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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 (27)] ‘셈하는 인간’ 호모 칼쿨란스(Homo Calculans) 

추상적 사고의 여왕, 숫자의 탄생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
물표(物票)는 그 기호가 상징하는 물건을 쉽게 기억하기 위한 표식…경제활동의 재분배와 숫자가 창의적으로 만나 정교한 형태로 진화

▎물표는 문자의 등장 이전에 물건의 수량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됐다. 토판문서의 위쪽에 동그란 구멍이 세 개 나있고, 그 아래 숫자 1자 모양의 형태가 새겨져 있다. / 사진· 위키피디아
하나, 둘, 셋, 넷…. 나는 유치원을 다니기 전에 숫자를 알고 사용했던 것 같다. 숫자는 추상적 사고의 여왕이다. 우리는 ‘하나’라는 숫자를 알고, 그 수(數)를 1로 표시한다. 그리고 1을 연필, 지우개, 책 등 내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을 개별적으로 구별하여 지칭할 때 사용한다. 혹은 ‘하나’를 이용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나 개념에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최선을 지칭하는 지고한 한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의 기간을 ‘한 인생’ 이라고 말한다. 내 주위에 있는 연필, 지우개, 책은 ‘하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이렇게 하나로 묶인다. 우리가 ‘하나’라고 말할 때, 지칭하고자 하는 대상의 구체적인 양과 그 양을 표시하는 1이란 숫자 사이에는 추상적인 사고가 존재한다.

인류는 언제부터 수량을 가시적인 숫자 혹은 기호로 표시했을까? 또는 숫자를 조직적으로 표시해서 그것을 사용해 소통하려는 당사자들 간에 합의가 이뤄졌을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이 자신의 혁신의 공간인 동굴에서 숫자로 보이는 일련의 기호를 남겼지만, 그 기호들은 의미가 있는 소통의 도구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 기호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공동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빈번한 사용을 통해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농업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흩어져 간간히 존재하는 ‘마을’들이 모여 일정한 정해진 범위 안에 살면서 도시보다는 작은 ‘읍(邑)’이란 경제생활 공동체를 구축했다. ‘마을’은 촌락보다는 큰 공동체로서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모여 살았다. 기원전 8000년경부터 ‘읍’이 등장했다. 이란의 수사(Susa)와 같은 지역은 대규모 농사와 그 수확물을 저장하는 시설을 갖췄다. 특히 이 읍의 중앙에서 농산물들을 보관하고 농산물의 생산량을 조절해 관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나 나오기 시작한다.

읍(邑)을 유지하는 정교한 행정망


▎수메르 지역인 우룩에서 발견된 물표. 기원전 3100년경 이 지역들에서 인류 최초의 문자가 등장했다.
중동지방에서 아랍어로 ‘텔’이나 ‘테페’ 혹은 터키어로 ‘휘육’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도시와 문자가 발견되기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던 장소다. 이곳들은 소규모 마을들이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서 읍을 형성해 생존을 위한 대규모 공동체를 만들었다. 고고학자들은 이들 읍에 남겨진 동물과 사람의 뼈들, 그리고 탄화된 곡식 낱알들을 통해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의 식단뿐만 아니라 경제규모를 가늠했다. 읍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목축, 농업과 더불어 사냥과 어업을 통해 식생활을 해결했다. 이들이 남긴 도기, 농기구, 무기를 통해 그들이 달성한 기술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유물들과 달리 추상적인 사고의 기반이 돼 문자 발명의 씨앗이 되는 유물이 있다. 정착한 인류가 자신이 수확하거나 기르고 있는 가축을 효과적인 관리하기 위해 진흙 위에 일정한 기호를 표시했는데, 이것이 물표(物票)다. 물표는 읍을 유지하는 정교한 행정망이자 문자를 탄생시킨 모체다. 진흙으로 만든 이 물건들은 가지각색이다. 서로 다른 모양을 지닌 물표들이 특정한 농산품이나 가축을 의미한다.

