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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 선물의 文化史(13)] 퇴계가 세상 떠나는 날까지 아낀 ‘매화’ 

절의 상징으로 많은 문인의 사랑 한 몸에 받아… 중국에서는 신선, 일본에서는 무사의 상징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난초·국화·대나무와 함께 사군자 중 하나인 매화는 절의를 상징한다. 2016년 2월 중순 광주광역시 중외공원에서 눈을 맞은 매화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사진:오종찬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비롯해 근대 이전의 많은 문인이 매화를 좋아했다. 매화를 보면서 그들은 늘 절의와 아름다운 심성을 떠올렸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계절의 풍광을 사랑했다. 시문을 쓰는 중에도 매화는 중요한 소재로 사용됐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자주 마주치던 커다란 매화나무와 희디흰 꽃을 생각하면, 10대 시절의 내게 매화란 일상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여러 사물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고전문학 작품을 접하면서 매화의 이미지는 새롭게 재구성됐다. 중·고등학생의 머리에는 절의(節義)의 상징 매화가 자리하기 시작했고, 일상에서 늘 보던 매화는 새로운 개념으로 덧칠됐다.

이황의 매화시(詩)를 만난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이황은 매화를 아주 사랑해서 많은 시문을 남겼다. 이정형(李廷馨,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의하면 이황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 시자(侍者)를 시켜 매화 화분에 물을 주도록 하고 저녁 무렵 자리를 정돈한 뒤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만큼 이황의 매화 사랑은 널리 알려질 만큼 정평이 나 있었다.

대학원 시절 수업 시간에 강독을 하게 돼 본격적으로 읽게 됐고, 그 때 비로소 나는 매화의 여러 이미지와 다양한 고사를 접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내 방에 매화 화분을 들여놓고 함께 살아보려는 소망을 막연하게나마 가지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내가 매화분(梅花盆)을 뜻밖의 선물로 받은 것은 40대 중반이었다. 평소에 늘 매화와 관련된 화제가 나오면 매화를 길러보고 싶은 소망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다가 후배가 문득 매화분을 내게 선물한 것이다. 지나가는 말을 잊지 않았던 후배가 고맙기도 했지만, 매화분을 보는 순간 나는 드디어 내게도 멋진 벗이 생긴다는 생각에 가슴 가득 설렘이 넘실거렸다.

낮은 장방형의 화분에 굵고 뒤틀려 올라간 줄기, 거기서 뻗어 나온 서너 개의 가지, 푸른 잎 몇 개. 지금도 내 눈에 선연히 떠오르는 그 모습처럼 내가 마음속으로 상상하던 분매의 자태였으므로 설렘 가득한 기쁨이 더했던 듯하다. 그것을 연구실에 모신 뒤 나는 정말 애지중지하며 매화를 돌봤다.

매화의 성정이 원래 까다로운 탓인지는 모르겠으되 내게 있어 매화는 친해지기 어려운 벗이었다. 어쩌면 그건 내 탓이었을 수도 있다. 눈앞에 있는 현실 속의 매화를 관념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분매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은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그 화분을 연구실 창가에 놓았으니 그 이후의 일이야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자주 물을 주거나 뿌리를 덮은 이끼가 마르지 않도록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출장을 가거나 해외 나들이를 하느라 여러 날씩 연구실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면 화분은 바짝 말라 있기 일쑤였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3년을 넘기자 서너 개의 가지가 시들었고, 급기야 힘없는 잎 몇 개를 남기고 매화가 죽어갔던 것이다.

어찌할까 생각하던 끝에 버리기로 결심을 했다. 그렇지만 기왕 버릴 요량이면 땅에 심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매화분을 들고 처가로 가서, 화분에서 매화를 꺼내 앞마당에 심었다. 바쁜 일상에 쫓겨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몇 달 지나서 우연히 보니 매화는 마당가에서 싱싱한 푸른 잎을 자랑하며 새로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지식인들의 고결함 드러내는 시적(詩的) 상관물


▎2016년 제16회 대한민국 서당문화한마당 대회에서 한 여학생이 매화를 치고 있다. / 사진:오종찬
매화의 문화적 상징이 늘 한결같은 것은 아니었다. 시대마다, 혹은 나라마다 서로 다른 상징으로 사용됐다. 조선에서만 하더라도 매화는 절의와 고결한 성정의 상징으로 쓰였지만 기생들이 선호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조선 말기 유명한 고전소설 [강릉매화타령]에서의 매화는 얼마나 유머 넘치면서도 색정적인 여인이었던가. 중국에서의 매화는 신선의 상징이기도 하고 매실은 장생불사약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일본은 무사들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됐다.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나 에도시대에 우후죽순처럼 발흥한 무사 가문에서 문장(紋章)을 만들 때 가장 널리 사용된 소재가 바로 매화였다.

