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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 (25)]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 장수 모하당(慕夏堂) 김충선 

요순(堯舜) 삼대의 유풍을 사모하다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침략군으로 한반도 건너와 ‘예의의 나라’에서 수신제가한 선비...임진왜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에 공 세워 ‘삼란공신(三亂功臣)’으로 불려

▎녹동서원의 중심 강당 이름은 ‘숭의당(崇義堂)’이다. 김상보 종친회장이 서원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지구촌의 겨울 스포츠 축제 평창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지 30년 만이었다. 올림픽은 평화를 염원한다. 올림픽이 열리면서 북한 무력도발로 빚어진 한반도의 전운(戰雲)은 옅어졌다. 2년 뒤 2020년에는 이웃 일본 도쿄에서 여름올림픽이 열린다. 다시 2년 뒤 2022년에는 중국에서 베이징 겨울올림픽이 예정돼 있다. 평창을 시작으로 한·일·중이 축제를 이어간다. 동북아의 릴레이 올림픽을 통해 평화는 더 확대될 수 있을까.

한·중·일 3국은 역사적으로 애증(愛憎)의 관계다. 평창올림픽에서도 한·일 두 나라는 예민했다. 개회식에 북한의 김영남·김여정이 참석하면서 아베 일본 총리는 도착 시간, 자리 배치 등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위안부와 독도 문제 등으로 한·일 두 나라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한·일은 임진왜란으로 미움의 골이 깊어졌다. 전쟁은 한반도를 초토화시켰다. 그래도 다행히 절망만 있지는 않았다. 처절한 전쟁 중에도 평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한 왜장(倭將)의 양심선언이다. 그는 명분 없는 조선 침략을 거부하고 조선 백성이 됐다. 그의 전향은 앙숙인 두 나라를 우호로 이어가는 고리가 되고 있다.

평창올림픽을 보면서 침략군으로 건너와 선비로 수신제가(修身齊家)한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 1571∼1642) 선생을 떠올렸다.

자손을 대대로 예의의 백성으로 살게 함이라


▎달성 한일우호관의 내부 모습. 모하당은 ‘가훈’에 “내가 험난한 시대를 타고나 충성과 효도도 못하고 청렴과 검소도 못해 항상 부끄러웠다”라고 적었다.
올림픽이 한창이던 2월 21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1리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찾았다. 서원 앞을 지나는 도로는 확장 중이고 주변에는 모텔·음식점 등이 많이 보였다. 서원 옆 ‘달성한일우호관’에서 ‘사성(賜姓)김해김씨종회’ 김상보(70) 종친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시조 모하당의 12세손이다. ‘김해김씨’ 앞에 붙은 ‘사성’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성씨라는 뜻이다.

종친회장은 집성촌 우록리(友鹿里)의 내력을 먼저 소개했다. “시조께서 이 땅에 뿌리내리려고 많은 곳을 찾아다녔답니다. 지형을 보고 무릎을 쳤어요. 동네 입구만 막으면 산으로 둘러싸여 대군도 들어올 수 없는 안전한 터였으니…. 인근 팔조령은 대구를 관통하는 신천(新川)이 발원하고 동네는 산간이지만 자급자족할 만한 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록리 일대에는 모하당 후손이 60호 안팎이나 된다.

김충선이 남긴 글 등을 모은 [모하당문집]에는 우록리에 정착한 배경을 스스로 밝힌 ‘녹촌지(鹿村誌)’가 있다. “내가 이 나라에 귀화한 것은 잘되기를 구함도 아니요 명예를 취함도 아니다. 처음부터 두 가지 계획이 있었으니 하나는 요순(堯舜) 삼대(하·은·주)의 유풍을 사모하여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함이요, 또 하나는 자손을 예의의 나라에 남겨 대대로 예의의 사람을 만들고자 함이라…. 내가 여기 달성 남쪽 우록에 터전을 정했으니 이곳은 반곡(盤谷, 당나라 문신 이원이 살던 곳) 아닌 반곡 같은 곳이요, 율리(栗里, 진나라 도연명이 살던 곳) 아닌 율리 같은 마을이다…. 동리 이름 우록은 내가 취하는 바가 있으니, 산중에 은거하는 사람은 대개 사슴을 벗하며 한가로움을 탐하는 것이다. 내 평생 산중에 숨어살고자 하는 뜻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한 칸의 띠집을 세워 자손에게 남기노니, 이곳이 곧 내가 원하는 땅이다.”