이 물표는 기원전 8000년경 신석기시대 초기에 발견됐다. 인류는 이때부터 단순한 모양으로 숫자를 표시했는데, 이 단순한 표시는 그 안에 기하학적인 모형을 넣어 점점 복잡한 모습으로 진화한다. 물표는 문자가 등장한 기원전 3100년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됐다. 동그라미 물표는 곡식, 세모난 물표는 동물, 맨 아래 납작한 동그라미 물표는 사람이거나 하루 노동의 분량을 의미한다.

1970년대부터 물표연구를 통해 물표가 문자의 모체이며, 추상적인 사고의 도약이란 사실을 연구한 학자가 있다. 드니스 슈만트-베세라트(Denise Schmandt-Besserat)다. 물표는 고대근동에서 진흙으로 불은 뒤 구워서 제작됐다. 이들의 모형을 보면 혁명적이다. 물표는 ‘단순한 형태’로 시작하다가 점차 ‘복잡한 형태’로 진화했다. 베세라트는 지난 40년간의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16개 모양을 지닌 물표로 구분해냈다. (1)원뿔형 (2)구체형 (3)원통체형 (4)평원반형 (5)사면체형 (6)계란형 (7)사각형 (8)삼각형 (9)이중원뿔형 (10)포물형 (11)구부러진 코일형 (12)장사방(長斜方)형(rhomboids) (13)용기형 (14)도구형 (15)동물형, 그리고 (16)기타 모형이다. 이 물표들은 손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각기 크기가 다르다. 대개 1~3㎝ 정도이며 큰 물표는 3~5㎝ 정도다.

이 물표는 기원전 8000년경에 이란의 테페 아시압과 간지 다레 E, 시리아의 텔 아스와드, 텔 무레이벳, 그리고 체이크 하산에서 등장했다. 이곳에서 등장한 물표들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란의 두 장소는 반영구 마을이며, 시리아 세 장소는 읍 정도 규모다. 물표는 그 후에 고대 근동 전역에 전파됐다. ‘단순한 물표’는 근동 전역에서 발견되지만 다양한 표시를 새긴 ‘복잡한 물표’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수메르 지역과 이란의 수사에서만 발견된다. 수메르 지역인 우룩, 기르수, 우르, 니푸와 우바이드와 이란의 수사, 초가 미쉬, 무시안 등이다. 복잡한 물표는 문자의 등장으로 이어져 기원전 3100년경 이 지역들에서 인류 최초의 문자가 등장하게 된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물품명세서


▎이란의 수사에서 발견된 진흙 봉투. ‘단순한 물표’와 ‘복잡한 물표’ 등 여러 모양의 물표가 담겨 있다. / 사진· 위키피디아
물표는 그 기호가 상징하는 물건을 쉽게 기억하기 위한 표식이다. 예를 들어 농부가 자신이 수확한 농산물을 신전에 맡겨 놓았다고 가정하자. 신전의 관리는 이 농부가 가져온 10단의 보리 묶음을 신전창고에 저장하고, 그 농부에게 일종의 영수증을 발행한다. 신전 관리는 아직 마르지 않은 진흙을 조그마하게 떼어낸 후, 진흙을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로 넓적하게 편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보리 한 단’을 상징하는 알기 쉬운 기호 ‘십자’를 갈대철필로 눌러 표시한다. 조그만 진흙 덩어리 위의 ‘십자’ 표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낙서가 아니라 ‘보리 한 단’에 대한 표기다. 인간만이 이런 십자표시와 같은 상징물을 사용한다. 그것은 교통신호와 같다. 복잡한 교통을 원활하게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공유하는 상징체계를 만들었다. ‘빨간색’ 신호등은 운전자가 자동차를 정지하라는 상징이고 ‘파란색’ 신호등은 운전자가 자동차를 몰고 가도 좋다는 표시다. 물표는 신전 관리와 농부 간에 이루어진 상징이다. 이 두 당사자는 이 상징을 공유해야 한다. 만일 운전자가 빨간색 신호들을 무시하고 달린다면, 그는 큰 사고를 당할 것이다.

