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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23)] 국권 수호에 앞장선 홍와(弘窩) 이두훈 

일제 규탄문 지은 ‘행동하는 선비’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국채보상운동, 항일 언론운동, 애국계몽운동에 주도적 참여…철저한 자료 관리로 고령 국채보상운동의 증거물 세상에 전해

▎이진환 전 고령군수가 고령군 관동마을 의재 앞에 세워진 조부의 사적비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8일 대구 라온제나호텔에서는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시민보고회’가 열렸다. 앞서 10월 24일부터 나흘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3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최종 심사를 통과한 국채보상운동기록물 등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유네스코에 권고했다. 유네스코 이리나 보코바 사무총장은 권고를 받아들여 등재를 확정했다. 이로써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훈민정음](1997) [조선왕조실록](1997)에 이은 한국의 15번째 세계기록유산이 됐다.

시민보고회에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인 김영호(77)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그 감격을 “호랑이가 있어야 명산(名山)이 되듯 이제 대구도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명도시(名都市)가 됐다”고 말했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나라가 진 빚을 갚기 위해 1907년 한국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로 총 2475건의 수기(手記) 기록물, 일제 정부기록물, 당시 실황을 전한 신문·잡지 기록물 등으로 구성돼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불꽃이 일어 전국으로 확산돼 이들 기록물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해 국립고궁박물관·연세대학술정보원 등 12개 기관 등에 분산돼 있다. 유네스코는 이들 중 기록물을 소유한 11개 기관에 모두 세계기록유산 등재 증명서를 전했다. 등재추진위원회 신동학(88) 공동위원장은 유네스코가 보내 온 개별 증명서를 이 자리에서 전달한 뒤 임무를 완수하고 위원회를 공식 해산했다.

이번에 세계기록유산이 된 국채보상운동기록물 가운데는 개인이 수십 건을 소유한 경우가 있어 주목받았다. 바로 이진환(79) 전 고령군수다. 그는 어떤 기록물을 어떻게 소유하게 됐을까.

국채보상운동은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신분을 막론하고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게 특징이다. 관료와 선비 등 지도층에서 평민·영세상인·나무꾼·백정·걸인 심지어 도적 등 최하층까지 나섰다. 또 어린 아이도 세뱃돈을 받아 의연금에 보탰다.

고령향교에 배달된 국채보상 서신 한 통


이 전 군수의 할아버지는 당시 고령 지역의 대표적인 선비였다. 이름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1856∼1918). 그는 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그 시기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명성황후는 시해되고 을사조약 등으로 나라는 기울고 있었다.

1907년 1월 24일 고령향교에 서신 한 통이 배달된다. 담배라도 끊어 의연(義捐)을 거두자는 취지의 대구단연회(斷煙會) 이현주 회장이 보낸 국채보상 관련 협조 요청문이었다. “대구단연회가 보상에 관한 규칙과 통문 등을 만들 계획이니 서로 합심하는 것이 급하므로 취지서 1부를 살펴보라”는 내용이다. ‘금연상채회(禁烟償債會, 금연으로 채무를 갚는 모임) 취지서’는 이렇다.

“무릇 신민이 충(忠)으로 행하고 의(義)를 숭상하면 나라는 흥하고, 충과 의가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가 보여준다. 지금 구주(九州) 가운데 열강이라 불리는 나라와 멸망한 나라 또한 충의를 숭상하고 숭상하지 않은 것에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 동양의 최근 일을 살펴보면 더욱 주목할 바가 있는 즉, 그것은 일본이라.

예전에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긴 것은 병(兵)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대는 피를 쏟고 육체가 날아가도 마치 즐거운 땅에 이른 듯했고, 백성들은 가죽신·노리개·반지 등으로 군대 비용을 마련해 도우니 마침내 동서 역사상 처음 있는 강대국을 이뤄 그 영광이 지구 상에 진동했다. 이것은 오직 5000만 개개인의 충의에서 나왔다.(…)

지금 국채 1300만원이 있는 즉, 우리 존망에 관계된 것이다.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갚지 못하면 곧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산천은 한번 잃으면 다시 찾는 것이 어렵다. 우리 민족이 어찌 월남 등의 처지를 면할 수 있으리오?(…)

다만 보상은 손해 보는 것 없이 재물을 모으는 방법이 있다. 2000만 동포가 3개월을 한정해 담배를 금하여 그 대금으로 1명이 월 20전을 내면 가히 1200만원이 될 것이다. 설령 충분히 응하지 않는다 해도 1원부터 10원, 100원, 1000원을 출연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오호 동포들이여.”

