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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8주기 맞은 천안함 폭침의 후폭풍 

김영철은 돌아갔지만 유가족 절규는 계속된다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유가족,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천안함 폭침 추궁해야” ... 서해평화지대, 공동어로구역 설치 등 NLL은 또 다른 뇌관

▎2010년 4월 29일 천안함 희생 장병 합동연결식이 거행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면 꼭 한 번 따져줬으면 고맙겠다. 천안함 폭침은 누구의 소행인지, 북한은 유가족에게 사과할 의향은 없는지 말이다. 그랬으면 진짜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천안함 46용사 유족회’(이하 유족회)의 이성우 회장은 오는 5월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에서 천안함 폭침 사건이 의제로 다뤄졌으면 하는 간곡한 바람을 이렇게 피력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의 여정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리라 기대되는 첫 북·미 정상회담이 천안함 전사자 유족들에게는 오랜 비원을 풀 수 있는 전환점으로 와 닿는 셈이다. 이 회장은 “북한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는 게 천안함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고 명예를 지키는 길”이라며 이 문제를 계속 이슈화할 것임을 강조했다. 천안함 폭침 이후 조성된 국민 성금으로 설립된 천안함재단(이사장 손정목)도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입장 표명이나 사과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은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해상에서 경계 업무를 수행 중이던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된 사건이다. 8년 동안 국민들의 기억 속에 맴돌던 천안함 폭침 사건은 평창 겨울올림픽에 즈음해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방남하면서 핫이슈로 떠올랐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바로 천안함 폭침을 일으킨 주범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 부위원장은 2010년 서해에서의 천안함 폭침과 같은 해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이 일대의 도발을 지휘하는 정찰총국장으로 재직했다. 천안함 폭침에 동원됐던 북한 잠수정이 북한 해군이 아닌 정찰총국 소속이었기에 배후로 지목받는다.

하지만 정부는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임에는 분명하지만 김영철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해 유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2월 23일 브리핑에서 “천안함 폭침은 북한이 일으켰고, 김영철 부위원장이 당시 정찰총국장을 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관련자를 특정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이유로 김영철 부위원장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2010년 민군 합동 조사단은 천안함이 북한의 소형 잠수 함정에서 발사된 어뢰에 의해 침몰됐다고 발표했었다.

미국이 동맹국으로서 천안함 거론할 자격 충분


▎지난 2월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집회를 연 천안함 폭침 전사자 유가족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청와대 관계자에게 전하고 있다. / 사진:오원석
결국 김 부위원장이 평창 겨울올림픽 폐막식을 거쳐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영철 방남 반대에 나선 천안함 유가족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정부가 사전에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그의 방남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도 격분했다. 예우를 받아도 시원찮을 정부로부터 무시당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성우 회장은 “남북 관계의 진전을 우리도 바란다”고 전제, “정부 말대로 대승적 차원에서 김영철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적어도 천안함 유가족들에게 사전에 얘기는 해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그는 자신들이 정부에 의해 투명인간 내지 그림자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더 힘들고 억울하다고 했다. “우리에게 직접 이해해달라고 진정으로 호소하면 속으로는 아니더라도 겉으로 어떻게 안 된다고 하겠나.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다 희생한 자식·남편·형제를 둔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은 아파도 그러라고 했겠지. 정부는 우리를 무시하는 이상으로 우리 생각을 묻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던 것 아닐까. 그래서 더 분하고 화가 난다.”

천안함 폭침 유가족들의 심경은 2월 24~25일 통일대교와 광화문광장, 청와대 앞길을 오가며 밝힌 입장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김영철 방남에 대한 천안함 46용사 유가족의 입장문’에서 “김영철을 천안함 폭침 주범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정부 관계자의 발표는 부모·형제·자식을 잃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저희 유가족과 생존 장병들에게 또다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절규했다. 유가족들은 또 “천안함 46용사의 희생을 묻어둔 채 아무 일 없다는 식의 대화는 진정성이 전혀 없는 가식”이라며 “북한이 천안함 폭침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한다면 저희 유가족들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입장문을 직접 작성했다는 이성우 회장은 전사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꼬인 매듭을 푸는 첫 단추로 ‘북한의 사과’를 꼽았다.

