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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4)] 이인임 노선의 종언과 개혁의 시작 

반역으로 엮인 ‘조반 사건’ ... 국가 수탈과 폭력의 민낯 드러내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위화도회군 후 이인임 노선 부활 시도에 개혁파 강력하게 저항…조민수 제거 후 국가 개혁 과정에서 드러난 권문세족의 적나라한 부패상

소수 특권집단의 욕망 충족을 위해 국가를 희생시켜왔던 이인임 노선은 조민수 세력의 축출로 약화됐다. 하지만 국가 개혁을 방해하는 고려 말 권문세족들의 시도는 여전했다. 이런 가운데 권신들의 행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조반 사건’은 개혁과 반개혁 세력 간의 싸움으로 전개됐다.


▎권신 염흥방은 자신의 가노를 죽인 조반을 반역죄로 몰아붙였지만 우옹과 최영, 이성계 연합세력은 오히려 염흥방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는 염흥방(김민상 분).
정도전, 조준, 윤소종 등 이성계 그룹의 급진파는 원대한 꿈을 가졌다. 공자가 꿈꾼 동주(東周)를 현실에서 세우는 것이다. 그들의 비전은 단순히 당대의 정치 현안을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문명의 재창조였다. 조선이 바로 그 나라다. 역사적으로 조선이란 국호는 세 번 나타나는데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기자조선이 있었다. 정도전은 새로운 조선이 기자조선을 잇는다고 보았다. 정통성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그렇게 연결한 것이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현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은을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그를 조선 후에 봉했다고 한다. [한서(漢書)]는 기자를 한반도에 문화를 전한 문화적 영웅으로 기록했다. 그는 조선에 와서 예의와 농사·양잠·직조술을 가르치고 팔조법금을 세웠다. 하지만 기자동래설은 역사적 근거가 약하다. 그러나 정도전이 주목한 것은, 그가 [서경(書經)]에 등장하는 중화 문명의 영웅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의 교(敎)를 지어서 국중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조선경국전] ‘국호’) 홍범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약어로 나라를 다스리는 9개의 대원칙이다. 우왕이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는 치수를 할 때, 하늘이 내린 낙서(洛書)를 보고 정했다.

‘홍범구주’는 단순한 전설 이상이다. 그 지침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예컨대 ‘홍범구주’ 중 제5항인 황극론은 영·정조대 탕평론의 이론적 기반이었다. 황극이란 임금이 만민을 위해 세운 공정한 질서다. 그것은 탕탕평평한데, 치우침이 없고(無偏) 무리지음이 없는 것(無黨)이다. 그래서 공안국은 황극을 대중(大中)이라고 한다. 나라를 그렇게 운영하고 정치를 그렇게 하면 어떻게 당쟁이 있겠는가!

기자는 이런 ‘홍범구주’의 오의를 깊이 이해한 현자였다. 주무왕은 은나라 말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만든 위대한 왕이었다. 그런 그가 국정 운영의 원칙에 혼란을 느끼고 기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오, 기자여! 오직 하늘은 백성이 서로 화합하여 살고, 언제나 먹고 살 수 있도록 말없이 돕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늘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기자는 ‘홍범구주’의 역사와 내용을 설명했다. 기자는 이렇게 전설적 성왕인 주무왕과 연결돼 있다. 그리고 주의 문명은 주무왕의 동생 주공을 통해 공자와 연결돼 있다. 공자는 주공을 깊이 사모했다. “심하도다, 나의 쇠약함이여! 오래되었구나 꿈에서 주공을 다시 보지 못한지가!” 공자는 오매불망 주공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주공의 나라를 부활시키고 싶었다. “주나라는 하·은 두 왕조를 본받았으므로 그 문물제도가 매우 찬란하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吾從周)”([논어])

그래서 주나라는 유학자의 유토피아가 됐다. 정도전 등도 똑같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됐으니 기자의 선정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천자의 덕도 주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공자가 ‘나는 동주를 만들겠다’라고 하였으니, 공자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공자는 평생 이상 국가를 꿈꿨지만 아무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기원전 500년경 노나라의 권신 계씨가(季氏家)의 가신이자 비읍의 읍재 공산불요(公山弗擾)가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는 가려고 했으나 자로의 만류로 단념했다. 그때 공자는 “나를 부르는 자가 어찌 까닭이 없겠느냐? 만약 나를 쓰려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곳을 동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공자의 꿈은 그만큼 간절했다.

