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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 선물의 文化史(15)] 도검(刀劍), 거짓과 청렴을 가려내다 

문신의 나라 자처했던 조선에선 보기 드문 선물… 지식인들의 호기로운 마음 담는 소재로도 활용돼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숭례문 파수의식 행사에서 국방부 전통 의장대가 조선검으로 대나무를 자르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1457년(세조3) 명나라에서 진감(陳鑑)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3월 북경을 출발한 진감 일행은 6월 3일 한양에서 도착해 모화관에서 공식적인 일정을 시작한다.

이들은 한양에 머무는 동안 임금을 비롯한 조선의 명사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주고받기도 하고, 한강에 배를 띄우는 등 풍류도 즐겼다. 사신 일행은 6월 15일 한양을 떠나 북경으로 돌아간다. 그들과 관련된 시문을 모아서 따로 [황화집(皇華集)]을 편찬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조선의 명사들과 교유하는 동안 여러 일화가 만들어진다.

진감 일행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늘 예겸(倪謙, 1415~1479) 일행과 비교되곤 했다. 예겸은 인품으로 보나 문장으로 보나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서 주변 사람들을 감탄시키기도 했다. 또 진감에 불과 7년 앞선 1450년 사신으로 왔었으므로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여전히 조정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진감을 사신단의 책임자인 정사(正使)로 삼아 구성된 명나라 일행으로 고윤(高閏)이 따라왔다. 고윤은 사신단에서 둘째로 높은 위치를 가진 부사(副使)였다. 고윤에 관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산견(散見)되지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기록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들어 있는 일화였다.

서거정은 그들이 사신으로 왔을 때 접대하면서 시간을 같이 보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썼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것이라 해도 신뢰할만한 기록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진감은 예겸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행실이나 문장은 그런대로 볼 만했기 때문에 약간의 부정적인 기록은 있어도 전반적인 평가는 괜찮았다. 그런데 고윤의 경우는 달랐던 모양이다. 고윤은 문장도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처신도 그리 적절치 못했다. 뇌물에 가까운 선물을 은근히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물건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서 자랑했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처음 사신단 일행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조선에서는 선위사(宣慰使)를 파견해서 제철에 맞는 옷을 제공했지만, 고윤은 자신의 청렴함을 드러내기 위해 옷을 받지 않았다. 그냥 슬며시 거절하고 말았다면 고윤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터인데, 그는 즉시 ‘보내온 옷을 받지 않았다’(送衣不受詩, 송의불수시)를 지었다. 그런데 내용도 거만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기생을 거절한 시를 쓰기도 하고, 안장을 얹은 말을 거절한 시도 써서 자신이 청렴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이 조선을 떠날 때 사단이 났다. 조선에 머물던 사신단이 떠날 때 그동안 주고받은 시문을 모아서 문집을 편찬해서 선물로 준다. [황화집]이 그런 책이다. 고윤은 자신의 글이 수록된 책을 기분 좋게 보다가 ‘사검시(謝劍詩)’를 보더니 안색을 바꿨다.

다른 선물은 모두 거절했던 고윤이 세조가 전별 선물로 검(劍)을 줬는데 그것에 감사하는 내용의 시를 지어서 바쳤던 것이다. 그 작품이 [황화집]에 수록됐으니, 그동안 자신이 모든 선물을 거절하면서 청렴결백한 척했던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검을 선물로 받고 지어 올린 시 한 편 때문에 고윤의 거짓 청렴이 탄로 났으니, 고윤으로서는 난감해졌고 그의 표정을 보는 조선의 관료들은 오래 묵었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고윤은 조선에서 주는 선물이 적다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고 나아가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표리부동한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내 권위를 그대에게 위임하노라”


▎온양민속박물관 주최 ‘한국의 도검전’에 전시된 검.
도검(刀劍) 선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선호됐던 선물도 아니었다. 문신의 나라를 자처하던 조선이 도검을 선물로 증정한다는 것은 명분상 어려웠을 것이다. 도검 선물을 해야 할 때가 있으면 당연히 했겠지만, 그것을 내세워서 자랑으로 삼지는 않았다.

임금 입장에서도 신하들에게 도검을 선물할 때가 많았다. 특히 변방으로 떠나거나 전쟁터로 가는 장수에게 도검을 줌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위임한다는 상징성을 드러내는 일은 늘 있었다.

