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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특집(1)]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미 대화의 길 

‘한반도 역사를 바꿀 위기의 대반전 왔다’ 

김영희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 전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역사상 위대한 일은 언제나 낙관주의 산물… 비핵화·평화 협상은 자동차 두 바퀴처럼 함께 가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정상회담 소식은 전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제5 도살장] [챔피언의 아침 식사] 같은 대표작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은 역사를 깊이 통찰하고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극도로 비직선적·비선형적이고 불가예측적이다(History is highly unlinear and unpredictable).”

“역사는 놀라운 일들의 리스트다(History is merely a list of surprises).”

평창 겨울올림픽 이후 우리는 매일 역사의 불가예측성과 놀라움을 실감한다. 작년 한 해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김정은과 트럼프는 살벌한 말폭탄 공방을 벌였다. 미국 의회, 행정부, 군부의 강경파들, 보수적인 싱크탱크들은 연일 대북 선제공격의 진군나팔을 불었다. 그들은 남한과 일본이 큰 희생을 치르지 않는 방식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기지를 외과수술적인 공격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는 한국의 동의 없이 확전이 불가피한 선제공격은 안 된다는 입장을 미국에 거듭 밝혀야 했다.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은 제2의 한국전쟁을 의미한다는 상식적인 인식에서다.

트럼프 정부는 선제공격의 카드를 휘두르면서 대북제재를 최고도로 강화해 북한을 사실상 해상 봉쇄하는 단독 제재조치를 취했다. 해상 밀무역을 차단하는, 북한에는 고통스러운 특단의 조치다. 평창 겨울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진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김정은이 신년사의 말미에서 평창에 북한 선수단과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우리는 한반도 사태가 이렇게 급반전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놀라움(surprise)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 코스를 일직선으로 달린다 싶던 한반도 위기가 ‘평창’에서 변곡점을 만나 180도 방향을 틀었다. 한국인들이 가슴을 쓸어내린 역사적인 반전이다. 그때부터 사태는 아래와 같은 급행차선을 달리고 있다: 특사단 방북,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 전달→김정은과 노동당 당사에서 회담과 만찬→4월 말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합의→특사들 방미, 트럼프 만나 김정은의 트럼프 방북 초청, 핵·미사일 추가 시험 중단 약속 전달→트럼프, 김정은과 5월에 만나겠다고 약속→특사단,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 방문해 평양과 워싱턴 회담 결과 설명하고 협력 요청.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메시지와 초청장의 의미는 한반도 문제 해결에 하나의 획을 긋는다. 그는 비핵화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라는 미국의 북미 대화의 전제조건을 시원하게 만족시켜 버렸다. 한반도 문제는 이제 새로운 프레임 안에서 논의될 희망적인 전망이다. 201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낙인찍던 때가 아득한 옛일로 느껴진다.

김정은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 대표, 사실상 특사로 보낸 것이 남북 관계의 큰 변곡점이 됐다. 김영남은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정부 수반이어서 상징성이 높았다. 김여정은 김정은의 문재인 대통령 방북 초청장을 들고 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보수 진영의 비판을 각오하고 김여정을 극진히 대접했다.

김정은의 다음 수도 절묘했다. 그는 폐회식에 노동당 부부장 겸 통일전선부 부장 김영철을 보냈다. 통전부장은 대남 전략과 공작을 총괄하는 자리다.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김정은의 의사를 전달한 것도 김영철이다. 김영철은 남한에서는 천안함 폭침의 기획·실행자라는 의심을 받는 금기 인물(persona non grata)이지만 문재인 정부의 ‘꿩 잡는 게 매’라는 현실주의가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제재 대상이기도 하다.

우연을 가장한 역사의 흐름, 평창 분기점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3월 11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등 특사단으로부터 미국 방문 결과를 보고받고 있다. / 사진:청와대
김정은은 김영철을 폐회식에 보냄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첫째, 제재 대상을 남한에 보냄으로써 국제 제재에 작지만 의미 있는 틈을 벌였다. 유용한 기정사실 만들기다. 둘째, 김영철은 김정은에게 직보하는 지위에 있고 대남 정책·전략에 관한 한 김정은의 신임이 두텁다. 김영철의 방남은 남한 특사단의 방북과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협의하고 준비하는 데 가속페달 역할을 했다.