최영 희생양 삼아 과거 회귀를 시도하다


▎[고려사] ‘염흥방’ 열전. 염흥방은 [고려사] ‘간신열전’에 기록된 인물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오른 염흥방은 우왕 때 국정을 농단한 이인임을 비판하는 등 개혁적 인물이었지만 주류세력에 편입된 후 매관매직을 하고 타인의 토지를 강탈하는 등 부패한 인물로 전락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 뒤 급진파의 큰 꿈은 곧 커다란 장벽에 직면했다. 이인임 노선이 다시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1388년 6월 8일 우왕이 강화로 축출되고 이튿날 창왕이 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창왕의 즉위와 함께 조민수는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都統使)에 임명되었다. 반면 이성계는 동북면·삭방도·강릉도도통사에 임명됐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다. 조민수는 전군의 통수권을 장악했다. 이성계에게는 본래부터 지배해 온 작은 지역의 통수권만 인정됐다. 두 사람에게는 또한 사직을 안정시킨 공신이라는 호(安社功臣號)가 똑같이 내려졌다. 그러자 이성계는 조상(穆祖)의 이름이 ‘안사’라는 점을 들어 사퇴하고 며칠 후 칭병사직했다.

회군 뒤 조민수파의 정치적 비전은 창왕의 즉위를 즈음해 발표된 공민왕비 정비의 교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교서는 위화도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밝힌 고려정부의 첫 번째 공식 성명이었다. 그 요점은 한마디로 현상유지 정책의 천명이었다. 이 교서는 먼저 공민왕의 정치를 찬양하고, 그것이 가능한 최선의 정치적 대안임을 시사했다. 회군의 정치적 목표는 공민왕대로의 복귀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 공민왕은 공손하고 조심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조종을 공경했으며, 현자에게 맡기고 그 말을 채용하여 정교(政敎)를 밝히니, 그 공이 조상에 빛나고 혜택이 생민에 있음이 지극하였도다. 명황제의 명령을 받자 천명을 밝게 알아 여러 나라에 솔선해 표문을 받들어 신하를 칭하니,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왕위에 봉하고 옥새를 하사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의뢰함을 삼았다.”([고려사] 창왕 즉위년 6월 신해)

공민왕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이성계파도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 교서의 문제점은 공민왕대와 비교해 우왕대의 정치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왕은 물론이고 이인임에 대한 비판이 완전히 빠져있다. 그 시대의 정치에 대한 암묵적 긍정인 셈이다. 일체의 책임은 최영에게 전가됐다.

“불행히 선왕이 훙서하고 경(卿, 창왕)의 아버지가 계승하여 사대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허물된 바가 없었는데 뜻밖에 최영에게 혹한 바 되었다. 최영은 매와 개를 바쳐 서 사냥으로 유도하고 형륙을 가르쳐 난폭함을 드러내게 했다. 이에 군사를 일으키고 군병을 움직여 중국과 불화를 만들어 거의 종사·생민의 화가 될 뻔 하였으니 말하면 가히 마음 아픈 바로다. 다행히 조종의 비밀스런 도움에 힘입어 최영이 퇴출되고 왕도 또한 과오를 후회하고 스스로 왕위를 사양해, 종사의 제사와 생민의 목숨을 경에게 부촉하노니 그 책임이 중하도다.”

이처럼 우왕은 최영의 악행으로 인한 피해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기만이다. 최영은 악행의 원인이 아니라 그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조민수파는 최영이라는 희생양을 통해 폭정의 모든 폐단을 은폐시키고 나아가 그것을 온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 교서는 결국 위화도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이인임 노선의 부활에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2차 권력투쟁은 이인임 노선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창왕이 즉위하자 조민수는 즉시 이인임을 복권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인임은 이 무렵 세상을 떴다. 이민수파에 의해 가시화된 회군의 현실적 결과는 결국 이인임을 축출한 최영과 우왕의 제거였다. 사실 회군은 이성계가 최영과의 연합을 깨고 이인임 그룹과 제휴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성계는 먼저 최영과 연합해 이인임 그룹에 치명적 타격을 입히고, 다시 이인임 그룹과 제휴해 최영 그룹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진정변 후 숙청 과정에서 최영의 가혹한 태도와 달리, 이성계는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이인임 그룹이 이성계와 손잡고 회군을 단행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성계 또한 최영이 자신을 배제하고 독주하자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서로 적대적이던 두 집단이 마침내 결합한 것이다. 이들에게 공요군의 지휘권을 맡긴 것은 최영의 부주의였다.

