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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안평대군 탄생 600년 ‘몽유도원도’의 재발견 

시(詩)·서(書)·화(畵) 어우러진 조선의 최고 걸작 

박경환 미술평론가
실경산수(實景山水) 아닌 사대부의 도가적 꿈을 그린 이념적 산수화…신사임당, 양팽손, 김명국 등 조선 화단에 큰 영향, 하루빨리 환수해야

안평대군 탄생 600년을 맞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국내 환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1447년(세종 29) 4월, 안평대군이 도원에서 노닐었던 꿈을 안견에게 말해 사흘 만에 그려진 작품으로 조선시대의 회화와 서예가 행복하게 어우러진 걸작이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현재 덴리 대학(天理大學)에 소장돼 있다. 2017년 10월, 국회에서 ‘몽유도원도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강연하며 국내 환수운동에 힘을 보탰던 박경환 미술평론가의 기고문을 싣는다.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도원에서 노닐었던 꿈을 안견에게 말해 사흘 만에 그려진 작품으로 조선시대의 회화와 서예가 행복하게 어우러진 걸작이다. / 사진:박경환
조선 세종시대(1418~1450)는 숭유배불 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적 문치주의(성리학 사상)가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대부 중심의 통치는 세종조의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는 문화발전의 근간이 됐다. 문화·예술을 장려하고 여러 가지 재주에 능한 사람들이라면 신분을 뛰어넘어 그 재주를 받아들이고 귀히 여겼다. 한국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안견(安堅, 생몰연대 미상)의 출현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학자들은 유학뿐 아니라 다양한 고전을 연구해 당대의 문화에 탄력적으로 수용·발전시켰는데, 중국의 주(周)·한(漢)은 물론 당(唐)·송(宋)의 문화를 폭 넓게 연구, 현실에 맞게 적용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유능하고 참신한 집현전 젊은 학사들과 당대 최고의 예술가이며 후원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등장한다. 안평대군은 원나라 때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松雪體)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서체를 정립해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조선 초기 화가들도 자신의 그림에 명(明)의 원체화풍(院體畵風: 남송의 화풍으로 궁정 취향에 따라 화원畵院을 중심으로 이룩된 직업화가들의 화풍), 절파화풍(浙派畵風: 명나라 초기 절강성 출신 화가들의 화풍)을 자연스럽게 수용했다.

안견도 이런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고전필법을 받아들여 몽유도원도에 적용했다. 이들은 고전을 수용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독창적으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끌어내는 단계로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한글 창제인데, 이런 자주적인 생각들은 훗날 진경산수(眞景山水)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가 낳은 8형제 중 셋째로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이다. 1430년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했고, 시(詩)·서(書)·화(畵)에 능해 삼절(三絶)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글씨에 뛰어나 한석봉과 더불어 조선 전기 최고의 명필로 꼽힌다. 그의 글씨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명성이 높았고 때문에 사람들이 중국에서 글을 사오면 안평의 글씨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 [연려실기술]에는 “북경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어디 가서 좋은 글씨를 찾을 수 있느냐?’고 물으면 중국인들은 ‘당신네 나라에 제일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사려 하느냐?’고 되물었다”는 대목이 있다.

세종시대 학문·예술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


▎1. 안평대군은 한석봉과 더불어 조선 전기 최고의 명필로 꼽힌다. 사진은 안평대군의 글씨. / 2.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날로부터 4년 후 꿈속에서 본 것과 유사한 곳을 택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사진은 종로구 부암동에 소재한 무계정사 터.
안평대군과 관련된 여러 일화가 있는데, 박팽년의 [비해당기]에는 “어느 날 왕을 알현하였는데 왕이 말씀하시길 어찌 안평이라 하는가. (…) 편액에 비해(匪懈, 부지런하다)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안평은 타고난 재질이 뛰어나고 성품이 착해…”라고 적혀 있다. 세종대왕이 안평의 성품을 알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타고난 재주를 펼치라고 말한 것으로 당시 안평의 재주를 왕이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안평대군은 세종으로부터 250결의 땅을 하사받았는데, 이것이 그의 문화예술 활동과 수많은 서책을 수집하고 예술을 후원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평은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날로부터 4년 후 꿈속에서 본 것과 유사한 곳을 택하여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짓고 매우 흡족해했다고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는 기록하고 있다. 안평의 인간적인 풍모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람을 무계정사로 모이게 했고, 안평은 그들과 더불어 담론을 나누고 풍류를 즐겼다. 무계정사는 또한 수양대군과의 정쟁의 주요 장소로도 이용됐다.

