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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러시아는 북한 대변자? 

푸틴, 북의 핵 보유 사실 17년 동안 함구하면서 시간 벌어줘… 대북 군사·경제 지원 통해 미국 견제하고 한반도 영향력 확대 노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4일 모스크바에서 가진 연례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대북한 공격 자제를 촉구했다. / 사진:연합뉴스
"난 김정은이 이번 판에서 분명 이겼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은 자신의 전략적 과제를 해결했다. 북한은 핵폭탄을 갖고 있고 사실상 전 세계 어느 지점, 최소한 적의 영토 모든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1만3000㎞나 되는 글로벌 사거리의 로켓도 갖고 있다. 그는 이미 판단이 빠른, 원숙한 정치인이다. 그는 이제부터는 역내 긴장 완화를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반드시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월 11일 러시아 신문과 통신사 대표들과의 신년 간담회에서 밝힌 내용이다. 푸틴 대통령은 김정은을 높이 평가하면서 앞으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푸틴 대통령이 이처럼 북한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의도를 파악하려면 우선 푸틴이 2017년 10월 4일 모스크바 국제 에너지포럼에서 북한의 핵 보유 사실을 17년이나 지나서 뒤늦게 밝힌 내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틴은 당시 이런 발언을 했다.

“내가 2001년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북한을 들렀다. 거기서 나는 북한의 현 지도자(김정은)의 부친(김정일)과 만났다. 김정일은 그때 내게 핵폭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김정일은 (한국의 수도인) 서울이 포격으로도 사정거리 안에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그동안 계속 제재를 견디며 버텨왔다. 당시에는 핵폭탄이었지만 지금 북한은 수소폭탄을 갖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북한을 방문한 것은 2000년 7월이다. 2000년을 2001년으로 착각하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당시 그런 사실을 국제사회와 공유하고 북한 핵 수준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비밀에 부치다가 북한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탄두 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완료했다고 주장하는 시점에야 공개했다.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실시한 것은 2006년 10월 9일이었다. 북한의 1차 핵 실험은 김정일이 푸틴 대통령에게 핵 보유를 언급한지 6년이나 지난 뒤였다.

푸틴 대통령이 북한의 핵 보유 사실을 뒤늦게 공개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당시 푸틴 대통령이 김정일이 허풍을 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북한은 이미 핵 개발을 상당히 진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페르베즈 무샤라프 전 파키스탄 대통령은 2006년 발간한 자서전 [사선에서(In The Line of Fire)]에서 북한 핵 기술자들이 1999년부터 파키스탄을 방문해 핵무기 제조를 위한 우라늄 농축과정에 필수적인 원심분리기 기술을 지원받았으며, 파키스탄 핵과학자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북한에 20여 기의 원심분리기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20년 지나 북한에서 재현된 러시아의 미사일 기술


▎2005년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한과 미·중·러·일 등 6개국 대표들이 북한의 핵 포기 등 6개 항의 합의문을 담은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은 상당 부분 옛 소련과 후신인 러시아의 지원과 묵인 덕분에 이루어졌다, 소련은 북한 정권 초기부터 핵 개발을 위한 이론·기술·인원·시설·재료 일체를 지원했다. 또 1980년대 영변에 핵 관련 시설을 10여 개 건설하는 데 도움을 줬다. 소련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으로 북한을 지원했지만, 북한은 소련을 이용해 핵 개발 기술을 체계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북한은 1956년 소련과 ‘핵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을 맺은 바 있다.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인 1990년까지 두브나 핵연구소에서 공부한 북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250명이나 됐다. 이들은 국방과학원 핵전략연구실과 제2국방과학원 핵 기술실, 원자력총국 산하 제38호 연구소 등에 집중 배치됐다. 소련 유학생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들은 리명하 전 영변 물리대학 학장, 최학근 전 원자력공업부장. 서상국 전 김일성종합대 물리학부 강좌장 등을 들 수 있다. 북한은 또 1990년대에 국제 핵 암시장에서 핵 개발에 필요한 각종 부품들을 조달했다. 당시 북한은 소련에서 분리·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핵무기 재료와 장치를 비밀리에 사들였다.

