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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16)] 러시아의 남하 대비책 제시한 '조선책략' 

‘조선은 청·일·미와 함께해야 자강(自强) 도모할 수 있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러 대규모 병력 집결 소식에 크게 긴장하는 淸·日…조선 양반, 찬반으로 나뉘어 격심한 투쟁 벌이게 돼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은 1880년 일본에 다녀오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척사파의 공격 표적이 됐다. 2차 수신사 김홍집의 행차 모습.
강화도조약 제5조에 따라 조선정부는 1877년 음력 10월(이하 동일)까지 부산항 외 2개 항구를 추가 개항해야 했다. 장소는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도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였다. 얼핏 별 문제없을 것 같은 제5조는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유발했다. 지정 주체가 명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라는 내용이 해석에 따라 논쟁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조선정부는 개항장 지정 권한은 당연히 조선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76년 가을에 전라도 진도와 함경도 북청을 개항장으로 지정하고 일본정부에 통보했다. 조선정부는 가능한 수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개항장을 지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연한 권한에 따라 지정하고 통보했다 생각한 조선정부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안심하고 달리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정부는 강화도조약 제2조에 대해서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해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한다’는 제2조의 내용을 조선정부는 기왕의 통신사 파견과 같은 것으로 해석했다.

강화도조약 직후에 제1차 수신사 김기수를 파견했을 뿐 상주사절(常住使節) 파견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본정부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예컨대 제2조의 ‘수시로 사절을 파견’이라는 내용을 기왕의 통신사가 아니라 만국공법에 입각한 상주사절 즉 주재 공사 또는 주재 대사로 해석했다. 또한 제5조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를 지정하는 권한 역시 조선정부가 아니라 일본정부에 있다고 생각했다.

1877년 8월 메이지 천황은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초대 조선 주재 대리공사에 임명했다. 근거는 물론 강화도조약 제2조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강화도조약 제5조에 따라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2곳을 1877년 10월까지 확정하고자 했다. 따라서 초대 대리공사 하나부사의 첫 번째 임무는 한양에 일본 공사관을 개설하고 아울러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2곳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규슈(九州) 오카야마(岡山)현 출신인 하나부사는 어려서 난학(蘭學)을 공부했다. 26세 때 유학길에 올라 영국·프랑스·미국 등에서 공부하고 27세에 귀국했다. 이후 외무성에서 전문 외교관으로 성장한 그는 37세 젊은 나이에 초대 조선 주재 대리공사가 됐다.

내한(來韓)에 앞서 하나부사는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에게서 비밀훈령을 받았다. 그 내용은 ‘강화도조약 제5조에 따라 두 곳의 항구를 확정할 것’인데, 첫째는 ‘동쪽의 영흥’으로 정하라는 것과 함께 둘째는 ‘전라도 옥구 또는 목포 부근 아니면 경기도 강화에서 인천까지 조사하고 편리한 곳에’ 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비밀훈령으로 볼 때 일본 외무성은 조선정부에서 통보한 진도와 북청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고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근거로 내세운 것은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에 대한 지정 권한이 일본정부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원산·인천 개항하라” 압박 나선 하나부사


▎1. 김홍집은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려다 고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2. 초대 조선 주재 대리공사에 임명된 하나부사 요시모토. / 3.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
그런데 비밀훈령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하나부사의 내한 이전에 이미 동쪽의 영흥을 개항장으로 확정했다. 반면 서쪽의 개항장은 결정하지 않고 전라도 옥구 또는 목포 아니면 강화에서 인천지역을 조사하고 확정하는 것으로 했다.

이는 두 가지를 고려한 결과였다. 첫째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러시아는 두만강 하구에 해군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일본정부는 한반도 동해안 요충지에 개항장 겸 해군기지가 될 만한 항구를 물색해 영흥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둘째는 조선정부의 반발을 고려해 서해안 개항장은 협상 여지를 열어 놓았던 것이다.

비밀훈령에 따라 하나부사는 전라도 옥구와 목포 부근을 조사하고 강화도 쪽으로 왔다. 하지만 그곳은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채 1877년 10월 20일 한양에 들어왔다. 조선에서는 예조판서 홍우창을 반접관(伴接官)으로 삼아 상대하게 했다. 하나부사와 홍우창 사이에 공사관 개설과 개항장 장소가 협의됐지만 타협의 실마리는 전혀 없었다.

