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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13)] 고종, 수신사 김기수를 파견하다 

“저들의 물정을 잘 탐지하도록 하라”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강화도조약을 양국의 관계 복원 정도로 여긴 개화파… 조·일 조약 권유했던 淸은 일본의 3국 협력 제안에 반색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은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척사파의 표적이 됐다. 김홍집의 행차를 그린 그림.
신헌과 구로다가 강화도에서 협상할 때 조선 양반들이 보인 반응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조선 양반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 대군에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조선 양반들은 항복파와 항전파로 갈려 싸웠다. 최명길로 대표되는 항복파는 치욕보다 생존이 우선이라 주장하며 항복을 주장했다. 반면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항전파는 치욕스럽게 생존하느니 차라리 다 같이 죽자며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결국 최명길의 항복 문서로 조선은 살아남았지만 항복파는 배신자로 또 굴종자로 수백 년 동안 지탄을 받아야만 했다. 반면 김상헌을 필두로 하는 항전파는 의리의 화신으로 또는 정의의 화신으로 칭송받았다.

조선후기를 주도한 양반은 특히나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한 사림파였다. 사림파는 현실과 이념이 충돌할 때, 현실과 생존보다는 명분과 의리를 택했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유교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저 멀리 중국의 백이·숙제로부터 고려 말의 정몽주에 이르기까지 사림파가 숭상하는 위인은 명분과 의리를 위해 죽은 유교 순교자들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김상헌 역시 유교 순교자로서 칭송을 받았고 유교 성인으로 숭배됐다.

그런 상황에서는 현실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었다. 서양의 중세 암흑기에 천주교가 모든 것을 지배했듯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유교 이념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조선후기에 유교 이념이 강화될수록 현실과 생존은 점점 더 도외시됐고, 국가와 사회는 더더욱 폐쇄적으로 변했다. 겉으로만 보면 조선후기는 가히 유교 순교자들의 전성시대라 할만 했다.

서양의 근대는 바로 절대화된 천주교로부터 벗어나 현실과 생존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19세기의 조선은 여전히 유교 이념이 절대적인 사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로다의 일본 함대가 강화도에 나타나 무력 위협을 가하자 절대다수의 조선 양반들이 제2의 김상헌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라고 불렀다. ‘위정척사파’라는 말 자체에 그들의 가치관이 명백하게 들어 있었다. ‘정도(正道)를 보위하고, 사도(邪道)를 배척하는 무리’란 뜻의 ‘위정척사파’는 유교 이념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면에서 그들은 서양 중세시대의 십자군과 같았다.

제2의 김상헌 vs 제2의 최명길


▎1. 고종의 특명을 받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김기수. / 2.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찍은 사진.
위정척사파는 오직 유교 이념만 인정하고 그 이외의 모든 사상과 종교를 이단시하거나 야만시했다. 강화도조약 당시 위정척사파의 대표자는 최익현이었다. 그는 등에 도끼를 짊어지고 1876년 1월 23일(음력) 유인석 등 문하생 50여 명을 거느리고 광화문 앞으로 가서 상소문을 올렸다. 이런 행동을 지부상소(持斧上疏)라고 했다. 자신의 주장이 잘못됐다면 등에 짊어진 도끼로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즉 지부상소란 목을 내 놓을 정도로 자기주장에 확신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유교 이념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최익현은 지부상소문에서 ‘왜양일체(倭洋一體)’를 주장했다. 그것은 서양은 짐승 같은 오랑캐이고, 일본은 그런 서양의 앞잡이라는 뜻이었다. 서양이 짐승 같은 오랑캐인 이유는 삼강오륜과 조상을 무시하고 천주를 믿기 때문이었다. 이런 논리에서 최익현은 일본의 무력에 굴복해 강화하면 그것은 곧 짐승 같은 서양 오랑캐에게 굴복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의 유교문명이 파탄 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고종이 앞장서서 주화매국(主和賣國)을 천명하고, 무력으로 일본을 격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최익현에게 현실적인 승패나 생존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교 이념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순교자의 이름을 얻을 것이고, 승리하면 오랑캐를 물리친 영웅이 될 뿐이었다. 이런 면에서 최익현은 가히 제2의 김상헌이라 할 만 했다. 최익현은 절대다수의 양반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세기에도 현실주의자들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박규수로 대표되는 일군의 사람들인데, 그들은 스스로를 개화파(開化派)라고 불렀다. ‘생각을 열고, 문명을 변화 시키려는 무리’란 뜻의 개화파는 유교 이념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현실과 생존을 중요시했다. 이런 면에서 박규수로 대표되는 개화파는 가히 제2의 최명길이라 할만 했다.