도검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했지만, 도와 검은 엄연히 다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도는 한쪽에만 칼날이 있는 것이고 검은 양쪽에 모두 칼날이 있는 것이다. 도는 베는 것을 위주로 하는 병기이고 검은 찌르기를 위주로 하는 병기다. 당연히 그 쓰임새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조선의 기록에서는 도와 검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도검으로 지칭하기로 한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호신용으로 사용했던 은장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 사회에서 도검은 대장부로서의 기개를 드러내는 중요한 사물이었다. 무력을 상징하는 사물로서의 도검은 전쟁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무기였지만 신분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선사시대는 물론 청동기시대에도 도검류의 무기는 신분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물이었다.

고대사회로 갈수록 도검은 제왕의 상징처럼 인식됐다. 당시의 기술로는 질 좋은 쇠를 얻는 것도 어려웠고 제련을 하는 기술도 덜어져서 도검을 제작하기가 어려웠으니 그만큼 희소성도 높았다. 도검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큰 기술이었고 칼날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큰 기술이었으며, 칼의 무게중심을 잘 맞춰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어려운 기술이었다.

도검의 실질적인 용도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자격(刺擊) 용이었지만, 그 희소성 때문에 보물로 인식되면서 신분을 상징하는 사물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선사시대 고분군에서 도검류가 발굴되는 것도 신분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사물이어서 시신과 함께 묻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문신의 나라였으므로 도검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문신의 나라였다 해도 도검이 필요한 상황에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그러한 가능성 때문에 늘 도검을 잘 정비해야 하는 것은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비책이다. 사회적으로 도검 선물이 행해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도검이 현실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면 그런 기술이 꾸준히 전승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도검 제작기술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면 썩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 때문일까?

한국무예사의 전통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칼보다는 활이나 창을 중심으로 하는 전법을 선호했다. 최형국 선생이나 민승기 선생의 연구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활은 전쟁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궁시(弓矢)의 제작도 꾸준히 이뤄져서 조총과 같은 무기가 발전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활이 주력 무기였다.

병사들이 보통 활 1~2개, 화살 20여 발을 휴대하고 갑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에 긴 칼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우리나라 도검의 길이가 짧아진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당하면서 도검의 길이가 짧은 것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후 조총과 활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조선 군대의 무기 편성상 긴 칼을 주된 무기로 삼기에는 점점 어려워졌다.

삿된 기운 범접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데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인검.
일본은 전통적으로 사무라이를 위한 도검을 꾸준히 공급해야 할 사회적 수요가 있었으므로 제작기술이 발전하는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우리나라 관료가 통신사의 사절로 일본에 가면 그들이 귀한 선물로 선택하는 물건이 바로 도검이었다.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은 일본을 다녀오다가 잠시 머물게 된 대마도에서 관백(關伯)이 선물로 보검을 주고받았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이수광(李光, 1563~1628)은 박인전(朴仁, 1594~?)이 의원(醫員) 신분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선물로 받은 일본도를 선물로 받아서 가지고 있다가 김정지(金鼎之)에게 다시 선물로 주면서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이 시에서 이수광은 이미 늙어버린 자신이 쓸 데가 없으므로 청운의 꿈을 품고 있는 김정지가 소장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이는 도검이 고귀한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조선을 침략하는 외적을 처단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큰 공적을 세워서 삼공(三公)의 지위까지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도검을 선물한 것이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림파 유학자인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명나라에 갔을 때 순천부(順天府, 지금의 중국 북경 창평 일대)의 학사(學士)인 주전(周銓)을 만난다. 그의 사람됨이 상냥하고 좋으며 학문이 넓고 시를 잘 지었으므로, 김일손은 패도(佩刀)를 풀어서 선물로 건네고 책 몇 권을 답례로 받는다[‘感舊遊賦後序(감구유부후서)’, [탁영집(濯纓集)] 권2].