하나부사는 일단 개항장 한 곳은 영흥으로 결정했고, 나머지 한 곳은 추가 조사 후 확정하겠다고 했다. 반면 홍우창은 이미 조선정부에서 진도와 북청으로 결정하고 통보했으므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개항장 지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쟁점이었다. 아울러 하나부사는 강화도조약 제2조에 따라 한양에 주한 일본공사관을 개설하겠다고 했지만 홍우창은 그것 역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강화도조약 제2조는 과거의 통신사와 같은 임시사절을 지칭하는 것이지 상주사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처럼 강화도조약 제2조와 제5조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르다 보니 홍우창과 하나부사 사이에 타협은 불가능했다. 한 달여 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하나부사는 별 소득 없이 귀국했다.

1879년 3월 25일, 하나부사는 다시 도쿄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그의 임무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공사관 개설과 개항장 확정이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별 소득 없이 귀국했기에 이번에는 성사될 때까지 한양에 머물면서 관철시키라는 훈령을 받았다. 조선이 계속 거절할 경우 전쟁 위협도 불사하라는 의미였다.

윤3월 3일 부산에 입항한 하나부사는 동래부사에게 글을 보내 장차 전라도·충청도·경기도 연해를 조사하고 개항장을 결정한 후 한양으로 갈 예정이라고 알렸다. 윤3월 9일 부산을 출항한 하나부사는 예고한 대로 서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조사하면서 북상해 4월 15일에는 인천에 도착했다. 조사를 마친 하나부사는 인천이 개항장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조선에서는 이번에도 홍우창을 반접관으로 삼아 하나부사를 맞이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부사는 홍우창이 아니라 예조판서와 직접 담판하고자 했다. 하나부사는 미리 예조판서에게 편지를 보내 원산과 인천을 개항장으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4월 24일 한양에 들어온 하나부사는 예조판서를 상대로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예조판서는 이미 조선에서 북청과 진도를 지정했으므로 수용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하나부사는 훈령 받은 대로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기 전까지는 한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거절할 경우 무슨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식으로 위협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양반들은 원산과 인천 개항은 절대 안 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원산은 함흥과 가깝고 함흥에는 조선왕실의 왕릉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인천은 수도 한양에 너무 가깝다는 것이 이유였다.

고종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전쟁을 각오하고 북청과 진도를 주장할지 아니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해 인천과 원산을 개항할지 선택해야 했다. 둘 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국내 여론과 국가 자존심을 우선한다면 북청과 진도를 주장해 관철시켜야 했다. 그러려면 협상 결렬은 물론 전쟁까지도 각오해야 했지만 전쟁은 두려웠다.

그렇다고 전쟁이 무서워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국가 자존심이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결국 고종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원산 개항을 수용하고 그 대신 인천은 남양이나 강화도 교동으로 바꾸자는 절충안이 그것이었다. 하나부사는 일단 그 정도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판단했다. 자존심 강한 조선정부에서 기왕의 고집을 꺾고 원산을 개항하기로 결정한 것만도 큰 변화였기 때문이다.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다간 역풍을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하나부사는 본국과의 협의가 필요하다며 7월 17일 한양을 떠났다. 한양에 들어온 지 근 석 달 만이었다.

이홍장 “주도면밀한 개화정책 필요”

