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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김정은식 ‘신년사 정치’의 노림수 

자책성 발언까지 등장… 새해 깜짝쇼는 뭘까 

1만 자에 달하는 신년사, 선 채로 육성으로 읽어… 핵무력 완성 선전하며 미국에 대담한 제의할 수도

▎김정은의 2017년 신년사 발표 모습. 서면으로 신년사를 발표했던 아버지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육성으로 1만 자를 읽어 내려간다.
2018년 1월 1일 낮 12시30분. 한국 외교안보 부처의 관계자들은 일제히 출근해 사무실의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을 것이다. 북한 정세분석 등 업무를 위해 북한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해놓은 텔레비전 속 북한 관영 조선중앙TV는 곧 한 사람을 클로즈업할 터이다. 신년사를 육성으로 읽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다.

만 34세로 추정되는 젊은 지도자 김정은. 그의 강점 중 하나는 이미지 정치에 능하다는 데 있다. 북한 내부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즐긴다. 매년 1월 1일, 전 세계 지도자들이 발표하는 신년사 역시 주목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십분 활용한다. 자신이 직접 연단에 서서 육성으로 신년사를 읽어 내려간다. 어떤 폭탄선언을 할지 모르니, 주변국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2016년부터는 그래도 사정이 나아졌다. 그 전에는 몇 시에 신년사를 발표할지 몰라 아침 일찍부터 조선중앙TV 화면을 주목하고 있어야 했다. 대개 오전 9시30분(평양 시간 오전 9시)에 시작하곤 해 북한 업무 관계자들은 새해 아침 떡국도 제대로 못 먹고 출근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2016년부터 “중대방송이 있겠다”는 나름의 친절한 안내 멘트와 함께 12시30분(평양 시간 정오)에 신년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 역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북한이 가진 최고의 확실한 무기는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외교안보 부처 관계자는 이를 두고 “신년사 발표를 가지고 이렇게 이목이 집중되는 건 가히 ‘신년사 정치’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길이도 만만찮다. 2017년 1월 1일 김정은이 육성으로 읽어 내려간 신년사의 글자 수는 1만463자에 달했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12월부터 북한 각 기관의 엘리트들은 머리를 싸맨다. 한 고위급 외교관 출신 탈북자는 “12월이면 모든 브레인이 평양에 모여 신년사 메시지를 다듬고 원고에 들어갈 내용을 정리한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계획 등을 담은 보고서를 각 기관에서 제출하면 이를 노동당 선전선동부와 조직지도부가 검증한다. 그 뒤 노동당 핵심 부서로 비서실 역할을 하는 서기실에서 신년사 형식으로 만들고, 김정은에게 보고된다. 김정은이 수정과 검토를 지시하고 확정 결재를 한 뒤에야 신년사가 완성된다. 김정은이 생각하는 정책 우선순위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나침반이 신년사인 셈이다. 김정은은 이렇게 만들어진 신년사를 육성으로 읽는 모습을 녹화하고, 관영 매체를 통해 1월 1일 일제히 공개한다.

김정은이 신년사를 발표하고 나면 주민들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신년사 총화 학습’이 북한 전역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한 탈북자는 “신년사가 나올 때마다 전체를 달달 외워서 암송대회를 열기도 했다”고 전했다.