특히 북한이 핵탄두 탑재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은 러시아 과학자들의 도움 덕분이다. 북한은 1990년대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가 정국 혼란과 경제난 등으로 어려움에 빠지자 러시아 미사일 관련 분야의 과학자들을 대거 영입했다. 1993년 8월 모스크바의 세레메티에보 국제공항에서 60명이 넘는 러시아 과학자와 가족이 평양으로 가려다 체포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북한의 미사일 제작을 돕기 위해 평양으로 가려다 러시아 정보당국에 적발됐다. 이들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이후 많은 러시아 미사일 과학자가 북한에 고용돼 마케예프 로켓 설계국의 미사일 설계도와 기술 도안, 청사진 등을 북한에 넘겼다. 마카예프 설계국은 소련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개발해 온 곳이었다. 북한은 이들에게 월 1200 달러를 지급했다.

북한이 지난해 6월 시험발사에 성공한 북한의 무수단미사일(화성-10형)은 소련의 SLBM인 R-27 Zyb와 같은 엔진을 사용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디자인도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이 지난해 8월 시험 발사한 SLBM인 북극성-1호도 마케예프 설계국이 만든 R-27 미사일을 변형한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으로 흘러 들어간 옛 소련의 미사일 기술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성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북한이 정교한 소재들과 기술자들, 컴퓨터 기반 시설들이 부족한 데 따른 때문으로 보인다.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출신이자 러시아의 연방보안국(FSB) 수장을 역임한 푸틴은 북한의 이런 핵무기, 미사일 개발과 자국 과학자들의 북한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이 김정일의 핵 보유 언급에 침묵한 것은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푸틴은 2000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과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첫 방문에서 푸틴은 김정일과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유예 용의라는 합의를 끌어냈다. 당시 두 정상은 군사협력 강화, 국제패권 반대, 주권 존중,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 양국 우호협력 증진 등 11개 항이 담긴 ‘북-러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푸틴은 이어 G8 정상회의에서 북한과의 합의를 성과로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푸틴은 2000년 5월 7일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에 이어 러시아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당시 G8 정상회의에 처음 참석한 푸틴은 북한과의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자신과 러시아의 중요성을 각국 정상들에게 강렬하게 심어줬다. 국제사회에 무명이었던 푸틴이 G8 정상회의에 참석하기에 앞서 북한을 방문한 의도가 100% 맞아 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의 남·북한 등거리 관계 외교


▎200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북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왼쪽)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포옹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당시 푸틴은 북한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발언권을 높이고,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1940년대 북한의 건국을 주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북한 지역을 점령했던 소련은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내세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정권을 수립하도록 했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김일성이 제안한 남침을 승인했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과 소련은 1980년대까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1990년 소련이 한국과 수교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됐다. 북한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에 따라 북한과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 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특히 러시아는 1994년 북핵 1차 위기 해결을 위한 4자회담에서 배제됨으로써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존심의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 푸틴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2000년 6월 발표한 ‘러시아 대외정책’에서 새로운 한반도 정책을 제시했다. 새 정책의 골자는 ‘한반도 문제에서 러시아의 동등한 참여 보장과 남북한과의 등거리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푸틴의 방문 이후 북한과 러시아는 급속한 밀월 관계를 보였다. 김정일은 2001년 7월 특별열차를 타고 무려 23박 24일의 일정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왕복 2만㎞를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오간 여정은 서방 언론으로부터 ‘21세기에 19세기식 여행을 한다’는 조롱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과 러시아는 우호관계를 국제사회에 과시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푸틴과 김정일은 정상회담을 갖고 이른바 모스크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러시아가 북한의 미사일 개발 권리를 인정하고,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북한의 입장에 러시아가 동의하는 등 정치적인 내용과 함께 경제 협력도 포함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한반도 종단철도(TKR)를 연결한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김정일은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둘러본 뒤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정일은 또 2002년 8월 러시아 극동 지역을 5일간 방문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TSR과 TKR 연결 사업 등을 포함한 경제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처럼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푸틴은 북한의 핵 보유 사실을 밝힐 필요성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푸틴과 러시아 정부가 2000년대 초반처럼 또 다시 북한을 비호하고 있다. 푸틴은 지난해 12월 14일 연말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자제를 촉구했다. 특히 푸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과 관련해 미국 책임론을 주장했다. 푸틴은 “미국이 2005년 발표한 9·19 공동성명을 파기해 북한을 자극했다”면서 “이후 북한은 리비아와 이라크의 정권 붕괴 사태 등을 우려해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기술을 개발하게 됐다”고 북한의 핵 개발 동기에 공감을 표시했다.

