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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사랑학개론] 문학에 담긴 사랑의 ABC(3) 셰익스피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희생 없는 사랑이나 정치는 없다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랑은 정치가 야기하는 야망·갈등·배신·명예와 충돌…로마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안토니우스의 패착

▎레지널드 아서가 그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1871).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한 것은 안토니우스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정치적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어쩌면 사랑은 비(非)정치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간의 감정·활동·목표다. 사랑과 정치는 ‘지배’의 문제를 떠나 생각하기 힘들다. 사랑을 움직이는 성욕과 정치를 움직이는 권력욕은 둘 다 강력한 욕구다. 사랑과 정치의 교집합에는 배신이라는 요소가 빠질 수 없다. 둘 다 희생이 따른다. 희생 없는 사랑이나 정치는 없다. 사랑과 정치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러브스토리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이야기는,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사랑과 정치가 만나면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인들의 마음에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커플의 이미지를 고착한 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희곡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엘리자베스 테일러(1932~2011)와 리처드 버턴(1925~1984)이 주연한 4시간짜리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였다.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사랑은 정치가 야기하는 야망·갈등·배신·명예와 충돌한다. 핵심 테마는 이성과 감정, 서쪽(the West)과 동쪽(the East)의 차이다. 안토니우스(기원전 82~기원전 30년)의 라이벌인 옥타비아누스(기원전 63~기원후 14년)는 이성, 안토니우스는 감정을 대표한다. 서쪽의 로마는 이성, 동쪽의 이집트는 감정이다(이 작품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 이미 나타난 것이다). 이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 이야기를 엘리자베스 시대(1558~1603) 영국의 관점으로 채색한 결과다.

‘로마 버전의 삼국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대작이다. 읽는 데 5~7시간이 걸린다. 대사가 있는 인물만 34명이 나온다. 40개 장면으로 구성됐다. 셰익스피어 희곡 중 최대다. 극의 전개를 위해 로마와 이집트 사이를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나오는 클레오파트라는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극중 인물 중에서도 완성도가 높다. 셰익스피어는 아주 복잡한 인물을 창작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쓰기 위해 토머스 노스(1535~1604)의 1579년 영역본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존했다. 대사를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쓴 경우도 있다. ‘셰익스피어도 표절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물론 셰익스피어가 표절했다고 해서 표절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플루타르코스(플루타르크, 46~120)가 그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감정 상태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둘은 권력을 위해 연대했지만, 서로 사랑한 것도 사실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플루타르코스의 견해를 수용했다. 물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둘의 사랑은 ‘양념’에 불과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정치와 사랑을 모두 균형 있고 솜씨 있게 처리한 셰익스피어와 달리, 존 드라이든(1631~1700)의 [올 포 러브(All For Love, 1678)]는 정치보다는 둘 사이의 불멸의 사랑에 기울고 있다.

비극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문제극(problem play)이기도 하다. 문제극은 사회·도덕·인생의 문제를 다룬 희곡이다. 셰익스피어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인생의 모순을 드러낼 뿐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줄거리의 배경은 카이사르(시저, 기원전 100년~기원전 44년)의 암살이 낳은 ‘누가 로마제국을 차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로마 버전의 삼국지’ 상황이 전개됐다. 기원전 42년 필립피(빌립보)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패퇴시킨 3인이 3두정치(triumvirate) 시대를 개막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공화국의 서부, 안토니우스는 동부, 레피두스(기원전 88년께~기원전 13년)는 남부, 즉 아프리카를 차지한 것이다.

사랑에 집착한 안토니우스


▎셰익스피어의 희곡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1623) 폴리오판 첫 페이지. 읽는 데 5~7시간 정도 걸린다. / 사진:위키피디아
3두정치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속성은 독점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세월을 낭비하며 흥청망청 보냈다. 친구들의 조언과 경고를 무시했다. 3두정치에 대한 폼페이우스의 도전과 아내 풀비아의 사망으로 안토니우스는 마지못해 로마로 간다.

3인과 폼페이우스는 갈등을 봉합한다. 3두정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는 정략결혼을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불 같은 질투에도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결혼한 것이다(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 사이에는 딸이 둘 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는 스키타이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테네로 떠난다.

옥타비아누스는 합의를 깨고 폼페이우스·레피두스·안토니우스를 적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옥타비우스는 레피두스를 감옥에 처넣는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를 로마로 보내고 이집트로 떠난다. 옥타비아누스와 한판 붙으려면 로마의 민심을 잡아야 하는데 사랑에 집착하는 안토니우스는 패착을 둔다. 이집트로 돌아와 거행한 성대한 행사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와 로마공화국 동쪽의 통치자로 선포한다. 로마인들에게 클레오파트라는 완곡어법으로 말하면 ‘팜파탈(femme fatale)’,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매춘부’였다. 속국의 군주인 클레오파트라를 안토니우스가 동등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로마인들은 경악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공화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려고 한다는 루머까지 퍼졌다.

들끓는 민심을 등에 업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에 전쟁을 선포한다. 첫 번째 맞붙은 것은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다. 안토니우스는 육지에서 싸우는 게 유리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바다에서 싸우자고 했기 때문에 명예를 중시하는 안토니우스는 해전을 감행한다. 그리스 서해안에 있는 악티움에서 싸우기 위해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배 230척과 수군 5만 명을 동원했지만 클레오파트라의 배신으로 패배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배 60척을 빼내어 이집트로 향한 것이다.

