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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미학(22)] 최제우의 아버지 근암(近庵) 최옥의 퇴계 연구 

성리학 공부한 용담서사에서 동학 태동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쉰 넘긴 나이에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 연구에 몰입…영남학파 전통적 유학이 아들 수운의 학문적 근간

▎근암의 7대손인 이복임 종부(오른쪽)가 용담서사에서 이름이 바뀐 용담정을 둘러보고 있다.
북한에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지낸 류미영의 아들 최인국(71) 씨가 11월 25일 나흘 간의 평양 방문을 마쳤다. 최씨는 어머니 1주기에 참석하기 위해 방북을 신청해 통일부 승인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천도교(天道敎) 7대 교령을 지낸 최덕신 전 외무장관이다. 최씨의 방북은 문재인 정부 들어 한국 국적자가 북한 초청으로 입북한 첫 사례였다. 천도교가 새삼 주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천도교는 3·1만세운동 등으로 독립의 길을 열었다. 천도교는 국내 7대 종단이다. 북한에는 광복 당시 천도교도가 150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천도교는 지금도 북한의 최대 종단이다.

천도교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雨)가 창도한 동학(東學)에 뿌리를 둔다. 세계관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으로 표현된다. 수운이 깨달음을 얻은 곳은 경북 경주시 현곡면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이다. 동학의 발원지다.

용담정은 수운의 아버지 때 처음 지어졌다. 아버지 최옥은 동학의 교조(敎祖)인 아들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용담계곡의 첫 번째 주인이다. 그는 계곡에 서사(書社)를 지은 뒤 산림에서 제자를 길렀다. 지향점은 달랐다. 아버지는 퇴계학을 이었고 아들은 유(儒)·불(佛)·선(仙)을 망라한 동학을 창시했다. 두 사상은 이어지는 연결점이 있을까.

‘동학난’으로 탄압받으면서 일가 흩어져


선비 최옥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11월 20일 경주시 현곡면 하구2리 근암(近庵) 최옥(1762∼1840) 선생의 본가를 방문했다, 복원된 가정리 최제우 생가에서 2㎞쯤 떨어진 인근 마을이다. 근암의 7대손인 이복임(62) 종부가 맞이했다. 본가는 양옥이다. 방으로 들어서자 ‘번복지심 두게 되면 이는 역시 역리자요’ 등 네 가지 글귀가 적힌 액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천도교의 사계명입니다. 우리는 천도교회에 다녀요. 할배의 가르침 아닙니까.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면 신자 수십 명이 모입니다.”

종부는 집안의 서고를 열어 [근암집]을 꺼내 주었다. 캐비닛에는 3년 전쯤 발견된 근암의 유묵과 모서리가 타버린 [근암유고] 필사본 등이 보관돼 있었다.

종부는 “이게 근암 선조 유품의 전부”라며 “동학이 지금은 ‘혁명’이 됐지만 시조모 시절만 해도 ‘난’으로 불려 출신을 속여야 했다”고 회고했다. 자신은 그런 집인 줄도 모르고 시집왔다는 것이다.

방문 전날은 마침 9대조 아래로 15위의 묘사(墓祀)를 지냈다. 근암의 후손은 관(官)의 탄압과 핍박으로 흩어지면서 지금은 네댓 집이 하구리 인근에 겨우 남아 있다.

최옥은 이종상이 쓴 ‘행장(行狀)’에 “총명해 7, 8세 무렵에는 중국 고대부터 명(明)에 이르는 역사책([19사략])을 한 번 훑고는 대강을 알았다”고 적혀 있다. 8세에는 봉덕사 종을 보고 한시 ‘봉덕종부(鳳德鐘賦)’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자주 읊는 시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에 전념토록 공을 들인다. 13살에 기와(畸窩) 이상원(李象遠)의 문하에 보낸다. 기와는 퇴계 학맥의 유학자였다.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을 이은 경당 장흥효 - 존재 이휘일 - 갈암 이현일 - 밀암 이재 - 대산 이상정으로 내려오는 계보다. 기와는 밀암의 아들로 대산의 문하에서 배웠다.

