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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리포트] 팬지어(Pangaea) 시대, 상식과 논리가 안 통하는 한국 

가상통화 규제는 열린 세계를 향한 쇄국정책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세계는 이미 분리할 수 없어 일국 단위 통제는 무의미…가상통화는 간단하고도 평등한 규칙에 의한 전방위 투쟁

▎서울 중구 무교동에 위치한 가상화폐거래소 빗썸 시세판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필자가 지금 머물고 있는 이탈리아 베니치아 펜션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하자. 매년 겨울 한 달 이상 머무는 곳으로 베니치아 동쪽의 리도 섬에 위치한, 정원 10명의 작은 숙박업체다. 겨울의 유럽은 어둡고도 춥다. 대략 오후 4시쯤이면 베니치아를 비롯한 주변 섬 전체가 밤의 유령도시로 변해간다. 산마르코 광장 주변 레스토랑만 북적일 뿐 적막 그 자체다. 겨울의 베니치아는 여름에 비해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올해 리도의 겨울은 조금 다르다. 겨울인데도 필자가 애용해온 펜션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방 다섯 개가 전부 꽉 찼다. 그 이유는 지난해 12월 말리도에서 시작된 건물 개·보수에 있다. 원래 병원으로 사용되던 5층짜리 건물을 관광용 복합상가로 바꾸는 과정에서 건설노동자들이 일시에 리도에 밀려든 것이다. 리도 내 전체 숙박시설 규모는 하루에 500명 수준이다. 그나마 비수기인 겨울에는 8할 정도가 문을 닫는다. 나머지 1할, 즉 100명 정도 규모의 숙박지에 건설노동자들이 밀려든 것이다. 예약을 안 했다면 필자의 겨울 리도도 없었을 것이다.

펜션에는 필자를 제외한 나머지 방 4개에 8명의 노동자가 숙식을 하면서 머물렀다. 놀랍게도 매일 아침 6시에 나가서 오후 5시에 모두 들어온다. 일요일도 없이 7일 연속 노동이다.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곳이 펜션이다. 8명 노동자도 모두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다. 자연히 저녁식사 시간에 함께 어울리게 됐다. 이들을 처음 접했을 때 놀란 것은, 8명 중 한 명을 뺀 나머지 7명 전원이 이탈리아 밖에서 온 이민자란 점이다. 알바니아·이집트·모로코·슬로베니아 출신이다. 유창하진 않지만, 대부분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이해한다. 국경을 넘는 전파를 통해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볼 수 있기에 어릴 때부터 이탈리아어를 익히게 된다고 했다.

매일 저녁 이국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둘 알게 됐다. 비(非)유럽의 유럽화는 필자가 알게 된 가장 확실한 현실이다. 유럽 전체가 불법 이민으로 인해 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슬람=테러’라는 이미지도 떠오른다. 그러나 합법 이민에 의한 경제·사회·문화적 통합이 유럽 내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은 낯설 듯하다. 부분적으로 시작됐으리란 추측은 가능하지만, 필자가 접한 펜션 생활에서의 경험에 비춰보면 그 속도나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는다. 간단히 말해 이탈리아의 경우 건설 노동력의 90% 정도는 비유럽인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고 한다. 다른 유럽 선진국도 대략 70% 이상의 건설노동자가 비유럽인이라고 한다. 베니치아 식당의 부엌이 방글라데시인으로 메워진 것은 이미 5년 전의 상황이다.

절제의 이슬람 노동력을 선호하는 이탈리아


▎아랍에미리트 글로벌 브레인대학 홈페이지 초기 화면. 일본과 싱가포르 학생들이 주류를 이룬다. / 사진:유민호
이들 4개국 7명의 이민자는 모두 합법적 절차를 밟아 이탈리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임금도 최저임금제에 따라 이탈리아인들과 똑같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탈리아인의 절반 정도라고 한다. 이들을 합법 노동자로 만들고 일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소개업체가 40%가량을 챙겨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의 불평·불만은 듣기 어렵다. 알바니아에서 온 50대 중반 노동자는 원래 경찰 출신이다. 한 달 월급이 300유로 정도로, 그나마 2년 이상이 체불돼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온 중학교 교사 출신 노동자의 현지 월급도 400유로 정도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의 한 달 월급이 출신지의 반년치 수준이다. 체불도 없이 곧바로 현금 지불이다. 리비아·알제리·방글라데시·아프리카를 비롯한 다른 지역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유럽과 이슬람 국가는 문명의 충돌권에 해당된다. 가톨릭의 대부(代父) 격인 나라에 이슬람권의 이집트·모로코·알바니아·리비아 출신자가 밀려든다는 데 대한 현지인의 반감이 클 듯하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것이 테러다. 그러나 필자가 접해본 이탈리아인은 전혀 다르다. 정반대로 합법적인 이슬람권 사람들을 한층 반긴다. 같은 가톨릭 문명권인 슬라브계 이민자보다 무슬림에 대한 호감도가 더 높을 정도다. 왜 그럴까. 일에 대한 성실성과 더불어 술·도박·여자 문제에 관한 절제된 생활이 가장 큰 이유다. 간단히 말해 무슬림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술도 안 마시고 싸움도 안 하는 모범생 범주에 들어간다. 굳이 무슬림권 이민자들에 대한 불평·불만을 꺼낸다면 음식 문제가 클 듯하다. 할랄(Halal) 음식만 찾기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이 함께 대하기 어렵다.