국권 수호를 모색하던 홍와는 취지에 공감한다. 바로 다음날인 1월 25일 이두훈은 고령군 단연상채회사 도회장(都會長)에 임명된다. 그때부터 단연상채회사는 읍·면·동으로 의연금을 독려한다. 29일 첫 기록이 등장하는 의연금은 읍내에 사는 여성 ‘정부인(鄭夫人)’이 낸 은가락지가 맨 앞에 적혀 있다. ‘전 참봉(參奉) 이규신 50원’ 등 지역 유림도 의연금 대열에 동참했다. 또 2월 19일 의연금 명부에는 관동·후암 등 읍내 외곽이 등장해 참여 지역이 확대된다. 흉년이 든 면민들은 “의연금 갹출이 어려워 야산을 팔아 1700냥을 보내겠다”는 약조 문건도 있다. 그 무렵 “우리도 품삯 받아 단연회를 도와주세/ 주색잡기 하는 놈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등의 내용이 담긴 단연상채를 권유하는 가사도 등장한다.

모아둔 서신, 의연금 영수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성산 이씨 관동 입향조를 기리는 재실 의재의 모습.
1907년 4월 20일 고령군 의무소장(義務所長)을 맡고 있던 이두훈은 당시 전국 조직으로 서울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채보상연합회의 이준(李儁) 소장의 공문을 받는다. 의연금을 낸 사람의 이름과 금액을 모아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의연금 모금 현황을 신문에 싣기 위해서였다. 공문을 보낸 이준은 두 달 뒤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특사로 파견돼 을사보호조약 무효를 선언하며 순국한다. 1909년 8월 14일에는 학교를 세울 자금으로 의연금을 내겠다는 ‘우신학교장 이봉조’의 편지도 받는다. 이 같은 고령지역 국채보상운동의 면면이 담긴 증빙자료는 모두 52건.

이진환 전 군수는 시민보고회 자리에서 “집안에 내려온 이들 자료를 잘 보존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어른들이 하던 대로 고서와 고문서 뭉치를 1년에 두 차례 일일이 바람을 쐐야 했습니다.” 변질을 막기 위해서다. “고문서를 팔라”는 유혹도 받았다.

거기다 자료 대부분이 한문으로 쓰여 있어 무슨 내용인지 또 중요한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다. 이 전 군수는 2013년 할아버지가 남긴 고서와 고문서 등 유물 9728점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그리고 뜻밖의 일이 생긴다. “거기서 대구시민이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밝혀진 겁니다. 가문의 영광이자 고령의 자랑입니다.” 민심을 받든 홍와의 철저한 자료 관리가 국채보상운동의 증거물을 세상에 남긴 것이다.

12월 20일 이 전 군수의 안내로 홍와 선생의 흔적을 답사했다. 먼저 대구단연회 서신이 맨 처음 도착한 고령향교를 찾았다. 대가야읍(옛 고령읍) 가운데 계단을 따라 동산에 오르니 지산동 가야고분군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향교가 있었다. 읍내도 내려다보였다. 동산 오른쪽에 ‘고령군국채보상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2년 전인 2015년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홍와고택에서 발굴한 자료를 바탕으로 고령지역 모금 과정을 돌에 새긴 것이다.

고령군의 민선 초대 군수를 지낸 홍와의 손자 이씨는 향교를 내려오며 “지금 돌아보니 군수 재직 당시 공교롭게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져 금 모으기를 직접 추진하는 고령군 책임자가 됐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란히 국채를 갚는 지역 책임자로 이어진 우연이다.

