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미루의 어드벤처(11)] 사막에서 배운 생각 멈추기 연습 

고요를 벗 삼아 모래바람의 노래에 귀 기울이네 

김미루 사진작가
물질의 풍요 대신 문명의 속박 미치지 않는 해방구…적막한 광야에서 여유와 소박한 삶의 기쁨 깨달아

▎빌리지 디시 근처에서 찍은 걸작. 빛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부랴부랴 찍었다. 인간은 경이로운 자연의 오브제일 뿐이다. 해석은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요르단 와디 럼의 광야로 깊게 들어갈수록 석양의 노을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졌다. 자연의 예술은 인간의 예술과 달리 순간에만 존재하지만 그 광경의 다양성과 장쾌함은 인간의 모든 개념적 카테고리를 뛰어넘는다. 내가 바위 위에 앉아 하늘이 진홍색으로 변해가고, 오묘한 구름의 문양에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동안 내 주변에는 단 한 점의 소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내가 움 아흐마드의 텐트 안에서 느꼈던 것과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다. 움 아흐마드의 텐트는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기르는 가축에게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소리들로 충만해 있다.

태양이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고 하늘이 자색으로 물들어 갈 때 살렘은 그의 소총을 휘두르면서 나에게 물었다. “한번 당겨 보겠소?” 갑자기 전체 시나리오가 초현실주의적으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내가 사막여행을 기획했을 때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체험의 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완전히 아랍인의 의상을 하고 기다란 돌격소총을 멘 남자, 그것도 아무도 없는 사막의 한가운데서 그와 단 둘이서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어찌 보면 초현실적인 그림이었고, 극히 공포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 속에서 나는 태연하게, 아주 정상적인 상태에서, 보통 때보다도 더 조용하게 그 베두인 남자에게 소총을 당겨 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사격이나 사냥에 취미를 느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러한 호기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생애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모험의 기회였다. 나는 실제로 총을 쏘아 본 적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살렘은 나를 사격의 포지션에 안치시켰다. 그리고 라이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타깃을 어떻게 조준하는지 설명했다. 타깃은 100m가량 떨어진 산의 표면을 덮고 있는 한 작은 바위였다. 내가 사격 포즈를 취하자 살렘은 나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총신을 잡자 개머리판이 나의 어깨를 단단히 눌렀다. 나는 시선을 목표를 향해 정밀하게 정렬했다. 그러자 나의 가슴은 미세한 떨림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나는 나의 숨을 완벽하게 동결시켰다. 그리고 미세한 움직임도 없이 손가락만을 당겼다. 붐! 아~ 얼마나 큰 소리인가! 그 굉음은 마치 침묵을 파열시키는 거대한 폭약소리처럼 들렸다. 첫 방은 아주 근소하게 목표를 빗나갔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정확하게 타깃을 맞췄다. 살렘은 좋아라 하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우리는 적절한 캠프사이트를 찾기 위해 더 깊은 광야로 달려 나아갔다.

아랍 남자와 함께 한 사막의 야숙(野宿)


▎맞은편 바위산을 향해 M16 소총을 겨누고 있는 뒷모습.
내 손에 그토록 강력한 무기를 잡는다는 것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순간의 일이었지만, 긴 라이플을 손에 든다는 것은 즉각 나에게 권력을 장악했다는 허위적 감각을 제공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가슴이 으쓱 부풀었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왜 근대적 무기의 발명이 인간성을 전쟁과 파괴의 광분 속으로 그토록 휘몰아갔는지, 그 심리적 측면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캠프사이트는 보통 바위로 둘러싸여 바람이 비켜가는 모래지면 위에 잡는다. 자동차의 파킹도 캠프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해놓는다. 캠프라 해봐야 폼 매트리스 몇 장, 캠프파이어용 장작과 나뭇가지를 주변에 놓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먼저 불을 피운 후에, 살렘은 차를 준비했다. 그리고 밀봉된 플라스틱 보존용기로부터 그의 하녀가 준비해준 양념 닭을 꺼내었다. 그는 그 양념 닭을 포일에 싸서 자글자글거리는 작은 불 위에 놓았다. 닭이 잘 익은 후에 그는 숯불 위에 직접 동그란 후브츠 빵을 놓고 뒤집어가며 구웠다. 그리고는 잘 구워지면 먹기 전에 공중에 빵을 들어 재와 탄 부분을 툭툭 털어낸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그 요리를 준비한 인도네시아 여인은 역시 동양의 미각을 지녔기 때문이겠지만, 베두인 여인들이 만드는 음식과는 비교될 수 없는, 내 입맛에 맞는 요리를 만들어 놓았다. 배를 불린 후에, 살렘은 불이 지속되도록 계속 가지를 얹고 차를 다시 달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질문을 해댔다.