그래서 실낱 같은 희망일지언정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천안함 폭침을 추궁해주길 갈망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동향은 이게 영 허망한 기대만은 아니라는 예감을 주고 있다. 김영철 방남에 즈음해 미 국무부는 “김영철이 천안함 기념관을 방문하길 바란다”고 밝힘으로써 김영철과 천안함 폭침과의 연계성을 부각시켰다. 최근 평창 겨울올림픽 폐막식 참석차 방한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남자의 곁에서 불과 몇 인치 떨어져 있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은 단순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로 김영철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 사절로 방한한 마크 펜스 부통령 일행은 천안함기념관을 방문해 두 동강 난 천안함을 둘러봤다. 이처럼 미국의 주요 관계자들이 김영철과 천안함 폭침의 관련성에 집착하는 것으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의 뇌리 한구석에 이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통일연구원장을 역임한 김태우 건양대 교수는 “미국이 한국의 동맹국이므로 북·미 정상회담에서 천안함 폭침 문제를 제기해줄 이유는 충분하다”며 “그렇게 해주면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와 관련해 이성우 회장은 “그런데 참 우습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미국 대통령에게 한다는 게 우습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오는 4월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한다. 이 회장은 “미국은 천안함 폭침 사건에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데 정작 우리 정부는 있는 사실마저 가리고자 한다”며 정부의 석연찮은 태도를 비판했다. 물론 문 대통령에도 “김 위원장과 만난다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주시고 천안함 폭침에 대해 사과받을 것은 받고, 5·24 조치도 해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라고 말하면서도 큰 무게를 싣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안중에 우리는 없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월 24일 통일대교 남단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방한을 저지하기 위해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천안함 유가족들에게 상당부분 신뢰를 상실한 것 같았다. 김영철 방남부터 이후의 정부의 대응은 유가족의 바람과는 따로 놀았기 때문이다.

김영철 방남은 그 자체로는 큰 사건이지만 세심하지 못한 일 처리로 후유증을 남긴 케이스다. 여권 내 외교안보 정책 프로세스를 잘 아는 한 전문가는 “남북대화에서 다뤄진 의제를 협의할 적임자가 김영철이고, 남한 당국은 협상에 골몰한 나머지 김영철이 가져올 후폭풍은 제대로 가늠해보지 못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김영철 부위원장의 방남을 허용한 데 대해 “남북대화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3월 7일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의 청와대 오찬회동에 참석한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가 “김영철의 방남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문 대통령은 “이해해 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유가족 측은 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이런 전후 사정 얘기를 정치권이나 언론에 할 게 아니라 당사자 격인 자신들에게 왜 직접 말해주지 않는지 의아해 한다. 정부가 무슨 사유에서인지 천안함 폭침 사건 전사자와 그 유가족들을 홀대하고 심지어 배척한다는 느낌마저 든다며 소외감을 토로할 정도다.

천안함 폭침의 전사자 고(故) 손수민 중사의 아버지 손강열씨는 “지난 8년 동안 자식을 가슴에 묻고 조용히 살려고 했다”며 “요즘 정부가 하는 걸 보면 분노와 울분을 금할 수 없다”고 격한 어조로 항의했다. “천안함 폭침을 김영철이 안 했으면 누가 했겠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걸 꼭 밝히라고 하는 건 아니다. 백분 양보해 정부 말대로 남북대화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만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사전에 직접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안중에 우리는 없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전문위원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건 희생하는 사람을 국가가 기억한다는 기본 전제가 돼 있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우리가 천안함 폭침 희생 장병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너희와 대화하고 화해해도 이는 사라지지 않는 사실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대화 분위기 때문에 이 사건과 유가족이 무시된다면 여전히 적국인 북한과의 대화에서 모멘텀을 상실할 수 있다.”

실제로 유가족은 2월 24일 청와대 앞에서 가진 김영철 방남 반대 항의 집회 당시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자료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이 자료에서 유가족들은 “대통령께서는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확실한 입장 표명을 국민들 앞에서 밝혀 남남 갈등의 소지를 없애 달라고”고 요청했다. 또 “천안함 46용사의 명예를 지켜주고 부모, 자식, 형제를 가슴에 묻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유가족과 생존 장병들의 상처를 보듬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핵심 짚지 않고 변죽만 울리는 정부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5일 평창 겨울올림픽 폐회식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선전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기자가 취재에 나선 3월 중순까지도 청와대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천안함재단과 유가족은 밝혔다. 천안함재단은 3월 14일 “이와 관련해 청와대나 정부기관으로부터 연락 받은 사항이 없다”고 월간중앙에 밝혔다. 재단 측은 “유가족이 북한 김영철 방한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고, 청와대에 입장문을 전달한 건 사전에 천안함 46용사 유가족에게 아무런 설명이나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김영철 방남을) 발표했기 때문”이라며 “사전에 협조를 구하려는 노력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사후적으로도 청와대의 대처는 미흡하다는 게 유가족과 천안함재단의 시각이다.

