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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물건(5)] ‘궁중요리 적통’ 한복려의 ‘푼주’ 

“전통 잇는 사명의 소중한 증거입니다” 

글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ins.com
조선 궁중요리의 마지막 유산… 격조 있어 청화백자로 음식 담으면 맛과 멋이 ‘활짝’

세월을 이겨낸 물건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상궁이 제자에게 물려준 청화백자도 그렇다. 왕조는 몰락했을지언정 그 요리의 전통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던 상궁과, 그 대를 이은 모녀 제자의 이야기.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장과 애장품인 푼주 그릇. 조선의 마지막 주방상궁 한희순이 한 원장의 어머니 황혜성에게 물려준 것이다.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장의 겨울은 유자 향기로 시작된다.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제2대 기능보유자인 어머니 고(故) 황혜성(1920~2006) 씨는 초겨울 무렵 항상 유자로 화채를 만들곤 했다. 노랗고 하얀 유자 화채도 별미지만 그것을 담은 그릇은 각별했다. 황 선생이 자신의 스승인 고(故) 한희순(1889~1972) 상궁에게서 물려받은 푼주라는 그릇이었다. 푼주는 밑은 좁고 아가리는 넓은 사기 그릇을 이르는 말이다. 한 상궁이 황 선생에게 물려준 푼주는 청화백자로, 묵직한 품위를 자아내는 흰색 바탕에 목숨 수(壽)자 등이 단아하게 그려져 있다.

이 푼주에 유자 화채를 담으면 그윽한 유자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황 선생은 “기분이 참 좋구나”라며 맏딸 한 원장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한 원장은 그 미소를 보며 “이제 겨울이 시작되는구나”라고 실감했다고.

“유자 화채는 향이며 모양새가 참으로 고급스러운 우리 전통의 디저트에요. 유자의 노란색과 하얀색, 그리고 고명의 석류와 잣까지, 마치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과 같죠. 푼주에 담으면 그 맛과 멋이 최고조에 이릅니다.” 한 원장의 말이다. 지금도 초겨울이면 유자화채를 만들곤 하는 이유다.

스승 따라 이사 다니면서 배우며 뒷바라지


▎아 가리가 넓은 푼주 그릇에 유자 화채를 담은 모습. 푼주에 유자 화채를 담으면 향이 확 퍼져 공간에 상쾌함이 가득하다.
이 푼주를 한 상궁이 황 선생에게 물려주기까진 사연이 있다. 황 선생은 일본 교토(京都)에서 가사과 공부를 마친 뒤 서울로 돌아와 1940년 숙명여전(현 숙명여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영양학을 전공한 신여성이었다. 그런데 일본인 교장이 황 선생에게 “조선 요리를 가르쳐보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했다. 당시엔 조선 궁중요리가 하나의 분야로 체계화돼 있지 않을 때였다. 황 선생은 “조선인으로 조선 전통 요리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조선 궁중요리법을 하나둘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교장의 도움 등으로 찾아간 곳이 창덕궁 낙선재. 순종 계비인 순정효황후를 모시던 한희순 주방상궁을 스승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몰락한 왕조였지만 그 최후의 상궁들은 서릿발 같은 자존심으로 낙선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황 선생에게 쉬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황 선생은 생전에 남긴 글에서 “궁인들은 나를 바깥사람이라며 견제하고 눈길도 주지 않고 서럽게 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라고 회고했다. 궁중음식은 용어부터 달랐다. 된장찌개 대신 토장 조치, 장아찌는 장과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알아듣지를 못해 물어보면 “음식에 침 튀기기 말라”며 혼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황 선생은 쉬 물러서지 않았다. 퇴근 후 전차를 타고 낙선재 소주방으로 달려가 허드렛일 돕기부터 시작했다. 쪼그리고 앉아 숯 풍로를 불어가며 순정효황후 상에 오를 12첩 반상의 기본을 배워나갔다. 이런 황 선생의 열정과 끈기에 한 상궁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선생은 한 상궁을 “스승님”으로 부르게 된다. 한 상궁이 해방 후 궁에서 나와 서울 왕십리 친척집에 머물게 됐을 때에도 황 선생은 아예 그 근처로 집을 옮겨갔다. 평생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한 원장은 말한다. “일부 사람은 ‘궁중음식이 뭐 별 거냐’라고도 말하지만 궁중요리는 그 나라 음식 문화의 뿌리예요. 자칫 그대로 역사 속으로 묻힐 수 있었던 그 뿌리를 어머니께서 복원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식도 글로벌이라고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의 전통을 지켜가야죠. 그 전통의 정수가 궁중요리인 셈이고요.”

