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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인터뷰] 싱가포르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 전이경 

“20년 만의 귀환, 평창올림픽 참가 설레요” 

정영재 중앙일보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올림픽 金 4개에 빛나는 ‘레전드’, 자녀 유학 중에 2015년부터 대표팀 감독 맡아…쇼트트랙 개인전은 참가 선수들 모두 우승후보, 한국 금메달 넷 예상

▎전이경은 올림픽 금메달 4개에 빛나는 쇼트트랙의 레전드다. 2015년부터 ‘불모지’인 싱가포르 대표팀을 맡고 있는 전이경은 이번 평창올림픽에 샤이엔 고를 데리고 참가한다. / 사진:전이경
한국 쇼트트랙의 전설 전이경(41)이 ‘겨울이 없는 나라’ 싱가포르에 겨울올림픽을 선물했다. 싱가포르의 샤이엔 고(18)가 2018 평창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이경은 ‘전설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2015년부터 싱가포르 쇼트트랙 대표팀을 맡고 있는 전이경 감독이 지도하는 샤이엔 고는 지난 11월 열린 국제빙상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3차 대회에서 여자 1500m 예선 7조에 출전, 2위를 했다. 앞서 달리던 선수들끼리 뒤엉켜 넘어지는 바람에 얻은 행운이지만 어쨌든 그는 준결승에 진출했고, ISU 랭킹 포인트를 얻어 36명 중 36위로 평창행 티켓을 잡았다.

전이경은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998년 나가노올림픽 1500m와 3000m 계주에서 연속 우승했다. 올림픽 금메달만 4개를 목에 건 한국 쇼트트랙의 레전드다. 그는 “상상도 하지 못 한 일이 벌어졌어요. 20년 만에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 올림픽 무대를 다시 밟는다는 게 꿈만 같아요”라고 말했다.

전 감독에게 전화를 했더니 선수들을 데리고 호주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길이라고 했다. 질문지를 보내주면 비행기 안에서 답안을 작성하겠다고 했다. 며칠 뒤 카톡에 ‘기자님. 멘붕입니다. ㅠㅠ’라는 문구가 떴다. 세 시간 넘게 써서 분명히 저장했는데 보내려고 다시 열었더니 파일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메일로 답을 받았고, 전화로 보충 질문을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에너지가 넘쳤다.

자녀교육을 위해 싱가포르로 이주했다가 대표팀을 맡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온 지 벌써 3년이 돼가네요. 2014년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둘째가 중학교 진학 대신 유학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싱가 포르를 선택한 건 한국과 가깝고 안전하며 2개 언어(영어·중국어)를 배울 수 있어서였죠. 그런데 싱가포르빙상연맹에서 쇼트트랙 대표팀을 맡아 달라고 제안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빙상종목에서는 개발도상국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선수들을 키우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수락했죠.”

“동남아 빙상 선수들에게 희망 주고 싶어”


▎싱가포르 쇼트트랙 대표선수인 루카스 응(왼쪽), 샤이엔 고와 함께 포즈를 취한 전이경 감독. / 사진:전이경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겠습니다.

“막상 팀을 맡고 보니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기본기가 떨어지는 데다 훈련에 임하는 자세에 진지함이 별로 없고 실력을 늘리기엔 훈련량이 너무 적었습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하루 쉬고 매일 훈련하고 있어요. 그럴 듯하게 한 줄로 맞춰서 활주가 가능하기까지 6개월 걸렸습니다. 4년 뒤 베이징겨울올림픽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가능성이 보이는 어린 선수들도 있고요.”

올림픽 티켓을 딴 샤이엔 고는 어떤 선수인가요?

“캐나다에서 자란 샤이엔은 육상과 아이스하키를 하다 쇼트트랙으로 종목을 바꾼 지 3∼4년밖에 안 됐습니다. 쇼트트랙도 아이스하키처럼 어중간한 자세로 타고, 아직은 장점보다는 고칠 점이 많은 선수죠. 이번 올림픽 출전은 100% 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아직 어리고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 출전이 그녀의 운동선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평창올림픽은 말 그대로 참가에 의의를 둬야겠지만 이번 기회가 샤이엔뿐 아니라 싱가포르, 나아가 동남아 빙상 선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줄 거라 믿습니다.”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남아 쇼트트랙의 현황이 궁금합니다.