이인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조민수파는 이인임의 정치 노선을 복권시키고자 노력했다. 창왕은 이인임의 죽음을 애도하는 교서를 내렸다. “내 그대를 위하여 애도하니, 그대는 유감이 없으나 좌우의 보필을 내가 누구에게 바라리오.”([이인임전]) 개혁파에는 희대의 간신이자 역적으로 인식된 이인임을 공공연히 칭송한 것이다. 조민수는 또한 이인임의 장례에 최고 예우를 베풀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그를 예장(禮葬)하고, 사신을 보내 조상하며, 만장을 지어 주고, 제사를 지내며, 추증(追贈)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이인임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한 개혁파의 반대 역시 강경했다. 그 공격의 선봉장은 좌사의대부 윤소종이었다. 그는 당대의 모든 정치적 폐단이 이인임의 ‘사욕(私慾)의 정치’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첫째, 이인임은 우왕을 난행으로 이끌었다. 둘째, 군공에 대한 논공행상의 원칙을 무시해 국방을 난맥에 빠뜨렸다. 셋째, 자신이 살고자 친원정책을 강행해 대명관계를 파탄시켰다. 넷째, 벼슬을 팔고 옥을 팔아 축재가 끝이 없고 법이 무너졌다. 윤소종의 비판을 보자. “임견미, 염흥방을 심복으로 삼아 벼슬을 팔고 옥을 팔자 문전이 물 끓듯 하였습니다. 뇌물로써 부탁하는 자가 현재(賢才)가 되고 절행과 염치 있는 자는 불초가 되어, 공훈이 한 번 웃음에서 생겨나고 형벌이 한 번 찡그림에서 일어나니, 양부(兩府, 첨의부와 밀직사)와 백사(百司, 모든 관청), 병마사와 수령이 모두 그 문에서 나고, 언관·요직에 그 사친을 포열하고, 욕심이 끝을 알지 못하여 농장이 전국에 편재하고 비단이 집에 찼습니다.”([이인임전]) 윤소종은 이인임의 관을 베고, 집을 파서 못으로 만들고, 집·노비·재물은 모두 몰수하고, 자손은 귀양 보내고, 그들을 영원히 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금고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몸은 이미 죽었어도 하늘의 죽임(天誅)을 면치 못함을 알게 하라”고 요청했다.

1388년 7월, 마침내 조민수가 유배됐다. 대사헌 조준이 조민수의 사전겸병에 대한 죄와 사전개혁에 대한 반대를 이유로 탄핵·축출했다고 한다. 탄핵만으로 조민수가 제거됐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아마 조선의 사관으로서는 기록할 수 없는 권력투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조민수는 명목적인 군통수권을 가졌으나 실질적인 군사력을 장악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1398년 조선 개국공신 남은은 이성계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감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일찍이 군사를 장악하고 있지 않았던들 어떻게 오늘날이 있사오며 신 같은 자도 또한 보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이성계는 “누가 남은을 허무맹랑하다고 하는가? 이 말이 진실로 영원한 경계이다”라고 절대 수긍했다.([태조실록] 7년 3월 20일) 고려말 군대는 개별 장군들의 사병 형태로 존재했다. 조민수는 결국 여러 장군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민수에 대한 탄핵의 명분이 사전개혁에 대한 반대라는 사실은 다가올 권력투쟁의 방향을 알려 준다.