이슬람권 노동자들이 필자가 머문 펜션에 몰려든 이유는 할랄 음식을 직접 주문, 조리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면 무슬림의 할랄 음식에 대한 자세는 말 그대로 신앙이다. 필자가 요리를 해서 테이블에 올리자 재료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다. 돼지고기·새우·오징어처럼 할랄 음식에 어긋날 경우 입에 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밖의 경우 규율을 잘 지키고 꾸준히 일하면서 이탈리아 체제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돈을 벌어 전부 고향으로 보낸다. 오후 5시 펜션에 돌아오는 즉시 모두가 경쟁하듯, 현지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비디오 통화로 직접 얼굴을 보면서 행한다. 덕분에 7명의 신원이나 가족에 대해 전부 알게 됐다.

리도에서의 개인적 경험은 최근 일고 있는 ‘팬지어(Pangaea)’ 세계관으로 설명될 수 있다. 팬지어는 고대 그리스어 ‘팬(Pan, 하나로 합쳐진 전체)’과 ‘가이아(Gaia, 어머니 같은 대지)’를 합성한 말이다. 하나로 연결된 대지, 대륙이란 것이 팬지어의 문자적 의미다. 20세기 초 등장한 학설로 약 3억 년 전부터 1억7000만 년 전까지 지구의 지표면에 관한 것이다. 전체가 하나의 땅으로 연결됐을 당시의 지형적·지리적 상황을 팬지어라 부른다.

21세기 들어 팬지어란 말이 다시 등장한 이유는 지구 전체를 하나로 묶는 조류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국가나 문명권으로 나눠진 게 아니라 하나로 연결됐던 팬지어 당시 상황과 똑같다고 보는 은유적 개념이다. 대륙만이 아니라 국경을 초월해 이뤄지는 대규모 국제무역은 팬지어의 좋은 본보기다.

대부분은 ‘팬지어=현실로서의 글로벌라이제이션, 사상으로서의 글로벌리즘’으로 대할 듯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다. 20세기 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시절 시작된 글로벌 시대와,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본격화된 팬지어 시대의 주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해보자. 지구가 둥글고 또 다른 대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다. 왕에 이어 국민·민족·국가가 등장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국가 차원의 국제관계가 본격화된다. 국가 간, 대륙 간 통상은 가장 큰 자극이자 원동력이다. 종교나 정치적 신념도 중요하지만 근본은 역시 돈이다.

기업은 국가를 대신해 나타난 20세기 말 글로벌 시대의 주인공이다. 국가의 국익과 더불어 기업의 사익이 글로벌 시대의 가치로 떠오른다. 애플은 대표적인 모델이다. 애플을 국가 차원의 기업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노동력은 중국, 머리는 미국 내 소수자, 경영은 앵글로색슨, 시장은 글로벌인 식이다. 국익을 넘어선 사익이 글로벌 시대의 현상이자 상식으로 정착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팬지어는 어떨까? 국가 기업과 더불어 ‘개인’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인터넷·소셜미디어·인스타그램 같은 것으로 개인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는 것은 팬지어 현상의 기본이지만, 이미 구문에 속한다.