종부는 서고를 닫은 뒤 “먼저 어른을 봬야 한다”며 이웃으로 데려갔다. 근암의 5대손 최영관(82) 씨였다. 최씨는 “수운 20세에 가정리 생가에 불이 나 많은 전적을 태웠다. 이후 이웃마을로 이사하고 6·25 이후 지금의 본가가 지어졌다”고 내력을 설명했다.

종부와 함께 가정리 근암의 생가를 찾아가 봤다. 아들 최제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안내판은 ‘최제우 생가’로 표기돼 있다.

생가 진입로 건너편이 용담정이 있는 구미산이다. 종부와 함께 용담계곡으로 들어갔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계곡은 말라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대는 천도교의 성지다. 계곡 위에 자리 잡은 용담수도원의 김종운 원장이 나왔다.

1778년 근암의 아버지(최종하)는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용담의 절터와 밭을 사들인다. 이상원은 그 집을 ‘와룡암(臥龍庵)’으로 명명했다. 그 뒤 와룡암은 폐허가 되었으나 근암은 과거시험 준비로 복구할 겨를이 없었다. 용담정으로 오르는 길 오른쪽으로 집터 흔적이 보였다.

근암은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과거시험을 준비한다. 그는 본래 성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가문을 일으키길 기대했다. 근암은 20세에 첫 과거를 본다. 행장에는 “20세 이후 향시에는 여덟 번 나가 다 합격했으며 그 위 굉사시에도 한 번 합격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2차 시험인 한양 복시(覆試)에는 번번이 실패한다.

부패한 과거시험에 50세까지 매달린 이유


▎종부가 보관하고 있는 모서리가 불타버린 최옥의 필사본과 서적.
이와 관련 ‘행장’에는 “경주부사가 ‘공의 문장을 보고 영남 제일’이라는 평을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향시를 우수하게 통과한 근암이 한양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낙방한 건 무슨 까닭일까. 부패 때문일 것이다. 당시 과거라는 인재등용 제도는 이미 수명을 다해 가고 있었다. 돈 있고 세력 있는 사람이 시험관을 매수해 문제를 미리 빼내는 등 부정 수법이 활개를 쳤다. 그는 고지식한 서생이었다.

근암은 30세에 부친상을 당한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아들의 손을 잡고 “너의 입신양명을 보고 싶었으나 이제 끝이 났구나. 너는 내가 없더라도 바람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근암은 이 유언 때문에 이후에도 두세 차례 시험장을 더 찾았다고 한다. 근암의 거듭된 과거 낙방은 설화로 남았다. 조동일(78)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옥은 서울을 아홉 번 가도 급제를 못했어. 한강 강둑에 나와 울고 있으니, 빨래하는 할미가 ‘영남 최옥은 과거를 아홉 번 낙방해도 아무 말 않고 가는데 급제하지 못했다고 대장부가 울 수 있느냐’고 했다”는 이야기를 채록했다.

근암이 과거 준비에 매달리는 동안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근암은 아버지에 이어 36세에 정씨 부인과 사별하고 1년 뒤에는 달성 서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47세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집에는 불이 났다. 불운은 이어진다. 50세엔 다시 서씨 부인과 사별한다. 인생무상을 절감한 근암은 그때쯤 과거시험을 단념한다.

1815년 53세 근암은 과거시험 낙방이 천명(天命)임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헛된 명예를 좇던 자신을 소인으로 규정하고 통렬하게 반성한다.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용담 주변에 다섯 칸 집을 지어 승려가 살게 하고 그 북쪽에 네 칸을 지어 ‘용담서사(龍潭書社)’라 이름 붙였다.

근암은 그때부터 용담서사에 들어가 학문에 침잠한다. 스승의 영향을 받아 그것도 퇴계 이황의 성리학을 공부했다. 사장(詞章)을 주로 공부하던 과거시험 지망생에서 유학자로 거듭난 것이다. 근암은 용담서사로 들어가면서 ‘자경사(自儆辭)’를 짓는다.

“…어찌 너의 마음은 날뛰는가/ 닭과 개를 놓치면 오히려 찾을 줄 아는데/ 너는 어찌 말도 하지 않는가….”

