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 고려 몰락을 재촉한 위화도회군(2) 

2차 무신 집권의 장애물 최영이 제거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요동 정벌이 실패할 경우 이성계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설사 성공한다 해도 이성계의 군사력은 소진될 것이 뻔했다.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이성계로서는 죽는 길이나 다름없었다. 이성계는 ‘반역’의 길을 택했다. 최영이 간신히 지탱하던 왕권은 유명무실해지고 신진 세력의 무신 집권이 다시 시작됐다.
지난 호에서는 위화도회군과 개성 전투, 그리고 고려와 명의 국경 분쟁이 발생한 원인을 당시 동북아 국제정치 속에서 간략히 알아보았다. 철령 이북의 영토에 대한 명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 고려는 고려의 북쪽 국경이 원래 공험진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공험진이 정확히 어딘지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많다. 함흥(1학설), 길주(2학설), 그리고 두만강 건너(3학설)라는 견해가 있다.(윤경진, ‘고려 동북 9성의 범위와 공험진 立碑 문제’, 2016)

1920년대 식민사학자들(津田左右吉, 池內宏)은 함흥평야 지역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한백겸, 안정복, 정약용 등 실학자는 길주 이남으로 보았다. 세종대는 두만강 건너 700리에 있다고 추정했다. [세종실록](155권) ‘지리지’에 “소하강(蘇下江) 가에 공험진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이라고 썼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은 네 개다. 그중 소하강은 북쪽 만주지역으로 흐른다. 이 강이 공험진, 선춘령을 지나 동쪽으로 120리 흘러 수빈강이 되고 동해 바다로 들어간다. 선춘현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는데 여진족이 비의 글자를 깎았다.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하지만 세종이 김종서에게 보낸 편지나 신하들과의 대화를 보면 이 점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신 박의중이 명에 전한 표문에서 고려는 철령 이북에 있는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를 거쳐 공험진까지 고려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곳은 일찍이 윤관이 정복한 곳이다. 그런데 1258년 원의 영토가 됐다가 1356년(공민왕 5년) 고려가 돌려받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고려 정부는 공험진을 길주 이남 지역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던 그때 우왕은 최영과 이미 단독으로 요동공격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개성의 방리군(坊里軍)을 동원해 한양의 중흥산성을 수리토록 했다. 유사시 천도도 생각한 것이다. 최영은 외교적인 수단에 희망을 걸지 않았다. 요동의 나하추마저 항복한 이상 명의 의도는 분명하다고 본 것이다. 명이 요구하는 철령 이북의 영토를 할양할 수 없고 외교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 해당 기사는 유료콘텐트로 [ 온라인 유료회원 ] 서비스를 통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803호 (2018.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