하나부사가 돌아가고 한 달쯤 지나 이홍장의 밀서가 이유원에게 전달됐다. 그 밀서에는 일본의 위협에 더해 러시아의 위협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밀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종은 이홍장의 권고대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켜야 함은 물론 서구열강과의 개항도 적극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의 주류세력인 양반들, 그중에서도 위정척사파는 개항에 결사반대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고종은 위정척사파로 불리는 보수 유림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아왔다. 위정척사파는 일본을 섬나라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했는데 고종은 그런 일본의 무력에 굴복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위정척사파의 눈에 고종은 섬나라 오랑캐에 나라의 자존심을 팔아버린 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이 섣불리 서구 열강에 개항한다면 위정척사파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주류는 여전히 위정척사파였다. 고종이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지지세력 없이 단독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개화정책이 성공하려면 고종은 지지세력을 강화해야 했고, 동시에 위정척사파를 설득해야 했다. 그러려면 시간도 필요하고, 은밀하면서도 주도면밀한 개화정책이 필요했다. 이홍장의 밀서는 그렇게 하라는 권고였다. 이홍장의 밀서는 밀서이기에 은밀히 전달됐고, 그에 대한 토론 역시 은밀히 이뤄졌다. 그래서 이홍장의 밀서를 보고 고종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밀서에 대한 답장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고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답장에는 “7월 9일에 보내준 편지를 8월 그믐쯤 받아 읽었으나, 그 후 또 이럭저럭 하다가 지금까지 회답을 올리지 못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유원이 답장을 보낸 시점은 10월이었다. 밀서를 받은 8월 말부터 계산하면 두 달 가까이 된 시점이었다. 그동안 고종이 이유원을 비롯한 측근들과 대응책을 논의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답장에서는 “서양 각국과 먼저 통상을 맺기만 하면 일본이 저절로 견제될 것이며, 일본이 견제되기만 하면 러시아가 틈을 엿보는 걱정도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당신 편지의 기본 취지입니다”라고 해 밀서의 핵심을 지적했다.

따라서 답장의 핵심 취지 역시 서양 각국과의 통상에 대한 고종의 생각이었다. 그것과 관련해 답장에는 “우리나라는 한쪽 모퉁이에 외따로 있으면서 옛 법을 지켜 문약(文弱)함에 편안히 거처하며 나라 안이나 스스로 다스렸지 외교를 할 겨를이 없습니다”는 표현이 있다. 당장은 서양 각국과 통상을 맺을 수 없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고종이 아주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우리나라가 오래오래 당신의 덕을 입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도를 받는 것이야말로 오직 믿고 의지하는 바입니다”는 내용은 서양과의 개항을 천천히 추진할 것이고, 그때 이홍장의 자문(諮問)하고 싶다는 고종의 뜻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홍장의 밀서를 받은 고종은 두 가지 대비책을 세웠다. 첫째는 이홍장이 천진에 설립한 무기 공장에 조선 기술자들을 파견해 무기 제조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고종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서양 각국과의 통상 조약보다 군사력 강화와 일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훨씬 더 긴급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첫째 대비책은 이홍장의 협조 여부에 달려 있었다. 고종은 이홍장에게 특사를 파견해 협조를 구했다. 이홍장은 물론 찬성이었다. 고종은 기술자들을 천진(天津)에 파견하는 문제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그때 고종은 이 문제를 주로 민영익과 논의했다. 민영익 뒤에는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이른바 개화파 인사들이 있었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문제도 은밀하게 추진됐다. 그 문제는 1880년 2월 9일에 결실을 맺었다. 그날 제2차 수신사 파견이 결정됐고, 뒤이어 3월 23일 김홍집이 수신사(修信使)에 임명됐다. 문과 출신인 김홍집은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 양반관료였다. 당시 39세의 김홍집은 하나부사와 동갑이었다. 6월 26일 부산항을 떠난 김홍집은 7월 6일 도쿄에 도착했다. 이후 한 달가량 도쿄에 체류하면서 메이지 천황을 예방했고 일본의 주요 정치인들은 물론 주일 청국공사 하여 장 그리고 참찬관 황준헌과도 접촉했다.

淸도 합종연횡 필요성 제시

김홍집이 도쿄 체류 중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들로부터도 가장 심각하게 들은 경고는 러시아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은 처음에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예컨대 7월 11일에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하나부사가 김홍집을 찾아와 국제정세를 언급했는데 그때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은 “과장된 저의가 아닌 것이 없었다”고 느꼈다.

당시 이노우에 등이 언급한 국제정세는 러시아의 위협이었다. 그때 일본 신문에는 러시아가 두만강 하구에 16척의 군함과 5만 가까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장차 남해와 서해를 돌아 중국 산동 반도에 상륙했다가 북경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런 소문은 일본인들을 크게 긴장시켰다. 만에 하나라도 산동반도로 향하는 러시아 함대가 도중에 방향을 틀어 일본 또는 조선을 공격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16척의 군함과 5만 가까운 병력은 일본으로서도 벅찼고 중국으로서도 벅찬 규모였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본토에는 100만 가까운 대군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 사이에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이노우에가 김홍집에게 역설할 국제정세 역시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조선과 청나라 그리고 일본의 동북아 3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에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은 공감을 느끼기보다는 공갈·협박으로 느꼈던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위협이 실감나지 않아서였다.