이처럼 매화의 상징적 의미는 시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용돼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 들어있는 의미를 따져보면 역시 매서운 눈보라와 추위를 견디고 꽃을 피우는 이미지가 근간을 이룬다. 그 상징이 문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돼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매개체가 됐다.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거론한다 해도 조선 지식인들에게 매화란 역시 고결한 성품을 드러내는 시적 상관물이었다. 이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매화를 선물로 주고받았다. 그중에 꽤 드라마틱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는 15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문인 이행(李荇, 1478~1534)과 박은(朴誾, 1479~1504) 사이의 일화다. 흔히 해동의 상서시파(江西詩派)로 불리는 두 사람은 자주 만나서 시와 술을 나누면서 깊은 교유관계를 만들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의 사화(士禍)가 처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던 어지러운 때였다. 연산군이 통치하던 이 시기에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 출신 관료들은 새롭게 관료 사회에 진출하면서 세력을 형성하던 사림파 출신의 관료들을 정치적으로 공격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한 것이 사화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1519년(중종14) 기묘사화, 1545년(명종1) 을 사사화로 이어지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행과 박은은 바로 사화가 시작되는 시기를 살아가면서 뛰어난 시문 창작 능력을 선보였던 절친한 벗이었다.

1504년 이행은 박은에게서 잠시 맡아뒀던 매화 화분을 다시 돌려주면서 시를 한 편 짓는다. 이 매화는 원래 남산의 심거사(沈居士)라는 분이 1498년 화분에 심어서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 1469~?)에게 선물로 줬다. 무오사화 당시 탄핵을 받고 장(杖) 100대에 3000리 유배형을 받고 의주와 김해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1501년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고양에서 모친의 묘를 지키던 중 산책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정희량은 아마 유배형을 당하게 되자 자신이 아끼던 매화를 가까이 교유하던 박은에게 선물로 준다. 그러다가 박은이 서울을 떠날 상황이 되자 자신의 절친한 벗 이행에게 맡긴다. 아마 선물로 줬을지도 모를 이 분매(盆梅)는 이행에게 늘 박은을 생각하게 하는 꽃이었을 것이다. 봄에 맡았던 분매는 가을 중양절 무렵 다시 박은에게 돌려주는데 그때 지은 시가 문집에 남아 있다. 이행은 이 작품에서 매화가 성색(聲色)의 티끌이 없음을 말하면서 매화 때문에 자신의 작은 집에 봄빛이 가득한 느낌이 든다고 읊었다.

가지 꺾여 시들었어도 신선 풍골 남아 있나니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매화의 개화(開花)를 기념하는 시회를 열었다. 과거시험 재현 행사에서 답안을 작성하고 있는 선비들.
매화를 좋아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매화에 얽힌 우여곡절이 기록으로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 중기의 이름난 유학자 정구(鄭逑, 1543~1620)의 매화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이황의 학맥을 이은 정구는 이황만큼이나 매화를 좋아했다.

그는 1583년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짓고, 그곳에 대나무 100촉, 매화 100그루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고 이름한 바 있다. 임진란 때 모두 불에 타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는 늘 매화를 주변에 두고 감상했다. 이런 까닭인지 정구의 학맥을 이은 사람 중에서도 매화를 유독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었다.

서사원의 호는 낙재(樂齋), 자는 행보(行甫)다. 이천(伊川, 대구 지역) 인근에서 태어나 백부(伯父)에게 양자로 들어간 그는, 양부(養父)가 세상을 떠나자 과거 공부를 작파하고 평생을 학문 연찬에 매진한다. 이황의 학맥을 이은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는 한편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했지만 그는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치는 건물도 경의재(敬義齋), 완락재(玩樂齋)라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 성리학에 대한 열의와 이황에 대한 존경심을 미뤄 짐작할 만하다. 이황 학맥의 매화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그런 영향을 받았던 서사원 역시 매화를 좋아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매화를 즐겨 선물했다.

한번은 이황을 모신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정경세(鄭經世)가 방문한 적이 있었다. 1607년 6월이었다. 그는 서원의 학생들과 함께 경서를 강독하면서 뜻 깊은 시간을 보낸다. 당시 서사원이 서원의 산장(山長)을 지낼 때였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학문적 교유를 하면서 인연을 이어갔다. 이 무렵 어느 겨울, 매화가 피자 서사원은 정경세에게 매화 가지를 꺾어서 선물로 보낸 적이 있다. 서사원의 문집이 전하지 않아 어떤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에게 선물을 받은 정경세가 지은 작품을 통해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絶俗幽芳合在山(절속유방합재산)
속세 기운 끊은 그윽한 꽃 산에 있어 마땅한데
誰敎送到簿書間(수교송도부서간)
그 누가 문서 쌓인 곳으로 보내오셨나.
殘尙有仙風骨(최잔상유선풍골)
가지 꺾여 시들었어도 여전히 신선 풍골 남아 있나니
可把凡花比竝看(가파범화비병간)
뭇 꽃들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볼 만하여라.