“내가 모든 걸 통제한다”는 자신감의 표현


▎김정은(오른쪽)은 종종 뿔테 안경을 쓰고 나타난다. 할아버지 김일성(왼쪽) 따라 하기 행보 중 하나로 보인다.
김정은만 ‘신년사 정치’를 해온 건 아니다. 북한은 김일성 때부터 신년사를 대내외 메시지 전달의 주요 통로로 활용해 왔다. 하지만 김정은은 유독 신년사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2011년 12월 17일 사망한 아버지 김정일과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김정일의 신년사 정치는 조용했다. 김정일 본인이 앞에 나서서 떠들썩하게 이목을 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대신 서면으로 신년사를 배포했다. 북한 주민들에겐 ‘은둔의 지도자’에 가까웠다. 김정은은 다르다. 신년사를 육성으로 발표하면서 인민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정치를 한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정은은 신년사 발표를 주민과의 직접적인 소통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며 “은둔형이었던 아버지와 달리 ‘인민을 위한다’는 애민(愛民)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적극 심으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1만 자가 넘는 신년사를 육성으로 읽으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김정은은 연단에 서서 읽어 내려가는 방식을 택하는데, 2017년 신년사 발표는 약 30분이 소요됐다. 젊은 지도자로서의 체력을 과시하는 장치도 되는 셈이다. 여기에 본인이 북한체제 전반을 통제한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신년사는 정치·경제·사회를 총망라하는데, 김정은이 직접 신년사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모든 정책을 틀어쥐고 간다’는 자신감을 인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후계자 수업이 길지 않았던 젊은 김정은으로서는 신년사 발표가 자신의 권위와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요긴한 수단이자 장치인 셈이다. 김용현 교수는 “신년사는 김정은이 자신이 1년간 체제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큰 틀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에 최적의 기회”라고 설명했다.

고개 숙이고 자책성 발언 등 깜짝 연출도

지난 1월 1일, 2017년 신년사 녹화를 실시간으로 함께 시청하던 통일부 기자실은 몇 차례 술렁였다. 두 가지 포인트 때문이었다. 김정은이 “내 능력이 안 따라가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는데 올해는 보다 더 분발하고 전심전력하여 인민을 받들겠다”고 자아비판을 한 것이다. 김정은은 또 신년사를 읽기 전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북한에선 ‘무(無)오류의 수령’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최고지도자에겐 결점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고지도자가 본인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인민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김정은이 자신의 애민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선대와의 차별화를 꾀한 ‘깜짝쇼’라는 해석이 나왔다.

김정은은 또 젊은 지도자답게 새로운 방송 장치도 선보였다. 신년사를 읽는 김정은의 모습만 클로즈업한 게 아니라 특정 내용이 나올 때마다 관련 사진이나 영상을 덧붙여 편집하는 방식이다. 2016년 신년사에선 모두 127장의 자료 사진이 방영됐는데, 2017년엔 210장으로 늘어났다. 김정은이 ‘비주얼’에도 신경 쓰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연설 중간중간엔 녹화 장소로 추정되는 노동당 당사의 전경도 비쳤다. 주요 대목마다 누가 치는지 모를 박수소리도 음향효과로 곁들여지는데, 미국 의회에서 대통령 연설 중간중간에 박수를 치는 것을 벤치마크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2017년 신년사엔 이 박수소리 음향효과가 37번이나 등장했다.

차별화 전략을 꾀하는 김정은이지만 롤모델은 있다. 할아버지 김일성이다. 육성 발표라는 형식뿐 아니라 패션도 다분히 김일성 따라 하기의 면모를 보인다. 김일성이 즐겨 쓰던 뿔테 안경을 쓴 것이 대표적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 향수를 일으키기 위한 장치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통성을 굳건히 보여주려는 의도가 읽힌다. 김정일의 본처가 아니었던 재일동포 고용희(고영희로도 알려짐)가 낳은 아들인 김정은은 김일성 생전에 적통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김일성과 김정은이 찍은 사진도 없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김일성의 인정을 못 받았다는 것이 김정은에겐 가장 뼈아픈 부분일 것”이라며 김정은의 김일성 따라 하기엔 이런 배경도 깔려 있다고 해석했다.

핵·미사일 도발 자화자찬 후 평화공세 할 듯

김정은의 신년사는 대내용만은 아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북쪽으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현해탄 건너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을 모두 염두에 둔 메시지다. 김정은이 2018년 1월 1일 마이크를 잡고 할 연설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

김정은에게 2017년은 숨가쁜 도발의 해였다는 점을 먼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북한의 신년사는 지난해의 평가와 새해의 전망을 한꺼번에 담는다”며 “2017년 강행한 6차 핵실험과 대륙형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내용을 강조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일부에선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핵무력 완성 위업을 달성했다”며 ‘핵보유국 선언’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김정은은 본인의 입으로 핵보유국 주장을 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아버지 사망 뒤 집권 직후인 2012년 4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서문에 “우리 조국을 불패의 정치사상 강국,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 강국으로”라는 표현을 넣으며 시동을 걸었다. 그 후 3~6차 핵실험과 함께 핵탄두를 미사일에 탑재해 미국 본토까지 사정권에 넣을 수 있도록 한 ICBM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지난 11월 29일 기습 강행한 화성-15형 미사일 역시 ICBM 급이다. 그 여세를 몰아 신년사에서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육성으로 처음 선언할 것이라고 예상됐다.

