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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사랑학개론(5)] 구약성경의 ‘아가(雅歌)’ 

서양문학사에서 가장 에로틱한 시(詩) 

김환영 중앙일보 지식전문기자
유대인들이 관혼상제와 예배에서 부르고 읊었던 ‘최고의 노래’…‘부적절한 육체적인 사랑’은 피해야 한다는 게 교훈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1826~1898)의 [아가](1893). [아가]의 모태는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의 사랑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 사진·디종 순수미술박물관
우리말에서 ‘아하다(雅-)’는 “깨끗하고 맑다’는 말이다. 구약성경의 [아가(雅歌)]는 ‘아하다’보다는 ‘야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아가]가 성경에 어떻게 포함됐는지 의아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욥기]와 더불어 유대교·그리스도교 성경 속 미스터리 텍스트다. [아가]는 서양 문학사에서 가장 에로틱한 시(詩)로 손꼽힌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리워라, 뜨거운 임의 입술, 포도주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 임의 향내, 그지없이 싱그럽고 임의 이름, 따라놓은 향수 같아 아가씨들이 사랑한다오. 아무렴, 사랑하고 말고요. 임을 따라 달음질치고 싶어라. 나의 임금님, 어서 임의 방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대 있기에 우리는 기쁘고 즐거워 포도주보다 달콤한 그대 사랑 기리며 노래하려네.”(공동번역 1:2~4)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개정개역 2:6)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개정개역 7:7)


이런 낯뜨거운 표현 때문에 [아가]를 성경에 포함시키면 안 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아가]가 유대교 경전으로 확정된 것은 2세기다. [탈무드]에 나오는 랍비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아키바(50~137)가 [아가]가 포함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90년 잠니아 공의회에서다. 히브리 성경을 확정하고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가 메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을 추방하기로 한 공의회다.

[아가]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관혼상제와 예배에서 부르고 읊는 노래다. 신약성경은 [아가]를 전혀 언급하거나 암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아가]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신(神)이 존재한다면, 그는 왜 [아가]를 성경에 포함시키게 했을까. 어떤 깊은 뜻이 담긴 것일까.

히브리어로 ‘쉬르 핫시림’인 [아가]는 영어로는 ‘솔로몬의 노래(Song of Solomon)’,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다. 예수를 ‘왕중왕(King of Kings)’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은 어법이 사용됐다. [아가]는 ‘최고의 노래’다.

아가씨와 목동 사내, 솔로몬 왕이 주인공


▎폴란드 크라쿠프 소재 베르나데타 성당에 있는 ‘검은 마돈나(black Madonna)’. 몇몇 신학자는 유럽의 예술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검은 마돈나로 형상화한 이유를 [아가]에서 찾는다. / 사진· 데니스 자비스
[아가]를 둘러싼 여러 논란 중 하나는 ‘통일성’ 문제다. [아가]에 통일적인 구조가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대립한다. 대략 문학적으로 봤을 때 [아가]에 구성(構成, plot)은 없으나 틀(framework)은 있다는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아가]의 무대는 봄이다. 주인공은 해석에 따라 두 명 혹은 세 명이다. ‘술람미(Shulam)’라는 마을 출신인 아가씨와 목동 사내, 그리고 솔로몬 왕이다. 그중에서도 진짜 주인공은 ‘술람미’ 아가씨다. [아가]를 삼각관계로 보면 목동과 술람미 아가씨를 후궁으로 삼으려는 솔로몬은 경쟁관계다. 아가씨의 집안 식구들은 목동과 맺어지는 데 반대한다. 아가씨는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에 나오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목동을 선택한다.

[아가]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돼 있다. 현대 학자들은 솔로몬이 저자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 회의적이다. 솔로몬이 저자라면 [아가]의 집필 시기는 솔로몬의 제위 시기인 기원전 971년에서 931년이다. 전통적으로는 솔로몬이 [잠언]과 [전도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아가]는 솔로몬이 청년, [잠언]은 중년, [전도서]는 노년이었을 때 집필했다고 볼 수 있다. 성숙한 중년이나 인생의 덧없음을 알게 된 노년이 아니라 혈기왕성할 때 쓴 시다.