피할 수 없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승자승 게임


▎에스토니아 디지털 시민 모집 홈페이지. 143개 나라 가운데 참가 시민이 가장 많은 곳은 인도다. / 사진:유민호
2018년 들어서기 무섭게 한국 사회 전체를 흔들고 있는 가상통화 열풍은 어떨까? 팬지어 현상의 대표적인 본보기다. 필자가 글을 쓰는 이 순간 가상통화 거래 불법화 논의 방침이 뉴스로 퍼져 나가고 있다. 논의는 엎치락뒤치락한다. 가상통화 열풍의 진원지가 2030세대 청년이란 점에서 경제뿐 아니라 정치논리가 개입된 듯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최종 방침이 내려지겠지만, 팬지어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상통화 거래 중단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거래처를 외국으로 옮겨, 아예 계좌를 외국에 두면서 거래할 경우 한국 정부의 법 적용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있다. 정부가 막을 수 있을까? 인터넷 시대에는 다양한 방법의 국외 탈출이 가능하다. 국가 단위, 나아가 기업 단위로 처리할 수 없는 영역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가 바로 팬지어다. 이민자 문제는 아날로그 차원의 팬지어 현상에 불과하다. 국가와 기업의 방치나 무관심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사람들이 하나로 이어진 대륙을 대상으로 한 세계관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시대다. 정부가 나서서 가상통화 거래소를 차단할 수는 있겠지만 거래 자체를 영원히 중단시킬 수 없는 세상이다. 물론 자본주의에 기초한 민주헌법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공산당 일당독재 중국에서나 가능한 국가의 횡포다.

필자의 개인적 판단이지만 가상통화 거래는 국가·정치·사회·문화적으로 장려해야 할 영역이다. 투기로 변하고 돈을 잃은 사람들의 자살을 걱정하기보다 팬지어 세상의 현실과 광범위한 무대 체험을 일찍부터 터득하는 것이 한층 더 건설적이다. 기술적 차원의 완비만이 국가의 할 일이다. 사실 가상통화의 주인도 모호한 상태에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가상통화 거래소만큼 갑을이 없는 평등한 세상도 드물다. 100% 자기 책임 아래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승자승 게임이다. 요즘 세상에 돈보다 더 확실하고 현실감 넘치는 존재가 있을까? ‘청년이여 눈을 뜨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청년이여 팬지어 세계를 휘젓는 돈부터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다. 얻은 사람은 얻은 사람대로, 반대로 잃을 경우 거기에 맞게 소중한 교훈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가상통화가 언젠가 폭락할 것이란 것은 어린애도 이해한다. 마치 언젠가 온난화로 인해 지구가 종말을 맞을 것이란 얘기와 똑같다. 팬지어를 16세기 대항해 시대의 군주, 19세기 국민국가, 20세기 말 글로벌 기업 체제 아래의 세계로 해석하는 것이 가상통화거래소 폐지 발상의 배경에 있다.

디지털 시민은 팬지어 시대를 실감할 수 있는 증거다. 인구가 130만 명인 북구의 미니 국가 에스토니아가 무대다. 지난해 에스토니아는 자국민의 요건 중 하나로 디지털 시민을 추가한다. 에스토니아 정부가 연 ‘디지털 시민 신청서(https://e-resident.gov.ee)’를 통해 가입할 수 있다. 가입 후 탈퇴도 자유다. 신청서에 자신의 정보와 비용 102유로를 보내면 시민 여부에 관한 심사에 들어간다. 곧바로 시민카드가 발급된다. 한 달 정도가 소요된다. 1월 11일을 기준으로 전 세계 143개국의 2만7608명이 에스토니아 디지털 시민으로 등록돼 있다.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시민에 사람들이 몰린 이유


▎지난해 12월 일본 기업 소니가 공개한 반려견 로봇 아이보. / 사진:소니
과연 어떤 장점이 있을까? 디지털 시민이 오픈한 에스토니아 내 회사 설립이 답이다. 4272개 회사가 디지털 시민에 의해 탄생됐다. 에스토니아의 세법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럽연합(EU) 가맹국이란 점을 감안할 때 에스토니아의 법인세나 소득세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왜 디지털 시민으로 등록하면서까지 세금을 에스토니아에 내려고 할까? 에스토니아 자체만이 아닌 EU 28개국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가 전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EU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에스토니아에서 비즈니스에 들어간다. 에스토니아라는 목마를 통해 EU란 트로이를 공략하는 식이다. 비애국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가상통화 거래에 따른 세금이나 불이익을 피하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디지털 시민이다. 세금이 에스토니아로 빠져나가겠지만 개인 차원의 이익이나 투자와 관련한 안정성 측면에서는 남다를 듯하다.