김영남·김여정·김영철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공식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뒤에는 또 한 사람의 주목할 인물이 있었다. [중앙일보] 정용수 기자의 2월 28일자 보도 말고는 언론들이 그 존재를 간과한 통전부 부부장 맹경일이다. 맹경일은 북한 제일의 대남 전략가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 모든 공식·비공식의 남북회담과 접촉을 기획하고 참가한 사람이다. 그는 올림픽 기간 중 20일 동안 북한 응원단원의 편리한 모자를 쓰고 국정원과 통일부 인사들을 만나 평창 이후’를 물밑에서 작업했다. 그는 남한의 방북 특사들을 위한 김정은의 만찬에도 참석할 정도로 비중이 높은 인물이다. 이렇게 ‘3김+1맹’은 김정은이 남한에 파견한 환상의 팀이었다. 남북대화와 북·미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김정은의 적극적인 관심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인선이다.

미국은 평창 이후 남북 관계가 과속으로 진전되는 것을 경계했다. 미국 대표단장에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임명한 것부터가 남북 관계의 과속 개선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펜스는 서울과 평창에 머무는 동안 의도적으로 북한의 김영남과 김여정의 존재를 투명인간처럼 무시했다. 서울 도착 전 도쿄에서는 대북 강력 제재의 필요성을 새삼 강조했다. 폐막식 대표단장으로 온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도 미소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반대로 펜스와 같이 강력한 대북제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올림픽 기간 내내 백악관 안보보좌관 허버트 맥매스터와 부시 정부 이후 살아남은 네오콘(neocon)들은 대북 고강도 압박과 전쟁 분위기를 열심히 고조시켰다. 그들이 경계한 것은 미국이 빠진 남북 관계 개선, 비핵화가 빠진 남북 관계 개선이었다.

그들의 걱정은 지정학적인 것이었다. 남북 관계가 평화공존의 수준까지 개선되면 주한미군의 지위가 흔들린다고 걱정했다. 미국에 주한미군은 대(對)중국 전선의 전초기지로 중국 포위망의 필요불가결한 연결 고리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여유 있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트위터로 김정은의 옆구리를 찌르기는 했어도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면 김정은과 만날 용의,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는 계속 발신했다. 트럼프는 문 대통령으로부터 남북 접촉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걱정되는 것은 미국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 사이에 북한에 관한 인식과 정보가 만족스럽게 공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메달을 제외한 평창 최대의 성과는 펜스 부통령이 김영남이나 김여정과 악수는 고사하고 눈길 한 번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남·북·미 3국은 한국을 매개로 참으로 생산적인 3각 대화를 진행한 것이다. 그 결과가 4월의 남북 정상회담, 5월의 북·미 정상회담이다. 평양의 트럼프를 상상하면 달콤한 전율이 느껴진다. 트럼프는 남북 정상회담을 기꺼이 이해하고 지지했다. 김정은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한미 연합군사연습도 그대로 실시해 좋다고 말했다.

게임의 룰 바꾼 ICBM 화성-15


▎지난 2월 북한 ‘건군절’ 기념 열병식에 등장한 ‘화성-15’. 게임의 룰을 바꿨다는 평가가 나온다. / 사진:연합뉴스
대부분의 북한 분석가는 북한이 북·미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키 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의 중단 내지 축소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에 박힌 ‘상자 속 사고(inside the box thinking)’의 상식적인 결과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보이는 대로의 북한, 우리가 주관적으로 형상화하는 북한이 북한의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론적 반성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김정은이라는 한 인간의 사고 회로를 들여다보고 판단하는 일은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배운다.