이 작품의 제목을 보면 시가 지어진 내력을 짐작하게 된다. 선사산(仙査山)에 살고 있던 서사원이 동짓달 분매(盆梅)가 꽃을 활짝 피우자 그중 한 가지를 꺾어 지롱(紙籠) 속에 넣어 보내면서 세 편의 좋은 절구 시도 아울러 부쳐 왔다고 했다. 정경세는 기뻐하면서 그 작품에 차운해서 답시로 보냈는데 위의 작품은 두 번째 수다.

여기서의 매화는 속세와 인연을 끊은 채 은거하면서 학문 연찬에 매진하는 서사원의 삶과 그의 맑고 서늘한 정신을 상징한다. 매화 가지를 꺾어서 종이 봉투에 넣었지만 그것을 전하는 동안 아마 시들었으리라. 그러나 거기에는 여전히 신선의 풍모와 정신이 스며 있었고, 동짓달의 설한(雪寒)을 견디고 피어낸 꽃에는 서사원의 삶이 담겨 있었다. 화려하게 피어났다가도 조금만 춥거나 바람이 불어도 금세 떨어지고 마는 다른 꽃들과 비교하면 매화의 마음은 얼마나 고결하고 은근한가. 서사원과 정경세는 매화 가지 하나로 선비로서의 정신적 교유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근대 이전의 문인들이 선물로 주고받았던 꽃으로는 국화와 함께 매화가 단연코 으뜸이다. 고려의 큰 인물 이색(李穡, 1328~1396)은 매화를 선물로 받기도 했지만 주기도 했던 기록을 남겼으며, 조경(趙絅, 1586~1669), 윤선도(尹善道, 1587~1671) 등의 글에서도 매화 선물을 받고 시를 지어 답례한 사례가 있다.

조선 말기의 문인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지인 중의 한 사람이 방문했다가 자기 집에 분매(盆梅)가 활짝 피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종을 시켜서 그 분매를 가지고 오도록 한 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매화 아래에서 시를 읊었다고 했다. 이처럼 옛 지식인들은 매화를 선물로 주고받으면서 자신만의 고아한 풍류를 즐겼다.

개화 기념해 흥겹고 품격 높은 잔치 열려

매화 선물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교유라면 매화가 피었을 때 펼쳐지는 시회(詩會)는 한 지역 문인들의 흥겹고 품격 높은 잔치 자리였다. 꽃이 핀 것을 기념해 시회를 여는 기록은 고려 후기부터 자주 기록에 등장한다. 1199년 5월, 고려 최 씨 정권의 실력자 최충헌의 집에 천엽유화(千葉榴花)가 만발하자 문인들을 불러서 그것을 기념하는 시회를 열었을 때 이규보가 사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던 일화는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지식인들이 개화(開花)를 기념하는 시회를 열 때 빠지지 않는 꽃이 바로 매화다. 매화가 피어나면 주변 사람들을 초청해 매화를 감상하는 한편 술과 시로 풍류로운 한때를 즐겼다. 이러한 시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해한 시대의 성사(盛事)로 알려진 경우가 꽤 있었다.

정약용(丁若鏞)의 글에 보면 죽란시사(竹欄詩社)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그는 자신과 동갑인 채홍원(蔡弘遠)과 시사를 만들기로 하면서 자신들보다 4년 연상인 사람들과 4년 연하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성원을 꾸린다. 그렇게 모인 선비 15명은 살구꽃이 처음 필 때, 복숭아꽃이 처음 필 때, 한여름 오이가 익을 때, 초가을 연꽃이 필 때, 국화가 필 때, 큰 눈이 한 번 내릴 때, 그리고 한 해가 저물 무렵 분매(盆梅)가 필 때 모이기로 약속한다. 그러면서 모일 때마다 술·안주·붓·벼루를 준비하자고 했다.

이제는 무슨 꽃이 피는 계절인지도 잊고 살아가는 신세가 됐다. 자연의 아름다운 순환은 우리 생활에서 밀려나고,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도 출근길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자연에서 한 걸음 멀어지자 우리의 삶은 한층 팍팍해졌다.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눈앞에 닥친 일을 감당하느라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세월이 흐른다.

나 역시 매화가 피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술과 시와 담소가 어우러지던 모임을 하곤 했지만, 그것도 벌써 5년 전의 모임을 끝으로 모이지 못하고 있다. 매화의 고결한 자태를 통해 우리의 맑은 심성을 돌아보자는 깊고 원대한 목표를 가져야 매화 모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풍요로운 선물을 풍류 있게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그리운 것이다.

오래전 마당에 심어둔, 그리하여 이제는 제법 잎이 무성한 매화가 언제쯤 피어날지, 올겨울에는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혹 꽃눈이라도 틔우면 주변의 벗을 불러 따뜻한 눈길을 나누고 싶다.

※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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