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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 비스타, 아바나(1)] 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쿠바에 열광하나? 

아바나의 시간은 옆으로 간다 

김해완 작가
잉태된 모순으로 가득한 쿠바의 일상…가장 주관적인 영역인 일상에서 오해를 깨뜨리는 역설을 찾고 싶어

청년 철학도 김해완의 쿠바 탐구를 연재한다. 그는 2017년 9월 아바나에 정착해 쿠바 공부를 시작했다. 이 철학도는 이해했다. 혁명은 답이 정해져 있는 ‘정치적 노선’이 아니라, 똑같은 세상에서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잃어보는 ‘생활의 실험’이었다는 것을. 혁명 신생국 쿠바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향을 택했고, 세계 정세가 출렁일 때마다 그에 맞춰 대담한 변혁을 감행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아바나에는 큰 시장이 많이 없고, 시장을 방문해도 사고 싶은 식재료가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이처럼 야채장수 아저씨들이 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방문하며 채소를 판다. / 사진:김해완
“알또 세드로에서 나는 마르까네로 간다네. 꾸에또에 도착해서 나는 마야리로 간다네. (De Alto Cedro voy para Marcan. Llego en Cueto voy para Mayar.)” (노래 ‘찬 찬(Chan Chan)’ 중에서)

나이 든 할아버지들이 멋드러지게 노래를 한다. 1930년대 유행했던 쏜(Son)과 볼레로(Bolero)의 멜로디가 스페인어와 함께 퍼진다.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노년의 노련함과 음악의 소울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 유명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다.

영화감독 빔 벤델(Wim Wender)이 찍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오래된 꿈을 꾼 기분이 든다. 이곳은 어디인가. 모두가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혁명을 성공시킨 카리브해의 섬. 북한과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동지’인 탓에 남한 대사관조차 없는 나라. 세계화에 문을 잠그고 독특한 문화를 간직하는 땅. 쿠바다.

21세기 한국인이라면 ‘찬찬’을 이렇게 패러디할 것이다. “인천에서 나는 토론토로 간다네. 토론토에 도착해서 나는 아바나로 간다네.” 시대는 변한다. 최근 10년간 SNS는 세계 방방곡곡을 인터넷 속에서 연결시켰고, 2014년 전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의 경제 봉쇄정책을 철폐했다. 이제 사람들은 꿈만 꾸는 게 아니라 여권을 들고 두 발로 직접 지구 반대편을 찾아간다. 요즘 아바나에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출몰한다!

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쿠바에 열광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세계화’의 추세에서 벗어나 고립돼 있다는 점 때문인지 모르겠다. 쿠바를 소개하는 글들은 모두 비슷한 문구를 사용한다. “시간이 멈춘 나라, 쿠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다큐멘터리가 개봉한 지 거진 20년이 흘렀건만, 아바나의 풍경은 거의 변한 게 없다. 1950년대 올드카, 식민지 시대의 건물, 말레꼰에서 맥주를 마시는 커플, 그리고 ‘피델(Fidel)’과‘체(Che)’를 지지한다는 슬로건. 이곳에서는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렇지만 아바나에 짐을 푼 지 어언 100일 째, 나는 혼돈의 도가니에 있다! 현재 나는 관광객의 동선 밖에서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섞인 쿠바인의 일상을 마주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쿠바가 20세기에 꽃피운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나 변화의 물결 역시 거세다. 젊은이들의 파티에서는 미국 팝송이나 레게똔(힙합 장르에 기반한 라틴 팝)이 들려오고, 핸드폰과 인터넷도 급격히 대중화되고 있다. 물자가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생활의 배치 자체는 뉴욕이나 서울과 다를 바 없이 근대적이다. 사람들은 전기와 수도와 가스에 의존하고 (구할 수만 있다면) 키친 타올과 알루미늄 호일도 쓴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사회현상 또한 한국의 풍경과 비슷하다.

이 상황에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 봉쇄 때문에 한 장소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춤이 21세기의 ‘한국’의 전부가 아니듯이, 21세기의 ‘쿠바’는 혁명과 음악 그 이상이 아닐까? 1996년 생인 젊은 쿠바 친구는 나의 무지를 확인해 주듯이 이렇게 말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음악파일을 구해달라고? 글쎄. 이 밴드가 명성을 얻은 후로는 너도 나도 그 멤버였다고 주장하면서 음악이 짬뽕이 됐어. 너는 정확히 뭘 찾는지 아는 거야?”

