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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50년 발자취] 자유와 민주 거목(巨木) 키우는 밑거름이 되다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 자료 수집·정리=문상덕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1968년 4월 창간해 군사독재 날선 비판… 강제 정간·폐간 반복하며 균형 잡힌 시대정신 이어와

서울 중구 서소문동의 중앙일보 본사 지하 서고(書庫) 한편에는 500권에 이르는 [월간중앙]이 빽빽이 꽂혀 있다. 겉은 누렇게 바래고 종이먼지를 뒤집어써 낡았지만 속에는 시대의 기록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격동의 현대사를 목도(目睹)한 활자가 내뿜는 안광(眼光)은 반백 년 되도록 형형함을 간직하고 있다. 1968년 4월 1일 “민주주의라는 자유의 묘목(苗木)”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되고자 창간한 [월간중앙]이 2018년 4월, 50주년을 맞았다.


▎[월간중앙]은 1968년 창간 이래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혁신을 멈추지 않았다. 바른 목소리를 내다가 정간과 복간을 반복하기도, 시대를 좇기 위해 제호를 파격적으로 바꾸기도 했다.
월간중앙의 긴 여정의 출발은 1967년 8월 10일 중앙일보 출판부가 단일 부서로 분리되면서부터다. 초대 주간(主幹)은 이종복(2010년 별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다. 창간호는 국판(234×159㎜) 440쪽 분량으로 제작됐다. 발행부수는 당시 시사종합지 중 가장 많은 4만 권이었다.

월간중앙이 다룬 영역은 정치와 시사에 머물지 않았다. 문화와 예술, 학문까지 시야를 넓혔다. 책 후반부는 문화·예술·인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교양물을 실었다. 생각을 표현할 무대가 부족했던 당대 문화예술인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았다. 전반부는 시사, 후반부는 인문·예술로 나눈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월간중앙은 창간사에서 밝힌 대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권력을 향해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창간호는 박정희의 3선 개헌 저지에 국민이 나설 것을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당시 신민당 당수였던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1906~1987)의 기고문 ‘분계선상의 헌정질서’를 통해서다. 현민은 “설령 경제성장의 목표가 달성된다 하더라도 근대화나 경제건설을 위해서 민주주의를 제물로 할 수는 없다”고 박정희 정권의 경제건설 우선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다.

1970년에는 5·16 쿠데타의 내막을 둘러싼 지상논쟁이 벌어졌다. 윤보선(1987~1990) 전 대통령의 회고록 연재(‘내가 겪은 5·16: 새벽 3시의 비상전화’, 4~5월호)가 발단이 됐다. 쿠데타가 일어나서야 소식을 들었다는 윤 전 대통령의 주장에 반박해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현석호와 박정희 소장의 참모였던 유원식 대령은 [월간중앙] 7, 8월호에 잇따라 윤 전 대통령의 ‘사전 합의설’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이듬해 대선까지도 계속됐다.

권력의 억압 맞서 민주주의 옹호


▎1968년 4월 1일 발간된 월간중앙 창간호.
권력을 비판하는 기고와 기획물은 계속 이어졌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한완상(82) 서울대 교수와 조동필 고려대 교수, 이건호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의 대담을 정리한 ‘비리의 일상 속에서’(1978년 10월호)는 유신체제의 어용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꼬집었다. 월간중앙의 편집 방향을 못마땅히 여기던 당국은 결국 성낙현 공화당 의원의 여고생 치정(癡情) 사건 등 3대 스캔들을 고발한 특집(‘이지러진 의식의 회복을 위하여’)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며 문제를 삼았다. 그해 11월부터 3개월간 발행이 중단됐다. ‘자진휴간’ 형식을 빌린 언론탄압이었다.

이듬해(1979년) 월간중앙 2월호가 속간한 뒤 10·26 사태와 12·12 군사쿠데타가 연이어 터졌다. 월간중앙이 원고지 300장 분량으로 작성한 다큐멘터리 ‘1979년 10월 26일 밤’이 실린 12월호는 6만 부가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정국은 더 짙은 암흑으로 빠져들었다.

월간중앙은 한 줄기 희망을 찾아보려고 했다. 1980년 6월 호에 ‘전후 세대가 말하는 통일 전망’이란 좌담을 실었다.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아 6·25 전후 세대 5명이 생각하는 반공 교육과 남북한 체제의 문제, 통일 전망에 대한 토론을 강희경(66) 당시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가 정리한 글이다. 절망에 빠진 시민들에게 통일시대의 희망을 심어주려는 노력이었다.