구로다의 일본 함대가 강화도에서 무력도발을 벌일 때 고종으로 하여금 전쟁보다는 강화를 택하게 한 사람들이 바로 박규수로 대표되는 개화파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남한산성에서 강화한 후 청나라와 잘 지내 오늘날까지 조선을 보존했다. 오늘날 일본과 강화하는 것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개화파의 주장은 양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단적으로 최익현의 지부상소 이후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문은 줄을 이었지만 일본과의 강화를 요구하는 상소문은 하나도 없었다.

당시 개화파는 최명길과 마찬가지로 배신자 또는 굴종자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그런 지탄을 받으면서도 개화파가 강화를 주장한 이유는 간단했다. 유교 이념보다는 나라의 현실과 백성의 생존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순교하겠다고 나서는 위정척사파 앞에 개화파의 주장은 왜소했다. 현실과 생존을 강조하는 개화파의 주장이 보다 강력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유교 이념을 대체할 만한 미래 비전과 미래 이념이 동반돼야 했다.

하지만 당시 개화파는 그럴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주장 즉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세웠을 뿐 그 이상을 내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과 강화해야 한다는 개화파의 주장은 단지 눈앞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 또는 단지 생존하기 위한 편법이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런 비난은 곧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도 좋다는 말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그 질문에 개화파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 같은 한계 속에서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한 개화파는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위정척사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고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른바 1876년 1월 30일의 이른바 ‘의정부육칙(六則)’이었다. 그것은 일본과의 강화는 곧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위정척사파의 비난에 대응하기 위해 고종과 개화파가 일본에 요구한 여섯 가지 원칙이었다.

고종, 의정부 육칙으로 정면돌파 노려

제1칙은 상평전 사용을 불허한다는 원칙이고, 제2칙은 미곡의 교역을 불허한다는 원칙이며, 제3칙은 물물교환만 인정한다는 원칙인데, 조선의 농업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원칙들이었다. 나머지는 아편 금지, 천주교 금지 및 서양과 교류 금지인데 이는 ‘왜양일체’를 주장하는 위정척사파에게 반박하기 위한 원칙들이었다.

고종과 개화파는 조선 건국 이래 일본과 교린을 해왔으므로 일본은 서양 오랑캐와 전혀 다른 국가라고 주장하며 육칙을 요구했다. 즉 고종과 개화파는 강화도 조약을 근대국가 일본과의 강화가 아니라 과거 일본과의 교린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작성된 의정부 육칙은 신헌을 통해 미야모토 오카즈(宮本小一)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미야모토는 의정부 육칙을 강화회담의 의제로도 삼지 않았다. 대신 자기 선에서 아편과 천주교는 일본에서도 금지한다는 수계(手契)를 써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근대 세계에 편입된 상황이라 서양과 교류 금지는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과거의 일본을 요구하는 의정부 6칙은 구로다나 미야모토에게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이런 사실에서 당시 일본과의 강화를 주도한 개화파가 강화도 조약을 과거의 교린 정도로 이해했을 뿐 왜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또 왜 구로다 함대까지 동원했는지 그 속사정까지는 잘 몰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일본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당시 개화파가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물론 일본의 국내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조약을 추진한 일본의 본심은 미야모토 오카즈에 의해 드러났다.

당시 미야모토 오카즈는 외무성 대승으로 구로다를 수행해 강화도에 왔다. 제1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기수는 미야모토에 대해 “나이는 40세가량 됐다. 사람이 깔끔하고 훤칠해 문자를 아는 듯했다. 일을 자세하고 합당하게 계획하고 주도면밀히 처리했다. 듣건대 그는 현재 매우 신임을 얻어 각국 관계의 사무는 반드시 이 사람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된다고 했다”는 인물평을 남겼다. 이 인물평 그대로 강화도 조약 때 겉으로 드러난 일본의 대표자는 구로다와 이노우에였지만, 실제 막후 실무자는 미야모토였다.