애플이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처럼 개인의 이익이 국가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 팬지어 시대의 상식이자 논리다. 물론 언젠가 디지털 시민에 대한 세금도 한국 정부가 부과할 것이다. 그땐 아마도 달나라 시민카드가 등장하면서 국가의, 아니 지구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하마나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를 통해 이뤄지던 세금포탈용 불법 비밀계좌가 아니라 아예 디지털로 전 세계에 명명백백하게 밝히면서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것이 팬지어 시대의 비즈니스 논리다. 근대화 이후 정체성의 기준이 된 것이 국가·민족·인종 같은 단위다. 디지털 시대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제의 추억에 불과하다.

가상통화거래소 폐지 문제로 나라 전체가 출렁이는 동안 미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흥미로운 뉴스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미국의 경우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SE 2018’을 통해 데뷔한 섹스 로봇이다. 인공지능(AI) 탑재 로봇으로 이름 그대로 인간을 대신한 섹스 도구다. 1만 달러 전후로 곧 출시된다고 한다. 라스베이거스 현지 비디오를 봤지만 머리가 잘린 얼굴만 내세워 음담패설에 특화한 여성 로봇의 성적 매력을 주변에 과시했다. 가슴과 하반신을 부착해 업무 충실도 120%의 섹스 로봇이 침대 한가운데를 지킨다는 의미다. 성평등론자가 보면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상품은 아직 여성 로봇에 한한다고 한다.

팬지어의 상식, 개인이 기본 단위


▎12월 4일 서울 역삼동에서 가상화폐 빗썸 피해자 대책위 회원들이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일본 뉴스는 도쿄에서 열린 소니(SONY)의 신상품 발표 무대가 진원지다. 일본 미디어로부터 ‘소니 부활의 증거’로 명명된 로봇 개의 등장이다. 아이보(アイボ)로 명명된 로봇으로, 크기는 라면 박스의 절반 정도다. 2006년 생산이 중단된 이래 12년 만에 업그레이드된 인공지능 로봇이다. 2006년의 소니는 장래가 불투명한 늙은 공룡기업으로 통했다. 개선과 혁신에 사운을 건 결과, 지난해 글로벌 블루칩 첨단기업으로 재기했다. 21세기 키워드인 인공지능 개발을 통한 소니 부활이다. 아이보는 그 같은 부활의 징표로 받아들여진다. 19만8000엔에 달하는 금수저 개이지만 출시 전부터 매진이다. 아이보 출시 이벤트는 선발된 다섯 명의 고객과의 만남을 통해 이뤄졌다. 조작은 손과 목소리로 행한다. 짖는 것은 물론 뛰고 안기거나 오줌 누는 모습도 보여준다. 차기 아이보는 주인의 얼굴 표정만으로도 알아서 행동할 것이라고 한다.

섹스 로봇과 로봇 개를 보면서 느낀 것은 동(東)과 서(西)의 확연한 차이다. 크게 두 가지가 눈에 띈다. 먼저, 로봇과 인간의 교감을 육체적 측면에 두는 곳이 서, 심리적·정신적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 동이다. 물질의 서, 정신의 동이란 식으로 해석할 듯하지만 배경을 보면 그렇게 간단히 나누기도 어렵다. 사실 서의 경우 로봇 개는 아예 필요 없다. 집 안에서 개와 함께 살고 함께 산책하는 것은 미국에서 일상적인 풍경이다. 동의 경우 반대로 섹스 로봇이 필요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매춘을 불법시하는 동이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 손만 뻗치면 곳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동의 매춘이다. 물질 정신과 같은 양극론이 아니라 서로의 생활과 문화에 기초한 로봇들이다.

두 번째 주목한 부분은 개인적 관계로서의 섹스 로봇과 다수와의 소통에 기초한 로봇 개다. 침대에서 이뤄지는 개인과의 은밀한 관계로서의 서, 텔레비전과 식탁을 에워싼 모두의 공간 속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존재로서의 동이다. 섹스 로봇=개인, 로봇 개=가족이라고나 할까? 실제 두 로봇의 등장 무대를 보면 섹스 로봇에는 남자가 한 명씩, 아이보 이벤트에는 가족으로 채워져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섹스 로봇, 남자 혼자 달랑 나와 아이보와 노는 장면은 없다. 아마 대부분은 상상하고 싶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필자의 그 같은 생각은 이미 한물간 구시대적 ‘꼰대 발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소니의 아이보가 대상이다. 아이보 개발팀의 인터뷰를 통해 주된 소비층을 가족이 아닌 개인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병원 내 환자, 특히 노인홈에 거주하는 단신 고령자가 주된 타깃인 것이다. 발언은 삼갔지만 미혼 남녀에게 왕따를 당한 초등학생도 판매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도 있겠지만 개인이 한층 더 중요한 소비층이란 의미다.