사전검열로 언로를 막아놓고 언론 통·폐합 시기를 엿보던 신군부는 ‘북침설’이란 한 단어를 문제 삼았다. 사전검열 땐 문제 삼지 않다가 책이 나오자 꼬투리를 잡은 것이다. 당국의 칼끝은 중앙매스컴 전체로 향했다. 양태조 주간을 비롯해 기자 4명이 해고됐다. 회사는 월간중앙 무기한 휴간계를 문화공보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당국은 1980년 7월 언론 통·폐합 조치 때 결국 월간중앙을 강제 폐간했다. 시중에 배포된 6월호는 전량 회수됐다.

현재 남아 있는 1980년 6월호는 단 두 권뿐이다. 중앙일보 서고에 제본돼 있는 보존본 한 권과 비상계엄 당시 서울시청 보도검열단에 근무했던 위영일씨가 빼낸 한 권이 전부다. 위씨는 월간중앙 창간 40주년 송년 특집호(12월호)를 통해 1980년 보도검열단의 활동을 기록한 비망록을 공개했다. 10·26 사태 직후 소령으로 진급해 계엄사 보도검열단에 배치돼 2년간 그가 남긴 기록은 언론통제의 실상이 낱낱이 들어 있었다. 신군부의 사회 정화란 미명 아래 사라진 언론사는 44개에 달했다.(‘28년 만의 고백! 1980년 보도지침 대공개’, 2008년 12월호)

강요당한 침묵은 8년간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1987년 6월 ‘봄’이 찾아왔다. 월간중앙은 입에 물려졌던 재갈을 벗어던졌다. 기자들은 펜에 잉크를 적셨고, 인쇄기가 다시 돌아갔다. 1988년 3월 복간호에서 월간중앙은 이렇게 천명했다.

“20년 동안 자라지도 못하고 눈·비·바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늙은 묘목, 아니 기형적인 노목(老木)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 모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처량한 모습을 한번 들여다보자. 월간중앙은 앞으로 ‘자유의 묘목’이 반드시 수목(樹木)이 되도록 희생의 밑거름이 될 것을 독자 앞에 천명한다.”

복간호는 666면으로 전보다 두꺼워졌다. 8년간 삼켜야 했던, 하고 싶고 담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부수는 10만 부에 달했다. 복간 이후에는 매월 심층 취재한 특집 기사를 실어 시대적 과제를 진단했다. ‘6공화국이 풀어야 할 7개의 매듭’(1988년 3월호),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1988년 6월호) 등이다. 월간중앙은 사회구조적 모순을 들춰내 고민할 지점을 찾아내는 데 천착(穿鑿)했다.

복간 후에는 매해 신년호마다 심혈을 기울인 특별 부록을 펴냈다. ‘오늘의 북한’(1989), ‘80년대 한국사회 대논쟁집’(1990), ‘한국의 파워’(1994)는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담론을 만들어냈다. [월간중앙] 별책부록을 소장하는 게 당대 오피니언 리더들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6월항쟁으로 군사정권의 위세는 한풀 꺾였지만 언론에 대한 압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88년 8월 29일 당시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이던 오홍근 기자가 군인에게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월간중앙기자 16명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문책을 촉구하며 제작 중지로 맞섰다. 조사 결과 8월호에 실은 칼럼(‘청산해야 할 군사문화’)에 불만을 품은 군부가 조직적으로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보사령부 예하 부대장이었던 이규홍 준장과 권기대 정보사 참모장(준장)이 구속됐고, 이진백 정보사령관이 직위 해제됐다.

긴 호흡, 시대를 읽는 특종 쏟아내


▎강단에 선 한완상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그의 목소리가 담긴 칼럼 ‘가짜와 위선의 출세주의’(1978년 10월호)와 대담 ‘전후 세대가 말하는 통일 전망’(1980년 6월호)으로 [월간중앙]은 정간과 폐간을 맞아야 했다.
1992년 8월 월간중앙은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당시 전두환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의 특종을 보도했다. 8월호는 초판 6만 부가 순식간에 매진됐다. 그러나 정부 압력으로 재판 발행은 물론 신문광고도 싣지 못했다.

이듬해 11월에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새롭게 조명된 최태민 목사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오랜 관계의 내막을 최초로 제기했다.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월간중앙은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최씨를 적극 후원한 배경을 상세히 보도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월간중앙은 잡지의 새 여정을 모색했다. 1970~80년대 독자들의 요구는 시사 잡지가 민주주의를 향한 목마름을 해갈해주는 단비가 되는 것이었다. 1990년대 독자들은 보다 다양하고 생활과 밀접한 정보를 원했다. 혁신은 시대의 요구였고, 중앙매스컴 전체의 사활을 건 당위(當爲)였다.


