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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평양 로열패밀리 ‘곁가지’ 열전(列傳) 

‘백두혈통’ 밀려나면 낭떠러지뿐!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lee.youngjong@joongang.co.kr
김정남 암살 1년 지났지만 ‘가지치기’ 작업 계속…김여정 등 ‘고용희 핏줄’ 내세우지만 여의치 않아

2017년 2월 13일 벌어진 김정남 암살 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이자 한때 권력승계 1순위로 점쳐지던 인물이다. 이복동생인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암살 지시를 내렸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북한 김씨 세습 정권 내부의 실상에 관심이 쏠렸다. 집권 7년차에 접어든 김정은 체제에서도 끝나지 않는 평양 로열패밀리의 피비린내 풍기는 권력다툼. 그 뿌리와 실상을 짚어본다.


▎김정일(앞줄 왼쪽)과 김정남(앞줄 오른쪽)이 1981년 8월에 함께 찍은 사진.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은 줄곧 권력 승계 1순위로 꼽혀 왔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김정남 암살 사건도 마찬가지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몇 개의 가지가 엉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다시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과정에서 만들어진 복잡한 가계도(family tree)다. 70년 노동당 통치를 이어온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의 여성 편력이 빚어낸 일이다. 특히 김정일은 결혼·동거 등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드러난 것만 3명의 여성에게서 모두 합쳐 3남2녀를 낳았다.

후계권력에서 밀려난다는 건 곧 몰락을 의미한다. 김정일의 여인들과 그 소생들이 죽음을 무릅쓴 권력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생결단의 싸움은 후계자 낙점과정에서 치열하게 벌어졌고, 그 이후에도 수면 아래에서 은밀하게 이어져 왔다. 마그마처럼 꿈틀대다가 이례적이고 폭발적인 분출로 이어지기도 한다. 김정남 암살은 그중 하나다.

생전에 김정남이 남긴 글에서는 호두 속 같이 어지러운 김 씨 일가의 속사정을 엿볼 수 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아버지 김정일과 권력 후계에서 멀어지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우면서도 담담하게 적고 있다. 한 일본 언론인과 2011년 3월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이다.

“제가 유학을 떠난 뒤로 저의 이복형제들인 정철·정은·여정이 태어나면서 부친의 애정도 그들에게 쏠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완전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해 북한에 돌아간 때부터 부친께서는 저를 경계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부친의 기대 밖이었을 것입니다.”(고미 요지 지음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중에서)

김정남의 언급은 다소 충격적이다. 그는 “유학 시절 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었고 형제들은 베른에 있었다. 서로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한 아버지를 둔 형제지만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는 대목에선 권력의 냉혹함을 넘어 섬뜩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김정남이 이 같은 메일을 쓴 지 불과 9개월 만에 김정일 위원장은 심근경색으로 급사했다. 그리고 절대 권력은 이복동생인 김정은의 손에 쥐어졌다.

김정은의 대관식은 김정남의 죽음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갈등을 빚다 결국 상대를 제거해야겠다는 극단적 선택을 해야 할 정도로 김정은과 김정남의 골은 깊었다. 곁가지로 말려나지 않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다. 봉건 왕조처럼 적통(嫡統)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싸움이 평양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불화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 김정일이었다. 김정일은 32세이던 1974년 2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낙점됐다. 1960년대 중반 이미 최고 지도자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의 장남으로 위세를 떨쳤다. 그 시절 사실상 첫 여자로 알려진 성혜림과 만나게 된다. 김정남의 생모다.

‘형제의 난’ 씨앗 뿌린 김정일의 선택


성혜림은 1969년 프놈펜 국제영화제에 초청될 정도로 잘나가던 영화배우였다. 그녀는 월북 작가 이기영의 며느리였다. 그런데 이 집에 드나들던 김정일이 성혜림에게 한눈에 빠져버렸다. 결국 다섯 살 연상인 친구의 형수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동거에 들어갔다.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남편 이평이 대동강에 투신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김정일은 막무가내였다. 김정일의 사랑은 불타올랐다. 1971년 5월 성혜림이 첫아들 정남을 낳자, 김정일은 새벽길로 달려와 “혜림이가 아들을 낳았어”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서방으로 망명한 언니 성혜랑씨의 전언이다.