2월 3일 오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구로다와 이노우에는 곧바로 떠났다. 그 대신 사후 처리를 위해 미야모토가 뒤에 남았다. 이런 사실에서도 미야모토가 강화도조약의 실세 실무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2월 3일 오후에 미야모토는 신헌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미야모토는 동북아 지도와 조선 지도를 꺼내놓고 포시에트(posyet)를 가리키면서 러시아의 남침 가능성을 언급했다. 또한 대만을 가리키면서 1874년 일본의 대만 침공 경위와 국경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물론 일본이 조선과 강화한 목적은 무엇보다도 러시아 때문이라는 뜻임과 동시에 그것을 신헌이 고종에게 전해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당시 미야모토가 언급한 포시에트는 두만강 너머의 조선인 개척촌이었다. 1863년 전후로 두만강을 넘은 조선인들이 포시에트에 정착하면서 1876년 당시에는 상당한 마을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1860년에 러시아가 연해주를 영유하면서 포시에트를 비롯해 두만강 너머의 조선인 개척 촌은 모두 러시아 관할로 바뀌었다.

미야모토가 문제삼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포시에트 등 두만강 너머 조선인 개척촌이 확장되면서 두만강을 넘나드는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곧 두만강이 점차 국경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될 경우 러시아는 이것을 빌미로 두만강을 넘어 남하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의 극동 해군이 머물던 블라디보스톡은 겨울에 얼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두만강 남쪽에서 부동항을 획득하고자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유구(流寇)를 병탄하고 대만을 침공하는 등 확장일로였지만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는 반대였다. 메이지 일본은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놓고 러시아와 대립하다가 1875년 5월 사할린은 러시아에 귀속시키는 대신 쿠릴 열도는 일본에 귀속시킨다는 협정을 맺었다. 사실상 러시아의 위력에 눌려 사할린을 포기한 것이었다. 문제는 러시아가 사할린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부단히 남하하고자 했다. 그런 러시아의 제1차 목표는 당연히 사할린 남쪽의 홋카이도 아니면 두만강 남쪽의 조선이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9일 후 日에 사신 파견

일본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대항해 홋카이도를 지켜야 했다. 아울러 두만강 남쪽의 조선도 러시아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했다. 만에 하나 조선이 러시아에 넘어간다면 일본 열도는 사할린·연해주 그리고 한반도에 의해 포위되는 형세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야모토가 신헌에게 포시에트와 대만 침공을 언급한 이유는 자칫 조선이 대만처럼 러시아에게 침공당할 우려가 있다는 경고임과 동시에 조선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려면 일본과 밀착해야 한다는 암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좋으나 싫으나 이제 조선은 국제 열강의 쟁탈전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는 뜻이기도 했고, 강화도 조약은 과거의 교린과는 전혀 다른 국제관계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헌은 2월 6일 있었던 고종과의 면담에서 미야모토의 경고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강화도조약을 과거 교린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신헌에게는 미야모토의 경고가 전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이나 일본의 대러시아 정책 등 동북아 정세에 무지한 결과였다. 고종이나 개화파 역시 신헌과 다르지 않았다. 만약 고종과 신헌 그리고 개화파가 러시아의 남하정책이나 일본의 대러시아 정책 등에 대해 깊이 이해했다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고민해야 마땅했다. 국제 열강의 쟁탈전 속에 휩쓸린 조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제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근대화는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 군사력은 어떻게 강화해야 할지 등등에 대한 고민이 절실했다.