적어도 이 글을 보면 임진왜란 선봉장을 지낸 장수의 기상보다는 만년에 낙향한 안온한 선비의 풍모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해도 김충선은 일본과 조선에서 생애 대부분을 무인(武人)으로 보냈다. 다른 게 있었다면 일찍이 학식이 깊은 장수였다. 조선에서 새 이름 김충선을 얻을 때까지 그는 ‘사야가(沙也可)’로 통했다. 전쟁 중 투항한 장수인 만큼 이 이름은 본명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이름이 드러나면 일본에 남은 가족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13일. 22세 사야가는 일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우선봉장(右先鋒將)으로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부산에 상륙했다. 조선으로 출병한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우선봉장이 영을 내린다. “남의 나라에 들어와 토지를 빼앗고 재물을 탐내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은 병가의 가장 금하는 일이다. 너희들은 마음을 단속해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라.”

[모하당문집] 연보에는 전쟁의 배경과 사야가의 당시 심경이 적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군사를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갈테니 조선이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조선을 먼저 함락시키고 중원(中原)을 치려는 속셈이었다. 사야가는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평생 중하(中夏, 중국)를 사모해 와 한번가서 보려고 명령을 좇는 양 출병했다. 직접 와서 보니 풍토와 문물이 과연 듣던 대로였다. 귀화를 결심한다.

4월 15일. 상륙 사흘째 사야가는 방(榜)을 붙여 싸울 뜻이 없음을 밝힌다. 그리고는 조선 백성에게 안심하라는 ‘효유서(曉諭書)’를 쓴다. “아아, 이 나라 백성은 이 글을 보고 안심하고 일할 것이며 절대 동요하지 말라. 지금 나는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이고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 있었으니, 나는 너희 나라를 치지 않을 것과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전쟁 중 조총과 화포, 화약 만드는 법 전수


▎녹동서원 앞에 서 있는 모하당 신도비(神道碑). 앞면에 ‘정란공신증정헌대부’라 새겨져 있다.
4월 20일. 사야가는 마침내 경상 병마절도사 박진 장군에게 글을 보내 강화(講和)를 청한다. 투항이다. 자신의 철포(鐵砲, 조총)부대 수백 명을 이끌고서다. 그때부터 사야가는 말 머리를 돌려 일본을 치는 데 앞장선다. 울산 사람 서인충·서몽호 등과 힘을 합쳐 일차로 큰 전공을 세웠다. 선조 임금이 보고를 받고 사야가를 불러들인다. 임금은 어전에서 직접 무예를 지켜본 뒤 그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내리고 남쪽 방면 방어를 맡겼다. 사야가는 무기가 정밀하고 용맹이 뛰어나 동래·양산·기장 등지에서 한 달 동안 78회나 승전한다.

11월. 사야가는 경상도 병영에 글을 올려 “우리나라 무기가 불완전하니 각 도, 각 진에 조총(鳥銃)과 화약 만들기를 가르치자”고 주장한다. [모하당문집]의 ‘통제사 이순신 장군에 답하는 편지’에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벌써 각 진에 가르치는 중”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조정은 훈국도감(訓局都監)을 설치해 조총을 만들고 화약 다루기에 힘을 쏟았다. 조선군도 마침내 조총으로 무장하게 된 것이다. 개전 초기 왜군의 일방적인 조총 위력을 반감시키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한일우호관에는 우록리 도로확장 공사 중 발굴된 조총이 녹슨 채 진열돼 있었다.

1593년 4월 경주 이견대 전투에서 왜군 300여 명을 참살하는 공을 세운다. 왜군에 함락된 18개 성(城)도 되찾았다. 도원수 권율 등이 포상 장계를 올린다. 선조 임금은 마침내 사야가에게 ‘김해 김씨’에 ‘충선(忠善)’이라는 성명을 하사한다.

김충선은 귀화 이후 생애의 절반을 조선군으로 전장에서 맹위를 떨쳤다. 특히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워 ‘삼란공신(三亂功臣)’으로 불린다. 1613년 광해군은 김충선이 북방 방어를 자청해 10년을 머무르며 여진의 침노를 막은 공으로 정2품 정헌(正憲) 벼슬을 내린다. 교지(敎旨)에는 ‘자원잉방 기심가가(自願仍防 其心可嘉: 자원하여 계속 변경을 지켰으니 그 마음 가상하다)’라는 어필을 써 주었다.