김홍집이 중국인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김홍집은 7월 16일 청국 공사관으로 가서 주일공사 하여장을 처음 만나 필담(筆談)을 나눴다. 그때 하여장은 “지난번 러시아 사람들이 귀국 두만강 일대에 군사 시설을 설치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듣건대 귀국 사람들 중 러시아로 간 사람들에 관한 소식을 선생께서 잘 아신다고 하니 알려주십시오”라고 해 러시아 문제에 관심을 표시했다.

김홍집은 “러시아와는 국경을 접하기는 했지만 통상하지 않아 그들의 사정을 잘 모르고, 함경도 주민들이 러시아 땅으로 들어갔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 역시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나중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런 대답으로 보면 당시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 당국자들은 러시아에 대하여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여장 역시 그렇게 짐작하고 러시아의 위협을 강하게 경고할 필요성을 느낀 듯하다. 하여장은 “요사이 각국에는 균세(均勢)의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한 나라가 강국과 이웃해 후환이 두렵다면 각국과 연결해 안전을 도모합니다. 이 또한 예전부터 부득이하게 대응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마치 춘추전국시대에 강국 진(秦)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나머지 국가가 합종연횡(合從連橫)했듯이, 조선도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해 서구 열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물론 이 같은 하야장의 언급은 이홍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김홍집 역시 그런 속뜻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김홍집은 러시아 위협보다는 국내의 위정척사파가 더 걱정이었다. 그래서 김홍집은 “본국은 옛 법도를 엄격하게 지키며 외국을 홍수나 맹수처럼 질시합니다. 또한 예전부터 서양의 이교(異敎)를 엄격하게 배척해왔습니다. 하지만 가르침이 이와 같으니 귀국 후 조정에 보고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반응으로 볼 때 김홍집은 아직 러시아의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더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한 하여장은 주제를 돌렸다.

5일 후에 김홍집은 다시 하여장을 찾아 필담을 나눴다. 그때 하여장은 “오늘날 시변(時變)이 이와 같으니 귀국은 서양각국에 개항하고 통상·왕래하며 각국과 더불어 대양을 왕래해야 합니다”라고 직설적으로 권고했다. 며칠 전에는 서양 각국과의 외교·통상을 완곡하게 권고했지만 김홍집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단도직입적으로 권고한 것이었다.

김홍집은 “오늘날 시변이 비록 이와 같지만 우리나라는 각국과 왕래할 수 없습니다. 국내 형세가 그렇습니다”라고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자 하여장은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미국과의 통상을 권고했는데,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친중·결일·연미 해야 러시아 막을 수 있다”


▎충남 청양군 칠갑산 도립공원에 조성된 최익현의 동상. 최익현은 구한말 위정척사의 대표적 인물이다.
“제 생각에는 러시아 문제가 아주 시급합니다. 세계 각국 중 오직 미국만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또한 국세가 부강합니다.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와 통상하면서 오히려 신의를 준수해 침략하고자 심하게 도모하지는 않습니다. (…) 만약 조선이 굳게 걸어 닫고 거절하다가, 훗날 다른 급변사태가 발생해 어쩔 수 없이 조약을 맺게 된다면 분명 큰 손해를 볼 것입니다. 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언급으로 볼 때 당시 하여장은 이홍장의 지시 아래 조선과 미국을 통상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이홍장이나 하여장은 청나라를 러시아 또는 일본으로부터 지켜줄 서구 열강은 오직 미국뿐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믿음은 아편전쟁 이래 오직 미국만이 청나라를 침공하지 않았다는 경험에 더해 류큐(琉球)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대결할 때 미국의 전 대통령 그랜트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청나라를 지지했다는 경험에서 생겨났다.

게다가 미국은 비록 백인들의 나라이기는 해도 영국에서 독립한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유럽 열강보다는 오히려 아시아 각국에 우호적일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런 믿음과 희망에서 이홍장과 하여장은 조선을 미국과 통상시키기만 하면 조선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예상했던 것이다. 이처럼 강경한 하여장의 발언에 김홍집은 더 이상 부정적이 반응을 보이기 어려웠다.