그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관하여 정말 순수하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대와 처음으로 대화했을 때, 나는 정말 놀랐소. 베두인 텐트 속에서 베두인과 똑같이 살아보려고 하는 이방의 여성이라. 너무 신기하지 않소? 나는 당신이 보통의 시시한 관광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지. 그대는 지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했고, 또 매우 영리하오. 그대가 하는 일들은 범상치 않소.”

처음에 나는 그의 질문에 상투적인 방식으로 대답했다. 그냥 사막이라는 고립된 지역에서의 삶의 방식에 관심이 있다든가, 베두인이 과연 어떻게 하루하루의 삶을 운영하고 있는지를 찍는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든가 하는 등등의 얘기를 했다. 그러나 살렘은 매우 집중해서 들었고, 또 놀랍게도 갑자기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왜 사막이냐 말이오? 왜 하필 사막이냐 말이오?” 그는 마치 내가 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당했던 깊은 슬픔을 이미 알아차리고나 있는 듯이 말했다.

영혼의 상처 치유하려 선택한 사막의 삶


▎사막 한가운데 캠프에서 불을 피우고 차를 달이다. 우리 옛 습관처럼 숯불을 옆에 따로 모아 그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차를 달인다.
그때 아마도 사막에서 외롭게 타오르고 있던 불꽃이 나의 고독감, 그 고독감으로 생겨난 허심탄회한 공허감에 불을 지폈는지도 모르겠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때의 정적 속의 분위기는 내가 한 남성에게서 상처받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만들었고, 그 상처로 인해 문명세계를 탈출해보고 싶은 강렬한 동기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영혼의 정화를 위해 사막의 단절이 필요했고, 그것은 나에게 어떤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더 이상 깊은 얘기는 할 수가 없었다. 살렘은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미 예상이나 한 듯이 양식적으로 이해했다. 사막에 오랫동안 머무는 외국인들의 공통된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대는 옳은 일을 했소. 그대는 아직 젊고, 선택할 남성은 많소.”

살렘은 뉴욕에 사는 나의 친구가 나를 위로하듯이 그런 상투적인 말로써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했다. “여기 당신이 결혼할 수 있는 베두인 남자는 많아요.”


▎사진촬영 작업을 위해 와디 럼 인근 마을로 가는 도중 모래구덩이에 빠진 차량을 다른 사막 원주민의 도움으로 빼내고 있다.
이러한 멘트에 대해 과연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참 고마운 얘기군요.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삶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뭐 이런 투로 얼버무려야 할까? 하여튼 인생의 짙은 이야기는 함부로 떠들 게 못 된다.

담소 후에, 살렘은 차에서 담요 두 장을 꺼냈다. 나에게 한 장을 건네주고, 자기는 자기 매트리스로 가서 누웠다. 나는 굿나잇을 말하곤 깊이 잠들어 버렸다. 야외에서 자는 데 이미 익숙해 있었다. 내 몸 아래에는 부드러운 모래가 열기를 전하고 위로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이불 노릇을 해준다.

내가 여기에 도착한 이후로 한 모든 활동, 움 아흐마드의 삶을 관찰하고, 라마단을 끝내는 이드축제에 참여하고, 살렘과 같이 광야 깊은 데서 캠프한 일 등등의 작업 이외로 나는 내가 사막에서 해야만 할 중요한 작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예술사진 작업이었다. 말리와 몽골리아에서는 지역 원주민들에게 내가 낙타와 함께 찍는 사진작업에 관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에게도 나의 사진작업에 관해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신원이나 정체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사진작업을 감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이곳 사람이 아닌 타지의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유일한 커넥션은 암만의 여행사 주인 사이드였다. 고맙게도 사이드는 그의 영민한 운전사 아부칼리드와 함께 약속대로 나에게 와주었다. 그리고 작품사진을 위해 움 아흐마드의 캠프로부터 나를 데리고 나갔다. 내가 그의 차에 앉자마자 사이드는 빙그레 웃으며 멘트를 날렸다: “오~ 넌 정말 베두인족이 되었구나!”