조민수 탄핵 후 시작된 개혁파의 반격


▎삼봉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 중 ‘국호론’. 단군조선, 위만조선, 기자조선 중 이씨 조선은 기자조선의 정통을 잇는 것으로 인식했다.
조민수가 축출된 뒤에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이를 보면 이인임에 대한 평가 문제는 조민수 개인과의 친분관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고려 지배계급 일반의 합의 사항이었던 것이다. 이성계 그룹의 입장에서 볼 때, 이인임 노선은 소수 특권집단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를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성계 그룹이 오히려 고려의 오랜 전통에 반하는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실제로 창왕의 재위기간 동안 이인임의 정치노선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은 전혀 공포되지 않았다. 두 입장이 팽팽히 대치한 끝에 이인임의 장례는 사후 8개월이 지날 때까지 치러지지 못 했다. 해가 지난 1389년 2월, 창왕은 이인임의 장례를 강행했다. 그러나 개혁파는 결국 2차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이인임 노선의 부활을 저지했다.

바야흐로 폭풍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후 4년여에 걸쳐 생사를 건 정치투쟁이 전개됐다. 1388년 7월 조민수의 축출에 즈음해, 혁명적인 개혁안들이 제기됐다. 그 깊이와 폭은 고려왕조 전 시기에 걸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심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이름에 적합하다. 정몽주는 생각이 달랐지만 혁명 없이 그 같은 과업을 이루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개혁안은 수백 년 동안 뿌리내린 특권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개혁자들이 생각한 이 시대의 개혁은 크게 국가개혁과 문명개혁으로 나뉜다. 국가개혁의 기본이념은 ‘공공성’(publicness)이며, 문명개혁의 기본이념은 ‘경건성’(piety)이다. 회군 이후 개혁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한 조준(趙浚)은 그 점을 잘 요약했다.


▎중국 하나라 우왕 때 낙수(洛水) 위에 신령스런 거북(神龜)이 떠올랐다. 그 등 위에 1~9개 점으로 이루어진 9개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우왕은 하늘에서 내린 낙서(洛書)를 보고 홍범구주를 정했다고 한다. 이는 하늘의 대법으로 상천의 질서를 본떠 인간세계에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 사진:김영수
“경(敬) 한 글자는 제왕이 성인이 되는 기초(作聖之基)이고, 공(公) 한 글자는 제왕이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致治之本)입니다. 청하건대 전하는 위로 황천의 굽어보심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억조 백성의 우러러 봄을 두려워하여, 한 사람을 상주더라도 착한 자를 복주는 상제의 마음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한 사람을 벌주더라도 음란한 자를 죄주는 상제의 뜻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기뻐한 후에야 상을 주고, 여러 사람이 버린 후에야 형벌을 더하시옵소서.”([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12월)

경과 공의 근원은 모두 하늘(天)이다. ‘경’은 하늘을 본받는 것이고, ‘공’은 하늘을 대신하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만물의 내면(性)은 하늘로부터 기원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완성은 본래의 성품(天性)으로 돌아가는(復性) 것이다. 또 하늘은 만물을 낳고 통치자는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화육(化育) 한다는 점에서 하늘은 정치권력의 근원이자 표본이다. 이처럼 성리학의 정치는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은 완성된 인간(作聖)을, 공은 완성된 정치(至治)를 목표로 한다. 현대의 용어를 빌리면 국가와 문명의 문제를 모두 포괄하려는 것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이 생각한 국가개혁은 제도개혁과 정치개혁 두 가지다. 먼저 제도개혁은 크게 4개 분야로 전제개혁, 관제개혁, 지방정치 개혁, 군정개혁이다. 정치개혁은 국가의 의사결정 시스템과 운영원리를 바꾸려는 것이다. 제도개혁이 가시적이라면 정치개혁은 비가시적이다. 문명개혁은 종교와 학문을 바꾸려는 것이다. 이는 제도적으로 학교·가족·과거·의례(관혼상제)와 직접 연관돼 있다. 이런 개혁의 최종 목표는 크게 세 가지로 민생 개선, 국가 재건(재정·행정·국방), 새로운 정치와 문명의 창조다. 개혁자들이 국가 개혁에서 초미의 문제로 생각한 것은 전제(田制)였다. 위화도회군과 조선건국으로 이어진 일련의 역사적 사건도 이 문제에서 비롯됐다. 조반(趙)의 사례는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 준다.

