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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9)] 와디럼과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 역사와 전설 

전통과 돈벌이 경계에 선 베두인의 이중생활 

김미루 사진작가
금욕과 절제의 전통 간직한 사막에 불어오는 산업화의 물결

아흐마드의 무서운 표정은 중동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참여하는 전사들의 험악한 얼굴, 또는 명예살인을 저질러 미디어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중동 남자의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그가 짙은 아라빅 액센트를 섞어가면서 나에게 영어로 심문하듯 말 걸기 시작했을 때 내 심장은 펑펑 뛰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각박한 표정들이 타오르는 장작불에 비쳐 짙은 색조로 다가왔다.


▎와디럼의 ‘읍내’와 같은 마을. 보호구역내에 유일한 마을이다.
"당신 이름은 무엇이오? 대학생이오? 여기서 무엇 하려고 하시오? 얼마 동안 유숙할 생각이오? 베두인 옷들은 가지고 계시오?”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해 침착하게 하나씩 대답해나갔다. 나의 이름은 누라(Noora)였고, 대학생이며, 베두인과 더불어 3주를 살면서 그 문화를 몸소 체험해보고 배우고 싶다. 헤드 스카프를 포함해 모든 전통의상을 갖추고 있다, 등등…. 사이드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나에게 현명한 대처방식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나는 베두인 이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베두인 가족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그냥 대학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내가 성인이고 무슨 미디어에서 왔다고 하면, 내가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을 전혀 허락치 않을 것이다. 그들의 전통 문화 감각으로는 여인들은 사진 찍히거나 동영상에 나타나서 공중에 드러나는 것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아흐마드의 인상이 하도 험궂어서 내 이름을 ‘누라’라고 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가명을 쓰지 않고 실명을 썼다가는 그들이 온라인상으로 내 작품들을 매우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도 관광사업이 발달해서 베두인들도 활발하게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우연히 내 실명을 한번 눌렀다가는 내가 발가벗고 돼지들과 뒹구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다른 사막에서 사진작업을 위해 나의 작품을 공개했던 것과 달리, 요르단 사막에서는 내 작품에 관한 정보를 모두 차단시키려고 애썼다. 로컬 베두인들과 가능하면 오랜 시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그 기간이 1년 이상에 이르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여튼 나의 전통 베두인과 공생은 이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아흐마드의 심문이 끝났을 때, 나는 나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실 한가지 질문밖에는 더 물어볼 것이 없었다. “낙타를 키우십니까?” 아흐마드는 자기 엄마가 직접 낙타를 키우지는 않지만 주변에 낙타가 많이 있다고 말할 때 어조를 좀 부드럽게 낮췄다. 그것은 내게 모종의 안도감을 주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다른 베두인들도 아흐마드를 항상 투덜거리는 심술꾼으로 취급한다고 했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도 마치 성난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랄 만한 일은 그가 실제로는 내 나이 또래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나보다 최소한 스무 살은 더 돼 보였다. 벗겨진 민머리와 깊은 주름살들은 아마도 유전성과 사막의 태양과 스트레스의 복합원인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나는 주변에 낙타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시야에 하이웨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 사이드에게 이곳에 머물겠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이드는 연고도 없는 이방인인 나를 위해 이미 너무도 많은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다. “행운을 빌어, 나의 친구여! 정말 너는 네 예술에 미친 사람이야!” 아부 칼리드, 아우데와 함께 빌리지로 돌아가기 전에, 사이드가 나의 귓전에 속삭였던 말이다.

사막의 유목민과 이방인의 동거가 시작되다


▎요르단 사막의 밤하늘.
그들이 모두 떠나자, 작고 어린 여자가 텐트 밖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텐트 속으로 휙 자태를 감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는 매우 어려 보였다. 그녀는 캠프파이어 건너편에 나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꿰뚫을 듯 쳐다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늘어지자, 나는 어떻게든 이 침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아주 털이 많이 난 몽골리안 쌍봉낙타 사진을 보여주기로 했다. 나의 작전은 재치 있는 히트였다. 흥분 속에서 그녀는 내 아이폰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 가지고 갔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밝은 웃음을 띄우며 엄마를 와서 보라고 힘차게 불렀다. 그녀가 일찍이 본 적 없는 이상하게 보이는 쌍봉의 자말(jamal·카멜의 아랍어)은 하나의 경이였던 것이다.

