 많지만, 상주 상무 김태완 감독(홍익대 90학번)을 제외하면 프로 구단 가운데 90년대 학번은 인천 유나이티드 이기형 감독(고려대 92학번)이 유일하다.

형님들의 ‘인기 바통’ 이어받았던 아우들


▎연세대 시절 문경은은 ‘람보 슈터’라는 별명답게 한국을 대표하는 3점 슈터였다.
90년대를 들어다 놨다 했던 ‘오빠부대’의 원조는 농구 선수들이다. 소녀 팬들을 몰고 다니며 농구 인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주역들이다. 그 여세를 몰아 1997년 프로농구(KBL)가 출범할 수 있었다.

1983년 출범한 농구대잔치 초창기에는 박수교·이충희·이원우(이상 현대전자)·신동찬·박인규·김현준(이상 삼성전자)·유재학·한기범·김유택·허재·강동희(이상 기아자동차)로 이어지는 스타플레이어가 있었다.

90년대에는 대학팀이 실업팀에 도전장을 내밀며 농구대잔치 인기를 절정에 올려놓았다. 그 주인공들이 연세대는 문경은·이상민·우지원·김훈·서장훈 등이고, 고려대는 전희철·김병철·신기성·양희승·현주엽 등이다.

특히 연세대는 대학팀으로는 농구대잔치 출범 10년 만에 처음으로 1993~94시즌 정상에 올랐고, 그 주역이 90학번으로 4학년이던 문경은과 91학번 3학년 이상민이었다. 당시 농구는 야구나 축구 인기를 뛰어넘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농구를 주제로 한 만화 ‘슬램덩크’와 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청소년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당시 연세대 농구부의 엄청난 인기는 3년 전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로 부활했다.

흥미로운 점은 프로농구 90년대 학번 감독들은 거미줄 같은 라이벌 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문경은 감독의 SK와 이상민 감독의 삼성은 ‘서울 라이벌’이다. 이번 시즌부터 ‘S-더비’라는 이름으로 라이벌 대결을 공식화했고, 유니폼도 서로 홈경기 유니폼인 빨간색(SK)과 파란색(삼성)을 입기로 약속했다.

또 이상민 감독의 삼성과 추승균 감독의 KCC는 전통의 ‘삼성-현대’ 맞수다. 문경은 감독의 SK와 조동현 감독의 kt는 만날 때마다 으르렁대는 ‘통신 맞수’이고, 현주엽 감독의 LG와 이상민 감독의 삼성 역시 전자업계 라이벌이다. 여기에 kt-SK-LG는 이동통신 3사로 엮여 있기도 하다. KGC인삼공사 김승기 감독과 삼성 이상민 감독은 선수 시절 ‘터보 가드’와 ‘컴퓨터 가드’라는 별명으로 맞수 대결을 펼친 사이다.

이 가운데 문경은과 이상민의 관계는 좀 특이하다. 둘은 대학시절 ‘람보 슈터’와 ‘컴퓨터 가드’로 호흡을 맞추며 대학팀 최초로 연세대를 1993~94시즌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끈 주역이었다. 키 1m90㎝로 당시로선 장신 슈터였던 문경은은 광신상고 재학 시절부터 ‘괴물’로 소문난 선수였다. 이상민은 홍대부고 시절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트리플더블을 여러 차례 기록했는데, 연세대에 진학해서는 최희암식 분업 농구에 따라 포인트가드로 자리 잡았다.

연세대 1년 선후배로 만난 둘은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이상민의 패스를 받은 문경은은 어김없이 림 안으로 공을 배달했다. 마치 90년을 전후해 미국프로농구(NBA) 유타 재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최고의 포인트가드 존 스탁턴과 ‘우편배달부’ 칼 말론을 보는 듯했다. 이상민은 키가 1m83㎝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탄력으로 덩크슛까지 꽂았다.