모하당의 충절 이야기는 끝이 없다. 물론 문집을 바탕으로 한 이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모하당문집]이 처음 나온 것은 1798년(정조22) 모하당의 6세손 김한조가 김응서 장군 고택에 보관된 기록을 참고해 간행했다. 모하당이 세상을 떠난 지 150년이 지나서다. 모하당 관련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하고 한일관계사학회장을 지낸 전북대 한문종(60) 교수는 “문집이 후대에 쓰인 만큼 전과(戰果) 등은 과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모하당이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었다는 것은 일본 쪽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그쯤에서 김재성(62) 문중 이사와 함께 녹동서원 뒤 삼정산(三頂山)으로 모하당 묘소를 찾았다. 8부 능선쯤에 봉분 4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눈길을 끈 건 석상이다. 묘소 앞 왼쪽에는 홀을 든 문인석이, 오른쪽에는 칼을 잡고 갑옷을 입은 무인석이 세워져 있었다. 모하당이 문무를 겸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가을 묘제 때는 후손 200여 명이 모입니다. 주변을 넓히는 등 지난해 묘역을 새로 단장했어요. 이곳에 설치한 폐쇄회로TV를 되돌리면 사슴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곳에선 모하당이 터 잡은 우록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가훈 남기고 풍습 교화하는 향약 만들어


▎녹동서원 뒷산인 삼정산에 자리한 모하당 묘소. 후손들이 지난해 묘역을 새로 단장했다.
1613년 43세 김충선은 우록리로 돌아왔다. 30세 무렵 진주 목사(牧使) 장춘점의 딸 인동 장씨와 혼인하고 달성에 정착한지 10년이 지나서다. 1615년 맏아들 경원을 시작으로 5남 1녀를 얻는다. 1624년 이번에는 이괄이 군사를 일으켜 한양을 침범하는 역모가 일어난다. 인조 임금은 공주로 피란하고 이괄은 용케 잡혀 죽었으나 이괄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가 남으로 내려왔다. 54세 김충선이 나서 왜장 출신 서아지를 잡았다. 인조는 기뻐 서아지의 땅을 하사했으나 모하당은 청도 사패지(賜牌地)를 조정에 반납해 군대가 둔전(屯田)으로 쓰게 했다.

1628년 58세 김충선은 수신제가에 진력한다. 먼저 자손에게 가훈(家訓)을 남긴다. “힘써 농사짓고 부지런히 글 읽으며, 부귀를 부러워하지 말고 검소함을 숭상하라…. 한마디 말이라도 불충·불효를 입 밖에 내지 말라….”

모하당은 이어 자손과 동민이 지켜야 할 ‘향약’을 만들었다. “하나. 부모에게 효도한 뒤에야 온갖 행실이 바르게 되는 것이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부모에게 효도함을 근본으로 할 것이다. 하나. 관(官)에 대한 납품이나 세금은 첫 기일을 넘기지 말 것이다. 하나. 이웃이 병에 걸리거나 특수한 사정으로 실농(失農)할 경우 모두 힘을 합해 모내기나 추수시기를 놓치지 않게 할 것이다….” 우록리의 풍습을 교화하는 향약은 모두 15개 항이다. [모하당문집]을 국역한 이수락은 “선유(先儒)들 문집에서 여씨향약·율곡향약을 찬양한 글은 많이 보았으나 향약이 실린 문집은 정작 처음”이라고 놀라워했다.


▎사당인 녹동사(鹿洞祠)에 모셔진 모하당의 위패와 초상화. 학이 그려진 문관(文官) 차림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눌러앉은 왜군은 전체 16만 중 1만여 명. 이들 중 상당수가 김충선에 의지해 우록리 주변에 살았다고 한다, 모하당은 귀화한 왜인의 정착을 도운 것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났다. 우록리에서 난리 소식을 들은 모하당은 부름이 있기 전 66세 노구를 이끌고 광주(廣州) 쌍령에서 호병(胡兵)을 무찔렀다. 그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호병이 물러가자 우록리로 돌아왔다. 모하당은 이후 자손들에 글을 가르치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며 산중에서 은거하다 72세로 삶을 마감한다.

종친회장은 녹동서원으로 안내했다. 서원 뒤편 모하당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녹동사(鹿洞祠)에 들러 먼저 참배했다. 종친회장은 “모하당이 ‘향불천위(鄕不遷位, 대구지역 유림이 기리는 위패)’”라며 “대구향교가 향사를 지내오다 수년 전 사당을 수리하면서 문중이 넘겨받았다”고 설명했다. 녹동서원은 유림의 공의를 거쳐 1794년(정조18) 준공됐다. [모하당문집]에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대구지역과 도내 유림이 잇따라 관찰사에 현창을 청하는 글이 전한다.