나는 더 많은 사진을 보여주며 그 여인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예스”나 “유 슬립(you sleep)”과 같은 몇 개의 단어를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영어를 좀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소개했다. 나는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고, 뉴욕에서 왔다 등등. 그녀는 고개를 끄떡이며 “우후, 우후”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내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의 반응은 똑같았다. 한참 후에 나는 그녀가 내 말을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제로 “유 슬립”, 이 한마디가 그녀가 아는 유일한 영어문장이었다. 덕분에 취침시간이 됐을 때는 그 한마디라도 도움이 됐다. 그녀의 엄마는 두꺼운 담요 한 장과 베개를 가지고 왔다. 나는 텐트 밖 불 옆에 기다란 스폰지 쿠션 요를 깔고, 그 위에 담요와 베개를 놓았다. 그리고 옷을 입은 채 거적대기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나는 완벽한 정적(靜寂)과 부동(不動)의 사막 공기를 들이키며 별들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우주공간에 극미한 무중력상태의 한 점으로 부웅 떠있게 되었다. 눈을 뜰 때마다, 수천억 개의 별을 볼 때마다, 내 몸은 무한소(無限小)의 질점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간다. 무한소의 질점 속에서 존재가 무존재로 화해버린다. 그때의 느낌은 순결한 공포였다. 난생처음 깊은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느꼈던 체험과 매우 유사한 공포였다. 머리를 물속에 파묻고 거대한 대양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을 때 광막한 미지, 오싹한 고독 속에 홀몸으로 버려지고 있다는 그 공포감은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느낌의 연상 속에서 요르단 사막에서의 첫날 밤은 눈을 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거대한 바다의 폭풍처럼 우주공간을 감싸고 있는 은하수의 어지러운 광경을 나의 극소한 존재감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사막에서 고고하게 야영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느낌을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침 8시경 나무 타는 냄새에 눈을 떴다. 너무도 신선한 아침 공기가 벌써 태양에 달구어지고 있었다. 움 아흐마드(Um Ahmad: ‘아흐마드의 엄마’라는 뜻)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나는 우선 내가 가져온 인스턴트 커피를 한잔 타 마시고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히잡을 단정히 고쳐 쓰고, 카메라 장비들을 챙기고, 움 아흐마드가 염소몰이 하는 광경을 동영상에 담기 시작했다. 9시경, 염소들은 목초를 먹기 위해 우리에서 풀려났다. 황량한 사막에 뭐가 먹을게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자세히 보면 가축이 먹을 수 있는 작은 관목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리고 바위산 언덕에는 더 많은 식물이 살고 있다. 특별히 식수원 근처에는 식물이 꽤 많다.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하면 염소들은 사막에 외롭게 서있는 아카시아나무 밑으로 간다. 아카시아나무는 보통 한 그루가 사막 한가운데 장엄하게 서있는데, 그 그늘은 25마리 정도의 염소들을 거둘 만하다. 염소들은 아카시아나무에서 떨어진 꽃과 이파리를 먹는다.

‘아카시아나무’라고 하면 한국 산하에 너무 흔해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사막의 아카시아나무는 매우 특별한 종자다. 잎새모양이나 가시, 꽃, 열매가 모두 우리가 알고 있는 아카시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주 단단하게 수분이 증발 안 되는 형태로 외피가 발달해 있다. 우리네 아카시아와는 달리 매우 고귀한 느낌이 드는 단단한 재질의 나무인데 구약 성서 ‘출애굽기’ 26~27장을 보면 유대인의 성막이나 제단이 모두 이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서의 문구들도 실제로 와서 봐야 그 의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별빛이 어지럽게 쏟아지는 사막의 밤