1387년(우왕 13년) 전밀직부사 조반은 배주(白州, 황해도 연백)에서 염흥방의 가노 이광(李光)을 죽이고 집을 불살랐다. 일찍이 이광이 조반의 전토를 점탈했는데 조반은 염흥방에게 애걸하여 돌려받았다. 그러나 이광이 다시 빼앗았고 욕까지 보였다. 조반은 욕을 참고 이광을 찾아가 다시 애걸했다. 밀직부사는 정3품의 고관이다. 그런 조반이 일개 권신의 가노에게 욕을 당하고도 후환이 두려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것이다. 이 무렵 이런 일은 일상적이었다. 염흥방은 조반만이 아니라 “배주 사람의 밭 수백 경을 빼앗아 종 이광을 장주(庄主)로 삼고, 또 여러 사람의 밭을 빼앗아 1년에 수조(收租)하기를 두 번, 세 번까지 하니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고 한다. 지방관들도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조반이 고개를 숙이자 이광은 더욱 기고만장했다. 조반을 업신여기고 더 못되게 굴었다.

죽음을 각오한 조반의 속내


▎서울 전농동 부군당의 무신도. 부군당은 고려 말, 조선 초 토지개혁을 이끈 조반을 주신으로 모신 마을 제당이다. 조반은 죽음을 각오하고 염흥방에 맞섰다. / 사진:연합뉴스
마침내 조반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수십 명의 기병을 동원해 이광을 목 베고 집을 불살랐다. 그러나 순간적인 분노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 우왕이 일곱 살 난 조반의 아들을 불러 아버지의 일을 물었다. “제 아버지는 다만 칼을 빼어 살펴보면서 ‘탐욕스런 예닐곱 재상의 목을 베어 내 한을 풀련다. 그렇지 않으면 처자가 반드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릴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답이다. 조반은 그 외에는 재산을 지킬 아무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칼을 뽑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염흥방에게 일말의 희망을 건 듯하다. 급히 개경으로 달려가 염흥방에게 전후 곡절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앞서 소식을 들은 염흥방은 조반을 반역자로 공포했다. 개인 간 다툼 과정에서 생긴 일을 국가적 문제로 키운 것이다. 그 다음 치안을 담당하는 순군(巡軍)을 동원해 조반의 어머니와 처를 체포하고 조반을 잡기 위해 기병 400여 명을 백주로 파견했다. 현상금도 걸었다. 곧 조반은 체포돼 순군에 갇혔다.

염흥방은 당시 순군부 상만호였다. 부만호는 이인임의 인척이자 측근인 도길부였고 도만호(都萬戶)는 임견미의 사위 왕복해였다. 그들과 대간, 그리고 전법사가 합동 심문을 맡았다. 혹독한 고문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러나 조반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다. 오히려 그는 권신들을 무법한 도적이라고 비난했다. “6~7명의 탐오한 재상이 종놈들을 사방에 풀어놓고는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고 백성을 학대하니 그들이 바로 큰 도적이다. 내가 이번에 이광의 목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백성을 학대하는 도적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어찌 모반이라 하느냐?” 조반은 오히려 전선을 확대했다. 염흥방만 아니라 권신 전체로 전선을 확대했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지닌 의미도 넓혔다. 단순히 자신의 토지를 지키려는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을 국가를 위해 제거한 의거라고 주장했다. 개인 행위를 반역 행위로 확대한 염흥방에게 맞불을 놓은 셈이다.


▎평양 인근 평천리에 있는 ‘기자정전기적지비’ 탁본. 비의 글은 ‘평양은 3000년 전 은나라에서 온 기자가 세운 옛 도읍…’으로 시작한다. 오른쪽의 초서는 비석 앞면의 끝자인 ‘지비’라는 한자의 탁본이다. / 사진:권태균
도덕적으로 곤란해진 염흥방은 거짓 자복을 시키려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조반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역공을 가했다. “나는 너희들 같은 나라의 도적을 처단하고자 했으니 너와 나는 서로 소송이 붙은 관계인데 어찌 나를 국문하느냐?” 염흥방의 공권력 오남용을 규탄하며 꾸짖고 욕했다. 염흥방은 도덕적으로 더 곤경에 몰렸다. 분기탱천한 그는 사람을 시켜 조반의 입을 마구 치게 했다. 조반의 입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자 심문관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염흥방의 일파였지만 염흥방의 억지와 횡포가 도를 넘었다고 본 것이다. 왕복해는 조는 체하며 못 들은 척했다. 나머지 사람도 염흥방이 너무 펄펄 뛰었기 때문에 감히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좌사의대부(左司義大夫) 김약채(金若采)가 극력 저지했다. 그 덕분에 고문은 중단됐다.([임견미전])