이성우 유족회 회장도 “청와대로부터 꼭 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어떤 답변도 듣지 못했다”며 “얼마 전 국방장관이 국회에 나와 김영철 방남에 ‘군도 불쾌하다’고 말해준 데서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송영무 국방장관은 2월 28일 국회에서 김영철 부위원장의 방남 관련 입장을 묻는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의 질문에 “군 입장에서는 불쾌한 사안”이라고 한마디했다. 그러면서도 송 장관은 “(천안함 폭침 사건에) 김영철 부위원장이 관여된 당사자인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정부 입장을 되풀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은 “이 문제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이 완고해서 국방부 등 유관 기관에서도 김영철 방남 이후 이 문제에 대해 언급을 피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라고 정부의 처신에 거듭 분개했다.

물론 정부가 완전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3월 13일 송영무 국방장관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즈음해 천안함 유가족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또 피우진 보훈처장이 3월 넷째 주에 유가족과 천안함재단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했다고 청와대 측은 월간중앙에 설명했다. 청와대 측은 “국방장관이 오찬에서 유가족들 입장에 충분히 공감하고 감사를 표했다”며 “보훈처장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유가족들은 정부가 ‘핵심은 짚지 않고 변죽만 울린다’는 불만을 갖는다. 국방장관, 보훈처장과의 회동도 자신들이 청와대에 제출한 입장문에 대한 답변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닌듯하다. 송 장관과의 3월 13일 회동에 대해 이성우 회장은 “김영철 건도 있고 해서 정부 차원에서 위로하는 의미로 오찬에 초대한 것 같다”면서 “담소를 나누고 유가족을 다독이는 정도의 자리였지 청와대에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은 건 없다”고 주장했다.

유가족들은 천안함 폭침에 대한 문 대통령의 입장을 목말라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과 대선후보 시절 ‘천안함은 폭침’이며 ‘북한의 소행’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천안함 폭침과 북한 소행이라는 사실에 진보 진영 심지어 여권에서조차 의문을 제기한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천안함 사건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의문점이 너무 많은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천안함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재조사 청원’이 붙었고 6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최근 김영철 방남의 파장과 맞물려 유가족들은 현직 대통령의 입장을 직접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3월 13일 오찬에서 유가족들은 송 국방장관에게 문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송 장관은 즉답을 피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이 참석자는 “송 장관이 답을 줄 사안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며 “이런 유가족의 의지가 대통령에게 전해지지라는 기대에서 한 요청”이라고 귀띔했다.

유가족석 사라지고, 헌화 순서에서는 빠져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참석차 방한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방한 2월 9일 평택 2함대 사령부를 방문해 천안함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4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한 유가족의 입장 표명 요구가 곤혹스러운 사안일 수 있다. 북한이 자신의 소행임을 완강하게 부인했기에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양욱 수석전문위원은 강조한다. 그는 “그럴수록 정부가 전사자들을 챙기고 유가족의 마음을 다독여야 평화적 스탠스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면서 “이에 대한 의사 표명이 대화 분위기를 저해한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더 수구적이고 냉전적”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청와대에 따르면 유가족이 요구하듯 문 대통령이나 정부 차원의 공식 입장 정리 계획은 현재까지는 없다고 한다. 이에 천안함재단은 “국가 차원에서 많은 것을 고려해야겠지만 이 문제를 덮어둔 채 남북 교류를 추진한다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의 희생’은 무엇이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가다 보니 천안함 유가족들은 현 정부 들어 자신들을 보는 외부의 시선이 싸늘해진 걸 느낀다.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작은 변화에도 상처를 받는다.

지난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 현충일 추념식에서 유가족들은 정권교체의 세태를 실감했다고 한다. 지난해 6월 6일 언제나처럼 현충원에 조성된 천안함 전사자 묘역을 참배한 뒤 추념식장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유가족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이래 매년 준비되던 천안함 유가족 석이 사라진 것이다. 또 헌화 식순에서 유가족들에게는 헌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도 이때가 처음이라고 이성우 회장은 돌이켰다. 그는 “사람을 초청해 놓고 의자도 내주지 않는 것이나 학생 대표, 지역 대표도 다하는 헌화에서 우리를 빼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당혹스러웠던 당시를 회고했다.