녹동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향양문(向陽門)’이다. 모하당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일본을 향해 세워져 있다. 그 오른쪽에 정부와 대구광역시·달성군이 50억원을 지원해 2012년 ‘달성한일우호관’이 들어섰다. 임진왜란의 발발 배경과 모하당 관련 자료, 한일 교류사 등이 전시돼 있다. 한복과 기모노를 입을 수 있는 체험 공간도 마련돼 있다.

전쟁 배반한 역적에서 평화주의자로


▎녹동서원에 보관 중인 [모하당문집] 목판. 1798년 모하당의 6세손인 김한조가 처음 간행했다.
한일우호관은 조성 이후 일본인이 많이 찾았다. 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왜장의 존재를 일본에 처음 알렸다. 종친회장은 “일본에서 모하당은 전쟁을 배반한 역적 중 역적이지만 지금은 평화주의자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일본 정계의 실력자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의원 등이 그런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그러면서 이곳은 한국을 찾는 한일의원연맹 소속 의원을 비롯해 일본대사관 부산총영사 등이 부임하면 들르는 코스가 됐다. 관광 등 일본 방문객도 늘어나 한해 2000명 안팎이 우록리를 들른다.

일본인은 이번 평창올림픽 기간에는 녹동서원을 얼마나 찾았을까? 우호관 직원은 “위안부에다 북한 핵 등 정치적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요즘은 이곳을 찾는 일본인이 끊기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일본인은 지난해 500명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 그동안 꾸준히 진행돼 온 한·일 청소년 교류도 빨간불이 켜졌다. 취재한 날도 우호관에는 일본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일본의 지역교육위원회가 중학생 교류 중단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임진왜란은 올해로 종전 7주갑(420년)을 맞았다. 평창에서 평화의 제전이 열린 것은 그래서 더 뜻이 깊다. 2년 뒤엔 다시 일본에서 여름올림픽이 열린다. 가깝고도 먼 이웃 한·일은 지금 독도·위안부 문제 등으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냉랭하기까지 하다. 모하당은 한·일 우호의 상징이다. 장수로서의 배신과 따르고 싶었던 군자(君子)의 길. 426년 전 이 땅에 상륙한 모하당이 전쟁 선봉장 대신 조선의 선비가 되려 한 고뇌를 돌아본 까닭이다.

[박스기사] 궁금한 김충선의 뿌리 - 일본에선 철포 전문가, 쓰시마 출신 심지어 조선이 만든 가공인물 주장도

사야가(沙也可) 김충선(金忠善)의 실체는 지금도 다 드러나지 않았다. 조선에 귀화하기 전 그는 일본에서 어떤 인물이었을까. 일본에는 남은 기록이 없다. 그래서 주장이 혼재한다.

일본의 사야가 연구자 일부는 센고쿠(戰國)시대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사이카’라 불린 철포부대의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를 지목한다. [모하당문집]에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 뒤 조총과 화약 제조 기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에 근거해서다.

이에 대해 마루야마(丸山雍成)는 “스즈키 마고이치는 반(反)히데요시 세력이기 때문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이 될 수 없다”며 “사야가는 하라다 노부타네(原田信種)”라고 주장한다. 또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는 사야가는 우메키다의 반란(梅北一揆)에 연루돼 처형된 아소 코레미츠(阿蘇惟光)의 일족으로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으로 참전한 뒤 조선에 귀화한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岡本越後守)로 추정한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쓰시마(對馬島)인 설을 제기했다. 또 일제 시기에는 아예 “김충선은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란 말도 나왔다.

시바 료타로는 소설 [한나라기행]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왜군이 있다는 사실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후 [귀화한 침략병] [바다의 가야금] 등 사야가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 일본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또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아 1992년 일본 NHK는 사야가를 소재로 다큐멘터리 ‘조선 출병 400년, 히데요시에 반역한 일본 무장’을 제작, 방송했다.

일본 가족관계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다만 [사성김해김씨세보]에는 사야가가 1571년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귀화하기 전 일본에 부인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김충선이 조선에 정착한 뒤 후손은 현재 18대까지 내려가 대구 우록리와 전국에 75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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