개인적 행위를 국가적 문제로 전환시킨 조반의 의도는 성공했다. 왕복해의 태도를 보면 권신 내부에서조차 염흥방의 조치가 과도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개입을 꺼린 다른 권신들은 모른 체했고 염흥방의 권력을 두려워한 다른 관리들은 침묵했다. 김약채만이 용기를 냈다. 그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극력 저지했다. 김약채는 1371년(공민왕 20년) 문과 급제자로서 위화도회군에 반대해 유배됐다. 뒤에 조선건국에 참여해 대사헌,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조반의 항의는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놀랍게도 우왕이 그에 호응했다. 며칠 뒤인 1388년 1월 5일, 우왕이 최영의 집에 가서 조반의 옥사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염흥방은 다시 조반을 국문하려고 순군에 가서 옥관(獄官)과 대간을 오라고 요청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왕은 의원을 보내 조반에게 약을 하사한 후 곧 본인과 모친, 처를 석방하고 또 의약품과 가죽옷을 보냈다. 그런데 1401년(태종 1년) 조반의 졸기를 보면 조반은 행동에 나서기 전 최영에게 편지를 보냈다. “임견미, 염흥방의 당을 급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먼저 이광을 없애어 그 단서를 열고자 하니 원컨대 미리 주상께 계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태종실록] 태종 1년 10월 27일) 최영은 이를 곧 우왕에게 알렸다. 이에 조반은 100여 인을 거느리고 이광을 베었다. 임견미, 염흥방 등 이인임 그룹을 제거하기 위한 우왕, 최영, 조반의 사전 밀모가 있었던 것이다. 조반사건은 명분을 쌓기 위해 계획된 고육지책이었다. 조반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과 명분을 확대한 것도 이해가 간다. 아마도 조반이 자신의 억울함을 최영에게 호소하는 과정에서 최영이 먼저 결심을 하고 일련의 비밀 계획이 마련된 듯하다.

매달 7일은 마침 녹봉을 나눠주는 날이었다. 하지만 우왕은 “재상들은 부유하니 녹봉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먼저 먹을 것이 없는 군졸들에게 지급하라”고 명했다. 군대의 지지를 얻으려는 조치였다. 그리고 염흥방을 순군에 하옥시켰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 임금께서 현명하시다”고 기뻐했다. 1388년 무진정변의 시작이었다. 우왕은 최영, 이성계와 연합해 군사를 동원해 궁중을 숙위하고 임견미와 도길부를 하옥했다. 결국 염흥방, 도길부가 처형됐다. 임견미, 이성림, 왕복해, 염정수, 김영진, 임치도 사형에 처했다. 이인임과 권력을 나누고 누렸던 권신들과 그 일족, 측근과 심복이 모두 처형되었다. 그 처들은 고문을 당해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사형당한 자들의 자손도 죄다 몰아다 죽이면서 심지어 갓난아이까지도 모조리 임진강에 던져버리니 숨어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 사형된 자의 처와 딸을 적몰해 관비로 삼으니 모두 30여 명에 달했다. 이로써 14년에 걸친 이인임의 집권 시대가 막을 내리고 최영과 이성계의 무신 연합정권이 탄생했다.

염흥방은 친원파의 거두이자 공민왕대의 명신 염제신의 아들이었다. 명문세족 출신인 그는 공민왕 6년 과거에서 장원급제했다. 좌주는 공민왕대의 명신이자 저명한 학자 이인복이었다. 소시에 염흥방은 뛰어난 문재와 고결한 인품을 가진 인재라는 세평을 받았다. 침류정(枕流亭)이라는 그의 시는 세속의 때를 벗었다. “금사거사(金沙居士)의 침류정에는/ 버드나무 우거져 더운 기운 맑히네/ 귀 씻고 티끌세상 일 듣지 않나니(洗耳不聞塵世事)/ 다만 잔잔히 흐르는 작은 시내 소리 있다(潺湲只有小溪聲)”([동문선] 권22)