관심은 그때까지였다. 김일성 몰래 시작한 동거라 아들 김정남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몇 년 지나지 않아 김정일의 사랑이 시들해졌다. 버림받은 성혜림은 우울증과 심장병에 시달렸다. 신병 치료를 위해 서방을 오갔고, 탈북 망명설까지 터져 나왔다. 결국 그녀는 모스크바 병원에서 쓸쓸히 숨졌다. 그녀의 유해는 아직도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모스크바 외곽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성혜림을 버린 뒤 김정일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북송 재일 동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다.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는 28년간 김정일과 살았다. 성혜림이 불과 5년 안팎의 시간을 김정일과 보낸 데 비하면 절대 권력자의 사랑을 차지한 승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해진다. 열 살 연하인 그녀를 김정일은 말년까지 챙겼다. 유선암 치료를 위해 프랑스에 머물던 그녀가 숨지자 직접 특별기까지 보내 운구했다. 서방 정보당국에서 고급관이 실린 고려항공기를 포착하고 최고위급 인사가 사망했다고 파악했을 정도였다. 평양 대성산에는 아직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은 그녀의 성대한 묘소가 마련돼 있다.

김정은과 김정남은 한때 ‘평양판 형제의 난’이라 불릴 정도의 갈등을 빚었다. 우암각 사건은 외부에 포착된 대표적 사례다. 2009년 4월 평양 중구역에 위치한 특각(特閣)에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보위군으로 불리는 보위부 소속 특수병력도 동원된 심야의 습격이었다. 우암각으로 불리는 이 별장은 김정남이 평양 체류 때 주로 머무는 안가였다. 김정남은 아버지의 비밀연회를 흉내 낸 ‘파티 정치’를 벌였는데, 실제로는 김정남 지지세력의 모임으로 여겨졌다.

보위부원들이 급습했을 때 김정남은 우암각에 없었다. 일 년 중 상당 시간을 마카오와 홍콩 등지를 오가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보위부는 압수해 간 서류를 뒤졌고 김정남의 수족과 같은 관리인과 측근들을 상대로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김정남이 평양에 머물 때 은밀하게 접촉한 권력 내부의 인사들과 우암각 파티에 초대된 멤버들을 파악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후계에서 밀려났지만 김정남은 최고권력자인 김정일의 장남이었다. 그런 김정남과 추종세력의 근거지인 우암각을 보위부가 짓밟는다는 건 북한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배후에는 김정은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때 김정남이 유력시됐던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김정은이 잠재적 위협 세력인 김정남 일파를 거세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펼친 것이란 관측이 대북정보 당국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곁가지’에게 보습 대일 땅은 없었다


▎2015년 3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가운데)이 김여정(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동해안 전방에 위치한 신도방어중대를 시찰하는 모습. 당시 두 남매만 군부대 시찰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노동신문
보위부 조사를 받고 나온 최측근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김정남은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이복동생인 김정은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어린 동생이 후계에서 밀려난 자신을 향해 칼끝을 겨눴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미 권력의 칼자루를 놓쳐버린 김정남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싱가포르로 몸을 피하는 등 자신의 동선을 드러내지 않고 유랑생활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김정남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정은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세습 결정은 잘못됐다”거나 “중국에선 마오쩌둥조차 세습을 하지 않았다”고 날을 세운 건 화근이 됐다.

이후 중국과 오스트리아 등에서 암살 시도가 포착됐다. 후견인이던 고모부 장성택이 2013년 12월 김정은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면서 마지막 남은 방어벽이 무너졌다. 한때 김정남이 서방이나 한국으로 망명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극도의 신변 위협을 느꼈을 터였다.