또한 1828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박사호(朴思浩)는 함께 갔던 박재굉(朴載宏)이 중국의 문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의기투합한 나머지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서 선물로 준 사실을 [응구만록(應求漫錄)]에 남겼다. 조선의 선비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도검을 멀리했던 것은 아니다. 먼 길을 가면 호신용으로 혹은 장식용으로 도검을 패용(佩用)했고, 그것을 풀어서 선물로 주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도검이라고 해서 반드시 호신용이나 자격용으로 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물을 베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추가됐다.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효험이 있어서 가장 선호됐던 것은 바로 사인검(四寅劍)이다. 육십갑자로 연월일시(年月日時)를 헤아리던 시절,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들어진 검을 사인검이라고 부른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장유(張維)는 신익성(申翊聖)에게 사인도를 선물로 받고 지은 시 ‘사인도가(四寅刀歌)’의 주석에서 사인도가 잡귀를 물리친다고 하는 속설을 소개하고 있다.

사인검은 만들 수 있는 때가 있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다. 재료와 장인이 있어도 시간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미리 계획해서 만들어야만 했다. 지금도 사인검이 잡귀를 물리치는 신묘한 힘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검에 비해서 예기(銳氣)도 뛰어나서 최고의 검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전부터 계획된 제작에서 오는 이점 때문이었다.

사인검은 그 성격상 선물이나 하사품으로 활용하기에 적절했다. 특히 왕의 하사품 중에서 사인검이 더러 있는데, 연산군은 한 번에 200자루씩 사인검을 바치도록 하기도 했고, 시정 백성들을 잡아놓고 사인검을 바치도록 독촉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학문적 능력의 상징으로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조선시대 국왕의 수문장 임명식 재현 행사에서 시연(試演)된 검무(劍舞).
실록에 기록이 정확히 남지 않아서 왕실이 어느 정도 사인검을 소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산군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하사품으로 상당량이 소용됐을 것은 분명하다. 지나친 소비는 늘 폐단을 낳는 법. 중종 때가 되면 사인검을 공물로 바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철폐 논의가 시작된다. 사인검을 만들기 위해 산역(山役)을 1개월씩이나 하는 것부터 백성들에게 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인검이 해마다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년(寅年)에만 만드는 것이고 또한 조종(祖宗) 때부터 만들어 온 전통이 있으니 폐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반론도 있었다. 흉년에 민폐를 끼치는 것을 삼가는 차원에서 논의될 뿐 끝내 철폐시키지 못한 것을 보면, 사인검은 궁중의 하사품으로 널리 사용되었을 것이다.

새파랗게 잘 벼린 칼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낀다. 그 서늘함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것만 같은 칼날에서 온다. 그 이미지를 이용해 나쁜 기운을 막아내자는 것이 사인검이나 칠성검을 집 안에 모셔놓는 이유다.

도검류가 문학작품 속으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상징을 획득한다. 바로 자신의 능력 혹은 학문을 의미하는 시적 상관물이 된다. 그것은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의 작품 ‘검객(劍客)’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작품에서, “10년 동안 검 하나를 갈았으되, 일찍이 시험해 보질 못했네. 오늘 그대에게 보이나니, 누구에게 불평한 일이 있는가?”(十年磨一劍霜刃未曾試 今日把示君 誰有不平事, 십년마일검 상인미증시 금일파시군 수유불평사) 하고 노래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검에 비유해 세상에 뜻을 펼치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이후 검의 이미지가 학문적 능력을 드러내는 상징을 획득하면서 조선 지식인들의 호기로운 마음을 담는 소재가 된다. 가슴속의 검을 선물로 준다는 것은 상대방과 의기투합해 자신의 적공(積功)을 함께 풀어보자는 권유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마음껏 뜻을 펼치고 싶을 때가 있다. 기회를 얻으면 언제든지 뜻을 펼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적공을 하면서 살아가는가. 그렇게 가슴속에 시퍼런 칼날 가진 검을 하나 품고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이 검을 쥐고 뛰어난 검객으로서 정의와 공평함을 위해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세상의 정의와 공평을 위해 살아가려면 늘 유혹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돈과 이성, 높은 관직과 명예 등 우리를 유혹하는 많은 것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내 마음에 그러한 욕망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순간 그들은 순식간에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점령하고 괴물로 혹은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욕망의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칼을 늘 시퍼렇게 갈아놓는 것이다. 마치 적의 침략에 맞서서 과감히 찔러 나가는 검처럼, 우리를 침범하는 삿된 기운을 막고 없애는 검처럼, 우리의 공부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과감하게 거부하는 하나의 검이다. 마음에 품고 있는 그 검을 벼리면서 살아가는 일이 참 어렵다.

※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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