물표의 또 다른 기능은 신전 관리(官吏)가 자신이 받은 다양한 물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물품명세서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보관하기 위해 만든 최선의 조치라는 것이다. 이들은 현대인이 사용하는 숫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물표를 사용했다. 우리는 ‘하나’ ‘둘’ ‘셋’을 물건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기원전 7500년에서 3100년까지 사용된 물표들에서 숫자들은 특별한 물품들, 즉 곡식, 기름, 동물, 혹은 자신들의 노동시간과 같은 추상적인 단위만을 표시했다. 각각의 물표는 그것에 해당하는 물건이 존재하고, 그 물건을 표시하는 특별한 숫자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곡식의 작은 단위는 원뿔형과 구체형으로, 기름은 난형으로, 동물은 원통형으로, 노동의 시간은 사면체형으로 표시했다. 물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각 물표가 한 물건만을 일대일로 대응하여 표시한다는 점이다. 오일 두 병은 두 개의 난형으로, 오일 세 병은 세 개 난형으로 표시한다.

물표는 도시 경제활동의 재분배와 숫자가 창의적으로 만나 정교한 형태로 진화한다. 기원전 7500년경 물표의 숫자는 12개였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해져 기원전 3500년엔 350개가 됐다. 다른 지역과 장거리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새로 수입하거나 만든 물건들, 예를 들어 양털이나 금속과 같은 원자재뿐만 아니라, 옷감, 옷, 보석, 빵, 맥주, 꿀과 같이 가공을 마친 자재를 위해 새로운 물표가 등장했다. 원자재를 표시하는 ‘단순한 물표’ 이외에, 가공된 자재를 위한 ‘복잡한 물표’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했다. 메소포타미아 우룩에서 발견된 물표들 중 16%가 ‘복잡한 물표’다.

한 물건을 하나의 모양으로 표시하는 단순한 숫자 계산에서 10진법이나 60진법으로 진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발견됐다. 물표와 숫자의 등장은 도시문명의 핵심인 행정체계의 근간을 마련해줬다. 신전 관리는 신전창고에 있는 진짜 물건을 표시하는 진흙 물품명세서를 종류별로 정의한다. 사람들은 물품은 보관용으로 혹은 세금으로 바친다. 물표는 창고 안에 얼마나 많은 물품이 보관되었는지를 기록한다. 물표는 문자의 등장 이전에 물건의 수량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됐다.

신전 관리는 보리 일곱 단을 어떻게 표시할 것이다. 그는 보리 일곱 단을 십자모양 표식을 일곱 개 만들어, 그 수량을 표시할 수 있다. 혹은 십자모양을 번거롭게 일곱 번씩으로 반복하지 않을 방법을 고안해냈다. 진흙 위에 십자 모양을 하나 그려놓고, 그 옆에 세로로 일자표시를 일곱 번 반복한다. 이 일자표식은 보리 한 단을 상징하는 십자표시에 대한 기호다. 우리는 이 상징 기호에 대한 기호를 ‘숫자’라고 부른다.

숫자는 이미 상징화된 표식에 대한 더 깊은 상징이다. 이 토판문서는 기원전 3500년경 이란 수사에서 발견됐다. 토판문서의 위쪽에 동그란 구멍이 세 개 나 있고, 그 아래에 숫자 1자 모양의 형태가 새겨져 있다. 학자들인 이 토판문서의 동그라미가 그의 하는 세단의 곡식과 숫자 1로 표시된 다른 네 단의 곡식을 표시한 일종의 신전 영주증이라고 해석한다.