우리는 아부 칼리드가 아는 캠프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 캠프는 와디 럼 보호구역 밖에 있었다. 와디 럼 빌리지보다도 더 큰 디시(Disi)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빌리지에 가까운 데 있었다. 이 지역은 와디 럼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든 소문이 와디 럼 사람들에게 미칠 가능성이 적었다. 소문이 잘못 나면 나의 와디 럼 생활을 계획대로 마치는 데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캠프로 가는 동안 우리가 탄 차는 종종 모래에 박혀 지나가는 원주민의 차의 도움으로 꺼내어지곤 했다. 드디어 작은 계곡 속에 숨겨진 빈 관광캠프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한 베두인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항상 그러하듯이 사이드는 유창하게 그와 협상하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얼마 안 돼 그 베두인 젊은이는 두 마리의 낙타를 데리고 와서 우리 텐트 곁에 묶어 놓았다. 내가 사이드에게 사진촬영을 위해 낙타를 빌려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손짓으로 그 베두인 젊은이에게 낙타 안장을 벗겨줄 것을 요청했다. 그 젊은이는 묻지도 않고 내 말대로 해놓고 떠나갔다.

사이드와 아부 칼리드 그리고 나만 오롯이 남게 되자, 나는 즉각 작업에 착수했다. 로케이션을 헌팅하고 카메라 장치들을 준비해 놓고…. 태양이 벌써 가라앉고 있었다. 빛은 오후 5시 이후 급격히 퇴조한다. 나는 안달거리며 마지막 햇살을 놓치지 않으려고 분주히 움직였다. 내가 옷을 벗으면 또 원주민들에게 들킬 것을 걱정해야만 했다.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내가 아주 편하게 의존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도와준다는 사실이 이 모든 작업과정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날 오후 햇살에서 찍은 하나의 즉발적인 사진이 전 사막작품 시리즈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되었다.