안평은 그 자신이 예술가이자 예술 애호가로서 대단한 수집가이기도 했다. 신숙주(1417~1475)가 쓴 [화기(畵記)]에는 “안평대군은 서화의 소문을 들으면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후한 값을 주고 구입했다. 어느 날 그동안 모은 것을 보여주며 ‘물건이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고, (…) 모음과 흩어짐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곧 닥쳐올 정변의 소용돌이를 미리 예감한 듯하다. 안평은 송대 이곽(李郭)파의 그림도 다수 소장했는데, 그중 북송 때 곽희(郭熙, 1020~1090)의 그림을 살펴보면, 안평대군과 함께했던 안견의 화풍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몽유도원도 외에는 현재 안평이 소장했던 작품 중에 남아 있는 것이 한 점도 없다. 안평대군이 쓴 글씨는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 국보 238호)이 대표적이다. 안평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 때 세상을 떠났는데, 겨우 35세였다. 세종시대 학문·예술의 큰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의 사망은 융성했던 당대의 문화발전이 후퇴되는 비극을 낳았다.


▎몽유도원도 전도. 시·서·화가 어우러진 조선 최고의 걸작으로 신숙주 등 당대의 문사 21명의 찬시 23편의 글이 연결돼 있다. / 사진:박경환
안평에 비해 안견은 정확한 생몰 년대가 전해지지 않는다. 대략 1400년경에 태어나서 1470년대에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견의 자는 가도(可度), 호는 주경(朱耕), 현동자(玄洞子)인데 정4품 호군(護軍)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중인의 신분에서 이러한 직위까지 오른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로 안평대군의 후광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안견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의 호 ‘현동자’를 도가(道家)적으로 동방의 도원(桃源) 중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몽유도원도에 등장하는 찬시중 현동자가 이따금 눈에 띄어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그윽한 동굴 속의 남자’ 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호는 산수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도가적 취향을 일컫는 것으로 아마도 이상향을 추구하는 산수화가로서 안견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나타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몽유도원도 그림의 내용도 다분히 도가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안견, 대가들의 좋은 점만 취해 독창적 화풍 구축