한솥밥 동료에서 적으로, 얄궂은 운명


▎연세대 3학년이던 1993년 사복 차림의 이상민. 문경은·우지원·김훈·서장훈 등과 함께 ‘연세대 왕조’의 멤버였다.
그런데 둘은 대학 문을 나선 이후 늘 라이벌 팀에 있었다. 시계를 20년 전으로 돌려보자. 1997년 11월 15일 대전 현대와 서울 삼성의 프로농구 라이벌전. 그런데 두 팀에는 상대를 의식하는 또 다른 라이벌이 있었다. 삼성의 슈터 문경은과 현대의 리딩가드 이상민이었다. 둘은 신경전을 펼쳤다. 경기에 앞서 몸을 풀면서도 연방 덩크슛을 터뜨리며 ‘시위’를 했다. 더불어 소녀 팬들의 함성 소리도 높아만 갔다.

둘은 포지션이 달랐는데도 4쿼터에서 마침내 매치업(match-up)이 됐다. 문경은이 3쿼터에서 3점슛 3개를 포함해 14득점으로 살아나자 현대 신선우 감독은 문경은의 마크맨으로 이상민을 붙였다. 이상민은 문경은을 밀착 마크하면서도 승부처인 4쿼터에서 3점슛 3개를 연거푸 꽂아 넣으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웃은 건 문경은이었다. 그는 종료 3분30초 전 이상민을 앞에 두고 3점슛을 꽂아 넣어 추격에 불씨를 댕기더니 1분29초를 남기고는 역전 레이업슛마저 성공시켜 삼성의 역전승을 이끌었다.

프로농구 초창기엔 삼성(문경은)과 현대(이상민)에서 맞수 대결을 펼치더니 선수 말년에는 ‘서울 라이벌’ SK와 삼성으로 각각 유니폼을 갈아입고 다시 라이벌 대결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은 그 팀의 사령탑으로 변신해 라이벌 대결을 이어가고 있다. 문경은은 2011~12시즌부터 신선우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대행으로 SK를 맡아 어느덧 7시즌째 지휘봉을 잡고 있고, 이상민은 2014~15시즌을 앞두고 김동광 전 감독이 물러난 삼성 사령탑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문경은에게 ‘권력’을 이양한 신선우 감독은 이상민의 현대 시절 스승이고, 이상민에게 ‘바통’을 넘긴 김동광 감독은 문경은의 삼성 시절 스승이다.

삼성 이상민 감독과 KCC 추승균 감독의 관계도 각별하다. 둘은 프로농구 초창기 현대 시절 조성원(전 여자프로농구 국민은행 감독·명지대 90학번)과 함께 ‘이조추’ 트리오로 불리며 우승 3번, 준우승 2번을 함께 일궜다. 1997~98시즌부터 세 시즌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할 때는 외국인선수 조니 맥도웰과의 찰떡 호흡도 한몫 단단히 했다.

그런데 이상민이 삼성으로 이적한 뒤 2008~09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KCC 추승균과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을 펼쳤다. 두 팀의 라이벌 대결은 그룹 총수가 큰 관심을 갖고 경기장을 찾을 정도의 메가톤급 이벤트였다. 그리고 마지막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당시 허재 감독이 이끌던 KCC가 정상에 올랐고, 이상민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인자였던 추승균은 ‘선배’ 이상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우수선수(MVP)의 영예까지 안았다.

추승균은 허재 감독의 지휘봉을 이어받아 2015년 5월, KCC 사령탑에 올랐다. 첫 시즌이던 2015~16시즌 정규리그에서 막판 12연승의 놀라운 질주로 1위(36승18패)에 오르며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챔피언결정전에서는 고양 오리온에 아쉽게 2승4패로 물러나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2016~17시즌 하승진과 전태풍의 부상 공백으로 최하위(17승37패)까지 내려앉았다.

추승균 감독이 롤러코스터를 탈 때 이상민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감독 데뷔 시즌(2014~2015 시즌) 2할 언저리의 승률(2할4리)로 최하위(11승43패)에 머물다가 2016~17시즌엔 정규리그 3위(34승20패)에 이어 챔피언결정전 준우승까지 올랐다.

