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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한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윤동주의 시 ‘편지’를 읊었다. 침을 한번 꼴깍 삼킨 소녀는 같은 시를 노어(露語)로 한 번 더 낭송하며, 편지를 쓰고 땅에서 눈을 줍는 연기를 했다. 여느 평범한 중·고등학교의 국어 수업시간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민족학교 교실이다. 벽 곳곳에 학생들이 그린 그림과 직접 노어로 번역해 적어놓은 윤동주의 시를 볼 수 있다. 한편에는 러시아 전통 인형인 마트료시카가 큼직하게 놓여 있다. 대한민국 인천에서 장장 9시간이나 비행해야 닿을 수 있는 이곳에 펼쳐진 낯선 풍경은 바로 ‘제10회 국제 윤동주 시낭송대회’ 현장의 모습이다.2017년 11월 17일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시낭송대회가 러시아 모스크바 한민족학교인 17-3학교에서 진행됐다. 17-3학교는 러시아 정부가 유일하게 인정한 모스크바 한민족학교로, 유치부·초등부·중등부·고등부까지 700여 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학생은 고려인을 비롯해 러시아 53개 민족의 학생들로 구성됐다.모스크바와 윤동주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나와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 릿교대(立敎大)에 입학해 교토의 도시샤대(同志社大)로 편입한 그는 귀향길에 오르려다 항일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광복 6개월을 앞두고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일제 식민지 현실 속에서 ‘히라누마 도쥬’로 창씨개명까지 하게 된 그의 시에는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서정숙 윤동주 시낭송대회 추진위원장은 “스탈린 시대에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민족성을 지켜온 고려인들을 보면서 윤동주 시인이 떠올랐다”고 회고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서 위원장은 중국 옌벤대에서도 일곱 차례 운동주 시낭송대회를 진행했다. 그러나 올해는 한·중 갈등 여파 탓인지 중국당국으로부터 대회 승인을 받지 못했다. 서 위원장은 “조선족만큼이나 타국살이 아픔을 겪은 분들이 고려인 아닌가. 그래서 이번 행사를 모스크바에서 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타향살이 윤동주 삶에서 고려인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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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같은 아픔이 있어서일까. 고려인 작가의 작품 속에서도 윤동주 시에서 느낄 수 있는 현실적 고통을 러시아 배경으로 발견할 수 있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조은경 전주 근영중학교 수석교사는 “스탈린 시대를 겪으며 문학으로 고뇌를 표현한 고려인 3세 작가 아나톨리 김은 윤동주를 연상케 한다”고 설명했다. 작가 아나톨리 김은 소설 [다람쥐]와 [켄타우로스의 마을] 등의 작품으로 모스크바 시·문학상과 톨스토이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러시아 현대 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은 노어로 써졌지만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고려인의 삶이 곳곳에 녹아있는 것이 특징이다.아나톨리 김의 시에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녹아 있다. 러시아에서 살고 러시아 언어를 사용하지만 한민족의 정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동양적 인간, 구체적으로 말해서 ‘한(恨)’이라고 불리는 어떤 철학적 우수 같은 것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국 사람인 나는 러시아어로 쓴 시와 산문 속에 영혼을 담으려 했다.”
고려인·러시아인 참여해 한글로 시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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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신 빅토리아 양은 “‘별 헤는 밤’을 읽으면 나라를 잃고 어머니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떠오른다”며 “시를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무언가 뭉클한 마음이 차오른다”고 소감을 밝혔다.고려인이 아닌 다른 민족 학생도 다수 참여했다. 바실리바 빅토리아 학생은 “고려인 친구들만큼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진 못 한다”면서도 “윤동주 시의 슬픈 감정은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했다. 대회를 지켜본 러시아 모스크바 한국문화원 정창윤 교육관은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보다 톨스토이, 푸쉬킨을 더 존경하는 나라가 러시아”라며 “이곳에서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낭송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수상부문은 ‘대상’ ‘금상’ ‘은상’ ‘동상’과 ‘참가상’으로 나뉘었다. 대상은 10학년 선배들을 물리치고 8학년 정 쏘냐(17) 양의 차지가 됐다. 비결을 묻자 정양은 대회를 위해 한 달간 윤동주 시인을 공부했다고 밝혔다. 정양은 “윤동주를 잘 몰랐는데, 낭송을 준비하면서 시인의 상황은 어땠는지 등을 지도교사에게 물어보며 더욱 잘 알게 됐다”며 “윤동주 시도 많이 알게 되고 상까지 받게 돼 기쁘다”고 수상 소감을 말했다.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이정환 KBS 편성마케팅국 팀장은 “학생들이 시인 윤동주를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를 중요하게 봤다”며 심사평을 밝혔다. 이 심사위원은 “시 ‘서시’와 ‘쉽게 쓰여진 시’에서 보듯 윤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부끄러움의 시인’이였다”며 “이를 모르고 큰 소리로 저항하듯이 낭독하는 것보다 말하듯 낭송하는 모습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말했다.이날 참가 학생들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대회가 끝난 뒤 슬쩍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나왔다. 많은 학생이 “한국 대학을 입학하고 한국 기업에 들어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민족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고 고국의 시를 읊어도 이방인으로서 고단함까지 지울 수는 없노라 말하는 듯했다. 서정숙 위원장은 “2018년에는 그동안 낭송대회가 열린 지역 학생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함께 감동을 나누고, 꿈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박스기사] 서정숙 윤동주 시낭송대회 추진위원장 - “한국학교 있는 15개국에 시낭송대회 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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