위기감 때문인지 김정남은 동생과의 관계 회복도 시도했다. 2011년 1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동생이 후계자로서 북한 주민을 윤택하게 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동생이 제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도량 큰 인물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정남은 “제 동생이 이 말을 오해하거나 이 말을 듣고 좋지 않은 감정을 품는다면 도량이 작은 사람인 셈이고, 저는 무척 안타까울 것입니다”란 언급도 했다. 이복동생과의 영원한 결별을 예감한 듯한 발언이었다.

한쪽이 ‘본가지’가 되면 다른 쪽은 ‘곁가지’로 전락한다. 곁가지는 가지치기된다. 이런 다툼은 김정일과 이복형 김평일과의 불화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김일성과 본처 김정숙 사이에 태어난 김정일은 1970년대 중반 후계권력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후계수업 못지않게 곁가지를 쳐내는데 골몰했다.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활동을 함께한 것으로 북한이 선전하는 김정숙은 1949년 출산 도중 숨졌다. 김일성은 4년 뒤 타이피스트이자 비서 출신인 김성애와 재혼했다. 평양여자 사범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김성애는 70년대 여성동맹위원장을 맡고 노동당 중앙위원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거머쥐며 권세를 누렸다. 퍼스트레이디로 김일성의 사회주의 국가 순방 때 동행하기도 했다. ‘평양 치맛바람’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남동생 김성갑이 권력남용 등으로 처벌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김성애는 권력 전면에서 사라졌다.

김정일이 1980년 제6차 노동당 대회에서 후계자로 공식 추대되면서 운명은 갈렸다. 김성애는 김일성 주석과의 사이에 딸 경진과 평일·영일 형제를 뒀다. 이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자리를 다지면서 곁가지로 냉대를 받았다. 김일성종합대를 나온 김평일은 1981년 유고 주재 대사관 무관으로 3년간 근무했다. 평양 귀환 후 인민무력부에서 근무하던 그는 88년 헝가리 주재 대사를 시작으로 불가리아·핀란드·폴란드 대사를 거쳐 2015년 2월 체코 대사에 부임해 재직 중이다. 무려 30년째 해외를 떠돌고 있다.

한 살 터울의 남동생 김영일은 독일 주재 이익대표부에서 근무하던 2000년 현지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대북정보를 다룬 정부 당국자는 “김일성의 아들인데도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주재국 현지에서 병으로 사망할 정도라면 얼마나 곁가지에 대한 처우나 배려가 부족했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평가했다. 김평일의 누나인 김경진도 해외 대사를 전전하는 남편 김광섭과 함께 외국에 장기 체류 중이다.

곁가지인 이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내린 시기가 있었다. 1994년 6월 김일성 주석이 평양을 찾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를 맞으면서 김성애를 퍼스트레이디로 동반한 것이다. 김일성 부부는 카터 일행과 대동강에서 유람선을 타며 기념촬영을 했고 이 사진은 노동신문 등 북한 선전매체와 외신을 탔다. 하지만 한 달 뒤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김성애는 이후 김일성 추도대회 때 잠시 모습을 보였다.

‘만사혈(血)통’ 실세로 부상한 김여정


▎김정남(오른쪽)은 한때 “북한의 세습은 잘못됐다”며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기도 했다. 김정남과 여러 차례 접촉했던 고미 요지(왼쪽) 도쿄신문 편집위원.
김성애는 현재 94세 고령이다. 북한 매체에서는 그녀의 동정을 전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김성애가 이미 사망했는데도 부고가 나지 않고 있거나, 사실상 연금 상태에서 여생을 마치게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김평일이 유사시 김정은 권력의 대안이 되거나 맞서는 형국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오랜 외국생활과 곁가지에 대한 철저한 감시·통제로 측근 추종세력이 와해됐을 것이란 점에서다.

김정일은 이 같은 곁가지 제거 노하우를 고스란히 후계자 김정은에게 전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넘겨받을 당시 20대 말의 어린 나이였던 막내아들에게 있어 도전세력을 짓누르고 권력기반을 다지는 건 무엇보다 중요했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김정은의 선택은 더욱 거칠었다. 해외를 떠돌던 김정남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했다. 김정남 암살을 통해 잠재적 불안요인을 제거했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김정은은 권력기반 다지기를 가속화했다.

