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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대화] 소설 '사비로 가는 길' 펴낸 작가 이제홍 

성군, 정복 군주 의자왕의 전성기 재조명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na.kwonil@joongang.co.kr
백제 의자왕(義慈王)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삼국사기]에는 사치를 즐기다 나라를 망하게 한 무기력한 왕으로 그려졌다. 반면,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는 ‘의자왕이 윤충을 시켜 월주(저장성 사오싱)을 점령하게 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정복군주로 묘사돼 있다. 의자왕의 죽음을 두고도 늙은 몸으로 당나라에 끌려가 망국의 한을 이기지 못해 병사했다는 설, 부하 장수가 배신해 포로가 될 위험에 처하자 자결하다가 실패해 그로 인한 파상풍으로 죽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중국 북망산(허난성 뤄양시)에 묻혔다고 전해지는 의자왕의 무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부여군 능산리에 의자왕의 가묘를 만들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만큼 의자왕은 우리 역사에서 미스터리다.


▎사비로 가는 길 / 이제홍 지음 / 바른북스 / 1만5000원 / 사진:이제홍
작가 이제홍은 오래전부터 백제사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충남 부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기업체에서 근무하다 우리 고대사에 대한 갈증을 저버릴 수 없어 회사를 그만 두고 나서 전업작가로 나섰다. 2015년에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를 소재로 한 [지워지지 않는 나라]를 출간해 화려했던 백제의 역사를 복원한 그는 이번에는 [사비로 가는 길]에서 작심하고 의자왕을 복권해냈다.

기업체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어렸을 적에 역사책에서 근초고왕 대에 중국 산둥반도를 지배했던 강대한 나라 백제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뛰었던 때를 잊지 못한다.”(웃음)

왜 의자왕에 천착하게 됐나?

“왕이 죽으면 시호(諡號)를 붙여준다. 설사 왕조가 망했더라도 마지막 왕에게 시호를 붙여줬다.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이름은 고장(高藏)이다. 신라 경순왕의 본명은 김부(金傅)였다. 고려의 공양왕은 왕요(王瑤),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이척(李)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어릴 때 불리던 이름 그대로 부여의자(扶餘義慈)다. 당나라가 의자왕에게 시호를 붙여주지 않은 것은 이해한다고 해도 신라는 왜 의자왕에게 시호를 붙여주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의자왕은 어떤 왕이었나?

“기록에도 나오지만 재위 초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받을 정도로 성군이었다. 귀족 세력의 견제 때문에 40세가 넘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재위 한 달여 만에 신라의 40여 개 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신라에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일본서기]에는 ‘의자왕 친위 쿠데타’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백제가 멸망하기 5년 전인 서기 655년, 의자왕이 이복동생 부여교기(扶餘翹岐)의 외가인 사택(砂宅) 씨를 비롯한 백제의 귀족가문과 추종 세력을 일거에 숙청한 사건이다. 의자왕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감행할 정도로 강하고 담대했다.”

소설 [사비로 가는 길]은 의자왕을 승리자인 신라의 시각이 아닌 백제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소설 속에서 ‘어라하’(於羅瑕, 임금)로 불리는 의자왕은 중국의 저장성과 산둥, 일본의 관서지방 야마토를 경략(經略)하고 통치할 신하를 보냈던 정복 군주이자 지혜롭고 강대한 왕으로 그려진다.

소설의 갈피마다 작가의 땀이 배인 흔적이 많더라.

“누르리모이부리(黃山伐, 논산시 연산면), 두잉지(豆仍只, 세종시), 거야택(巨野澤, 산둥성 양산박의 옛 이름), 니니와(難波, 오사카) 등 옛 지명과 당시 백제, 신라, 고구려, 당나라, 일본의 풍속까지 세밀히 복원하려고 애를 썼다. 사비(부여)에 대한 애정, 대백제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이 없었다면 탈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비로 가는 길]은 삼천궁녀, 주지육림이라는 어두운 그늘에 덧씌워져 1500년 동안 모욕적인 긴 세월을 보내야 했던 의자왕에 대한 재조명이자 복권이라고 할 만하다. 작가 이제홍은 이렇게 말했다. “말년의 의자왕에 대한 기록은 의자왕의 야망과 능력을 두려워한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덧칠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na.kwonil@joongang.co.kr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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