이어 오후에는 읍사무소에서 북쪽으로 4㎞쯤 떨어진 관동(館洞)마을로 이동했다. 고령군 대가야읍 본관1리다. 마을 앞 널찍한 들판 사이로 소가천이 흐르고 뒤로는 용수봉이 두른 지세다. 성산 이씨 31세인 홍와의 고향이다. 관동이란 마을 이름은 성산 이씨 15세인 이사징(李士澄, 1418∼1454)이 성주에서 이곳으로 옮겨 터를 잡은 뒤 벼슬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도록 관동방(館洞坊)을 설치하면서 붙여졌다.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정착해 500년이 넘는 집성촌이 됐다.

마을 안쪽 산기슭에 입향조를 기리는 ‘의재(義齋)’란 건물이 있었다. 1620년 창건 당시 이름은 ‘의창(義倉)’이었다. 문중에서 제사에 쓸 곡식을 저장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구휼한 뜻을 받들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홍와의 국채보상운동으로 이어진 것일까. 의재 앞에 후학 허형(許泂)이 비문을 지어 1991년 건립된 ‘홍와선생사적비’가 있었다.

홍와는 어려서부터 재기(才氣)가 출중해 기대가 컸다. 아버지의 교육열도 남달랐다고 한다. [홍와선생문집]에 따르면 부친이 저명한 선비 김희진을 초빙해 홍와를 가르치고 유주목에게도 보내는 등 공부를 독려했다. 이두훈은 12세에 고령현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1875년 20세 이두훈은 당대에 이름난 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로 들어갔다. 동시에 학문에 매진하기 위해 스승과 가까운 성주 남쪽 운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주는 약관(弱冠)의 이두훈에게 ‘대형(大衡)’이라는 자(字)를 지어준다. “치우침 없는 도리를 추구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것”이라는 뜻을 담아서다. ‘홍와(弘窩)’라는 호는 또 한주의 아들 이승희가 지었다고 한다. 한주 부자가 이두훈의 자와 호를 모두 지은 것이다. 홍와는 뜻이 ‘넓은 움집’쯤 된다. 손자 이 전 군수는 “할아버지가 워낙 강직해 넉넉해지라는 뜻을 호에 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과거시험장에서 모친 위급 연락 받아


▎신동학 등재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이진환(오른쪽)씨에게 기념패를 전달하고 있다.
1880년 25세 이두훈은 부친의 엄명으로 과거(科擧)에 첫 도전한다. 그러나 아픈 일이 됐다. 과거의 첫 관문인 초시(初試)에서 답안지를 마무리할 때쯤 모친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는 붓을 던지고 급히 돌아왔지만 어머니가 운명한 뒤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 주변에서 그에게 다시 과거시험을 권유했다. 그러자 홍와는 “내가 과거 때문에 큰 죄를 지었는데 또 그 발걸음을 하겠는가”라며 끝내 응시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홍와는 한주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를 닦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한다. 특히 [중용]을 두고 한주와 깊은 문답을 나눴다. 하지만 1882년 아버지를 여의고 4년 뒤엔 다시 스승마저 떠나 보낸다.

홍와를 연구한 경북대 중문과 이세동(57) 교수는 “그의 일생에 한주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주 선생의 많은 제자 중에서도 뛰어난 이른바 ‘주문팔현(洲門八賢)’의 한 사람이다.

1895년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반일 감정은 극에 달한다. 거기에 단발령까지 내려지자 팔도 유생은 의병을 일으킨다. 홍와도 항일에 나섰다. 1896년 41세 홍와는 동문수학한 곽종석·이승희 등과 함께 상경해 을미사변을 성토하고 단발령 철회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됐다. 부득이 자신이 초안을 작성한 일본을 규탄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각국 공사관에 돌리고 귀향한다.

이듬해 홍와는 고령 내상리에 내산서당(乃山書堂)을 짓고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친다. 임시정부 문화부장과 반민특위위원장을 지낸 애국지사 김상덕 등이 대표적인 제자다. 이전 군수와 함께 이날 마지막으로 서당 자리를 찾아갔다. 읍내에 살던 이진환이 6·25로 피난했던 곳이다. “여기에 서당이 있었고 저쪽으로 사랑방과 안채가 있었어요.” 100년이 지나 서당은 논밭으로 변했지만 군데군데 서 있는 대나무들이 선비가 머무른 터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1902년 선비 홍와의 지조가 드러난다. 그해 한주 학설을 이단으로 규정한 통문이 충주 하강단소 명의로 전국 유림에 발송된다. 한주 제자들은 긴급히 대책을 논의했다. 홍와는 팔을 걷어붙였다. 한주의 문집을 들고 성균관에서 교수·유생들을 만나 스승의 학설을 고수하며 무고함을 변론한다.