두 번째 맞붙었을 때에는 안토니우스가 승리했다. 하지만 세 번째 결전에서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병력을 뺀다. 세 차례 결전을 통해 반복된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배신, 안토니우스의 분노와 용서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와 몰래 타협을 도모했다. 또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안토니우스는 칼 위로 몸을 던졌고 클레오파트라는 독극물로 자살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코브라에게 물리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설도 있다. 안토니우스에 이어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한 것은 안토니우스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정치적 미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치욕밖에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개선 행진에 클레오파트라를 개처럼 끌고 다니려고 했다.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옥타비아누스는 난감했을 수도 있다.

로마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역사 왜곡에 착수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실제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안토니우스는 실제보다 더 한심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기원전 41년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났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아프로디테(비너스)처럼 치장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디오니소스에서 찾는 인물이었다. 이집트 신들의 계보를 기준으로 하면 둘은 지상의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자처했다. 둘만의 ‘망상’이 아니었다. 당시 군주들은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은 ‘지성’


▎로렌소 카스트로가 그린 악티움 해전(1672). 그리스 서해안에 있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클레오파트라의 배신으로 옥타비아누스에 패배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클레오파트라는 고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가 미인이었다는 고대 기록은 없다. 기원전 32년에 나온 은전을 보면 적어도 현대 기준으로는 못생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제 눈에 안경’이 두 번이나 통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은 지성에서 나왔다. 에티오피아어·히브리어·아랍어 등 9개 언어를 구사했으며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목소리가 아름다웠다고 기록됐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혈육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였다. 카이사르의 힘을 빌려 공동 군주였던 남동생을 제거했다. 무자비했으나 당시 기록을 보면 이집트 국민들에게 인기 있는 통치자였다. 야만의 시대였다. 카이사르의 정복 활동으로 1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관대한 지도자로 인식됐다. 당시 국민이 통치자에게 바라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능력이었다.

혈통 상으로는 이집트 사람과 피 한 방울 안 섞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조상들은 마케도니아 사람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사망으로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기원전 356~기원전 323년) 대왕의 장군 중 한 사람인 플롤레마이오스가 창시한 왕조(기원전 323~기원전 30년)가 문을 닫았다.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의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하자 이집트는 주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집트가 다시 독립한 것은 20세기다.

클레오파트라의 집권 기간은 20여 년(기원전 51~기원전 30년)에 달한다. 그가 통치한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의 진주였다. 지중해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이자 로마를 제외하면 유일한 독립국이었다. 이집트의 무역망은 아라비아와 인도까지 뻗어 있었다. 등대와 도서관으로 유명했다. 알렉산드리아에 비하면 로마는 ‘시골’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뿐만 아니라 아마도 카이사르도 배신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암살에도 가담했다는 설이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마키아벨리적 인물이었다. 어제의 필요에 따라 한 약속은, 오늘의 필요에 따라 깰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어제의 사랑의 약속 또한 오늘의 정치적 필요에 종속됐다. 주저 없이 배신을 일삼고 사랑과 유혹을 도구삼았던 클레오파트라가 추구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최소한 생존을, 가능하면 팽창을 도모하는 게 정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러한 정치의 속성에 충실했다. 250여 년에 걸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통치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기원전 168년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의존국(client state)·보호령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독립성을 복원해야 했다.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권력투쟁에서 변수이자 상수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중요한 변수·상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어머니가 누구였는지도 모른다. 카이사르와 사이에 낳은 카이사리온(기원전 47~기원전 30년)은 클레오파트라 사후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처형됐다. 하지만 그의 다른 자식들은 안토니우스의 아내 옥타비아가 키웠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돼버렸다. 그는 정치(情癡), 즉 ‘색정에 빠져서 이성을 잃은 사람’이었다. 천하의 3분의 1을 소유한 그는 나머지 3분의 2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라는 나라에 대한 사랑과 클레오파트라라는 개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로마인들이 혐오한 클레오파트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안토니우스는 그가 쌓아온 명성을 상실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A. M 포크너가 그린 안토니우스를 맞이하는 클레오파트라(1906).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돼버렸다. / 사진:위키피디아
그의 군인·정치가 자질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부하들이 사랑한 위대한 장군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용장(勇將)이지만, 지장(智將)은 아니었다. 전략·전술이 뛰어나지 않았다. 로마황제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술과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한 남자였다.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유혹자(誘惑者)이자 전략가였다고 평가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서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역사가 아주 다르게 전개됐으리라.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권력 하나에 집중했다. 안토니우스에 비해 자질 자체는 떨어졌는지 모르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야심에 집중적으로 헌신했다. 자기관리가 좋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마찬가지로 매우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어쩌면 안토니우스는 심계(深計)가 뛰어난 두 인물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였다. 비록 싸움에 졌지만, 로마제국의 첫 5 황제 중 3명(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은 안토니우스의 직계 후손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제1대 황제가 되어 학술·문예를 장려해 로마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로마사나 유럽사, 세계사의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불멸의 사랑으로 기억된다. 정치가 아닌 사랑을 기준으로 보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승리자다.

※ 김환영 - 중앙일보 지식전문기자.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201802호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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