베두인 천막을 떠나 해방감을 만끽하다


▎사막의 석양. 대자연만큼 인간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은 없다.
이날 밤, 사이드와 아부 칼리드는 고맙게도 거대한 캠프파이어를 만들어 주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낄낄거리며 놀았다. 온전한 보름달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히잡도 쓰지 않고 추리닝만 걸친 채, 마음대로 입고 마음대로 말하는 느낌은 움 아흐마드의 집에서 며칠을 보낸 후인지라 그런지 진실로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아주 평범한 정상적 일상행위가 그토록 강렬한 해방감을 던져 준다고 하는 그런 느낌은 이전에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체험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낙타 한 마리가 밤을 틈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정말 황당했다. 우리는 죄의식을 느끼며 한바탕 웃어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낙타가 언제 탈출했는지, 얼마나 멀리 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아부 칼리드는 휴대폰으로 이 캠프 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불과 한 시간 후, 마술처럼 어제 데리고 왔던 그 베두인 젊은이가 바로 도망간 그 낙타를 데리고 왔다. 너른 들판에는 수백 마리의 낙타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어떻게 바로 그 동일한 낙타를 찾아내어 데리고 올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미스터리였다. 나 같으면 낙타에 지피에스 위치추적기가 달려있다 해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아침 우리에게는 두 낙타와 함께 찍고 싶은 사진을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찍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내 마음에 드는 단 하나의 사진도 얻지 못했다. 전날 저녁에는 시간도 없었고 마음의 스트레스도 심했다. 그런데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나왔다. 이런 상황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최상의 이미지는 최악의 환경에서 창조된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나의 무의식의 장난인지 알 수 없으나, 생명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움 아흐마드의 캠프로 돌아오면서 나는 히잡을 다시 썼다. 사이드와 아부 칼리드에게 너무도 감사했다고 말하면서 작별한 후, 나는 다시 또 하나의 나의 삶의 정상궤도가 되어가고 있는 베두인 삶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움 아흐마드와 이만은 빌리지(읍내)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가기 위해 이만의 언니 파티마가 준 아주 얇고 싼 나일론으로 만든 토오브 긴 옷을 입었다. 그런데 파티마는 좀 뻔뻔스러운 여자였다. 그녀는 나에게 매우 관대한 듯이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숨겨놓은 좀 치사한 목적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드 축제날, 파티마는 다양한 헌옷으로 가득 찬 큰 수트 케이스를 엄마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녀의 남편 여동생이 사우디에서 많은 옷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옷을 하나씩 들척이면서 엄마와 여동생 이만에게 보여주고는 그중에서 너무 길거나 저열한 옷은 모두 나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그들보다 크니깐 맞을 거라고 하면서. 일반적으로 베두인들은 작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자이언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체로 다른 곳에서 나는 작은 편에 속한다. 그녀가 가져온 헌옷은 매우 저질이고 스타일이 엉망이었다. 더구나 나에게 주는 것은 그중에도 최악의 것들이었다. 나는 계속 거절했지만, 파티마는 웃으면서 계속 받으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시스터, 시스터”라고 영어로 말하면서 내가 자기 언니 같다고 하면서 옷들을 받으라는 것이다. 솔직히 그 옷들은 모조리 쓰레기통이나 자선드럼통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관대함에 감사를 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저의는 다른 데 숨어있었다. 파티마는 내가 암만에서 사온 아름다운 새 옷들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 허락도 없이 그녀는 내 짐을 뒤져 아름답게 수놓인 퍼플색의 토오브를 꺼냈다. 그것은 내가 고르고 골라서 미화 35달러나 주고 산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한번 입어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옷이 자기에게 맞나 자세히 살펴보고는 나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그 옷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줄 마음이 없었다. 내가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녀도 충분히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 파티마는 다시 와서, 바로 그 퍼플 토오브를 꺼내 입었다. 이번에는 아주 오래 입었다. 내가 아껴서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것인데 그녀는 그 옷을 입은 채 설거지를 했다. 그녀는 아예 그 옷을 벗을 생각이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그녀의 모든 드라마는 내 옷 하나를 뺏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그 옷을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뛸 듯이 좋아했다. 나는 그녀의 패밀리 모두에게 내가 베두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정말 아끼던 아름답고 비싼 옷을 빼앗기고 쓰레기더미를 그 대신 받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질적 삶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를 배우는 하나의 실습 과정일 뿐이었다.

문명의 예속 피해 사막의 천막으로 간 베두인의 여인


▎파티마가 내게 준 싸구려 베두인 의상. 암만의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의 첫 빌리지 경험은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아우데가 우리를 자동차로 한 소박한 빌리지 가옥으로 데려다 주었다. 중년부인이 우리를 마중했고, 집 뒤쪽의 방으로 안내했는데, 그 뒷방에는 이가 다 빠진 연로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머리에 쓴 검은 베일이 흘러내려 얼굴 위쪽을 반쯤 가렸다. 이만이 나에게 “윰마 시스터(yumma sister)”라고 말해주는 것을 보면, 그 늙은 레이디는 움 아흐마드의 언니, 그러니까 이만의 큰이모였다. ‘윰마’는 우리나라 말의 ‘엄마’와 같은 애칭이며 ‘윰마 시스터’란 ‘엄마의 언니’라는 뜻이다. 그들이 이모할머니에게 이야기할 때는 바로 귀에다 대고 했고, 대답할 때도 할머니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중년부인이 방으로 들어와서 차를 대접했다. 우리는 모두 얇은 쿠션 위에 앉은 채, 사막의 텐트로 돌아가기 전까지 여러 시간 동안을 그냥 앉아 있어야만 했다. 차디찬 콘크리트 벽에 아무런 가구도 없고 아주 희미한 형광등 하나 켜진 곳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사막 텐트의 자연스러운 역동성과 그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사막의 텐트에서는 캠프파이어의 불꽃을 쳐다볼 수도 있고, 별들을 쳐다볼 수도 있다. 사막에서 사는 것이 읍내 콘크리트 집에 사는 것보다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자연의 경이로움보다 더 인간에게 지속적인 행복감을 주는 것은 없다.