북한은 핵·미사일이라는 ‘정의의 보검’은 미국과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강조해 왔다. 그런 북한의 김정은이 한국 특사단과의 회담에서 북한의 체제 안전만 보장된다면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경악할 변화다. 그는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는 말도 했다. 비핵화가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유지라면 김정은은 애당초 핵무기를 개발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모순이 생긴다. 그것이 현실 정치의 당위론(Sollen)과 존재론·현실론(Sein)의 충돌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를 포함한 정치에서는 도덕적으로는 수긍할 수 없지만 자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핵·미사일에 관한 버락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은 ‘전략적 인내’였다. 이름은 무슨 정책이나 독트린같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내용은 전혀 전략적이지 않은, 아무것도 안 하는 무위(doing nothing) 그 자체였다. 김정은은 오바마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지켜보기 자세를 견지하는 사이에 핵·미사일 능력의 업그레이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물이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요, 미국을 사정권에 둔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북한은 2017년 11월 29일 사거리 1만3000㎞의 ICBM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에서 뉴욕이나 워싱턴까지의 거리는 약 1만1500㎞다. 북한은 이날 “지구 전역에 대한 핵 공격 능력을 확보해 핵무기 개발을 완성했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화성-15에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화성-15는 왜 게임 체인저인가. 북한이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지 않는 한 북한 핵무기의 위협 대상은 한국과 일본으로 국한된다. 아무리 강력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미국 본토까지 실어 나를 운반수단이 없으면 미국은 실존적 위기를 느낄 이유가 없었다. 화성-15가 그런 여유를 박탈했다. 미국이 직접 북한 핵의 위협을 받게 될 때까지 미국의 대북 핵 정책은 비확산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북한의 핵무기와 물질이 미국의 동맹국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나 테러단체에 넘어가지만 않으면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완전, 검증 가능, 불가역적 핵 폐기의 긴 여정


▎2005년 9월 19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6자회담 대표들이 ‘9·19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악수를 나누며 축하하고 있다. 이후 이 성명은 실패로 판명났다.
화성-15가 미국의 이런 여유를 날려 버린 것이다. 우리같이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실존적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트럼프는 전쟁이 나도 거기(한국)서 나고 사람이 죽어도 그들(한국인)이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미국까지 직접 공격할 능력을 갖춘 상황에서는 트럼프도 더는 한국과 일본의 영토의 안전과 국민들의 생명을 가볍게 보는 발언을 할 처지가 아니다.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이 과연 뉴욕·워싱턴·시카고·로스앤젤레스 상공에서 북한의 중량급 핵탄두가 터지는 것을 각오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핵우산으로 지켜줄 것인가. 이런 회의와 불신의 당연한 귀결로 한국서는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전술핵을 재배치하거나 자체 핵무장을 하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한국이 핵무장을 하면 일본도 한다. 대만도 할 가능성이 높다. 동북아시아에 핵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 정체불명의 코피작전(bloody nose strike)이다. 한국과 일본을 심각한 북한의 보복 공격에 노출시키지 않고 김정은이 코피를 흘리는 원포인트 공격이 검토되고 있다는 보도가 일으킨 파장은 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표적인 북한 붕괴론자인 빅터 차 전략국제연구소 한국석좌 겸 조지타운대 교수가 코피작전에 반론을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주(駐)한국 대사 자리가 날아갔다. 빅터 차 교수는 한국의 희생 없는 선제공격은 있을 수 없다는 대다수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해 졸지에 한반도 평화의 챔피언이 됐다.

이름이야 코피작전이든 뭐든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면 일어날 재앙적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재래식 무기에 의한 미국의 선제공격→한국과 일본에 대한 북한의 미사일 공격→북한 보복공격에 대한 미국의 보복공격→북한 땅 초토화→절망적인 북한, 한국에는 스커드로, 일본에는 노동으로, 미국에는 화성-15로 핵 공격→미국은 북한의 공업도시 김책시를 핵 폭격….

남·북한과 미국과 일본이 핵전쟁을 벌이는 사이에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전쟁 개입을 저지하는 치열한 흥정을 벌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판단 여하에 따라서 전쟁은 동북아시아의 미니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선제공격의 무모함, 한국이 일본과 함께 총력을 기울여 막아야 할 이유다. 평창의 대반전이 이런 재앙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한다. 실제로 그럴 희망이 크다.

북한이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핵무기를 폐기하고 핵 비확산조약(NPT) 복귀를 선언한 것은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하다. 공동성명에는 단계적 비핵화 과정을 거쳐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까지의 과정에 관한 합의도 포함됐다. 평화협정 체결을 전후해 북·미 관계 정상화(수교)가 실현된다.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의 조건