솔로몬이 [아가]를 시바의 여왕(Queen of Sheba)를 위해 썼다는 설도 있다. 동조자가 별로 없는 주장이다. 다윗왕과 바쎄바의 아들로 태어난 솔로몬은 다윗의 11번째 아들이다. 그는 현자이자 색한(色漢), 즉 “여색을 몹시 좋아하는 남자”다. 영웅호색? (솔로몬 사후 나라가 분단된 것은 그의 호색 때문이었을까.) 솔로몬은 책임져야 할 여자가 정말 많았다. 성경에 이렇게 나온다.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개역개정 [아가] 6:8)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개역개정 [열왕기상] 11:3)


저자가 솔로몬이 아니라면 누굴까. 궁중 시인이거나 ‘남자 평민’일 가능성에, ‘여성이다’ ‘적어도 여성을 잘 이해하는 남성이다’라는 주장도 지지를 얻고 있다. 아마도 [아가]는 1000년 이상에 걸친 중동 사회 ‘집단 지성’의 산물이다. 역사학적·언어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아가]의 탄생은 기원전 10세기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올라간다. 게다가 헬레니즘 문명(기원전 323~146)의 영향까지 받았다. [아가]가 최종 완성된 것은 기원전 2~3세기다.

[아가]의 모태는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의 사랑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배경은 풍산종교(fertility religion)다. 풍산( 産)은 “풍부하게 산출됨”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남신과 여신의 성적인 만남에 지구의 풍산이 달렸다고 봤다. 탐무즈신(수메르·바빌로니아의 농경·목축의 남신)과 이슈타르 (앗시리아·바빌로니아의 사랑·풍요·전쟁의 여신)의 교합이 [아가]의 원형에 포함되는지 모른다. 한편 [아가]와 19세기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의 결혼식 노래에서도 공통점이 발견된다.

중세 수도사들이 가장 많이 필사한 성경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아가]. [아가]의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일단 ‘육체적’인 사랑이다. / 사진·구글 문화원
인류의 오랜 숙제인 남녀평등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문제다. 근대인이 고대인보다 더 남녀평등적인 것은 아니다. [아가]에 나오는 아가씨와 목동의 관계는 평등하다. 아가씨가 반강제로 남자 주인공을 방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남성이 여성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고 여성은 주로 찬양을 듣는 관계도 아니다. 남녀구별 없이 솔직하게 상대편에게 서로 ‘아부’한다. 이렇게.

“사내들 가운데 서 계시는 그대, 나의 임은 잡목 속에 솟은 능금나무, 그 그늘 아래 뒹굴며 달디단 열매 맛보고 싶어라.”(공동번역 2:3)

“그대, 내 사랑,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눈동자.”(공동번역 1:15)


[아가]에 대한 성경 해석에서 보수파와 진보파의 입장이 뒤집힌다. 현대의 진보적인 학자들은 대체로 [아가]가 종교와 무관한 세속의 ‘사랑 노래 모음집’으로 이해한다.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아가]에서 상징을 발견한다.) [아가]의 경우에는 글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아가]는 신(神)과 이스라엘 민족(유대교), 그리스도와 교회(그리스도교), 그리스도와 인간 개개인 영혼(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이의 사랑을 그린 노래라는 것이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서 신과 인간은 ‘계약’ 관계다. ‘갑을 계약관계’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계약 당사자라는 면에서는 동등하다. 일방이 계약을 깰 수 있다.)

[아가]는 중세 수도사들이 가장 많이 필사한 성경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아가]는 그들의 성욕을 승화하는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12세기부터 [아가]의 아가씨를 성모마리아로 해석한 신학자들이 나왔다. [아가] 2장 1절에 나오는 ‘무궁화’ ‘샤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 Hibiscus syriacus)는 성모 마리아로 해석됐다. 일각에서는 유럽의 예술가들이 성모 마리아를 ‘검은 마돈나(black Madonna)’로 형상화한 이유를 [아가]에서 찾는다. 근거가 뭘까. 아가씨의 피부가 검다고 표현한 다음 구절이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나 비록 가뭇하지만 케달의 천막처럼, 실마에 두른 휘장처럼 귀엽다는구나.”(공동번역 1:5)

우리 성경 번역의 ‘가뭇하다’ ‘귀엽다’는 영어 성경의 경우 “나는 검고 사랑스럽다(I am black and lovely)” 혹은 “나는 검지만 사랑스럽다(I am black but lovely)”로 표현된다.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정서는 ‘but’보다 ‘and’를 선호한다.