▎해질녘이 되자 염소떼가 우리로 돌아오고 있다. 베두인 여인들은 염소를 관리하는 약간의 일 이외에 크게 할 일이 없다.
대부분의 베두인은 읍내에서 사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말한다. 수도와 전기가 있어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읍내는 내게는 아주 초라한 타운일 뿐이고, 여성의 자유를 구속하는, 신경 쓸 일이 많은 곳이다. 여자는 밤에 절대 밖에 돌아다닐 수 없으며 콘크리트 박스 속에 갇혀 조용히 지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나중에 느꼈지만, 낮에 바깥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나를 멈춰 세우고 무슨 문제가 있느냐며 말을 건다. 그래서 결국 낮에 다니는 것도 어렵다. 주변사에 무관심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만나기만 하면 멈춰 세우고 묻는다. 외국인이 베두인 복장을 하고 밖을 걸어 다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한참 지난 어느 시점에는 내가 누구라는 것이 다 알려졌지만, 와디럼 읍내 공동체 사람들의 입을 통한 정보의 일체감은 무서운 동질감과 결속력을 과시했다.

그제야 나는 왜 움 아흐마드가 전통적 방식으로 살기를 고집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핵심적 이유는 감시로부터 해방이었다. 문명의 이기는 인간의 해방이 아닌 구속을 가져왔다. 움 아흐마드는 사막정신의 진정한 구현자였다. 그 광막한 대자연의 트인 공간이야말로 해방구였으며 보호자였던 것이다.

사막의 여인들은 모두가 고경에 도달한 선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의 예술을 마스터했다. 움 아흐마드와 이만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적다. 아침과 저녁에 약간의 보살핌을 요구하는 염소가 있을 뿐이다. 낮에는 그냥 앉아서 그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들은 독서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공예도 하지 않는다. 차를 만들고 아주 소박한 소찬을 만드는 것 외에 거의 절대적으로 삶의 활동이라는 것이 없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만이 엄마와 같이 고립된 삶을 사는 이유는 바로 그녀가 간질병 환자였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로부터도 피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병은 마귀의 침범이며 따라서 터부의 대상이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의 시대로부터 오늘까지 변함이 없다. 예수의 해방론적인 복음이 그 발생지에서부터 먹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왜 이만이 은둔생활을 해야만 하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이만과 그녀의 엄마는 텐트 밖을 멀리 벗어난 적이 없다. 결혼식이나 친척방문을 위해 빌리지를 가야만 하는 특별한 계기에도 반드시 남자들이 차로 데려다 준다. 사실 텐트에서 빌리지까지는 도보로 20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평생이 구간을 여성들은 두 발로 걸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과거 농촌을 보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혹독한 이념적 격리는 찾아볼 수 없다. 사막 종교의 도덕성과 유교문명의 인문적 도덕성은 비교할 수 없다. 전자는 너무 가혹하다.

아우데와 아흐마드는 매일 엄마를 찾아온다. 그리고 생필품을 가지고 온다. 그러나 둘 중에 누가 언제 무엇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두 여인은 그냥 앉아서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언젠가 누구든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들과 함께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 사건이라고는 똥파리의 날개소리가 유일하다, 그 침묵을 견디는 것이 처음에는 가장 힘든 과업이었다. 처음에는 나는 도대체 어디를 쳐다보아야 할지를 몰랐다.

생각마저 멈춰 버리는 사막 생활의 매력


▎베두인 천막의 거실. 고양이는 마호메트가 사랑한 동물이란다. 그래서 캠프 주변을 자유롭게 들락거린다. 개는 인간의 생활공간과 엄격히 떨어져 생활한다.
이만이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 시선을 정지시키고 조용히 앉아있을 동안, 나는 수백만 장소를 훑어보면서 안달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만의 감정표현이 없는 얼굴을 어느 순간 쳐다본다. 그리고 그가 쳐다보고 있는 방향으로 그 시선을 따라 가보면 아무것도 없다. 사건이 부재한 것이다. 그러면 곧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때로 이만의 시선이 나와 마주칠 때에는 나는 아주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만의 얼굴은 절대적 무표정의 정적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순간 웃는 행위를 멈추고 눈길을 피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소통의 부재를 언어장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아랍어를 좀 할 수 있었고 또 바디랭귀지를 익혀 소통할 수 있었다. 기실 내가 모르는 것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사유방식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추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이 지난 후로는, 순결한 침묵이 차차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유 그 자체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체류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경지에 거의 도달해가고 있었다.