‘믿을 건 핏줄뿐’이란 생각을 굳힌 듯 여동생 김여정(29)에게 부쩍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오빠의 후광을 업은 김여정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서방의 대북 관측통들 사이에서 ‘백두공주’란 별칭도 붙은 김여정은 김정은 체제 들어 평양에서 제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인물로 통한다. 오빠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거의 유일한 존재란 얘기다. 처형과 해임·강등 같은 공포정치로 전전긍긍하는 다른 간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김여정을 두고 북한 권력층 사이에서는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거나 “여정 동지를 통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인사나 이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차관)이던 그녀는 지난해 10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른 이후 공개 활동이 활발해졌다. 김정은을 곁에서 보좌하는 등 측근 실세 중의 실세로 자리했다.

이 같은 모습은 김정은의 형 김정철(37)의 행보와 차이가 난다. 동생과의 후계경쟁에서 밀린 김정철은 2015년 영국 뮤지션인 에릭 클랩튼의 70세 기념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런던을 찾았다가 서방 언론에 노출됐다. 당시 김정철을 안내하고 통역을 맡은 인물이 2016년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런던 주재 북한공사다. 앞서 2011년 2월에도 여성을 동반해 싱가포르 공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권력과 일부러 거리를 두는 제스처를 취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정일의 소생들을 정리해놓은 가계도에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김정은의 이복누이로 알려진 김설송(44)이다. 구체적인 신상이나 얼굴이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김정일이 정혼한 것으로 알려진 김영숙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정보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북한 권력의 막후 실세로, 김정은의 통치활동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한다.

하지만 대북 정보 관계자들은 “근거 없는 얘기”고 일축한다. ‘유일지배’라는 북한 체제의 특성상 최고지도자를 막후에서 좌우할 인물이 따로 있다는 건 난센스란 것이다. 김정은의 권력 장악 과정이나 현재의 리더십 등으로 볼 때도 김설송에게 과도한 의미를 두는 건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 탈북단체는 “김정일의 유서에 김설송을 중심으로 북한 체제를 이끌라는 당부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북부처 당국자는 “최고지도자의 유서가 탈북단체의 손에 들어가 서울에서까지 나돌 정도로 엉성했다면 북한체제가 지금껏 존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매체가 과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찍은 김설송의 모습이라며 사진을 공개한 적도 있지만, 확인 결과 평양 백화점의 간부로 확인됐다는 게 국가정보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원수님은 백두산 아닌 한라산 핏줄” 비아냥도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이 2007년 주 폴란드 북한 대사로 재직할 때 모습. 김평일은 1988년 헝가리 대사를 시작으로 30년간 해외에 머물고 있다.
후계 권력을 굳히고 정적으로 여겨진 이복형까지 살해하는 무리수를 뒀지만 김정은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비롯한 고용희 소생을 본가지라고 내세우면서 주민들을 가계 우상화로 이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생모 고용희가 과거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멸시받던 재일동포 출신이란 점은 아킬레스건이다.

1952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용희는 열 살 때 만경봉호를 탄 북송 재일동포다. 아버지 고경택은 조총련 간부 출신이다. 평양에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시절 김정일 눈에 들었다. 결국 아들 김정은을 최고 권력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고용희는 아직 ‘어머니’로 공식화되지 못하고 있다. 북송 재일동포를 ‘째포’라며 비하해 온 북한에서 자칫 주민들 사이에 입소문이 날까 우려해서다.

고용희의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육군성이 관할하는 군복 공장 간부로 일한 경력도 껄끄러운 대목이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군수공장에서 비밀로 부쳐온 자료가 최근 공개됐다”고 귀띔했다. 이에 따르면 제주 출신인 고경택은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성이 관할하는 히로타 군복공장에 들어갔다. 북한 주장을 따르면,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할 동안 김정일의 장인은 일본군 물자를 생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 주민들 사이에 “원수님(김정은)은 백두혈통이 아니라 후지산 줄기와 한라산 핏줄”이란 비아냥이 나온다고 한다.