▎낙타들이 물 마시는 곳. 사막의 유목민 마을은 샘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아카시아나무 아래서 얼마 동안 염소떼를 쉬게 한 뒤 움 아흐마드는 일어나 그들을 몰고 딴 곳으로 갔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면서 바위도 올라가보고 수원지도 조사해보고 전체 광경도 조망해보았다. 아카시아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 거대한 돌산의 바닥 지평선 부근에 동물을 위해 시멘트와 돌로 지어진 기다란 물구유가 있었다. 바로 옆에 큰 텐트가 있고, 베두인들이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그 물은 언덕 상부에 있는 샘에 고무호스를 통해 공급되고 있었다. 샘이 있는 언덕 상부까지는 걸어서 10분은 올라가야 하는 거리였다. 샘이라면 낮은 곳에 있어야 하는데 왜 높은 곳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곳을 올려다보니 샘 주변으로 수면을 따라 녹지가 형성되고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녹지가 형성된 수평선은 붉은 사암의 거대한 절벽이 그 아래의 화강암의 지반과 만나는, 그러니까 두 개의 다른 질의 암반이 만나는 곳이었던 것이다.

사막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사막이든 강우량이 제로인 곳은 없다. 이곳은 겨울철에는 여러 차례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릴 적에는 아주 폭우가 쏟아진다. 모든 사막에는 빗물의 흐름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사암은 놀라울 만큼 물을 잘 흡수한다. 사암이 기괴한 형태들을 하고 있는 것도 흡수작용과 관련이 있다. 사암은 빗물을 흡수해 속으로 내려 보내는데, 그 물이 화강암층을 만나면 더 이상 투과하지 못하고 그 이질적 경계에 수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이 압박을 받으면 물이 용출하면서 에지 부분에 작은 샘을 형성하게 된다.

이 샘이야말로 베두인족이 사막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원천이 된다. 1년 내내 끊김 없이 충분한 물이 흐른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을 보면 물의 고귀함과 생명의 고귀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물로서 동물이 사육되고, 베두인들이 살아갈 수 있다. 이 샘은 사막에서 극히 제한된 몇 지역에만 있고, 베두인들은 샘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와디럼(Wadi Rum) 마을도 이 수원지를 중심으로 형성됐는데, 지금은 인구가 늘어나고 물소비량이 많아 외부에서 수조트럭으로 실어 나른다.

질질 끌리는 긴 토오브를 입고 고무 슬리퍼를 신고 난생처음 화강암 바위산을 올라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긴 치마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걸었다. 여자가 속살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불경스러운 것이다. 머리에 쓴 히잡도 사막의 열기 속에서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샘 옆에 자라고 있는 무화과나무가 하이크 후에 헐떡거리는 나에게 안식의 그늘을 제공했다. 그토록 건조하고 화성 표면 같은 풍경 속에서 바위 사이에 자라나는 푸른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 폭의 서리얼리즘(surrealism·초현실주의) 그림과도 같았다. 물이 생명을 창조하는 힘을 사막에서처럼 극적으로 느끼기는 어렵다. 동방인이 말하는 수화론(水火論)의 한 전형적 시스템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베두인의 젓줄에서 ‘로렌스의 샘’으로


▎아래 돌기초는 나바테아 왕국의 신전 유적이다. 그 위로 사암과 화강암이 만나는 수평선을 따라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한 바위에 걸터앉아 와디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대한 바위산의 완벽한 시야를 확보하고 그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었다. 이 바위산의 이름은 자발 카잘리(Jabal Khazali)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카잘(Khazal)이라는 도망자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카잘은 이 산 꼭대기에까지 몰려 아래로 뛰어내렸는데 기적적으로 몸 하나 안 다치고 추격자들을 따돌렸다고 한다. 성공적인 도망자가 영웅시 되는 민담 속에는 얼마나 억울하게 몰린 사람이 많았을까, 하는 암시가 들어있었다. 이 거대한 바위덩어리의 기괴한 형태는 너무 위압적이어서 금방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내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그곳에 이르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걸어가야 한다.

“아, 광대하다. 울림이 있다. 신적이다!(Vast, echoing, and God-like!)” 이것은 영국군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가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외친 말이다. 로렌스는 오스만제국에 항거한 아랍 반란 기간(1916~1918)에 와디럼을 수 차례 방문했고, 이곳을 특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여기저기에서 로렌스가 살았다고 말한다. 많은 지명이 로렌스의 이름을 따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작명은 대부분 관광목적으로 날조된 것이다. 와디럼에서 찍은 그의 혁명적 투쟁을 주제로 다룬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감독 데이비드 린)가 1962년 12월에 방영되고, 1980년대 요르단관광 붐이 일자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역사적 인물은 전설이 돼 갔고, 외국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브랜드 전략이 됐다.