“말초적 ‘먹방’보단 전통의 깊이 지켰으면”


▎한복려 원장이 푼주에 담을 유자 화채를 준비하는 모습.
한 상궁은 제자를 ‘황 선생’이란 존칭을 써가며 아꼈다. 자신이 쓰던 다식(茶食)판이며 푼주 등도 물려줬다. 황 선생을 자신의 후계로 인정했다는 의미다. 조선 왕조는 사라졌지만 그 궁중요리만큼은 제자를 통해 남기고 싶다는 마지막 간절한 희망도 있었을 터이다. 황 선생은 그 뜻을 알기에 조선 궁중요리의 맥을 잇는데 평생을 헌신했다. 한 상궁으로부터 30년간 전수받은 조리법을 기록했고 재료를 계량화하는 등 조선 궁중음식을 체계화하는 역할을 했다. 한복려 원장을 포함한 딸 셋 모두에게도 궁중요리를 전수시켰다. 그 노력의 결과로 1971년, 조선 궁중음식은 국가로부터 무형문화재 제 38호로 지정됐고, 한 상궁이 제1대 기능보유자가 됐다. 이듬해 한 상궁은 유명을 달리했고, 황 선생이 뒤를 이었고, 한 원장이 제3대 기능보유자가 됐다.

황 선생은 여러 대학에서 조선 궁중음식을 가르쳤는데, 그때마다 한 상궁에게서 물려받은 소품들을 가져갔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요리 문화의 유물을 수강자들의 눈에 직접 보여주면서 체감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데 열정이 지나쳤던 탓일까, 그 와중에 하나둘씩 유실돼 지금 남은 것은 푼주 하나뿐이라고 한다. 한 원장은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푼주는 한 상궁께서 물려주신 전통의 명맥을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는 증거와도 같아요. 그만큼 소중하지요.” 한 원장은 하나 남은 이 ‘증거’가 사라질까, 애지중지한다. 이 푼주를 본뜬 그릇을 새로 만들어 시연이나 강의 때 쓰고 있다.

푼주가 주는 푸근함은 우리네 전통의 특징과도 닮았다. 한 원장은 “넉넉한 크기에 유자 화채를 담아도 좋지만 나물을 무치거나 고기를 재울 때도 그만이에요. 그 푸근한 모양새와 쓰임새가 우리네 문화와 닮지 않았나 싶어요. 이 푼주를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고, 든든한 기분이 듭니다.”

한 원장은 제3대 기능보유자로 어깨가 무겁다. 한 상궁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인들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그의 목표다. 조선의 대표적 국가 의례기록 문서인 의궤 중, 정조 시대 편찬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상세히 기록된 8일간의 연회 음식을 하나하나 재현하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다. 고문서를 오가며 재료와 조리법을 현대적으로 풀어내고, 이를 아예 레시피북과 스토리를 함께 담은 [수라일기]라는 책으로 준비 중이다.

그는 말한다. “요즘 ‘먹방’이다 뭐다 해서 음식에 대한 관심이 뜨겁긴 하지만 말초적인 데만 집중하는 듯해 아쉬운 부분도 있어요. 우리가 우리의 전통을 먼저 깊이 있게 지켜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조선 최후의 주방상궁 한희순이 남긴 푼주 그릇이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 글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ins.com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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