▎몽유도원도 전도와 이를 4단계로 구분한 그림. / 사진:박경환
[조선왕조실록]의 세조와 성종대 기록들을 참조해볼 때 안견은 세조 이후에도 생존했으리라 추정된다. 계유정란으로 안평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참화를 당했는데 어떻게 안평과 잠시도 떨어져있지 않았던 안견에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기록에 전해진다. 윤휴(1617∼1680)의 [백호전서(白湖全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안평은 그를 아껴 늘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북경에서 귀한 먹을 입수해서 안견에게 먹을 치고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대군이 잠시 밖에 나가 돌아오니 먹이 없어졌다. (…) 안견이 일어나니 홀연히 그의 품에서 먹이 떨어졌다. 안평이 크게 노하여 다시는 그의 집에 얼씬도 못하게 해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계유정란 후 안견만이 화를 면하자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 글은 안견 시대보다 후에 쓰인 것이지만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안견이 그림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내다보고 판단하는 기지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숙주는 [화기]에서 “안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호군(護軍)이며 성품이 총민하고 옛 그림을 많이 보고 좋은 점을 절충해 못 그리는 것이 없지만 산수화를 잘 그렸다.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적고 있다. 또한 김안로(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는 “곽희(郭熙)식으로 그리면 곽희가 되고, 이필(李弼)식으로 그리면 이필이 되었으며, (…) 뜻대로 못 그리는 것이 없지만 산수화를 가장 잘했다”며 안견의 화풍을 언급하고 있다. 안견이 여러 대가의 좋은 점을 취한 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유도원도의 절정인 도원의 풍광을 보여주는 4단계 도원 부분. / 사진:박경환
시·서·화가 어우러진 조선 최고의 걸작 몽유도원도는 안평의 꿈의 내용을 바탕으로 1447년(세종29) 사흘 만에 완성됐다. 그림의 크기는 38.6×106.2㎝로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졌다. 바깥쪽은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으로 푸른 비단에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이 붙어 있으며 안평대군의 발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世間何處夢桃源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野服山冠尙宛然 은자(隱者)의 옷 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著畵看來定好事 그림 그려 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自多千載擬相傳 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
後三日正月夜 그림이 다 된 후 사흘째 정월 밤
在致知亭因故有作 淸之 치지정(致知亭)에서 다시 펼쳐보고 짓는다. 청지 씀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함께 몽유도원도를 감상하고 제화시(題畵詩)를 쓰게 했는데, 모두 21명의 찬시 23편의 글이 있다. 신숙주, 이개,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 만우, 최수 등이다. 연구에 의하면 원래 순서는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순이었으나 표구할 때 잘못되었다고 한다. 신숙주가 맨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일본에 널리 알려진 그의 명성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몽유도원도의 정신적 배경은 안평대군이 꿈속의 내용을 바탕으로 사흘 만에 완성한 것이다. 그림에 쓰인 발문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묘년(1447년) 4월20일 밤 자리에 누워 꿈을 꾸게 되었다 仁叟(인수, 박팽년)와 함께 산 아래 당도하니(…) 여러 갈래가 나서 서성일 때 산관야복(山冠野服)을 만나 도원 길을 안내 받으며 골짜기에 들어서니 정말 도원동이라 하였다. 옆에 貞父(정부, 최항), 泛嗡(범옹, 신숙주)이 있으니…서로 실컷 구경하다 문득 깨었다.(…)” 라고 적었다.

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桃花原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도화원기는 “동진(東晋) 태원 때 무릉(武陵)의 어부가 내를 따라 길을 가다 갑자기 복숭아꽃나무숲을 만나 따라가다 조그만 구멍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니 확 뚫리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데 모습이 우리와 같았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니 진(秦)때 난을 피해 절경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었다.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와 다시 찾아보니 찾을 길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안평대군의 꿈과 비교해볼 때 등장인물 수, 장소와 시기를 명기한 점에서는 다르지만,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재해석 한 것이다. 안평대군이 마음속에 품었던 이상적, 도가적인 생각과 현실세계에서 자유롭고 싶은 옛 선비들의 의중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필법이 힘차고 기운이 넘쳐나는 수묵 담채화


▎곽희의 조춘도(早春圖). 구름모양으로 산세를 표현하는 곽희파 특유의 운두준법(雲頭皴法)이 보인다. / 사진:박경환
몽유도원도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4단계로 구분된다. 대각선을 따라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는 동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구도로 그려져 있다.

1구역은 현실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부감법(俯瞰法: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기법)으로 표현됐으며 안평대군의 꿈에 묘사된 산관야복을 만난 지점으로 볼 수 있고 현실과 도원의 경계점이다.

2구역은 도원 바깥쪽으로 기암절벽의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3구역은 도원 안쪽 입구를 나타내며, 산 사이로 길이 보이고 아름다운 폭포가 보인다.

4구역은 이 그림의 절정인 도원의 풍광을 보여주는데, 바위들이 주렁주렁 고드름처럼 표현돼 있다. 동굴(옛 사람들은 도원은 동굴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 안에 마을이 형성된 느낌을 주는데 아마도 안견의 호에서 추측하듯이 도가적인 느낌이 다분하다.