예를 들면, 방문객센터 맞은편에 하늘로 치솟는 기둥들의 모음처럼 보이는 거대한 바위산이 있다. 언뜻 보아도 5개의 기둥이 역력히 보이고 가장자리로 2개가 더 있다. 관광가이드나 지역주민들은 그것을 주저 없이 ‘지혜의 일곱 기둥’ 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로렌스의 그 유명한 자전적 저술의 제목과 같다. 마치 그 자서전의 작명이 이 와디럼의 바위산에서 유래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기실, 로렌스는 이 바위산을 언급한 적이 없다. 그의 책 제목은 원래 옥스퍼드에서 고전학과 고고학, 중동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중동의 7개 도시에 관한 책을 쓰려고 했던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 자체는 ‘잠언’ 9장 1절에서 따온 것이다.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제 집을 짓고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잔치를 베푼다.’

슬프게도 내가 서 있는 해맑은 수원지도 관광코스로 지정됐고, ‘로렌스의 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로렌스가 거기서 목욕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서전에서 언급한 샘은 마을 가까이 있는 다른 샘이었다. 로렌스는 그의 이름이 붙은 이 샘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샘을 아인 아부 아이네(Ain Abu Aineh)라는 원래 이름대로 부르고 싶다. 그것은 ‘아이네의 아버지의 샘’이라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샘의 주인은 권력자였다. 사막에 관광지로 지정돼 있는 ‘로렌스 하우스’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가짜 작명의 한 예다. 그것은 실제로 나바테아 왕국의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유적일 뿐인데, 로렌스가 거주했던 저택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로렌스가 오토바이사고로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 참여한 윈스턴 처칠은 이런 말을 남겼다.

“로렌스 같은 인간유형을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 살겠지요. 그는 전쟁사의 페이지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의 전설 속에 살겠지요.”

관광상품이 돼버린 ‘아라비아의 영웅’


▎도망자가 영웅처럼 추앙받는 전설이 깃든 자발 카잘리. 아침 해가 뜬 후 자동셔터로 찍었다.
내가 텐트로 돌아왔을 때, 아우데의 여동생 이만(Iman)과 엄마가 텐트 안 부엌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큰 비닐봉지를 열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뭔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 통 속에는 동그랗게 이스트로 부풀어오른 딱딱한 빵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후부스(khubz)’라고 부르는데, 서구인들이 보통 피타 브레드(pita bread)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부풀어 속이 비었기 때문에 갈라서 무엇을 넣어 먹을 수 있다. 다른 통에는 ‘사즈(saj)’라고 불리는 다른 종류의 빵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지역에서 만드는 것으로 효모를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을 눌러 얇게 편 것이다. 인도의 난보다 더 얇게 한 겹으로 솥뚜껑 같은 철판에 펴서 굽는다. 밀가루는 베두인 다이어트의 주요부분을 차지한다. 후부스는 매일 소비되는데, 엄청난 양이 매일 빵 굽는 큰 기계시설이 있는 타 도시로부터 이 마을로 공급된다.

요르단의 빵은 국가에서 보조금이 지급되어 가격변동이 없다. 밀가루는 여러 나라에서 오는데, 주로 루마니아와 러시아로부터 수입되고 있다. 나에게는 큰 조각의 사즈와 공장에서 만든 은박지로 싼 V자형 쐐기모양의 치즈가 점심으로 대접됐다. 치즈는 사우디아라비아산인데 그렇게 공장제품화 된 치즈를 사막 사람들이 먹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만은 또 오빠들이 마을에서 사온 오이와 토마토를 물에 씻은 뒤 툭툭 썰어 나에게 주었다. 와디럼에서 채소를 부담 없이 먹는다는 것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다른 사막에서 체험한 바대로 모든 식사는 파스타나 쌀과 같은 탄수화물, 그리고 자체적으로 사육된 염소나 낙타로부터 얻어지는 밀크와 고기 정도의 미니멀한 자체 해결의 식사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와디럼 베두인의 식사는 자본주의가 침투된, 오염된 보편성의 소산이었다.