그렇게 하려면 일본을 넘어 서구 열강과의 교류와 군사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종과 개화파는 이미 ‘의정부 6칙’에서 천주교 금지, 서양과 교류 금지를 천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넘어 서구열강과의 교류와 군사협력을 토론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헌이 고종과의 면담에서 미야모토의 경고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 대신 신헌은 가능한 빨리 일본에 사신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과거의 교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신을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제안을 했다. 당시 조선은 1811년(순조 11)에 통신사를 파견한 이후 65년 동안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일본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 제안에 따라 고종은 2월 22일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지 9일 만이었다. 사신 명칭은 수신사(修信使)였고, 대표자는 김기수였다. 수신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신의를 닦는 사신’이었다. 수신사 이전의 사신은 ‘신의를 소통하는 사신’이라는 의미의 ‘통신사(通信使)’였다. 그 통신사가 오랫동안 파견되지 않아 일본과 분란을 일으켰지만, 이제 강화도조약을 맺어 다시 신의를 닦게 됐다는 뜻을 드러내고자 수신사라는 명칭을 붙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도 고종과 개화파가 강화도조약을 과거 교린의 연장 내지 교린의 회복으로 생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기수의 [일동기유(日東記游)]에 의하면 고종이 이토록 빨리 수신사 파견을 결정한 이유는 “저들이 비록 기뻐하면서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 속마음은 끝내 우리에게 의심이 확 풀리지 않았을 것이니, 우리가 저들보다 먼저 사신을 보낸다면 저들은 반드시 망외(望外)의 기쁨으로 알 것이다. 우리가 은혜로써 회유(懷柔)하고, 의리로써 제재하며, 정도(正道)로써 굴복시키고 신의로써 화호(和好)를 맺는다면, 일본은 우리에게 순치(脣齒)가 되고 병한(屛翰)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고종은 일본을 조선의 순치와 병한으로 만들기 위해 수신사 파견을 결정했던 것이다. 순치는 입술과 이빨이라는 뜻이고, 병한은 울타리와 날개라는 뜻이다. 즉 순치와 병한은 일종의 보호막을 상징하는데, 고종은 일본을 이용해 서양 오랑캐를 막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종이 일본을 조선의 보호막으로 만들기 위해 제시한 방안은 “은혜로써 회유하고 의리로써 제재하며, 정도로써 굴복시키고, 신의로써 화호를 맺는다”는 아주 이념적이고 명분론적인 것뿐이었다. 이런 방안들은 과거 일본과의 교린 관계 때 강조되던 방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과거의 일본이 아니었고, 동북아의 국제정세 역시 과거의 동북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개화파는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과의 교린을 회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제관계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결국 고종과 개화파에게 강화도조약이란 파괴된 교린 관계의 복원이었고 그래서 그것은 전통적인 사대교린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종과 개화파에게 수신사 파견 역시 교린 관계의 복원이라는 의미 이상은 아니었다.

65년 만에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된 김기수는 주변 사람들에게 충고를 구했다. 사람들의 충고는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일본인을 믿을 수 없으니 조심하라 경고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일본과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니 잘 사귀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예컨대 “왜인은 서양의 앞잡이고 귀신이며 적(賊)이면서 간첩입니다. 영남·호남지역의 목화, 관동·해서지역의 누에고치, 호서·호남지역의 쌀과 모시, 관동·관북지역의 금·은·동·철과 호피·웅담·녹용은 모두 왜인들이 크게 욕심 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엿처럼 달콤하고 용모는 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기쁜 기색이지만, 그 실정은 헤아릴 수 없으니 그대는 저들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는 의견은 근본적으로 일본인을 믿을 수 없다는 충고였다.

반면에 “저들도 자립한 나라이니 자유로이 행동할 것이고. 외국인의 견제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인의 풍속이 천하에 퍼질 적에 가는 곳마다 저절로 쏠리게 되는데도 저들은 홀로 물리치고 딱 거절했습니다. 한때 힘이 모자라 굴복해 그들 서양인의 웃음과 꾸짖는 소리를 흉내 내게 돼 겉으로는 하나의 서양인이지만 속은 실상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리야마는 우리와 말할 적에 심히 그들의 의관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한 번은 모리야마가 사람을 물리치고 그 세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내게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귀국과 중국이 이와 같이만 된다면(3국 동맹을 이름) 어찌 구라파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했는데 이 사람은 함께 서양을 방어할 술책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가 이번에 가거든 반드시 그 실정을 타진하고 그와 친교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는 의견은 일본과의 협력을 위해 잘 사귀라는 충고였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자 김기수는 어느 한쪽의 충고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김기수는 수신사의 임무를 “수신이란 구호(舊好)를 닦고 신의를 두터이 하며, 사명(辭命)으로써 인도하고, 위의(威儀)로써 이뤄 과격하지도 맹종하지도 않으며, 태도를 장중근신(莊重謹愼)하게 해 임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해야 거의 적당하게 될 것”이라고 정리했다. 김기수 역시 수신사의 역할을 과거 통신사의 연장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근대 문물은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것”