▎1994년 10월 21일 당시 로버트 갈루치 미국 핵대사(왼쪽)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미 고위급회담의 기본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제네바합의 또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듬해 2006년 1차 핵실험을 단행해 세계를 경악시키고 9·19 공동성명을 공동화(空洞化)시켰다. 북한은 같은 해 스커드와 노동에 이어 대포동-2 미사일을 발사했다. 결국 9·19 공동성명은 1994년의 북·미 제네바합의의 운명을 맞았다. 북한은 핵 개발을 중단하고 그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중유를 제공하기로 한 합의다. 그러나 북한은 합의의 뒷전에서 핵무기용 고농축우라늄을 개발했다. 미국은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 제네바합의는 사문서가 되어 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특사단에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에 합의하면서도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한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 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irreversible)한 완전한 폐기, 이른바 CVID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길고 험난할 것이다. 핵무기는 북한의 생존전략의 축으로 생각돼 왔다. 북한은 결코 그런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서울·워싱턴·도쿄 전문가와 당국자들의 니어 컨센서스(near-consensus)였다. CVID로 가는 긴 여정의 첫걸음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경직된 전제를 버리는 것이다. 김정은과 트럼프라는 두 사람의 극단적으로 불가예측적인 지도가 합작하면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말은 북한과의 협상과 실천의 매 단계마다 북한의 약속 이행을 확인하겠다는 의미다. 전사후사(前事後師), 역사의 교훈에서 배운다는 현명한 자세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비핵화의 과정은 핵 동결로 들어가서(입구론) 완전 비핵화로 나오는(출구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핵 협상을 하는 것은 북한과 미국이기 때문에 미국의 복안이 협상의 방향과 진도를 결정한다. 한미 간의 치밀한 조율이 필수적인 이유다.

비핵화만 의제로 하는 회담은 그것이 어떤 수준의 것이든, 미국의 요구든 한국의 요구든 비현실적이다. 비핵화는 북한의 무장 해제를 의미한다. 그래서 비핵화 협상은 지금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평화협상과 같은 자동차의 두 바퀴처럼 진행돼야 한다. 평화협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북미 관계의 정상화가 이뤄져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은 주한미군 문제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평화협정과 북한 체제 안전의 조건으로 주장하면 협상은 난관에 부닥친다. 미국에 주한미군은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에서 중국 견제, 중국 포위망에 없어서는 안 될 고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긴밀한 전략적 이해의 조율이 북한 상대의 비핵화 및 평화협상에 필요조건이다. 한반도 평화라는 큰 바구니에 북한 비핵화, 평화협정을 통한 북한 체제의 안전 보장, 중국의 전략적 이해의 반영을 다 담아야 한다.

북한 체제의 안전보장에 관해서는 문 대통령과 렉스 틸러슨 전 미 국무장관이 한 약속이 있다: (1)북한을 침공하지 않는다, (2) 북한 체제의 전복을 시도하지 않는다, (3) 주한미군이 휴전선을 넘지 않는다, (4) 일방적으로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을 평화협정과 남북, 북·미 양자 협정에 반영하면 되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뒤에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한국과 북한과 미국은 각각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한국-5·24 조치 해제,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

북한-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수용. 억류 중인 미국인들 석방.

미국-유엔 안보리와 협의해 대북제재 완화. 평양과 워싱턴에 연락사무소 설치.

남·북한-문화·스포츠 교류, 군 단위까지의 지자체 교류, 북한 각처에 남북 합작 김치공장 설립, 산림녹화사업 시작….

대화 진행되는 동안 대북 억지력은 최고 수준 유지


▎평창 겨울올림픽에 참가하는 북한 예술단을 태운 만경봉 92호가 2월 6일 묵호항에 입항하자 보수단체 회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반발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정부는 국내에서도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북한 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이다. 지금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제1 야당의 인식은 문재인 정부의 입장과 거리가 너무 멀다. 인식 차의 출발점은 “김정은의 의도가 뭐냐?”다. 자유한국당과 보수 진영은 김정은이 대북제재를 해제받고 핵·미사일 개발에 시간을 벌기 위한 위장 평화공세를 취하는 데 정부가 속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김정은의 평화 제스처를 기만전술로 치부해 버리면 대북제재 강화와 군사옵션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일촉즉발의 한반도 위기가 해소될 길이 막힌다. 트럼프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한국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의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기만전술이라면 그것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한국도, 미국도 1994년 제네바합의 때, 2005년 9·19 공동성명 때의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다. 북한의 속임수가 들키는 순간 원점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래서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대북 억지력은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보수 진영도 경직된 사고의 프레임에서 잠시 나와 ‘상자 밖 사고’(out of the box thinking),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think the unthinkable)하는 여유를 보여야 하지 않는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말이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겠다: “낙관주의자들의 생각은 대개 틀린다. 그러나 역사상 위대한 일은 언제나 낙관주의의 산물이다.”