내가 사막의 삶을 갈망했던 주요한 이유는, 인간과 동물이 하나의 유기체적 순환고리를 형성해 서로가 의존할 수 있는 음식을 전통적 방식으로 자체 생산해내는 극히 단순하고 목가적인 소박함을 체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동물사랑은 도시인들의 자기기만적인 페트(pet) 사랑과는 좀 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사막의 유목민의 삶은 근대적 삶에서 완벽하게 사라진 인간과 동물간의 매우 밀착된 유기적 상생관계의 표상이었다. 특히 산업적 고기 생산의 비인간적 잔혹한 현실, 동물이라는 위대한 자연의 엄연한 생명체가 대량 식품 생산의 단순한 물리적 재료로 비하되는 비극을 목도하고 나서 나는 그러한 문명에 대한 대안을 추구하고 항의에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대량생산의 돼지우리에 들어가 그들과 같이 뒹구는 모습을 영상화했고, 심지어 쥐와도 공생하는 삶을 나의 작품 속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베두인 컬처에 대한 이상주의적 이미지는 점점 붕괴되어 갔고, 매우 현실적인 생존의 논리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붕괴과정은 하나씩 은박지로 포장된, 온갖 방부제가 첨가된 우유치즈 상품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경악할 사실은 온갖 깡통음식들이 전 세계로부터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참치캔은 베두인이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다. 그 중에도 한국의 참치캔은 특급으로 꼽힌다.

사막의 식탁에 오른 미국산 사과, 한국산 참치캔


▎베두인 모녀가 사즈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아우데가 내게 가져다준 사과에는 ‘레드 델리시어스(Red Delicious), 워싱턴(Washington)’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 사과와 달리 미국의 사과는 작고 새빨갛고 푸석푸석하며 맛이 없는데, 모두 서부의 워싱턴주에서 생산된다. ‘레드 델리시어스’는 대표적인 상표다. 그런데 그런 사과가 그 뜨거운 사막에서 긴 시간의 유통과정을 거쳤어도 아주 신선한 듯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지막지하게 많은 케미컬이 사과를 코팅하고 있다는 산 증거다.

그들이 수입 백설탕으로 발효시키는 베두인 차도 스리랑카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관광객들에게 베두인 치킨요리라고 대접하고 있는 닭고기가 미국과 브라질에서 수입된 공장사육 냉동제품이란 점이다. 많은 가정에서 닭을 사육한다. 나는 아우데에게 왜 구태여 수입된 냉동식품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천연덕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닭은 조그마해. 기르느라 고생은 많이 하는데 고기는 별로 없어. 냉동식품은 간편하고 고기도 많고, 값도 싸.”

움 아흐마드와 이만은 나에게 주어진 소찬조차 같이 먹질 않았다. 라마단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해 떨어지기 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의 정화를 위한 금식의 달이었는데, 원래 꾸란을 무함마드에게 처음으로 계시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정해진 것이었다. 라마단(음력 기준 대개 5~6월 한 달간)을 지키는 것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신앙·기도·구제·금식·순례)’ 중 하나를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그들이 어떻게 그 무서운 사막의 열기 속에서 일몰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견딜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그들이 금식 때문에 텐트 속에 앉아 있거나 하루 종일 낮잠을 자거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이 낮에도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대로 변함없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암만 같은 대도시에서는 라마단 기간에 많은 사람이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새벽까지 음식을 꾸역꾸역 먹는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늦잠을 잔다. 라마단의 본래 성격은 경건한 삶을 일깨우고 일체의 탐욕과 죄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삶은 이러한 제식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서 외롭게 살고 있는 두 베두인 여인은 종교적 규율을 너무도 적절하게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환경이 규율을 지키기에 더 열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슬람종교는 사막에서 유래되었고 사막의 삶에 대한 이해가 있다. 아마도 베두인들이 그래서 그 종교에 순종하는지도 모르겠다.