휘문중·고 선후배인 국보급 센터와 매직 히포


▎연세대 우지원이 농구대잔치에서 폭풍 드리블을 하고 있다. 우지원은 귀공자 같은 외모 덕에 ‘황태자’라는 애칭을 얻었다.
조동현은 2015년 4월, 만 39세의 젊은 나이에 kt 사령탑에 올라 화제가 됐다. 조상현(현 고양 오리온 코치)과 쌍둥이 형제로 유명한 그는 연세대 시절 ‘오빠부대’의 일원이었지만 쌍둥이 형만큼 유명세를 치르진 못했다. 하지만 코트에서 궂은일을 마다 않는 성실함과 꾸준함은 일찍이 인정받은 터였다.

조동현 감독이 이끄는 kt는 연세대 5년 선배 문경은 감독의 SK와 통신 라이벌이다. SK와 KT의 프로농구 대결은 ‘통신 대첩’으로 불린다. 농구와 휴대전화의 특성이 가미돼 경기 결과에 따라 “잘 터졌다” “안 터졌다”는 말이 나오니 감독들은 머리가 빠질 노릇이다.

조동현 감독은 부임 이후 두 시즌 동안 7위(23승31패)와 9위(18승36패)로 하위권을 면치 못했고, 이번 시즌에도 최하위권이다. 하지만 SK와의 라이벌 대결에선 전력의 열세에도 두 시즌 동안 7승5패로 앞섰다. 10월 21일 이번 시즌 첫 대결에선 접전 끝에 80대 81로 아깝게 졌다. kt는 올해 국내선수 신인 드래프트에서 허재 국가대표팀 감독의 차남인 가드 허훈(연세대)과 포워드 양홍석(중앙대)을 한꺼번에 영입하는 행운을 잡아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이상민 감독과 김승기 인삼공사 감독과의 오랜 라이벌 관계도 흥미롭다. 둘은 같은 1972년생이지만 초등학교에 1년 먼저 입학한 김승기가 1년 선배다. 둘은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플레이 스타일로 경쟁 관계를 이어왔다. 김 감독이 거침없이 탱크처럼 밀고 들어가는 저돌적인 인파이터라면, 이 감독은 지능적이고 예리한 아웃복서 스타일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터보 가드’와 ‘컴퓨터 가드’다. 둘은 청소년대표·대학대표·국가대표 선발 때마다 대표팀 강화(强化)위원들을 고민해 빠지게 했다. 유난히 국제대회에 강한 김승기와 국내 코트에서 돋보였던 이상민을 놓고 강화위원들은 ‘국제용’, ‘국내용’을 거론하며 맞섰다.

걸어온 길도 사뭇 다르다. 김승기는 용산고-중앙대-삼성전자-TG(현 DB)를, 이 감독이 홍대부고-연세대-현대전자(현 KCC)-삼성을 각각 거쳤다. 한솥밥을 먹었던 건 대표팀과 상무 시절뿐이다. 두 감독이 지난 시즌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자, 둘의 과거 라이벌 관계가 새삼 흥미를 끌었다.

챔피언전 미디어데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를 이렇게 얘기했다. 이상민 감독이 “승기 형이 주축인 용산고는 철옹성이었다. 고등학생 땐 ‘승기 형 정도만 했으면…’ 하고 부러워했다”고 치켜세웠다. 그러자 김승기 감독은 “상민이는 수비할 때 근성이 대단했다. 공을 따내려는 집념이 강했다. 그런 수비가 삼성 선수들에게 잘 이식된 것 같다”며 덕담을 건넸다. 두 팀을 이끈 두 사령탑은 매경기 명승부를 펼쳤고, 김승기 감독이 4승2패로 마지막에 웃었다. 승부가 결정된 6차전에선 86대86 동점에서 2.1초를 남기고 인삼공사 이정현의 결승골로 승패가 갈렸다.

LG 현주엽 감독은 90년대 학번 감독 6명 가운데 유일하게 이번 시즌을 앞두고 지난 5월 사령탑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다. 그는 고려대 시절, 휘문중·고 1년 선배인 연세대 서장훈과 당대 최고의 라이벌 대결을 펼쳤다. 사실 포지션은 센터와 포워드로 달랐지만 ‘매직 히포’ 현주엽이 ‘국보급 센터’ 서장훈을 막는 일이 잦아지면서 둘이 매치업되는 경우가 많았다.