미국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대한 반감 표출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 러시아에는 4만 명 정도의 북한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다.
9·19 공동성명은 북한의 핵무기 폐기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로의 복귀, 북·미간 신뢰 구축 및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푸틴은 “이제 북한 미사일이 미국 본토까지 도달하는 데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며 이는 좋은 일이 아니다”면서 “미국과 북한이 모두 상황 악화를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틴은 또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계획에 대해 “북한은 폐쇄국가로 미국도 어떤 목표를 타격해야 할지 모두 다 아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북한이 미국의 선제공격에 대응해 한 발의 미사일만 발사해도 그 결과는 재앙적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푸틴은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 핵 위기와 관련해 미국이 러시아의 협조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푸틴의 이런 발언은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푸틴이 북한의 ‘대변인’처럼 말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러시아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 제재를 받는 국가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러시아는 2014년 3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강력한 경제제재 조치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푸틴은 ‘제재 무용론’을 입증하고 싶을 수밖에 없다. 푸틴이 지난해 9월 5일 중국 샤먼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 참석한 후 기자회견에서 “북한 김정은 정권은 체제 안정을 보장받지 않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은 풀을 뜯어먹을지언정 제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비영리단체인 공산주의희생자추모재단의 매리언 스미스 이사는 “푸틴은 제재라는 개념 자체를 약화하기 위해 대북제재를 약화하고 있다”면서 “푸틴은 러시아가 제재를 받는 상황에서 제재가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푸틴은 리비아와 이라크를 예로 들어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비판했다. 리비아와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이 김정은으로 하여금 핵을 체제 방어수단으로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푸틴의 이런 입장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그동안 유엔 안보리 등에서 북한 제재에 대해 상당히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12월 23일 유엔 안보리의 새로운 대북 제재 결의 2397호 채택 과정에서 일부 조항을 제외 시키는 등 ‘몽니’를 부려 제재 약화를 이끌어냈다. 러시아 외무부는 결의 2397호가 채택되자마자 발표한 성명에서 “사실상 북한에 대한 전면적 경제·통상 봉쇄와 북한의 모든 지도부에 대한 제재를 요구했던 미국의 아주 엄격한 초안을 상당 정도 수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안보리는 대북 유류 공급을 50만 배럴로 제한하고 북한의 해외 파견 노동자들을 2019년 말까지 귀환시키도록 규정한 결의 2397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었다. 러시아 외무부는 ▷석탄 운송을 위한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지속적 이행과 러시아와 북한 간 직항 항공노선 유지를 비롯해 김정은 등 북한 최고지도부와 정부 및 노동당에 대한 제재 제외 ▷북한으로의 원유 및 석유제품 공급 전면 금지 제외 ▷북한 선박에 대한 나포, 검문 등과 관련한 조항 약화를 언급했다. 또 북한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귀환도 당초 12개월에서 24개월로 늘렸다는 것이다.

대북 제제 국제공조에 의도적 김 빼기


▎지난해 6월 시험 발사에 성공한 북한 무수단 미사일. 외형과 엔진 성능에서 러시아제 미사일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진:조선중앙TV
물론 러시아가 북한의 값싼 노동력 때문에 제재에 미지근하다는 시각도 있다. 북한은 50년 이상 시베리아 벌목에 일꾼들을 보냈다. 러시아로서는 극동의 인구가 줄어 노동력이 굉장히 부족하기 때문에 저임금에 양질의 북한 노동력을 대체할 만한 노동력을 찾기가 힘든 상황이다. 러시아에는 4만 명 정도의 북한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또 유엔 안보리의 제재를 무력화할 수 있는 북한과의 밀거래에 대해서도 눈을 감고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다른 회원국들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결의를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다른 회원국들과 달리 달랑 한 장짜리 이행 보고서만을 제출하기도 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러시아가 북한에 비밀거래를 통해 상당량의 원유와 유류제품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유럽 고위 안보 당국자를 인용해 러시아 국적의 대형 선박이 지난해 10월과 11월, 최소 3차례에 걸쳐 공해 상에서 북한 선박에 원유와 유류제품을 넘겼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 나선 특구-러시아 하산-중국 훈춘 루트가 대표적인 밀수 통로라는 말을 듣고 있다. 북한은 나선 특구와 훈춘 직거래 통로를 통한 밀수 단속이 심해지자 러시아 하산을 거치는 우회 방식으로 밀거래를 바꾸었다. 하산에서 가까운 무단강 일대에서는 북한산 제품을 한가득 실은 대형 러시아 트럭 행렬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프랑스의 [AFP] 통신은 북한과 러시아의 합작법인 나선 콘트랜스(RasonConTrans)를 통해 북한이 유엔 안보리의 석탄 수출 금지 제재조치를 회피하는 정황이 관측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200만t의 러시아 석탄을 실은 기차가 나선콘트랜스가 운영하는 나진항 부두에 도착한 뒤 석탄을 선박으로 옮겨 중국에 수출하는데 이 과정에 북한산 석탄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AFP]는 중국이 북한의 석탄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뒤에 오히려 나선콘트랜스의 사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 방송인 [도이체벨레]도 북한 유류 제품 가격이 몇 달간 오르내림을 반복한 뒤 지난해 11월 들어 떨어지기 시작했다면서 이는 러시아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러시아 국경을 통해 엄청난 분량의 연료가 들어오고 있다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제재 국제공조에 구멍이 나고 있다고 전했다.

