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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同行-고령사회로 가는 길’(2)] 조선시대에도 노인 우대정책 있었다 

“老人이 다 올 때까지 왕은 용상에 앉지 않아”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muzes@joongang.co.kr
평민·노비도 여든 살 넘으면 임금이 베푸는 양로연 참석하는 기회 부여…100세 이상 고령자에게 의복과 관, 쌀을 하사품으로 내렸다는 기록도

▎조선 숙종 45년(1719년)에 만들어진 ‘기사계첩(耆社契帖)’.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우대하는 뜻에서 만든 화첩이다. 왕의 시문, 참석자 명단, 행사 장면의 그림 등으로 구성돼 있다.
노인을 공경하고 우대하는 제도는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 속에서 존재해 왔다. 예와 효를 중시하는 유교문화가 사회 제도를 뒷받침하던 조선시대 때는 다양한 관련 제도가 시행됐다. 노인우대는 공자의 근본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3000명의 제자에게 효(孝)는 덕(德)의 근본(根本)이며 자신의 생활신조를 ‘노자안지(老者安之)’라고 했다. 즉 노인들을 편안하게 모시는 삶을 지향한 것이다.

조선의 역대 왕은 이러한 공자의 ‘노자안지’를 받들었다. 세종은 조선이 ‘효국(孝國)’임을 선언하고 노인에 대한 예우를 매우 중시했다. 세종은 안질 치료차 청주를 순행할 당시 진천에서 하루 묵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한 효자의 얘기를 듣는다. 노은에 사는 김덕숭이란 선비가 하늘이 낸 효자라는 보고를 들은 것이다. 세종은 효자를 특별히 불러 위로하고 주육(酒肉)과 백미를 하사했다. 그가 죽자 어명을 내려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증직하고 삼강행실도에 효행을 기록하게 한다. 추석이나 국경일을 맞으면 왕은 나이 많은 노인들을 궁중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평민은 물론 노비라도 여든 살을 넘게 되면 정부에서 잔치를 여는 양로연 제도도 시행됐다. 양로연 대상에 신분을 따지지 않았으나 부패 범죄자는 제외했다. 뇌물 범죄에 연루돼 이맛살 속에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자자형’을 받은 노인은 초청 대상에서 빠졌다고 한다. 양로연은 세종 이후 국상이나 흉년을 제외하고는 웬만해서는 중단하지 않을 정도로 정부가 크게 신경 쓴 국가 중대사였다.

왕과 왕비가 따로 하거나 합동으로 주관하는 양로연은 신분의 존비를 문제삼지 않았기에 평민은 물론 노비들도 왕을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다. 지방 양로연은 왕이나 고관대작이 출장 가서 챙기거나 지방 수령이 관청별로 주재했다. 국가대사나 자연재해, 흉년 등으로 양로연을 열지 못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생기면 음식이나 의자를 선물했다.

양로연 의전 절차를 보면 임금이 얼마나 노인들에게 예우를 갖추려고 애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반 잔치에서 왕세자를 비롯한 왕족과 문무백관이 왕에게 네 차례 하는 절을 양로연에서는 두 차례로 줄였다. 그것도 일어서지 않고 앉은 자세로 머리만 두 번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면 그만이었다. 연세가 높아 절하기 힘든 점을 고려한 예법이다. 세종은 여진족도 양로연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종은 양로연을 하면서 궁궐 근정전에 모든 노인이 자리 잡을 때까지 용상에 앉지 않고 오랫동안 서서 기다리며 깍듯이 노인을 모셨다고 한다. 절은 아예 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고령자에게 각종 하사품을 내린 기록도 적지 않다. 1410년 음력 6월 11일 왕(태종)은 70세에 이른 각사(各司)의 공장(工匠)들을 모두 제적하여 사역시키지 못하도록 했다. 또 1418년 음력 11월 21일 왕(세종)이 고양현에 사는 105세 노인에게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동옷( 衣)과 모관(毛冠), 쌀 3석을 내려줬다고 적고 있다. 1512년 음력 1월 3일에는 왕(중종)이 충청도 청주 등에 100세 넘은 사람 4명에게 쌀 열 섬을 주도록 명했다고 한다.

기로소 입소자 조선 통틀어 700명에 불과

양반 중심 사회였던 만큼 최고위급 관료 출신의 노인은 큰 혜택을 받았다. 고위 관료 출신의 고령자를 예우하는 기구로 ‘기로소(耆老所)’를 설치해 운영했다. 70세과 80세를 각각 의미하는 기(耆)와 노(老)를 합쳐 작명한 국립경로당과 같은 곳으로 이해하면 된다. 기로소 입소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70세를 넘은 정2품 이상 문관 출신 은퇴자로서 도덕성까지 겸비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예순 살이 된 1394년에 만들어진 ‘기사’라는 관청을 기로소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기사에서는 문신과 무신을 가리지 않고 70세 내외 정2품 이상 관료 출신들을 각별히 예우했다. 이들은 왕으로부터 논밭과 노비, 고기잡이 기구 등을 하사받고, 매년 봄과 가을에 왕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받았다. ‘기로소’로 명칭이 바뀐 이후에는 입소 자격이 달라졌다. 음직(과거를 보지 않고 조상 덕으로 얻은 벼슬)이나 무관 퇴직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대신 복지혜택은 더욱 확대됐다.

기로소 입소자들이 무병장수할 수 있도록 건강식품과 의복, 의약품을 정례적으로 제공했다. 생일과 과거 급제 60주년(회방), 결혼 60주년(회혼), 자손 과거 합격 축하연에 드는 비용도 나라에서 지원했다. 기로소 입소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곳에 들어간 이들은 700여 명에 그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력 가문이나 문벌을 따질 때는 기로소 출신자가 몇 명이었느냐를 따지기도 했다. 왕은 나이가 적어도 기로소에 들어가는 특혜를 누렸다. 조선 왕 27명 가운데 기로소에 들어간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4명의 입소 연령은 50~60세였다. 왕이 입소할 때는 궁중 잔치를 벌이고 전국 70세 이상 고령자에게 쌀과 음식을 내려주고 축하연을 베풀었다. 또 일반 백성에게는 세금도 줄여줬다.

왕이라도 조기 입소는 잘못이라며 신하가 강하게 반발하다가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사헌부 지평(정5품) 박성원(1697~1767년)은 1744년 영조가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가려고 하자 역대 왕보다 너무 젊다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경남 남해로 귀양 간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기로소는 왕을 포함한 국가 원로들이 모인 데다 임금의 자문위원회 역할을 한 덕에 관청 서열에서 늘 으뜸이었다. 기로소와 별도로 70세 이상 퇴직 공신에게 왕이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하는 ‘사궤장’ 제도도 운용했다. 의자와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도 좋으니 임금 곁에 오래 머물면서 국정을 도와 달라는 취지였다. 궤장 전달식 때는 궁궐에서 고위 관료들이 전부 참여하는 성대한 잔치를 연다. 궤장을 받는 노인은 국가공인 원로로 존경받고, 자손은 공무원 특채 혜택까지 누렸다.

-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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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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