팬지어의 상식은 개인이 기본 단위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국가·기업을 넘어선 것은 물론이고 가족·부부·부모의 관계를 초월한 개인 그 자체가 팬지어 시대의 기본전제다. 따라서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국가·민족·기업·가족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활용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개인 차원을 넘어설 경우 생길지도 모를 ‘카오스(Chaos)’를 고려하면 개인 차원에 묶는 것이 정의롭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인공지능 로봇을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악용할 경우 나타날 카오스는 각종 시나리오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살상용 로봇의 대량생산이 대표적인 예다. 영화를 통해 1987년 치안 부재 도시 디트로이트에 등장한 로보캅(RoboCop)은 카오스 팬지어의 미래가 어떨지 보여주고 있다. 처음엔 착한 로봇으로 등장하지만 나중에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통제 불능 개체로 성장해간다. 개인이 주도하는 팬지어를 국가·기업 논리로 억누르려는 발상은 가상통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로봇을 통해 국가·지구 차원의 문제에 개입하는 순간 엄청난 반작용이 밀려들 것이다. 카오스는 개인이 아닌 집단논리에서 탄생된다. 몇 명 피해 보는 수준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 인공지능 시대의 국가·기업·집단의 논리다. 물론 21세기 팬지어 세계관에 반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글로벌로 가는 자비로운 ‘만인의 투쟁’


▎베네치아 펜션에서 필자와 만난 외국인 노동자 8명중 7명이 이탈리아 밖에서 온 이민자였다. / 사진:유민호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으로 규정했다. 인간들 간의 폭력과 투쟁 상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필자가 보는 팬지어 세계도 만인의 투쟁 현장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환경은 400년 전 토머스 홉스의 세계와 전혀 다르다. 폭력·무질서의 정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됐다.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이 있지만, 양적으로 비교한다면 21세기 세계는 평화 그 자체다. 작은 산 하나를 넘는데도 남자 대여섯 명이 동행해야만 했던 것이 20 세기 이전의 풍경이다. 산적 때문이다. 바다는 물론이고 거리, 시장 어디를 가도 위험과 무질서가 넘쳤다.

간단한 법과 규칙이 존재할 뿐 개개인이 알아서 세상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팬지어의 현황이자 논리다. 국가권력은 중재할 필요도 없다. 폭력이 없는 투쟁 현장에 끼어들 틈이 없다. 오히려 국가권력 자체가 폭력처럼 느껴질 뿐이다. 심판도 폭력도 없이 어린애도 알 수 있는 간단하고도 평등한 규칙에 의한 전방위 투쟁이다. 바로 가상통화 세계와 같은 곳이다.

팬지어 시대의 투쟁 현장은 넘어진 사람을 주변에서 모두 힘을 합쳐 일으켜 세워주는, 인정이 넘치는 무대이기도 하다. 아랍에미리트(UAE)라고 하면 원전 건설, 밀거래, 적폐청산 같은 단어가 떠오를 듯하다. 필자는 다르다. 4년간 무료로 전액 학비·생활비를 지원하는 글로벌 브레인 유치국가라는 이미지가 한층 강하다. 미국 뉴욕대와 공동으로 매년 300명 정도의 유학생을 뽑아 사막의 오아시스로 세계의 청년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하버드대가 전부로 통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필자가 보는 팬지어 상식은 아랍에미리트 같은 나라로 귀결된다.

아랍에미리트의 글로벌 브레인대학 재학생은 1000여 명으로 세계 각국에서 몰려들었다. 강의 내용은 팬지어 세계관 그 자체다. 재학생의 경우 필자가 아는 한 아직 한국인은 없다. 일본·싱가포르가 주류다. 하버드대만이 아니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자. 갑을 논쟁, 흙수저 타령과 무관한 ‘자비로운’ 무대도 많다. 인터넷 댓글이나 이불 속 불평·불만이 아니라 만인의 ‘공평한’ 투쟁에 기초한 팬지어 세계다. 글을 마감하려는 순간 친구인 일본인 교수로부터 전자 우편이 날아왔다. “4년간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일본 내 최초 글로벌 대학인데 한국인 지원자가 제로다. 중국·베트남·호주가 대부분이다. 반일감정 때문인가?” 팬지어 세계는 이슬람 건설노동자뿐 아니라 한국의 미래에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얼마나 눈을 뜨고 마음을 열지에 달려 있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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