기원전 3000년대를 시작하면서 물표를 보관하는 두 가지 방식이 등장한다. 하나는 물표에 구멍을 내어 하나로 연결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진흙 봉투에 물표들을 집어넣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다양한 물표를 모아 경제행위를 하다는 두 사람의 계약을 완결한다. 점점 행정이 복합해지면서 조그만 물표를 넘어서는 진흙 토판이 등장한다. 다양한 원자재를 한꺼번에 표시할 수 있는 방안이 등장한다. 기원전 3500년부터 진흙과 연결하기 위해 구멍이 난 물표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혹은 다양한 물표를 담을 수 있는 소위 ‘봉투 진흙 토판’이 등장한다. 신전관리는 다양한 물품을 표시하는 단순한 물표와 복잡한 물표를 함께 정리하기 위해, 속이 빈 진흙 봉투를 만들어 그 안에 물표들을 집어넣는다. 이 단계가 바로 후에 등장하는 토판문서로 가기 위한 중간단계다.

구멍 난 물표와 진흙 봉투의 의미


▎동그라미 물표는 곡식, 세모난 물표는 동물, 맨 아래 납작한 동그라미 물표는 사람이거나 하루 노동의 분량을 의미한다.
일부 물표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구멍을 지닌다. 물표에 난 이 구멍은 크지 않으며 물표의 윗부분이나 중간이 나 있다. 예를 들어 구체형은 중간에, 원통형이나 원뿔형은 끝 부분에, 삼각형은 위쪽 끝에 나 있다. 이들은 모두 물표를 만든 진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을 때 만들어졌다. 학자들은 이 구멍이 난 물표들의 지형적인 그리고 시기적인 분포를 통해, 소위 ‘복잡한 물표’들이 보관한 장소에만 한정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놀랍게도 터키나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구멍 난 물표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란, 이라크, 그리고 시리아에서만 발견된다. 특히 이라크의 우룩과 우르, 그리고 이란의 초가 미쉬와 수사에서 다량으로 나왔다. 우룩에서 발견된 물표들 중 14.7%가, 이란 수사에는 27%가 구멍 난 물표다. 구멍 난 물표가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4000년대다.

구멍 난 물표는 기원전 3500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이 물건은 이전보다 더 진화한 거래 영수증이다. 길이 6.5㎝X2.5㎝의 기다란 진흙 위에 다양한 동물이 걷고 두 사람이 팔을 올린 채 환영하는 모습이다. 이 진흙 덩어리는 양쪽이 끈이 달려 일련의 구멍 난 물표들과 연결돼 있어 마치 목걸이 모양 같다. 하지만 이 복잡한 물표들 하나하나는 중요한 경제적인 거래를 의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섯 개 원반 물표가 연결돼 있다면, 이것은 옷감 5개와 관련된 거래다. 이 진흙 위에 새겨진 그림들은 200년 후에 등장할 그림 문자들의 조상인 셈이다.


▎기원전 3500년부터 다양한 물표를 담을 수 있는 ‘봉투 진흙 토판’이 등장한다. / 사진· 위키피디아
진흙 봉투는 이란의 수사에서 처음 발견됐다. 처음에 진흙 봉투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구를 거듭하면서 진흙 봉투들이 물표를 담는 봉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담은 물표의 내용을 그 봉투 외부에 표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진흙 봉투 뒤쪽으로 구멍이나 있어 아래에 있는 물표들을 담았다. 진흙 봉투 아래에 있는 11개 물표는 단순한 물표와 복잡한 물표들이 섞여 있다.

물표를 해석하는 열쇠는 초기 수메르 문자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단순한 물표와 복잡한 물표는 각기 다른 물건을 의미한다. 문자가 등장하기 전에 물표는 상징기호로 점점 불어나는 물건들을 표시하기 위해 점점 불어났다. 서양 문자들은 라틴어에서 왔고, 라틴어는 그리스어, 더 거슬러 올라가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어 문자와 한자는 자신들이 고안해 낸 독특한 그림문자를 각각 3000년과 4000년 동안 사용했다. 인류최초의 문자 수메르어에는 물표에서 진화했다. 동물을 표시하는 복잡한 물표는 후에 수메르 그림문자가 됐다.