그러나 사태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상주향교에서 다시 유림 도회가 열리고 도남서원에서 한주 문집 1질이 불태워졌다. 한주의 제자들은 배척을 당한다. 동문들은 시류에 편승해 하나둘 한주를 외면했다. 그러나 홍와는 그때도 흔들림 없이 스승의 학설을 견지했다. 세한도(歲寒圖)처럼 추운 겨울이 된 뒤 소나무의 푸름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는 내산서당에서 저술과 교육에 침잠한다. 만년에는 해박한 안목으로 단군부터 조선까지 우리 역사를 연대별로 기술한 [동화세기(東華世紀)]를 편찬했다. 중종2년에서 끝난 조선 편은 미완본이다. 그는 망국의 아픔을 역사를 정리하며 달랬던 것일까.

스승 학설 이단 몰리자 무고함 변론 나서


▎1. 고령 단연상채회사의 의연금 모금 내역이 적힌 장부. / 2. 국채보상연합회의 이준이 이두훈에게 보낸 공문. / 3. 국채보상운동이 이어지던 1908년 53세 이두훈의 모습.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홍와는 일본을 배척하는 언론 투쟁을 벌인다. 또 독립을 이루려면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등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다. 제자 김상덕은 일본 유학을 거쳐 독립운동가가 된다. 이 전 군수는 “조부께서는 당신 큰아들(이완, 1887∼1948)도 나라 위해 큰 뜻을 펼치라며 중국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이완은 이후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군인으로 항일 투쟁을 벌였으며 당대 중국 문필가 이문치(李文治)의 사위가 된 뒤 중국에 귀화했다고 한다.

1907년 홍와는 고령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섰다. 민족계몽운동을 벌이던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고령향교에 세워진 국채보상운동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전개한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국권수호운동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선비였다.


▎1. 고령향교 경내에 세워진 고령 국채보상운동기념비. / 2. 이두훈이 제자들을 가르친 내산서당이 있던 자리.
[박스기사] 국채보상운동의 안타까운 말로 - 일제가 만든 의연금 횡령 조작이 열기에 찬물

1907년 대구에서 김광제·서상돈이 앞장서 전국으로 번진 국채보상운동은 나라 빚 1300만원을 갚게 되었을까.

운동은 처음에 파죽지세였다. 모금액은 운동 시작 석 달 만인 5월에 20만원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그해 말부터 운동은 동력이 떨어진다.

일제의 방해 때문이었다.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이 온 나라로 확산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국채보상운동 지도부에 압력을 가하고 운동의 중심기관인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는 한편 발행인 영국인 배설(Bethell)을 추방하려 했다.

1908년 7월에는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자로 구속기소한다. 사건은 영국과 일본 간 외교문제로 비화했으나 9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국민들은 의연금 횡령 사건이 신문에 오르내리자 지도부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재판은 무죄로 결론이 났지만 신뢰는 회복하기 어려웠고 운동의 열기는 식어버렸다. 이처럼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을 배일(排日)운동으로 규정해 방해 책동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모금된 전체 의연금은 20만원 내외로 추산되지만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1910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각처 의연금 예치 상황을 조사한 결과 금액이 15만9253원99전”이라고 기록돼 있다. 1910년 4월 국채보상금처리회는 전국대표자회의를 연다. 이 회의는 국채보상금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증식해 적당한 시기에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제 경무총감부는 보상금처리회가 관리하던 모금액 15만원을 압수해버린다. 위로는 고종 황제부터 아래로는 시장 바닥을 헤매는 걸인까지 모금 대열에 뛰어들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의연금을 처리할 시간조차 없이 합방이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거국적인 경제주권 운동은 끝내 이렇게 미완(未完)이 돼버렸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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