푸틴과 러시아 정부가 북한을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북한을 지렛대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한반도 문제에 적극 관여할 의지나 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북핵 6자회담 참가국이기는 했으나 논의의 중심에는 끼지 못하는 주변적인 역할에 불과했다. 그러던 러시아가 최근 들어 북한과의 밀월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북한과의 관계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러시아는 화물과 승객을 실어 나르는 북한의 화물여객선 만경봉호의 취항은 물론 북한 전문 여행사의 개설, 북한 관리들을 극동 경제포럼으로 초대해 북한과 경제교류 활성화를 협의하기도 했다.

북한도 러시아와의 유대와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해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69주년에 푸틴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의장이 축전을 보냈다고 보도했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축전 발송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은 지난해 9월 3일 6차 핵실험 때도 러시아에 이틀 전에 통보했지만 중국에는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온·오프라인에서 물심양면 지원

러시아와 북한의 밀착 관계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인터넷 인프라 지원을 들 수 있다. 러시아 국영 통신업체인 트랜스텔레콤(TransTeleCom)은 지난해 10월부터 북한에 새로운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은 이전까지 인터넷망을 중국 통신기업 차이나유니콤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다. 러시아가 제공한 인프라 덕에 북한은 대역폭(어떤 신호가 점유하고 있는 채널의 주파수 폭)을 60% 확장하게 됐다. 인터넷 접속 채널이 두 개로 늘면 북한은 보다 많은 대역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이 같은 인프라는 결국 북한의 사이버 공격 능력을 두 배로 향상시킬 수 있다.

러시아는 북핵 문제 해결 관련 북한과 미국 간 중재자 역할도 자처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26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미국과 북한의 외교 대화에 중재자로 나설 준비가 돼있다”고 밝혔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같은 날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이 북한에 대한 공격적 수사와 역내 군비 증강 등을 통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면서 “제재의 언어 대신 협상으로 미국이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르미스트로프 러시아 6자 회담 차석 대표도 지난 1월 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미국과 북한 모두에 러시아와 중국이 제안한 로드맵의 첫 단계 구상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신중한 의견을 제시해 줄 것을 제안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러-중 로드맵은 푸틴과 시진핑이 합의한 쌍중단(雙中斷,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 중단과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쌍궤병행(雙軌竝行, 비핵화 프로세스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 동시 진행)을 말한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의 이런 제안과 대북 밀월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이클 케이비 국무부 동아·태 대변인은 “북한과 다양한 채널을 통해 대화할 수 있다”면서 러시아의 제의를 일축했다.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북한을 옹호하는 러시아의 태도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담당 조정관도 “러시아의 중재 역할 제안에는 동아시아에서의 입지를 키우겠다는 의도가 들어있으며 소련 붕괴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지위를 다시 찾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정부의 전직 고위 관리들의 언급처럼 러시아가 북한을 변호하며 북핵 문제에 대한 개입 폭을 넓히는 의도는 한반도와 동북아 및 미국과의 관계에서 지렛대로 삼으려는 푸틴의 계산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러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 북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옛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푸틴으로선 북핵에 따른 한반도 위기가 어떻게 보면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북한의 대변자로 나서겠다는 전략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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