근암은 “사람이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 알지만 마음을 잃어버리고도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심(放心)을 찾는 것일 뿐”이라는 [맹자]의 구절로 과거를 반성하고 새 삶을 추구한다.

근암은 14세에 ‘작은 퇴계’로 불리던 대산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향시를 보고 지나는 길에 대산이 은퇴해 사는 호상에서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황혼기에 그는 용담서사로 들어가 비로소 “대산 선생이 그때 주자(朱子)·퇴계 연구를 명하셨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 연유일까. 그는 퇴계와 율곡 이이의 이기(理氣) 논쟁에서 늘 율곡 쪽을 비판했다. 그는 “이와 기의 혼합만을 내세우는 학설(율곡)은 이와 기를 나누어 아울러 내세우는 학설(퇴계)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근암은 “이(절대자 곧 하늘)는 다스리고 기는 생성한다”는 퇴계 학설을 높이 받들었다.

근암이 남긴 글은 몇 차례 화재로 많이 소실됐다. 그런 중에 화재를 면한 것은 ‘자경사’를 비롯해 ‘근암기(近庵記)’ ‘치와기(恥窩記)’ ‘용담대학강의’ ‘심경강의’ 등이다. 또 제문과 시·서·기·잠·명 등이 [근암집]에 남아 있다. 그는 조선의 3대 시가인으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의 문집을 편찬할 때 영남의 학자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용담수도원 김종운 원장은 용담교를 건너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세워진 용추각(龍湫閣)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용추는 작은 폭포란 뜻이다. 용추각은 평소 문이 잠겨 있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 하는 건물이다. 김 원장이 문을 열었다. 용추각 안에는 건물 중건기(重建記)를 새긴 편액과 함께 목판 100여 장이 보관돼 있었다. 바로 최옥의 [근암집]을 새긴 책판이다.

용추각 아래는 수운이 득도한 공간인 ‘용담정’이 있다. 전신(前身)은 용담서사다. 최옥이 성리학을 공부한 용담서사가 후일 동학을 배태한 용담정이 된 것이다. ‘龍潭亭(용담정)’ 편액은 1971년 이 일대를 성역화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

재가녀 받아들여 환갑 지나 최제우 얻어


▎경주시 서면 도리에 있는 최옥의 묘.
근암은 서씨 부인을 사별한 뒤 동생의 맏아들인 제환(濟)을 양자로 들인다. 그는 그때부터 살림을 제환에게 맡기고 자신은 용담서사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학문에 몰입한 것이다. 산수(山水)가 기운을 회복시킨 것일까. 근암은 용담으로 들어와 환갑을 지나고도 건장했다. 그 무렵 제자들은 스승이 일점혈육이 없어 한탄하는 걸 눈치채곤 재혼을 추진한다.

마침내 경주 금척리에 사는 한 제자가 자신의 고모가 스승을 모실 만하다고 천거한다. 고모는 곡산 한씨(1793∼1833)로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20세부터 홀몸이 돼 친정에 와 있었다. 나이 서른의 청상과부였다. 이야기를 들은 63세 근암은 수절 과부를 훼절시키는 것이 온당치 않다며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자 편법이 동원된다. 제자들과 양자는 어느 날 한씨 부인을 안방에 모셔다 놓고 근암을 방안으로 모셨다. 용케도 인연이 맺어졌다. 1824년 10월 28일 한씨 부인은 아들을 출산한다. 바로 수운 최제우다. 전설에는 이날부터 구미산이 3일간 연달아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뜻밖에도 한씨 부인은 40세에 몸져눕는다. 수운은 10세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때부터 수운은 연로한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란다. 윤석산(70) 한양대 명예교수는 “수운의 학문적 기초는 영남학파의 전통적 유학을 공부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840년 79세 근암도 노환으로 세상을 뜬다. 이종상은 묘지명(墓誌銘)에 “(근암은) 주자와 퇴계의 책을 읽고 연구하는데 가장 큰 공을 들였다. 그는 늙어서도 중요한 부분을 추려내 변함없이 외웠다”고 적었다.