라마단이 끝났을 때, 모든 무슬림이 축제를 여는 마지막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만과 엄마는 아주 소박하게 그들의 축제를 즐겼다. 살짝 기름에 데친 양파로 만든 요리,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육즙 큐브를 넣어 끓여낸 인위적 닭고기맛 수프, 그리고 다양한 야채가 들어있는 깡통 하나, 그리고 후브스 빵, 그게 전부였다. 진짜 축제는 다음날에 있었다. 베두인 가족들이 다 모이고, 그들이 제일 사랑하는 요리인 신선한 염소고기가 등장하는 축제였다.

생명의 순환 일깨우는 그들의 진정한 축제


▎식탁이랄 것은 따로 없고 그냥 바닥에 놓는다. 그러면 모든 식구가 각자 빵으로 집어 먹는다. 간과 살고기와 양파를 볶은 것인데 왼쪽에 우리가 먹는 보통 요구르트가 놓여 있다. 고기를 요구르트에 찍어 먹는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났다. 전날 나는 염소를 잡기 전에 내게 꼭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염소우리 가까이 있는 바위지역으로 가보았다. 아뿔싸! 원망스럽게도 이미 염소는 황천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아우데와 아흐마드에게 도축과정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전체 도살과정을 동영상에 담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나에게 도축이 시작됐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일년에 몇 번 치르는 행사이고, 내가 꼭 봐야 할 유니크한 무엇이 아니라고 가볍게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슈퍼마켓에 말끔히 부분별로 분류해 포장돼 있는 고기 상품만을 보고 자란 나로서는 살아 있는 동물이 도살되는 과정 전체를 본 적이 없다.

비록 첫 장면은 놓쳤지만 나머지 과정,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끌어내고, 자르고, 요리하는 과정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아침용으로 작은 고기와 간 조각이 양파와 더불어 볶아졌고, 빵과 함께 식탁에 올려졌다. 점심과 저녁용으로는 뼈 있는 고기덩어리가 큰 통에 넣어지고 장작불에 몇 시간 동안 삶아졌다. 이때 들어가는 전통적 요르단 조미료는 ‘자미드(jameed)’라는 것인데 염소젖에서 얻은 치즈를 태양에 말린 것이다. 나는 이 전 과정에서 참다운 베두인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상품화된 치즈와 깡통채소에 실망한 후인지라 너무도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날 찍은 비디오는 염소머리가 분해되고 창자가 꺼내져 요리되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뉴욕갤러리에서 사진들과 함께 전시됐다.

많은 관객, 특히 고상함을 자랑하는 한국 부인들이 이런 살육장면은 전시장에 안 틀면 좋겠다고 항의해왔다. 교육상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내 비디오에서 아흐메드의 세 살 난 아들은 염소의 몸통 옆에서 아주 재미있게, 자연스럽게 놀고 있다. 베두인들은 걷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동물이 도축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난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반드시 고기를 만드는 과정, 귀한 생명이 도축되는 과정이 그 축제의 일환으로 인식됐었다. 닭을 잡을 줄 모르면 닭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자식교육 운운하면서 항의한 부인들은 결코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식들에게 고기를 많이 먹이는 여인들이었다.

고기를 먹는다고 하는 우리의 행위의 전체과정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교육적일까? 아니면 그것을 속이고 감추고, 오직 공장에서 생산된 최종적 고기 상품만을 식탁에서 먹게 만들고, 위생, 잔인, 살생, 백정 운운하며 고상한 삶의 가치를 구가하는 것이 교육적일까? 우리의 자녀를 대량 고기 생산의 맹목적 소비자로 만드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 생각 없이 불필요하고 과도하게 고기를 많이 먹는 병적인 인간들로 만드는 것이 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더 바람직한 것일까? 수천 년간 지속돼 온 ‘고기 먹음’의 축제적 성격, 자연스럽고 지속 가능한, 생태순환적인 전 과정을 인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을까? 과거에는 소고기를 먹어도 일년에 한 번이면 족했을 터다. 인류 식생활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라마단이 끝난 뒤 즐기는 베두인 가족의 축제. 양고기를 자미드와 같이 푹 삶고 있다. 왼쪽이 이만.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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