시간의 길을 잃다?뉴욕과 아바나의 교차점


▎아바나 비에하 길거리에 전시돼 있는 작품. 철사와 벽돌로 쿠바를 표현했고, 이 벽을 뚫고 나오려는 두 손이 보인다. 미국에 대한 항의일 수도 있고, 이 섬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쿠바 젊은이들의 마음일 수도 있다. / 사진:김해완
나는 쿠바에 뭘 찾으러 왔을까? 첫 번째 이유는 공부하기 위해서다. 뉴욕에 살 당시 나는 남미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인문학 공동체인 남산강학원과 감이당이 함께 진행하는 여행-공부 프로젝트 MVQ의 지원을 받아 쿠바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다음 행선지가 쿠바든 아니든 별 상관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1960년대 혁명에 대하여 상식도 로망도 없는 1990년대 생이었다.

만약 한국에서 곧바로 쿠바에 왔더라면 나는 정말로 맥락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의 길에서, 가게에서, 학교에서 만났던 이민자들은 내 나침반이 돼주었다. 나는 그네들의 집에서 살벌하게 터져나오는 세대 갈등에 친숙함을 느꼈고, 뉴요커가 되기 위해 피눈물 나도록 노력하는 이민자 2세에게서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보았다. 21세기, 우리는 너나할 것없이 모두 ‘시간의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짧게 보면 최근 20년간 범람한 테크놀로지와 70년간 진행된 산업화의 결과지만, 멀리 보면 500년간 역사가 진행된 방향이다.) 세대의 단절과 갈등은 개인이 부모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볼 수 없을 때 발생한다. 미지의 땅에 떨어진 이민자처럼, 각각의 세대는 매번 변하는 시대의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익힌 ‘생존법’은 나의 윤리나 정체성과 전혀 연관이 없으며, 내 미래의 아이에게도 전해줄 수 없는 영양가 없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은 푸에르토리코의 이민 3세대나 한국의 88만원 세대나 똑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바나에서 첫 100일을 보내는 동안 나는 뉴욕에서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 나는 또다시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자들을 목격했다. 느긋해 보였던 하바나의 일상은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개인의 욕망, 그리고 출렁거리는 바깥세상이 불일치하는 가운데 잉태된 모순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 모순에 적응하거나, 버티거나, 탈출하는 방법은 개인마다 또 세대마다 격하게 달랐다.

그제야 이해했다. 혁명은 답이 정해져 있는 ‘정치적 노선’이 아니라, 똑같은 세상에서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잃어보는 ‘생활의 실험’이었다는 것을. 혁명 신생국 쿠바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향을 택했고, 세계정세가 출렁일 때마다 그에 맞춰 대담한 변혁을 감행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성공도 실패도 아닌 시대 속에서 ‘길 잃은’ 개인들이다. 오늘날 쿠바는 한국 사회나 뉴욕 사회와 다를 바 없이 세대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있다. 이는 쿠바인들이 국경이 봉쇄된 와중에도 ‘시간의 이민자’ 대열의 선두주자에 서서 그들만의 스펙타클한 여행을 해왔음을 말해준다. 제1세계의 ‘현대문명’의 뒤를 쫓아가든지 혹은 제3세계의 ‘혁명’에 앞장서든지, 결국 (특히 비서구권) 생활인들은 생활의 연속성을 절단 내는 산업 시대의 흐름 속에서 먹고 살 길을 매번 새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여행이 궁금하다. 이 여행의 과정이 우리의 얼굴 또한 비출 것이라고 믿는다. 자본주의가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은 다르게 살고 싶어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길을 잃을까 봐, 그래서 굶을까 봐서다. 그러나 진짜 두려운 사실은, 요즘 같은 시대에는 시대의 정언명령에 완전히 맞춰 산다고 해서 시대의 부적응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뉴욕에서든 아바나에서든, 생활이라는 현실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정도(正道)도 사도(邪道)도 아닌 새 길을 개척할 용기를 요구한다. 이 두려움을 응시하는 자에게 아바나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뉴욕과는 또 다른 각도로 말이다.

[부에나 비스타, 아바나] 연재는 2018년 아바나의 평범한 일상을 현장 포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상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의도와 또 어떤 의도치 않은 역설이 있었는지 아바네로(Habanero)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려면 지난 반세기 동안 쿠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소한의 상식이 있어야 한다.