정부는 풀뿌리 교류에 최대한 많은 국민을 참여시켜 국민 모두를 대북정책의 참여자로 만들어야 한다. 청와대와 국정원과 통일부에 독점된 남북화해 정책은 뿌리가 약한 나무와 같은 것임을 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를 보고 통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까지의 길고 긴 여정도 통일 과정의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아직은 통일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한국이 말하는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통일 한국을 의미한다. 반면에 북한이 바라는 통일은 그들의 주체사상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체제 아래의 통일이다.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정(正=these)’과 ‘반(反=anti-these)’이다. 이 둘을 ‘합(合=synthese)’으로 승화(aufheben)시키는 데는 유장한 노력과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평창’ 같은 우연을 가장한 역사의 흐름이 필요하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일본과의 센카쿠·댜오위타이 분쟁을 지금, 우리 세대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보다 현명한 미래세대에 맡기자고 말했다. 덩샤오핑의 댜오위타이 모델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권이 바뀌어도 대북정책이 뒤집어지는 한국판 ABC(All but Clinton)가 필요 없는 정책을 축적해 가야 한다.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의 틀 안에서 전개된다. 독일 통일의 마무리 작업은 소련·폴란드·영국·프랑스·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같은 주변 국가를 상대로 한 헬무트 콜 총리의 정력적인 통일외교였다. 소련의 의사에 반한, 참여 없는 독일 통일이 불가능했던 것과 같은 정도로 중국의 참여와 중국의 의사에 반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정도는 낮아도 러시아와 일본도 한반도 문제에 일정한 지분을 가진 것이 현실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은 동북아 신지정학의 틀 안에서

특히 중국의 경우는 ‘시(Xi)황제’의 등극으로 국력의 적극적인 대외 투사가 예상된다.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는 19세기 서구 열강에 당한 치욕을 설욕하고 동아시아의 절대 강자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다.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중국의 꿈을 실현하는 핵심 수단이다. 시진핑은 ‘중국의 꿈’을 사실상 ‘시진핑의 꿈’으로 바꾸어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주석 임기제를 없애고 사실상 종신 집권의 체제를 갖추었다. 강화된 시진핑의 힘, 격상된 중국의 위상을 한반도 문제 해결에 긍정적으로 활용할 방도를 찾아 창의적인 대(對)중국 외교를 펴야 한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미 장기 집권 중이다. 그가 신동방정책을 펴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만큼 한반도를 위한 러시아의 활용가치도 높아졌다. 아베 신조의 일본은 한반도의 급속한 사태 발전에 주변국 중 가장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본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서 ‘일본 패싱’이 있을 것을 걱정하고 경계한다. 위안부 문제로 일어난 평지풍파를 조속히 진정시키고 일본의 지지와 협력을 확보해야 한다.

2017년 11월 화성-15 발사에 성공한 김정은이 2018년 신년사에서 핵·ICBM 완성을 선언하자 트럼프는 트위터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트럼프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가소로울 것이다.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은 400억 달러로 미국 중부 오하이오주의 소도시 데이튼의 그것과 맞먹는다.

그래도 최소한 10개 이상은 가졌을 것으로 보이는 북한의 핵탄두와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ICBM은 ‘북한이라는 꼬리(tail)가 세계라는 몸통(body)을 흔드는’ 사태를 만들어냈다. 트럼프 스스로 트위터로 김정은과 말폭탄을 주고받음으로써 김정은의 국제적인 위상을 크게 올려놓았다. 인정투쟁(recognition struggle)에서 김정은이 웃었다.

랜드연구소와 존스홉킨스대 국제문제대학원(SAIS)은 북한이 2020년까지는 100개의 핵무기와 성능이 입증된 운반수단을 보유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2년 뒤의 일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캄캄하던 비핵화의 전망이 ‘평창’에서 서광을 만났다. 이 탄력을 살리는 것이 문재인·김정은·트럼프의 어깨에 얹힌 무거운 짐이다. 그중에서도 조정자와 연결고리로서의 문 대통령의 역할이 가장 기대된다.

- 김영희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 전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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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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