그러나 김정은은 마음이 다급했다. 신년사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지난 12월 12일 평양에서 진행한 군수공업대회에서 김정은은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폐막식 연설에서 “국가 핵무력 완성의 대업을 이룩한 것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사생결단의 투쟁을 쟁취한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역사적 승리”라는 표현을 썼다. 이 사실은 이튿날인 13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신년사까지 기다리지 않고 허를 찌른 것이다.

신년사에선 이 같은 내용을 재차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2017년 신년사에선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발사가 마감 단계”라고 밝히면서 “우리 식 주체 무기를 더 많이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8년 신년사에선 지난해의 각종 핵·미사일 도발을 성과로 선전하는 데 상당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신년사의 키워드 중 하나는 자신감인 셈이다.

서강대 김영수 교수는 “이제 핵무력을 완성했으니 김정은 본인이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낼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눈치를 봐왔지만 이젠 자주와 주체의 길을 걷겠다는 것을 주요 메시지로 밀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다.

이 같은 내용은 김정은의 권위를 높이는 데도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김일성이 주체의 시대를 열었고, 김정일이 선군 시대를 끌었다면 김정은은 미국과 맞설 수 있는 자주 국가를 만들었다고 선전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침 2018년은 북한이 정권 수립 7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0’과 ‘5’로 끝나는 소위 ‘꺾어지는 해’를 중시하는 북한이 중요하게 고려할 만한 계기다.

김정은, 문재인 대통령 실명 거론할까


▎주민들 사이에선 신년사 암송대회도 열린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도 신년사를 1면에 통째로 게재한다. 오른쪽은 2013년 1월 1일 노동신문. / 사진:연합뉴스
핵무력을 완성했다는 자신감과 여유를 피력한 뒤 김정은은 평화를 논할 가능성이 크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김정은은 당분간은 핵·미사일 도발에 주력하기보다 이후 단계의 주도권을 어떻게 쥘 것인지를 고민할 것”이라며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협상을 요구한다며 미국에 대담한 제의를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남북관계 역시 주요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2017년 신년사에서도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자주통일 대통로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진보 정부의 탄생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올리브 가지를 내미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2017년을 핵·미사일 도발의 해로 만들면서 이는 선언적 내용에 그쳤음이 드러났다.

2018년 신년사에선 어떨까. 이번에도 남북관계는 상당히 중요 포인트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2월의 평창겨울올림픽과 6월의 지방선거 등 굵직한 일정을 앞둔 상황이기도 하다. 동국대 김 교수는 “북한이 남북관계를 주도하겠다는 식의 표현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며 “북한으로서는 ‘우리가 핵을 보유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대화를 해줄 수 있다’는 내용을 예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심스러운 시각도 존재한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압박 메시지와 함께 지방선거를 앞두고 남남 갈등을 조장하는 식의 내용이 포함될 가능성을 예측하는 시선이다. 김영수 교수는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에 예속되는 듯한 행동을 할 경우 함께 갈 수 없다는 식의 강한 압박을 할 가능성이 크다”며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면 지방선거를 앞두고 남쪽 흔들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할지 여부다. 김정은은 2017년 신년사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동족 대결” “매국 세력”이라는 표현을 동원해 비난했다. 북한이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등에서 박 전 대통령을 실명 비난한 것은 새롭지 않으나 김정은이 직접 육성으로 비난한 것은 처음이었다. 탄핵소추안이 이미 가결된 상태이긴 했지만 이례적이다.

현재로선 김정은이 문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김근식 교수는 “북한이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는 것은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고 판단했을 때 비난을 하기 위해서다”라며 “현재 상황에선 실명까지는 거론하지 않되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끌고 가기 위한 제스처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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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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