혁명, 그 앞 이야기와 뒷이야기


▎혁명박물관에 놓인 작품이다. 혁명이라는 사건을 한 척의 배로 표현하고 있다. 이 배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품고 현재 쿠바를 방문하고 있다.
쿠바 혁명은 1959년 1월 1일에 일어났다. 피델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이날 게릴라 전사들과 함께 하바나에 입성했다. 그리고 독재자 바티스타를 공식적으로 끌어내린 후 (그는 도망친 지 오래였다) “쿠바인들을 위한 쿠바”를 다시 세우겠노라고 공언했다. 지금이야 대단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계란으로 바위치는 미친 짓처럼 보였다. 이 작전이 성공했던 것은 가난한 농민들과 심지어 부유한 중산층까지 혁명을 두 팔 벌려 환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쿠바인들은 혁명 앞에서 이렇게 손발이 척척 맞았던 것일까? 이것은 하룻밤 만에 벌어질 일이 아니었다. 사건은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쿠바는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다. 그런데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르페데스라는 소농장주가 흑인 노예를 자발적으로 해방시키면서 ‘새로운 세상’을 주장했던 것을 계기로, 쿠바인들은 스페인 정부와 10년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1898년에는 마침내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미국이 독립전쟁에 개입했고 이를 빌미로 쿠바를 미국의 준 식민지 상태로 만든 것이다. 미국은 미국의 말을 잘 들을 꼭두각시 독재자가 정권을 잡도록 지원했고, 그렇게 60년간 쿠바의 민주주의 체제는 불능상태에 빠졌다. 쿠바의 대통령들은 미국에 충성하거나, 극도로 부패하거나, 부정선거의 달인이었다. 그중에서도 바티스타는 가장 문제적인 대통령이었다. 1933년에 그는 시민들이 지지했던 야당의 전도유망한 개혁안을 4개월 만에 쿠데타로 뒤엎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대통령 임기를 수행할 때는 그래도 노동조합과 협력하면서 일할 의지를 보였으나, 1952년에 쿠테타로 복귀할 때는 시민운동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무능한 독재자가 돼 있었다.

정치가 이렇게 막장드라마를 찍는 동안, 쿠바 사회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미국 문화와 자본 속에서 이리저리 표류했다. 인종 차별이나 빈부 격차 같은 식민지 시대의 후유증은 더 곪아갔다. 사회 양극단에는 ‘농촌 빈민 150만 명’과 언제든 마이애미로 쇼핑을 갈 수 있는 ‘90만 명 남짓한 가장 부유한 쿠바인들’이 있었고, “이 두 부류 사이에 있는 350만 명은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아비바 촘스키, [쿠바혁명사], 삼천리)

이때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외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다. 카스트로와 게릴라 군대가 정부를 상대로 몇 년간 전투를 치르면서 쿠바인들의 신뢰를 쌓았던 반면, ‘피델주의(Fidelismo)’에 대항하여 과격한 혁명이 아니라 온건한 개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혁명만이 답이었다. 1950년대 쿠바의 공기에는 혁명의 열기가 이미 짙게 퍼져 있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여기에 불씨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사건을 순서대로 개괄한 ‘앞 이야기’다. 그러나 1959년 이후의 이야기를 실감하려면 혁명정부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난감한 문제를 떠안았는지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혁명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쿠바라는 특수하고 고유한 맥락 속에서 진행됐기 때문이다. 이 ‘뒷이야기’는 앞으로 연재에서 주제별로 다루게 될 테니, 오늘은 세 가지 키워드로 짧게만 훑어보자. 설탕, 신인류, 그리고 아히아꼬(Ajiaco)다.

① 설탕? 악마와의 계약을 끝내라

설탕. 설탕처럼 쿠바 역사에서 말 많고 탈 많은 음식은 없었을 것이다. 이 작물에는 쿠바의 애달픈 식민지 시절이 녹아 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쿠바에 처음 왔을 당시, 아무리 찾아도 금이 보이지 않자 이들은 이 섬 전체로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토종 작물도 아닌 설탕이 바로 ‘쿠바’라는 국가의 탄생이유이자 존재이유였던 것이다. 쿠바가 어찌나 설탕을 체계적으로 잘 생산했는지,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세계 설탕의 4분의 1이 이 섬에서 나왔다.

그러나 독립국으로서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설탕 가격이 떨어지면 수입은 크게 줄었고, 설탕 수확 시즌이 끝나면 모두가 실업자가 됐다. 설탕이 아닌 다른 공산품은 외국에서 비싼 값을 주고 수입해야 했고, 무엇보다 설탕은 쿠바와 쿠바 설탕 수입국(미국) 사이에 종속적인 관계를 만들었다.