둘의 첫 대결이던 1994년 MBC배 대학농구대회에선 현주엽의 고려대가 28점 차로 크게 졌다. 고려대 선수들은 전원 삭발을 하고 절치부심했다. 패자부활전을 통해 1차 결승까지 오른 고려대는 연세대에 승리를 거두고 최종 결승에서 다시 연세대와 맞붙었다. 현주엽은 동점 상황에서 종료 0.4초를 남겨두고 자유투 2개를 침착하게 모두 성공시키면서 대학 첫 무대를 감격의 우승으로 장식했다.

여기서 잠시 ‘오빠 부대’의 환호성이 하늘을 찌르던 1994년 연세대와 고려대 베스트5를 살펴보자. 현주엽이 1학년이던 1994년 당시 고려대는 1학년 현주엽과 신기성, 2학년 양희승, 3학년 김병철과 전희철이 베스트 5였다. 연세대는 문경은이 졸업했지만 4학년 이상민, 3학년 김훈·우지원·석주일, 2학년 서장훈이 베스트 5를 이뤘다. 전력상 이상민·서장훈이 있었던 연세대가 고려대보다 조금 우위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5년 이상민이 졸업하고 서장훈도 1년간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고려대가 전관왕을 달성했다. 특히 고려대는 20연승을 이어가다가 그해 가을철 대학연맹전 예선 첫 경기에서 홍익대에 3점 차로 덜미를 잡히면서 연승이 좌절됐다. 이유는 발목 부상으로 현주엽이 결장했기 때문. 고작 2학년이던 현주엽의 팀내 위상을 새삼 확인시켜준 경기였다.

서장훈은 1년 유학을 마치고 1996년 3학년으로 복학했다. 현주엽과 학년이 같아진 것이다. 즉, 둘이 3학년이던 1996년과 4학년이던 1997년은 자존심을 건 라이벌 대결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서장훈은 복귀하자마자 고려대의 7회 연속 우승 행진에 제동을 걸며 모교를 대학농구 정상에 복귀시켰다. 이후 연세대는 파죽지세로 44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1970년 대 말 고려대가 세운 49연승에 도전했다. 하지만 1970년대 말 고려대 이충희·임정명의 후예들은 기록 경신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 선봉에 현주엽이 섰다.

삼성화재 9연패 신화 쓴 ‘좌 진식-우 세진’

두 선수의 대학무대 마지막 대결은 1997~98 농구대잔치 4강 플레이오프였다. 1997년 초, 이미 프로농구가 출범했던 터라 당시 농구대잔치는 대학팀들의 잔치였다. 즉, 연·고대 중 4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는 팀에게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현주엽은 4강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평균 30점을 넣는 맹활약을 펼치며 서장훈과의 대결에선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승부는 2승1패로 연세대가 챔피언결정전 진출권을 따냈고, 내친김에 우승까지 차지했다.

현주엽 감독은 프로에서 ‘우승반지’가 없다. 그는 90년대 학번 대학 농구 스타 가운데 우승 반지가 없는 유일한 선수로 아쉽게 은퇴했다. 그리고 그 한을 감독으로 풀기 위해 도전장을 냈다. 개막 후 강팀들과 대등한 승부를 펼치는 등 ‘초보 감독’치곤 출발이 괜찮은 편이다.

프로농구와 함께 겨울스포츠 양대산맥인 프로배구도 90년대 학번 사령탑이 남자부 7개 팀 가운데 4명으로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 4명 역시 라이벌 관계로 얽혀 더욱 흥미를 자극한다.

우선 이번 시즌 삼성화재 지휘봉을 잡은 신진식 감독은 OK저축은행 김세진 감독과 현역 시절 같은 팀에서 한솥밥을 먹었지만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이 강한 사이였다. 사실 둘은 한국 배구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왼손잡이 김세진은 라이트 공격수로, 오른손잡이 신진식 감독은 레프트 공격수로 ‘우 세진-좌 진식’으로 불리면서 찰떡 콤비를 과시했다.