또 국군의날(10월 1일) 행사장에서 천안함 유가족들은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듯한 충격에 직면했다. 지난해 건군 69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은 처음으로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열렸다. 당시 국군의날 기념식장으로 2함대사령부가 선정된 것은 천안함과 연평해전 등 2함대가 갖는 상징성이 반영됐다는 청와대 측의 설명에 뿌듯함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날 행사장을 찾은 천안함 유가족들은 언론 보도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날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 유가족 초청 정부 오찬에 자신들만 쏙 빠진 걸 뒤늦게 안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천안함재단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관심이 없어지고 국민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간다”며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은 유가족과 사지에서 돌아온 참전 장병들의 아픔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완곡하게 유감을 표했다.

유가족들은 이처럼 알게 모르게 옥죄어오는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이 낯설고 곤혹스럽기만 하다. 특히 천안함 폭침 당시엔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던 철부지들이 중고생이 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겪는 혼란은 천안함 폭침의 ‘2차 피해’에 비견된다. 최근 김영철 부위원장 방남을 둘러싼 논란, 청와대 홈페이지 천안함 재조사 요구 청원 등이 언론과 SNS를 타면서 천안함 폭침 전사자의 아이들도 정신적 갈등을 겪는다는 후문이다. 특히 여당인 민주당에서도 ‘천안함 판도라 상자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등의 진실 규명 요구 의견이 고개를 든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전사자의 자녀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천안함 폭침 당시 고(故)김경수 상사를 떠나 보낸 부인 윤미연씨의 폭침 당시 9세, 7세이던 남매는 중고생으로 성장했다. 윤씨는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고 자기 판단력을 가지는 아이들이 천안함 폭침 관련 인터넷 악플이나 주변의 구구한 억측에 겪는 심적인 고통을 엄청나다”면서 “이런 때일수록 중심을 잡아줘야 할 주체들이 손을 놓고 있다”고 정부를 원망했다. 천안함 폭침 진상 조사를 위한 민군 합동조사단의 공동단장을 지낸 박정이 예비역 육군대장은 “초계 임무를 수행하던 천안함이 북한 소형 잠수함정에서 발사된 어뢰에 폭침됐다는 건 다국적 합동 조사단의 발표이자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라고 사회 일각의 의문 제기를 일축했다. 나아가 “그래서 전사자 처리까지 한 사건의 유가족을 나라가 이렇게 홀대하다면 누가 애국심을 갖고 병역의무에 임하려 들겠나”며 “천안함 폭침을 정권의 이념 성향에 따라 마음대로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서해 수호의 날’ 행사 보이콧한다면…


▎2016년 3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1회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처럼 논쟁에 불을 지른 김영철 부위원장은 돌아갔지만 천안함 폭침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6년 정부는 2002년 제2 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도발에 맞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자 해마다 3월 넷째 주 금요일을 ‘서해 수호의 날’로 정했다. 2016년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1회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피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난해에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참석해 기념사를 했다.

올해 서해 수호의 날은 3월 23일에 해당한다. 천안함 유족들은 올해 누가 기념사를 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문 대통령이 참석할지, 이낙연 국무총리가 올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성우 유족회 회장은 “만약 문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서해 수호의 날 행사를 보이콧하고 천안함 전사자 묘역에서 조촐하게 자체 행사를 치르자는 얘기도 유족회에서 나왔다”고 전했다. 대통령 및 유가족의 참석 여부를 두고 논란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0·4 선언 10주년 기념식에서 “10·4 정상선언은 평화와 공동 번영이 새 지도를 그려가자는 남북의 공동성명”이라며 이 선언의 이행을 강조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이 선언의 핵심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공동어로구역 설치에 있다. 향후 남북정상회담이나 전후 준비 회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면 필연적으로 서해 군사경계선(해상 분계선), ‘북방한계(NLL)’도 함께 협상 테이블에 오르게 된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 시각이다.

만약 공동어로구역이 NLL 남쪽으로 더 많이 치우치는 일이라도 생기면 남남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김태우 건양대 교수는 “서해 NLL을 약화시키거나 허무는 양보 가능성이 보이면 서해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천안함 폭침 전사자의 유가족, 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들이 또다시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들 유가족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피를 흘렸는가’라는 심각한 회의와 자괴감에 빠져든다는 게 김 교수의 우려다.

국정원 특별활동비 상납 의혹 건으로 지금은 구속된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육군참모총장 시절 ‘참군인’의 표상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현역 시절 군인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건 나라가 정의(正義)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촛불민심을 받아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천안함 폭침 유가족들에게 나라가 ‘정의’롭다는 걸 보다 선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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