이 그림은 삼원법(高遠, 平遠, 深遠)을 적절히 배치해 안견의 창의적인 해석으로 자칫 협소해 보일 수 있는 공간을 무리 없이 풍부하게 표현했다. 산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점 높아지며, 오른쪽으로 갈수록 절정에 이르는 화면 연출이 작품에 몰입하게 만든다. 수묵 담채로 그려졌으며 필법이 매우 힘차고 기운이 넘쳐난다. 다른 도원도와는 달리 인물은 전혀 묘사되지 않았는데, 도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안견의 뜻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러 가지로 이 작품은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몽유도원도는 실경산수(實景山水)가 아닌 이념적 산수화(꿈을 바탕으로 그린)다. 북송의 곽희의 영향으로 탄생된 북종화[北宗畵: 당(唐)의 이사훈(李思訓, 651~716)을 시조로 하는 화원이나 직업화가가 주류를 이루는 화파] 계열의 그림이다. 바탕은 완염법(浣染法: 뒷면에 물감을 적셔 물감이 배어 나오게 하는 기법)으로 처리됐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광법(照光法: 빛을 처리하는 기법), ‘해조묘(蟹爪描)적인 수지(樹枝)법’(게 발톱 모양으로 선을 처리하는 기법)과 운두준법(雲頭皴法: 구름모양으로 산세를 표현하는 기법)적인 산의 형태 등이 모두 곽희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기법들이다. 고려 때부터 이미 곽희의 화풍이 전래됐다고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비교할 만한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1940년대에 국내 환수할 수 있었지만 무산돼


▎안견의 그림은 신사임당, 이징, 김명국 등 조선 중기까지 화단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이징과 김명국의 그림. / 사진:박경환
안견의 그림은 후에 신사임당(1504∼1551)을 비롯해 양팽손(梁彭孫), 이징(李澄), 김명국(金明國), 김시(金禔) 등에게 영향을 줬다. 이처럼 신분을 뛰어넘어 그의 그림을 추종했다는 것은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화풍은 조선 중기까지 오랜 기간 화단에 영향을 미쳤다.

몽유도원도와 중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밝혀진 사료가 없다. 중국보다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 무로마치 시대 화단에서 그의 영향력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무로마치 막부(1338~1573)의 선승이자 화가로 일본 수묵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덴쇼오 슈우분(天章周文)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줬다. 슈우분은 1423년 조선을 방문했다가 이듬해 돌아갔는데, 그 후 안견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또한 남아 있지 않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작품과 전칭작품(傳稱作品)으로 비교해볼 수밖에 없다. 전칭 작품으로 불리는 일본 세이카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촉산도(蜀山圖)]는 원산(遠山)들의 형상이 기법적으로 다른 점이 있지만, 몽유도원도에서 보이는 산들의 형태와 매우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형태(뾰족한 산세)는 슈우분(周文)파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데, 이는 안견의 강한 영향으로 생각된다.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일본에서 제일 오랜 기간 소장했던 사람이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인 시마즈 히사요시(임진왜란 때 출정한 장수의 후손으로 추정된다)인데, 후에 여러 사람을 거쳐 천리대학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경 초대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구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당시 국내 실정 때문에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일본 세이카토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촉산도(蜀山圖)와 몽유도원도의 부분 비교. 산들을 묘사한 형태가 비슷하다 / 사진:박경환
한번은 그 즈음해서 어떤 골동품상에 의해 국내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광수, 장택상, 최남선 등이 직접 보았다고 한다. 전형필, 최순우 씨에게도 구입을 권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국내 사정과 이런저런 이유로 국내에 잡아놓지 못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런 걸작을 자주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아직도 연구할 것들이 참으로 많은데 언제 그런 일들이 가능할지 알 수가 없다.

몽유도원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화강석으로 잘 만들어진 조각을 보는 것 같다. 뛰어난 그 조형미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600년 전 안평대군처럼 걸출한 예술 애호가의 출현으로 문화예술이 꽃피웠고, 뛰어난 예술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해 안견의 걸작인 몽유도원도가 세상에 나온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늘 가까이서 몽유도원도를 감상하고 도원을 이야기하는 시절이 언제 올 수 있을지 마음 한편이 무겁다. 그럼 점에서 뒤늦게나마 환수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 박경환 미술평론가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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