▎1988년 8월 29일 당시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사회부장이 월간중앙에 실린 칼럼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 게재 이후 군인에게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인 오홍근 부장.
[중앙일보]는 당시 석간에서 조간으로 변경하고 한글 제호를 도입했다. 또 신문 최초로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월간중앙은 창간호부터 지켜왔던 제호까지 포기하는 파격적인 실험에 나섰다. 1995년 4월호를 끝으로 월간중앙을 휴간하고, [시사월간 윈(WIN)]을 선보였다. 시사 월간지의 고정된 판형인 국판 대신 더 크고 얇은 국배판(210×297㎜) 전면 컬러를 도입했다. 그달 대표적 인물의 사진을 표지에 내세운 시도는 오늘날에도 변함 없다.

[시사월간 윈]의 파격적인 실험은 4년 만인 1998년 12월 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한국경제의 추락과 잡지시장의 축소 때문이었다. 대신 넓어진 지면과 디자인, 정보의 다양성은 이후 재창간한 월간중앙의 DNA로 계승됐다. 새 옷을 입은 월간중앙은 예전보다 깊이 있고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기사’를 잡지의 본령으로 여겼다. 기존 월간지가 답습했던 선전주의를 벗어나려는 노력과 함께 사건 자체에 매몰되기보다 그 속에서 시대정신을 읽어냈다.

2001년 월간중앙(5월호)은 휴대전화도 감청이 가능하다는 특종을 내놨다.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 감청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하지만 5개월간의 추적 끝에 휴대전화 감청이 가능하며, 한국이 이스라엘 감청 장비 두 대를 구입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 기사는 민간인을 상대로 한 국가기관의 불법 정보 수집 논쟁을 불렀고, 법적 기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2006년 신년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대담이 표지를 장식했다. 김 전 대통령은 신년특집 대담(‘방북 초읽기 들어간 김대중 전 대통령’)에서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두 번째 평양행 계획을 처음 밝혔다. 북핵 문제로 남북 관계와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터라 김 전 대통령의 구상에 국내외 이목이 집중됐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대담에서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 ▷미국의 북한 체제 안전 보장 ▷경제적 제재 해제를 한반도 평화의 선결조건으로 꼽았다.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금도 12년 전 월간중앙이 전한 DJ의 제언이 가진 생명력은 불변함을 보여줬다.

묵직한 정론으로 시대 요구에 부응


▎1995년 6월 ‘시사월간 윈’ 창간호와 1999년 3월 월간중앙 재창간호.
2007년 4월 창간 39주년 특집호는 42년간 미궁에 묻혀 있던 현대사를 발굴한 특별기고가 실렸다. 노 대니얼 월간중앙 객원편집위원이 쓴 ‘한일협정 5개월 전 독도밀약 있었다’가 그것이다. 막연한 소문처럼 떠돌았던 ‘고노-정일권(당시 국무총리) 밀약’이 사실로 확인된 순간이다.

한·일 정부 대표는 1965년 1월 11일 서울 모처에서 만나 ▷상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인정 ▷독도를 기준으로 한 중복 어업구역은 공동수역으로 지정 ▷한국의 점거 유지하되 경비원 증강이나 시설의 신·증축 금지 조항에 합의했다. 협상에는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으로, 당시 사업가이자 정객(政客)으로도 활동했던 김종락씨가 관여했다. 그해 6월의 한일협정 체결을 5개월 앞둔 때였다. 월간중앙 보도로 군사정권이 독도 문제를 외면해온 의문이 풀렸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정국이 소용돌이쳤던 2016년 12월호와 이듬해 1월호 월간중앙은 사태의 주요 인물인 정윤회와 고영태를 연이어 만났다. ‘최순실의 전 남자 정윤회의 심경토로 70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키맨 고영태의 11시간 마라톤 심경고백’ 기사로 두 사람이 고백한 국정농단 사태의 내막이 공개되면서 탄핵 여론은 더욱 높아졌다.

이들이 월간중앙에서 솔직한 심경을 고백할 수 있었던 건 자신들의 말을 왜곡하거나 가감하지 않고 육성 그대로 전할 것이란 잡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많은 이들이 월간중앙을 통해 자기 신념을 주장하고 심경을 토로하는 이유이다. 생명력 짧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월간중앙이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묵직함이 바로 잡지의 저력인 것이다.

반세기 전, 시대는 월간중앙이 ‘자유’와 ‘민주’라는 묘목의 보호자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시대정신이었다. 폐간의 아픔을 딛고 처음 내놓은 복간호에서 월간중앙은 우리 앞에 놓여 있던 묘목이 고목(枯木)이 아닌 생명의 기운을 내뿜는 수목(樹木)이 되도록 밑거름이 될 것임을 천명했다.

이제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는 지천명(知天命)에 접어들었다. 묘목은 훌쩍 자라 땅 위로는 울창한 그늘을 이루고, 땅속으로는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독자와 함께, 국민과 함께 눈물과 피땀으로 키워낸 거목(巨木)이다. 월간중앙은 거목이 모여 숲을 이루고 남북한으로 뻗은 산맥에 이를 때까지 밑거름의 소명을 다할 것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 자료 수집·정리=문상덕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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