혁명정부는 1963년에 설탕 생산을 그만두고 경제를 다양화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모두를 굶주림으로 몰아넣었고, 1970년에는 설탕을 1000톤이나 생산하겠다고 했다가 다른 경제 부문을 마비 상태에 몰아넣었다. 지금도 설탕은 애증의 대상이다. 없이 살자니 죽고, 함께 살자니 병든다. 이 악마와의 계약이 끝나지 않는 한 이 땅에 식민지의 기억도 계속될 것이다.

② 신인류? 도덕적으로 옳은 개발


▎아바나의 상징, 말레꼰.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 앉아 있으면, 세상만사를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로운 기분이 밀려온다.
쿠바 혁명이 처음부터 공산주의 운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로의 전환이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칼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혁명은 산업화가 이미 만개한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벌어져야 하지만, 현실에서 공산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가난한 구(舊)식민지 저개발국에서 선택됐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란 이념이 아니었다. 식민지와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룩하는 실천법이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체 게바라는 ‘새로운 인간(Hombre Nuevo)’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그는 공산주의가 경제의 재구성을 넘어서 인간의 재구성을 이뤄내야 한다고 믿었다. 돈에 영혼을 팔지 않고, 선(善)을 보상으로 여기고, 성실히 일하는 인간이 모두가 될 때야 ‘도덕적으로 옳은 경제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쿠바 사람 누구도 빵 없이 신인류가 되는 게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오늘날 쿠바는 병원과 학교 같은 근대 시설은 잘 갖춰놓고서 정작 이 시설을 돌릴 돈은 없는 희한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남을 착취하지 않고도 일용할 양식을 찾을 것인가? 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 살지 않겠다 하더라도, 나와 내 공동체가 경제활동에서 소외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절박한 문제다.

③ 아히아꼬? ‘우리 아메리카’의 찌개


▎피델 카스트로는 뛰어난 지성과 용기를 보이며 쿠바 역사에 등장했으나, 오늘날 그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 사진:김해완
아히아꼬는 한국의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처럼 쿠바인 모두가 즐겨 먹는 국민 찌개다. 여기에는 온갖 종류의 고기와 야채가 투하된다. 그래서 아히아꼬는 원주민,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의 피가 섞인 쿠바의 국민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쿠바인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쿠바의 중요한 과제였다. 이 땅에 ‘쿠바인’이라는 소속감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원주민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는데, 그 말인즉 현재 쿠바인들은 전부 이민자나 노예의 후손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혁명 정부는 인종차별을 엄격히 금지했고 여러 문화가 서로에게 갈마드는 트랜스-문화화를 쿠바의 특징으로 내세웠다. 그래서인지 쿠바인들은 이 나라에 중국 문화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1% 섞였다는 사실을 매번 강조한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요즘 젊은 세대는 과연 미국의 스테이크보다 쿠바의 아히아꼬를 더 좋아할까? 호세 마르띠는 플라타노(남미의 바나나)로 와인을 만들어 마시라고, 시큼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와인이라고 멋진 말을 남겼다. 그러나 21세기, 많은 쿠바 청년이 세계 시민으로서 소비문화를 즐기고 싶어 한다.

자, 이제 여행을 떠날 일만 남았다. 우리 집 쿠바 할아버지는 쿠바에 대해 뭣도 모르는 내가 글을 쓴다니 심기가 불편하신지 이렇게 말했다. “종이는 종이만을 증명할 뿐이고, 네 글은 ‘너의’ 진실일 뿐이야. 진실이 늘 주관적이라는 게 철학의 핵심 문제지….” (참고로 이분은 버스 정비사로 평생 일했던 평범한 쿠바 할아버지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말씀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 나는 밥벌이를 하기 위해 어쨌든 글을 써야 하고, 내가 밥벌이를 해야 할아버지도 나에게서 하숙비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답지만은 않은 일상의 진실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일상에서 출발하고 싶다. 모든 진실이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면, 가장 주관적인 영역인 일상에서 오해를 깨뜨리는 역설을 찾고 싶다.

쿠바의 시간은 후진국처럼 뒤로도 흐르지 않고, 선진국처럼 앞으로도 흐르지 않는다.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삐뚤빼뚤 노선을 바꿔가며, 그러니까 옆으로 흐르고 있다. 이 시간의 선분이 예측의 좌표에서 빗겨나가는 만큼 생활은 더 힘들어지겠지만, 사색과 상상력 또한 깊어진다. 이제 이 시간을 따라 2018년을 사는 아바네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김해완 - 1993년 생. 10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4년 초부터 미국 뉴욕에 떨어져 좌충우돌 여러 나라의 청년과 함께 생활한 후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 있다.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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