“현재까지 올림픽 사이즈의 링크를 갖고 있는 나라는 몇 안됩니다. 최근에 인도네시아에 링크가 하나 생겼고, 지난 8월 2017 동남아시안 게임(SEA Games)에서 처음으로 쇼트트랙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돼 나라마다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남아 대표팀은 모두 한국인 코치가 가르치고 있고, 선수들을 한국으로 보내 훈련을 받게 합니다. 아직은 선수층이 얇고 훈련 프로그램이나 전문가가 부족해서고, 한국 선수들 틈에서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려는 의도도 있죠.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동남아도 동계 스포츠 참가의 포문을 열었으니 실내링크가 있는 나라에서는 더 관심을 갖게 되겠죠. 또 동남아의 겨울올림픽 참가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입장에서도 반갑지 않을까요?”

돌발과 변수가 쇼트트랙의 묘미

평창올림픽 쇼트트랙에서 한국 선수단의 성적을 전망한다면?

“쇼트트랙은 변수가 많아 예측이 쉽지 않은 종목이죠. 지금까지는 한 명의 특출한 에이스가 주축이 돼 경기를 해 왔다면 이번 올림픽은 개인전 출전 선수 전원이 금메달 후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특히 남자 경기는 정말 예측불허 오리무중입니다. 그만큼 실력이 평준화되었고 개성 강한 선수들이 올림픽을 기다리고 있어요. 메달 색깔은 당일 컨디션이나 경기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고요. 조심스럽게 예상을 하자면 금 4, 은 2, 동 2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 선수는 어떨까요?

“빅토르 안, 대단한 선수죠. 나이 차가 있어 같이 운동해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많은 선수가 롤모델로 삼고 그의 경기를 보면서 쇼트트랙을 시작하고 메달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영화 같은 파란만장한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죠. IOC의 징계로 러시아가 평창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지만 개인 자격으로 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쇼트트랙 선수로선 나이가 많고 체력적인 열세로 경기력이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지만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어요. 충분히 올림픽에 맞춰서 컨디션을 조절할 능력이 되는 선수라 전성기만큼은 아니더라도 평창에서 분명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거라 생각합니다. 분명한 건 스케이트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 친구라는 거죠.”

쇼트트랙은 짬짜미·실격 등 부정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이 너무 많아 싫다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요.

“그게 바로 쇼트트랙입니다. 짬짜미에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는 관점과 잣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국제대회에 나간 대표팀에서 더 많은 선수를 결승에 올리기 위해 같은 조 선수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건 짬짜미가 아니라 팀플레이가 되겠죠. 그런데 국내 대회에서 같은 팀 선수끼리 맞춰서 타는 건 팀플레이가 아닌 짬짜미가 되는 건가요? 또 팀플레이를 하기로 하고 나왔지만 특정 선수가 결과에 불만을 갖고 그걸 터뜨려버리면 짬짜미가 돼버리는 건지요? 경기를 작전에 맞게 풀어갈 수도 있지만, 작전을 갖고 팀 플레이를 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될 때도 있거든요. 가장 억울한 건 상대선수의 반칙으로 인해 넘어지는 경우인데 상대선수는 당연히 실격 처리 되겠지만 그 반칙으로 피해를 본 선수는 억울하겠죠. 다행히 경기가 준결승 정도까지면 AD(Advance·자동 출전 규정)로 구제를 받아 올라갈 수 있지만 결승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거야말로 땅을 칠 일이죠. 그러나 이 모든 게 쇼트트랙의 일부고 ‘운이 없다’는 표현보다는 ‘운도 실력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이런 점들 때문에 쇼트트랙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는 거라 생각합니다.”

“올림픽, 상업화보다 순수한 인류 제전으로 가야”

평창올림픽 개막이 얼마 안 남았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삼수 끝에 유치한 겨울올림픽이고,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지만 관심과 열기가 좀처럼 뜨지 않는다. ‘최순실 게이트’의 그림자가 아직 걷히지 않았고, IOC 징계로 인한 러시아의 불참, 북핵 변수 등도 올림픽 성공을 낙관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다. 무엇보다 국민 사이에서 “올림픽이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강원도 사람들만 좋아진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여전히 높다.

평창올림픽이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들이 많은데요.