둘이 함께 뛴 삼성화재는 1997년부터 리그 9연패와 77연승이라는 믿기지 않는 불멸의 기록을 작성했다. 둘은 또 공교롭게도 슈퍼리그 최우수선수상(MVP)을 네 번씩이나 받았다. 김세진은 ‘월드 스타’라는 별명으로, 신진식 감독은 ‘갈색 폭격기’라는 별명으로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대표팀에서도 한국 배구 역사상 최고의 ‘쌍포’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둘은 17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에서 처음 만났는데, 처음에는 라이벌 의식이 아주 강했다는 게 두 사람의 뒤늦은 고백이다. 하지만 같은 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1년 후배인 신진식은 성균관대 졸업 당시 삼성화재의 라이벌팀 현대자동차서비스로 갈 뻔했다.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이었던 계약금 10억원에 가계약까지 맺었는데, 막판에 삼성화재로 선회했다.

만약 신진식이 현대 유니폼을 입었더라면 삼성화재 김세진과 한국 배구 역사상 세기의 라이벌전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삼성화재에서 두 선수가 함께 경기에 나섰을 때 한 사람이 잘하면 한 사람은 부진해지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훗날 “아마도 둘 중 한 명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삼성화재 신진식 감독은 2년 후배지만 2년 먼저 프로팀 사령탑에 올라 지난 시즌 현대캐피탈을 V리그 남자부 정상으로 이끈 최태웅 감독과 팀 간 라이벌 관계다.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은 전통의 맞수인데다 오랫동안 신치용-김호철 두 초등학교 동창 간 사령탑 라이벌 대결로 열기를 더했다. 이제는 그 바통을 신진식-최태웅 두 젊은 감독이 이어받았다.

소속팀 떠나 진한 우정 나눈 김세진-김상우

김세진 감독은 우리카드 김상우 감독과 친구 사이다. 고향과 출신 학교도 다르고 심지어 대학 때는 성균관대(김상우)와 한양대(김세진)로 갈리며 라이벌 팀에 있었지만 경기가 없는 날에는 자주 만날 정도로 절친이었다.

둘은 비교적 빨리 프로팀 지휘봉을 잡았다. 김세진 감독은 2013년 5월 신생구단 러시앤캐시(현 OK저축은행)의 초대 감독에 올랐다. 첫 시즌에는 다소 고전했지만, 이듬해인 2014~15 V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스승’ 신치용 감독이 이끌던 최강 삼성화재를 3전 전승으로 꺾고 우승하면서 배구판을 흔들어놓았다. 김 감독은 2015~16시즌에도 최태웅 감독의 현대캐피탈을 3승1패로 제압하고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삼성-현대 양강구도가 강했던 배구판에서 두 팀을 한 번씩 정상에서 물리치며 돌풍의 주인공이 됐다.

김상우 감독은 2010년 2월 LIG 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다가 그해 4월, 3년 계약을 맺고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다. 감독 데뷔는 김세진 감독보다 빨랐던 셈이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절반밖에 지나지 않은 이듬해인 2011년 9월 느닷없이 경질됐다.

당시 김상우 감독은 팀을 5년 만에 준플레이오프에 진출 시켰지만 구단으로부터 이런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5년 4월, 우리카드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3년 7개월 만에 프로배구 사령탑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2015년 7월 KOVO컵 대회 결승에서 만났다. 절친 대결에다 바로 직전 시즌 V리그 꼴찌팀 우리카드와 직전 시즌 V리그 우승팀 OK저축은행의 대결이었다. 결과는 세트스코어 3대 1로 김상우 감독의 우리카드가 승리하고 정상에 올랐다.

‘겨울 스포츠의 꽃’ 프로농구와 프로배구 시즌이 한창이다. 양복 입고 돌아온 그때 그 오빠들의 ‘2라운드’가 코트를 달구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90년대 학번 사령탑 대결을 눈여겨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가 될 것 같다.

- 김동훈 한겨레신문 스포츠 전문기자 cano@hani.co.kr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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