성리학과 동학의 공통분모는 하늘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 있는 최제우 생가.
수운은 신분과 계급을 따지는 시대를 살았다. 그는 무슨 신분이었을까. 동학 연구가 고(故) 표영삼은 “일부 학자는 수운을 서자로 분류했다”며 “그러나 수운은 첩의 아들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어머니가 한 번 출가했다가 재혼한 재가녀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경국대전]에는 재가녀 자손은 문과(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그래서 수운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신분이었다.

이 같은 신분이 그를 동학 교조로 성장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즉 수운은 자신의 불우한 출생으로 당대의 불합리를 일찍이 깨닫고 이를 극복하려 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근암집]을 국역한 고(故) 최동희 고려대 교수는 “나는 [근암집]을 통해 ‘하느님만 믿으라’고 가르치는 동학과 ‘태극을 하느님으로 받들라’고 가르치는 퇴계학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밝혀지기를 기대한다”고 피력한 적이 있다. 최 교수는 이어 “근암은 어쩌면 ‘하느님만 믿으라’고 가르치는 군자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걸 예감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수운이 용담에 들어간 것은 부친을 잃고 집이 화재로 소실된 뒤다. 수운은 본가가 불 타자 인근 마을에 방 한 칸을 얻어 형의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이 좁아 솔가해 용담서사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용담서사에서 보냈고 이곳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강석근 동국대 교수는 “근암이 용담서사에서 이룬 학문과 어려웠던 삶은 아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는 동인(動因) 중 하나가 되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동학을 정립한 수운의 정신세계는 유학 특히 퇴계학과 사상적으로 무관치 않은 것이다. 공통분모는 ‘하늘’일 것이다. 하늘은 백성, 국민과도 일맥상통한다.

천도교는 지금 민족의 과제인 남북통일에 관심이 남다르다. 근암의 6대손으로 수년 전 방북했던 최상은(67) 씨는 “계기가 되면 경전 곳곳에 숨은 그대로 통일된다는 걸 천도교는 굳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

용담정을 찾아간 날 계곡 위쪽에선 졸졸 물소리가 났다. 청아한 소리다. 계곡 아래는 아직 물이 흐르지 않는다. 그래도 물은 바닥에 잠복돼 있다. 용담의 물은 3·1운동에 이어 많은 국민이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날을 기다릴지 모른다.


▎4. 후손이 발견해 최근 사들인 최옥의 친필. / 5. 이복임 종부는 일요일 천도교회에 나가 시일식 행사에 참석한다.
[박스기사] “나는 역적이 될 것… 너희는 착한 백성” - 수운 최제우, 어린 시절 눈에서 광채 뿜어내

연로한 아버지 근암 최옥은 총명한 아들 수운 최제우를 가르친다. 그러나 어린 수운은 신분적인 제한도 있었지만 자라면서 과거시험 등 입신양명(立身揚名)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수운은 마을에서 어린아이들과 놀 때도 영특함을 보여 이따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수운은 특히 눈빛이 광채가 나 한 번 본 사람은 얼굴을 돌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아이는 역적(逆賊)의 눈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수운과 놀다가 그 눈빛을 보고 어른을 흉내 내 “너는 자라서 역적이 될 것”이라며 놀렸다고 한다. 그러자 어린 수운은 마치 어른이 아이들을 꾸짖듯 “나는 역적이 될 것이니 너희는 착한 백성이 되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역적의 뜻을 알기도 어려운 나이에 수운은 이미 남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역적은 반역이다. 고려시대 노비 만적(萬積)은 “왕후장상이 처음부터 씨가 있을까 보냐.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며 혁명을 꾀했다.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어린 수운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운이 함께 뛰놀던 아이들에게 던진 ‘역적’은 신분제도를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수운은 17세에 아버지를 잃는다.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에 의지했던 수운은 살 길이 막막했다. 그 와중에 화재로 집마저 잃는다. 아버지는 수운을 공부만 시킨 탓에 농사를 지을 줄도 몰랐다. 실의의 나날이었다.

수운은 그래서 무리에 섞여 장사를 해본다. 무료하면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며 세상을 향해 울분을 터뜨려도 보았다. 그러나 마음 한가운데는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구도(求道)의 시작이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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