“올림픽 성공의 기준은 ‘호응도+흑자운영’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겁니다. 일단 흑자 대회는 물 건너간 것 같고, 국민의 호응을 받아야 입장권이 많이 팔리고 현장 분위기가 뜨거워지겠죠. 최순실 게이트를 포함해 여러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어차피 하는 건데 멋지게 치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성원해주셨으면 합니다. 대회가 설 연휴와 겹치는데 해외여행 계획을 평창올림픽 구경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설 연휴에 가족·친지끼리 모여서 TV로 올림픽을 즐기고 응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올림픽 시설물의 사후 활용을 포함한 레거시(유산)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

“경기장 시설에 대한 건 참 어려운 상황인 것 같아요. 어떤 시설도 인구 대비 활용도를 따지면 답이 잘 안 나옵니다. 애초에 지을 때 가변석을 두거나 옮겨서 다시 지을 수 있게 설계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현재 논의되는 사후 활용 방안도 정치적 고려와 지역갈등 등으로 인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시설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평창올림픽을 통해 스키·썰매 등 동계 종목이 고르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면 그게 가장 확실한 레거시가 아닐까요. 썰매의 윤성빈(스켈레톤), 원윤종-서영우(봅슬레이), 스키의 이상호(스노보드), 최재우(모굴) 선수 등이 메달을 딴다면 그 종목 인지도가 높아지고 저변도 확대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구온난화, 겨울올림픽 유치 희망도시의 감소 등으로 IOC도 고민이 많을 것 같은데요. 겨울올림픽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이 올림픽 상업화와 규모 확대에 앞장섰는데요. 지금은 지나친 상업화와 프로화로 인한 문제가 큽니다. 그래서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올림픽이 순수한 인류의 제전, 아마추어리즘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 방향에 동의합니다. 몸집을 줄이고, 가능하면 있는 시설을 재활용하고 개·보수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겨울올림픽은 정말 추운 나라, 모든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나라에서 돌아가면서 개최하면 어떨까 싶어요.”

“스포츠로 청소년의 건강하고 균형 잡힌 생활 도와야”


▎1. 1998년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겨울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1000m에서 금메달을 확정한 전이경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 2. 여섯 살배기 딸 박세연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전이경 감독. 그는 이 사진을 카카오톡 ‘문패’로 걸고 있다. / 3. 2005년 전이경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가 부산의 한 아이스링크에서 아이스하키 연습을 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IOC 위원이 꿈이라고 하셨는데요.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꿈에 가까이 갔던 적도 있었죠. 하지만 어느 순간 거기까지 가기엔 제 그릇이 크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건 능력보다는 성격의 문제 같아요. 운동선수답게 성격이 좋고 활달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쉽게 상처받고 극히 소심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더라고요. 지금은 조용히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사는 게 좋아요. 현재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무언가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하던 대로 하다 보면 또 어떤 변화가 생기겠죠.(웃음)”

전이경 감독이 남 앞에 잘 나서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현역 은퇴 후 부산에 내려가 꿈나무들을 가르쳤다. 2010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에서 영입을 추진했고 “전이경이 한나라당에 입당했다”는 뉴스가 퍼졌다.

그러자 젊은 네티즌을 중심으로 비난 여론이 빗발쳤다. 전 감독은 “그때가 신혼여행 전후였는데 여행이고 뭐고 엉망진창이 됐죠. 원래 정치에 뜻도 없었고 출마도 하지 않았는데 ‘정치 야심을 좇아 꼴통 보수집단에 들어갔다’며 융단폭격을 당했어요. 그 후론 인터넷에서 제 이름을 찾아서 기사 검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전이경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돼 연세대 4학년까지 태극마크를 달았다. 23세 이른 나이에 은퇴한 뒤에는 연세대에서 체육교육학 석사과정을 했고, 골프를 배워 세미프로 자격증까지 땄다.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한 적도 있다.

전 감독에게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10년6개월간 스케이팅만 하면서 태릉선수촌에서 청춘을 보낸 게 아쉬워서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어요. 골프는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배웠는데 어깨가 아파 지금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잠든 딸아이 얼굴 쳐다보는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요”라며 웃었다.

그는 “스포츠를 통해 아이들이 배우고 얻는 게 정말 많아요. 그건 책에서 보고 배운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 아이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컴퓨터·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어요. 스포츠를 통해 건강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도와야 합니다”고 했다. 올림픽 4관왕 출신답게 똑 부러지는 말이었다.

- 정영재 중앙일보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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