처음 체류 며칠 동안은 대낮의 ‘앉아있음’만이 유일한 곤란이 아니었다. 밤에 밖에서 자는 것도 많은 걱정거리를 수반했다. 개들이 짖고 고양이들의 괴이한 소리와 싸움이 나를 괴롭혔다. 특히 고양이가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와 부스럭대면 소스라치도록 놀라 깨곤 했다. 야생의 동물들이 자는 나를 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다. 무슨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둔 손전등을 켠다. 대부분이 고양이였고, 고슴도치도 많았다. 사막의 고슴도치는 가시가 짧고 귀엽게 생겼다. 여우가 나타나기도 했다.

어느 날 한밤중에 일어나 불을 켜보니 여우가 1m가량 떨어진 곳에서 내가 마시다 놓아둔 찻잔 속의 남은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여우는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차를 다 마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나의 존재에 관해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나는 그 여우를 여러 차례 만났다. 매번 같은 여우였다. 한쪽 발을 절었으니까. 사실 이러한 나의 생활은 어린이 동화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 같다. “옛날 옛적에, 사막에서 자는 한 소녀가 있었지요. 별이 총총한 달님이 방긋 웃는 그날 밤에 여우와 고슴도치가 찾아왔지요…”

첫 주에 내가 잠을 잘 못 잤던 이유는 또 있다. 내가 덮는 수십 년을 빤 것 같지 않은 더러운 모포에 숨어 사는 온갖 미생물로 인한 고통은 끔찍했다. 누워서 바라본 하늘에 펼쳐진 장대한 은하수의 위압감과 공포감도 수면을 방해했다. 그러나 2주째 접어들면서 괴로움이 서서히 얕아졌다. 묵은 때와 미생물, 곤충에 대한 의식을 버렸다. 그리고 은하수의 위압적 공포감도 어린아이 방 천장을 장식한 야광별처럼, 위안을 주는 친근한 별님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내 일상생활을 다큐멘트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사라져갔다. 사막의 삶에 잘 동화되었기 때문이리라.

환영이 되어가는 도시의 기억


▎이만의 옷을 내가 빨아주고 있다. 베두인도 가루비누를 쓴다.
3주째는 모든 것이 나의 정상적 일상으로 느껴졌다. 맨발로 걸어도 발바닥 밑에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발바닥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리라. 그 발로 바위 뒤켠 모래를 쓱쓱 문질러 작은 웅덩이를 만든 뒤 대변을 보고 왼손으로 닦는다. 오른손은 숟가락 대신 음식을 집어 먹는 용도다. 그리고 매일 아침 거울도 없이 히잡을 쓰며, 도마 없이 양파를 썬다. 최소한의 물로 옷을 빠는 지혜를 익힌다.

밤에는 뉴욕에서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마치 모두 비(非) 실재했던 환영처럼 느껴진다. 꿈같은 사막생활을 하고 있는 도시의 소녀인지, 도시의 꿈을 꾸고 있는 사막의 소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장주의 나비가 되어 나의 정체성이 사라진 의식의 세계를 소요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상태를 그대로 만끽하고 살았다면 나는 대각자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도 사막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베두인 천막의 부엌. 깡통과 못 쓰는 오븐 속에 음식을 보관한다.
그러나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나는 내 정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떠나자! 사막을 떠나자! 예수도 필요 없다! 석가도 필요 없다! 나는 도사나 구루가 되기 위해 사막을 간 것이 아니다!

암만에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부엌 싱크대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감격! 평생 본적 없었던 것처럼, 평생 그런 물에 손을 씻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우와! 더운 물 샤워의 감격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숟갈을 대는 모든 음식이 감미로웠다.

처음에는 나는 사막에서의 삶의 태도를 고수하려고 노력했다. 물이나 전기를 낭비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도시에 돌아와 일주일이 지나자 모든 것이 옛날로 돌아갔다. 다시 참기 어려운 낭비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꿈을 지키고 산다. 사막에서의 장면들은 결코 내 인생의 환영으로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그것은 이 생애 끝날 때까지 내 생명의 원천으로 남아있으리라!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04호 (2018.03.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