▎1. 김기수가 일본과 수교 후 첫 번째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쓴 [일동기유] 원본. / 2. 구한말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이홍장.
4월 4일 오후 2시쯤, 김기수는 경복궁 강녕전으로 갔다. 부산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고종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위해서였다. 고종은 김기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저들의 물정을 탐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 반드시 잘 탐지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김기수는 “삼가 탐지할 길을 도모하겠습니다만 평소 잘 알지 못하는 곳이라 잘 탐지할지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무릇 듣는 일마다 모두 빠짐없이 기록해 오라”고 다시 당부했다. 고종은 수신사 김기수를 통해 일본에 환심을 사는 한편 일본의 상황도 자세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26일 부산 동래에 도착한 김기수는 3일 후인 29일에 일본에서 제공한 화륜선 황룡환(黃龍丸)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황룡환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화륜선은 메이지 천황의 전용선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65년 만에 파견되는 수신사를 위해 크게 배려한 것이었다. 김기수는 두 달 가까이 일본의 근대 문물을 보고 들으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기수는 그런 근대 문물을 ‘괴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봤다. 김기수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 문명을 자랑스러워했고,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런 김기수의 눈에 메이지 시대의 근대 문명이 제대로 보이기는 쉽지 않았다. 수신사의 임무를 과거 통신사의 연장으로 생각한 김기수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5월 27일 도쿄를 떠난 김기수는 윤5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고, 6월 1일 오후 6시쯤 경복궁 자미당에서 고종에게 복명했다. 그때 고종은 일본과 근대문명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김기수는 그런 궁금증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일본 사행은 조선시대 통신사의 일본 사행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수신사 김기수가 돌아온 후 청나라에 그 결과를 보고한 것 역시 조선시대의 사대교린 전통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고종은 청나라에 보고하는 기회를 이용해 이홍장에게도 밀서를 보냈다. 그 밀서에서 고종은 일본과의 강화 교섭에서 겪는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일본은 김기수의 사행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미야모토 고이치를 1876년 6월 조선에 파견했다. 한 달 정도 한양에 머물던 미야모토는 영의정 이최응에게 러시아의 남하 가능성을 재차 경고하면서 일본 상인들이 육로를 통해 청나라와 교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첫째는 만주 지역에 일본 상권을 확보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그것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고종에게는 큰 고민이었다. 거절할 경우 일본의 반발이 염려됐고 수락할 경우 청나라의 반발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종은 이홍장에게 밀서를 보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문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이홍장의 생각은 ‘논일본방교(論日本邦交)’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1876년 9월 27일자에 작성된 이 글에 의하면 이홍장은 위의 문제를 놓고 주청공사 모리아리노리(森有禮)와 논의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이 러시아 기밀문서를 획득했는데 그 문서에 의하면 유사시에 러시아는 시모노세키를 점령해 일본 열도를 양분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 전략을 현실화하려면 무엇보다도 조선에서 부동항을 확보해야 가능했다. 그것은 곧 러시아의 동북아 장기 전략은 조선과 일본 전체를 확보하는데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조선이 러시아 수중에 들어가고, 그때 러시아가 사할린 방면에서 규슈를 공격하면서 조선 방면에서 시모노세키를 공격한다면 일본 열도는 각개 격파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조선·청나라·일본 3국의 협력을 적극 추진하게 됐다.

생소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조선

그 일환으로 1876년 9월 23일에 주청공사 모리가 이홍장을 방문해 3국 협력을 타진하게 됐던 것이다. 그 당시 이홍장은 고종의 밀서를 통해 강화도조약 체결과 수신사 파견 그리고 미야모토 답방 등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비록 이홍장의 권고에 의해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이홍장의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지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이홍장은 어떻게 하면 일본의 영향력을 줄일까 고민하던 차에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이홍장은 모리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면서 3국이 협력하려면 일본이 조선을 너무 궁지로 몰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물론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발언이었다. 이홍장의 충고에 의해 일본 상인들이 육로를 통해 청나라와 교역하겠다는 요구는 없어졌다.

하지만 고종 앞에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3국 협력이라는 큰 도전이었다. 사대교린이 국제관계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고종에게 3국 협력이란 생소한 도전이었다. 게다가 3국 협력은 고종도 모르는 사이에 이홍장과 모리 사이에 밀약됐을 뿐만 아니라 순교 정신이 넘치는 조선 양반들의 동의를 받아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사안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난해한 도전이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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