국제사회의 개방화 조류나 북한 엘리트 세력과 주민의 체제 이반도 걱정거리다. 특히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확산될 경우 권력 유지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권력승계가 이뤄진 사례는 모두 30차례 가깝다. 권력자가 생전에 후계자를 지정한 경우도 10여 회에 이른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들·손자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다.

국제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지만 북한은 “혁명위업 계승 문제를 원만히 해결해 세계적 모범을 창조했다”(김일성종합대 학보 2016년 4호)고 강변한다. 하지만 국호(國號)에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표방하면서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봉건적 행태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최대 후견국인 중국의 지도부마저도 내부적으로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는 게 외교 당국자들이 전하는 분위기다.

봉건 논리로도 ‘김정은 정통성’ 부족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이 2017년 3월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김한솔은 영상에서 영어로 “내 이름은 김한솔이다. 북한 출신이며, 김씨 가족의 일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봉건 왕조가 원칙으로 삼아 온 장자승계(長子承繼)대로라면 김일성-김정일-김정남이 순리다. 이런 구도가 탐탁할 리 없는 김정은으로서는 ‘믿을 건 내 핏줄뿐’이란 생각에 마음이 급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세 자녀는 모두 여섯 살 이하다. 여동생 김여정을 정치국 후보위원에 앉혔지만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처형과 숙청 등을 일삼는 것도 이를 보여준다. 김정은이 김정남의 장남인 김한솔까지 제거하려 드는 것도 이런 연유일 공산이 크다.

대북정보 당국은 김한솔(21)의 동선을 탐문하고 있는 북한 공안기구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김한솔은 부친의 살해 소식을 접한 직후 신변 위협을 느껴 잠적한 상태다. 구체적 내용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 ‘천리마민방위’라는 조직이 지난해 3월 그를 보호하고 있다며 관련 동영상을 공개한 적이 있다. 영국과 호주 등 몇몇 국가가 김한솔의 해외 망명에 도움을 줬다는 게 이 단체의 주장이다. 김한솔은 이 단체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유튜브 영상에 나와 자신의 신분을 밝힌 뒤 “북한 김씨 가문의 일원”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천리마민방위는 “김정남씨의 가족을 만나 안전한 곳으로 직접 이동해 드렸다”며 도움을 준 미국·중국·네덜란드 정부 등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북한의 김한솔 찾기는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다. 지난해 가을엔 베이징에 파견돼 김한솔의 행적을 탐문하던 북한 공작조가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됐다는 설까지 제기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당시 “김한솔의 신변 보호 요청은 자신이 북한 정권의 다음 암살 타깃이 될 걸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김한솔은 페이스북 등을 통해 김정은을 ‘독재자’라고 호칭하는 등 비판적 입장을 보여 왔다.

김정남을 제거함으로써 김정은은 자신의 권력기반에 중대한 위해 요소 하나를 없애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이 친중 성향인 김정남을 북한 유고 사태 시 대안으로 고려한다는 관측 등은 김정은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김정남 살해는 엄청난 부담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북한 정권과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잔혹성을 전 세계에 고스란히 노출해버렸다. 권력을 위해서는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하는 건 물론 형제까지 암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국제공항을 범행 무대로 택하고, 국제사회가 극도로 우려하는 독극물인 VX까지 이용했다는 점은 충격을 던졌다.

북한은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자신들의 체제 존립을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의 명분을 여기에서 둔다. 하지만 폭압적 세습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과장된 ‘피포위 의식’일 뿐이란 비판이 설득력을 얻는다. 진짜 위기는 내부에 있다는 건 누구보다 김정은이 잘 알고 있을 것이란 측면에서다. 그 싹을 잘라내겠다며 벌인 어설픈 암살극은 또다른 보복의 씨를 뿌렸다. 김정은이 주연을 맡은 평양 로열패밀리의 피비린내 나는 활극은 또다른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lee.youngj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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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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