아가씨는 왜 가뭇했을까. 아마도 그가 상류층이 아니라 땡볕에서 일하는 당시의 보통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뭇하다고 깔보지 마라. 오빠들 성화에 못 이겨 내 포도원은 버려둔 채,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보느라고 햇볕에 그을은 탓이란다.”(공동번역 1:6)

여기 나오는 ‘내 포도원’은 흔히 처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가]를 성행위에 대한 은유로 가득한 문서로 보고 구절구절마다 야한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 방법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주인공들이 ‘관계’를 결국 한 것인가 안 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해석 모두 일리가 있다고 본다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아가]는 원초적이다.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진 이유는 상대편의 성격이나 지성이나 재력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외모다. [아가]의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일단 ‘육체적’인 사랑이다. [아가]에는 신(神)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교훈을 강요하려는 시도도 없다.

원초적 문헌으로서 [아가]는 사랑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서로 소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온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개정개역 2:16)

얄궂게도 심플한 사랑 노래인 [아가]는 해석하기 힘들다. 2000년이 넘는 언어 장벽이 있다. 우리에게 생소한 고유 명사가 많다.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에 있는 연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개정개역 7:3~5)

위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헤스본·바드랍빔·다메섹·갈멜이 뭔지 찾아봐야 한다. 또 언어 장벽은 오해를 낳는다. 다음 구절들이 근친상관과 연관 있는지 논란이 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공동번역 4:10)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개역개정 4:12)


여기서 ‘잠근 동산(garden locked)’ ‘덮은 우물(fountain sealed)’은 순결은 상징한다. 남성에게 누이는 성적인 대상이 아니다. ‘누이=신부’는 근치상간을 암시하는 게 아니다. 남자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혼전 순결’을 다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혼 전에는 아가씨가 나의 누이인 것이다.

언어 관습 차원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우리말에서 아저씨나 아가씨는 친족 호칭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남남끼리에서 성인 남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아가씨는 “시집갈 나이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중동지역에서 누이는 자신 또래의 여성을 부르는 말이었다. 따라서 ‘내 누이’는 ‘나와 동등한 사람(my equal)’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하다는 주장이 있다.

사랑이 바라기 전에는 사랑을 깨우지 말라


▎에곤 치르흐 (1889~1948)의 작품 [아가 6번](1923). ‘부적절한 육체적인 사랑’은 피해야 한다는 게 [아가]의 교훈이다. / 사진· 볼프강 아들러
[아가]에서 배우는 사랑의 ABC로는 어떤 게 있을까. 어쩌면 하나마나 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게 있다. 사랑은 뜨겁고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다. 미지근하거나 죽음보다 약하다면 참된 사랑이 아니다. 공자는 “나는 여색을 좋아하듯이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고 말했다. 그만큼 사랑과 성욕은 강하다. [아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개역개정 8:6)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개역개정 8:7)


다음 구절은 어떤 뜻일까.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개역개정 2:7)

한참 달콤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고 있는데 방해하지 말라는 뜻일까. 영어 성경(NIV판)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사랑이 바라기 전에는 사랑을 자극하거나 깨우지 말라(Do not arouse or awaken love until it so desires).”(NIV)

이 말은 ‘너무 사랑에 일찍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사랑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가]는 또 사랑에는 우여곡절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가]의 아가씨는 문 앞에 와 있는 사내에게 문을 너무 늦게 열어줬다가 사내가 떠나버려 후회하기도 한다. 사랑은 일사천리(一瀉千里)가 아니다. “거침없이 빨리 진행되는” 사랑도 있지만 멀리 돌아가는 사랑이 더 많다.

어쩌면 [아가]의 결론은 [잠언]에 나온다. 이렇게.

“네 샘터가 복된 줄 알아라. 젊어서 맞은 아내에게서 즐거움을 찾아라. 사랑스러운 네 암노루, 귀여운 네 암사슴, 언제나 그 가슴에 파묻혀 늘 그의 사랑으로 만족하여라. 아들아, 어찌 탕녀에게 빠지며 유부녀를 끼고 자겠느냐?”(공동번역 [잠언] 5:18~20)

구약성경은 ‘육체적인 사랑’ 그 자체는 죄악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적절한 육체적인 사랑’은 피해야 한다는 게 [아가]의 교훈이다. 그 교훈을 중시한다면 ‘미투(MeToo)’ 때문에 고생할 일도 없으리라.

※ 김환영 - 중앙일보 지식전문기자.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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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호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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