문명 활동의 핵심인 ‘경제’ 등장


▎줄에 매달린 구멍 난 물표. 기다란 진흙 위에 다양한 동물이 걷고 두 사람이 팔을 올린 채 환영하는 모습이다. / 사진· 위키피디아
물표는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 문자와 문명의 탄생을 위한 발판이 됐다. 첫째, 셈하기다. 물표는 인류에게 숫자와 셈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줬다. 그것은 추상이기도 하다. 셈하기는 추상의 능력이다. 추상이란 한 대상을 깊이 관찰한 후에 얻어지는 극도의 단순함이다. 대상을 자신이 가진 한 관점으로 보고, 그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제거하는 행위다. 추상의 본질은 한 가지 특징을 잡아내는 능력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현대 추상화 그림을 보면서, 흔히 “어린아이 그림 같아” 혹은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런 반응은 추상화에 대한 오해에서 온다. 추상화의 시작은 오히려 구체적인 실재에 대한 심오한 응시에서 출발한다. 그 구체에서 덜 중요한 부분들을 제거하면 된다. ‘덜 중요한 부분들’이란 그 대상의 본질을 묘사하는 데 생략해도 되는 것들이다.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스튜디오는 3층으로 돼 있었다. 1층에는 자신이 그리려는 대상, 모델이나 물건이 놓여 있었다. 2층에는 푹신한 의자가 있어 그 대상에 대한 한 가지 본질을 가려내는 상상훈련을 한다. 그는 기억과 상상의 과정을 거쳐 그 대상을 극도로 단순화해 한 가지 선이나 점 혹은 색을 생각해 낸다. 그런 후 3층으로 올라간다. 3층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 종이, 그리고 물감과 붓이 있다.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단순한 이미지를 화폭에 옮겼다. 이런 단순화 과정을 거치면, 그 대상의 구성하는 구체적인 형태들은 사라졌지만, 그 대상이 주는 인상, 그 ‘대상다움’을 표현된다.

둘째, 물표는 문명 활동의 핵심인 ‘경제’의 등장과 일치한다. 경제는 사실 기원전 8000년경에 농업이 시작하면서 등장했다. 물표는 자신들이 수확한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관리하고, 자신 속한 공동체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공동체 정신을 함양했다. 단순한 물표는 물건과 거래물품들을 위한 상징이고, 복잡한 물표는 마을과 도시생활을 위해 산출된 다양한 물건을 표시하고 저장하는 행정체계의 기반이 됐다.

셋째, 인류가 인식의 혁명인 추상(抽象)을 자신의 삶에 유입했다는 사실이다. 추상이란 한자는 두 개의 단어로 이뤄져 있다. 한자 ‘抽’(추)는 ‘뽑아내다, 제거하다, 부수다’라는 의미다. 추는 ‘손 수(手)’자와 ‘말미암을 유(由)’로 구성됐다. ‘추상’이란 그 대상이 그 대상이 된 ‘까닭(도리)’을 알기 위해 ‘손’으로 거추장스러운 것을 제거하는 고도의 기술이다. 추상을 영어로는 ‘앱스트랙트(Abstraktes)’라고 부른다. 교수가 되면 1년에 한두 번씩 자신의 연구 성과를 다른 학자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의례가 있다. 논문 전문뿐만 아니라, 그 전체 논문의 핵심을 A4용지 반 장 정도로 요약해 발표해야 한다. 요약본엔 자신이 주장할 내용의 핵심을 담아야 한다. 이런 요약본을 영어로 앱스트랙트 즉, 추상이라고 부른다. 인류는 물표의 발견으로 야만에서 문명으로, 마을에서 도시로, 구체에서 추상으로 도약한 것이다.

※ 배철현 -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셈족어와 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남긴 삼중 쐐기문자가 기록된 베히스툰비문의 권위자다. 2003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에 개원한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심연]이 있다.

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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