김홍집은 “이렇게 숨김없이 알려 주시니 폐국(弊國)의 사세상 갑자기 교섭할 수는 없다고 해도 어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말하길 한 나라와 조약을 잘 맺으면 다른 나라도 준수하므로 만국과 교류하는 것이 한 나라와 교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들으니 미국은 서양보다는 동양과 동반자가 되고자 한다는데 정말인지요?”라고 물었다.

이제 김홍집도 러시아의 위협을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이 정말 믿을 수 있는 나라인지 물은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하여 하여장은 “선생이 언급한 이토 히로부미의 발언은 사실입니다”라고 해 러시아의 위협 및 미국에 대한 신뢰에서는 청나라나 일본 공히 같은 생각임을 드러냈다.

하여장은 필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판단하고 참찬관 황준헌을 시켜 조선이 취해야 할 대외정책을 책으로 정리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조선책략]이라고 하는 책이 완성됐다.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을 핵심으로 하는 [조선책략]은 조선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의 국토는 진실로 아시아의 요충지에 위치해 반드시 다퉈야 할 요해처(要害處)가 되므로 조선이 위험해지면 중국과 일본의 형세도 날로 위급해집니다. 러시아가 영토를 공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아! 러시아는 승냥이와 같던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라와 같은 나라입니다. (…)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의 급선무를 계책할 때 러시아를 방어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러시아를 방어하는 계책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바로 친중국·결일본·연미국입니다.”

1880년 8월 4일 김홍집은 도쿄를 출항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8월 28일 한양에 도착한 김홍집은 고종에게 복명하면서 [조선책략]을 바쳤다. [조선책략]을 놓고 조선양반은 찬성과 반대로 갈려 격심한 투쟁을 벌이게 됐다. [조선책략]이 조선 양반사회에 격심한 충격을 던졌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홍집과 함께 귀국한 개화승 이동인 역시 조선사회에 격심한 충격을 던졌다.

유교문명과 서구문명 충돌의 시작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 조선이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의 봉원사 스님으로 있던 이동인은 강화도조약을 전후해 유대치를 매개로 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됐다. 이동인은 김옥균·박영효 등의 후원과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本願寺)의 부산 포교당 당주(堂主)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의 도움을 받아 교토의 히가시 혼간사(東本願寺)로 밀항, 유학했다. 그때가 1879년 9월이었다.

그 후 7개월에 걸쳐 일본어와 일본 불교를 공부한 이동인은 1800년 4월 동본원사에서 수계식을 마치고 도쿄의 아사노(淺野) 별원(別院)으로 갔는데 그곳은 조선통신사가 머물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동인은 승려로 활약하며 일본의 정객은 물론 서양 각국의 외교관과도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런데 마침 그 즈음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도쿄에 와서 아사노 별원(別院)에서 묵게 됐다.

이동인은 하나부사에게 “저는 국은에 보답하고 불은(佛恩)에 보답하고자 결심해 나라를 위해 어떠한 일이라도 감내하고자 합니다. 원하건대 김 수신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김홍집을 만난 이동인은 일본 옷을 입고 조선어로 말했다. 수상쩍게 여긴 김홍집은 이동인의 정체를 자세하게 물었다. 이동인은 작년에 자신이 밀항한 일, 공부한 일, 사람들을 만난 일 등을 자세히 설명한 후 자신은 다른 뜻은 없고 단지 조선을 문명개화로 이끌고 싶다고 열성을 다해 말했다.

김홍집은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오호! 이런 기인남아(奇人男兒)가 있어서 국은에 보답하는구나” 하며 감탄했다. 아마도 김홍집은 불쌍한 조선을 위해 부처님이 예비한 인물이 바로 이동인이라 생각했을 듯하다. 이동인이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한 김홍집은 함께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이동인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김홍집을 뒤이어 귀국하게 됐다. 한양으로 간 이동인은 김홍집의 추천을 받아 민영익의 사랑방에 기거했으며 고종과도 면담했다. 민영익과 고종 역시 이동인을 깊이 신뢰하게 됐다. 개화에 미온적이던 고종은 김홍집의 보고와 이동인의 설명을 듣고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고종은 [조선책략]과 이동인을 이용해 ‘연미국’을 추진하고자 했다. 반면 위정척사파는 미국의 기독교 문명과 이동인의 불교사상이 조선 유교문명을 파탄시킬 것이라 주장하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바야흐로 고종의 ‘연미국’을 계기로 유교문명과 서구문명이 조선 땅에서 격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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