담박 한아한 정취가 넘치지 않는가! 이색이 바로 그의 절친한 벗이었다. 한수, 염흥방, 이색은 늘 함께 술 마시고, 시를 짓고,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나누었다. 이색의 바람 중 하나는 염흥방의 이웃에 살며 함께 낚시를 즐기고 평생을 더불어 사는 것이었다. “내가 이제 늙었으니 하늘이 가령 나에게 복을 내려 동정(東亭, 염흥방)의 이웃에다 빈터를 잡고 살게끔 해준다면 동정과 함께 이 시를 읊조리면서 나의 생애를 마치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밖에 낚싯대와 낚싯줄을 위시해서 낚싯바늘이나 미끼 따위, 그리고 굽은 낚시를 할 것인지 아니면 곧은 낚시를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동정과 함께 돌아가서 상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목은집] ‘漁隱記’)

염흥방은 유학의 부흥에도 애썼다. 1367년(공민왕 16년) 전쟁으로 무너진 성균관을 중수할 때 그 책임을 맡아 국가의 도움 없이 개인의 후원을 받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가 기부를 재촉하자 열흘 만에 베 1만 단이 들어왔다고 한다.([염흥방전]) 그 가문과 개인의 명망을 짐작케 한다. 이색을 중심으로 성균관에 모여든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등이 성리학운동을 본격화했다. 이색은 염흥방을 참된 군자로 평했다.

염흥방의 제거, 전제개혁의 시발이 되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공자의 반열보다 높여 숭배한 기자의 초상. / 사진:김운회
“동정은 옛사람의 도를 좋아하고 몸을 닦으며, 참된 마음을 간직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가렴주구하는 무리를 개, 돼지보다 못하게 여기고, 물고기와 자라까지 모두 덕화를 입게 하는 데 힘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다.”([목은집] ‘漁隱記’) 어떤 시에서는 “동정의 풍채는 유림 속에 환히 빛나네”(東亭風彩照儒林)라고 찬양했다.([목은시고] 권 20, 柳巷門生開酒席)

1374년 우왕 즉위 후 대외정책의 변동을 둘러싸고 이인임과 대립한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유신이 대거 유배됐다. 염흥방도 이때 유배됐지만 곧 풀려났다. 유배에서 돌아온 염흥방은 상황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인임과 그의 심복인 임견미가 모두 염흥방을 꺼렸다. 하지만 본래 신분이 미천한 임견미가 혼인을 청하자 염흥방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과거 쫓겨났던 일을 돌아보고 자기 몸을 보존하고자 하여 이인임과 임견미의 말이라면 무조건 좇았다.”([염흥방전]) 동생 염정수는 내재추로서 궁중에서 “국가 업무를 모조리 맡아 모두 구두로 왕의 결재받았고, 때로는 왕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시행해 버린 일도 있었다.” 의붓형 이성림이 시중이 되니 “간신배들의 족속들이 양부(兩府)에 포진했으며 내외 요직은 모조리 그들과 친한 자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면서 관작을 팔고 남의 토지를 점탈했으며 산과 들을 죄다 차지하고 수많은 노비를 빼앗았다.

심지어 왕릉·궁고(宮庫)·주현·진(津)·역에 소속된 토지까지도 모조리 점탈해 버리자 주인을 배반하고 도주한 노예와 부역을 피해 유랑하는 백성들이 그 아래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안렴사와 수령도 감히 그들을 징발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은 유랑하고 도적떼가 마구 일어나 공사(公私) 간의 모든 재물이 고갈되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이를 갈았다.”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에 있는 조민수의 묘. 조민수는 위화도회군 후 군 통수권을 장악하고 이인임의 정치노선을 부활시키려 했지만 이성계 세력에 의해 제거됐다. / 사진:김영수
염흥방의 가노와 이림(李琳)의 사위 판밀직 최렴의 가노가 부평에 살았는데 주인의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렸다. 부사(府使) 주언방(周彦邦)이 부리(府吏)를 보내 군사를 징발하자 그 종들이 백성 40여 명을 거느리고 그 아전을 때려 거의 죽게 만들었다. 주언방이 친히 4도 도지휘사(都指揮使)의 군사징발 공문을 가지고 그 집에 갔지만 종들이 주언방마저 구타했다. 두 종자도 때려 치아를 부러뜨렸다. 염흥방이 일찍이 이성림과 함께 성묘 갔다가 돌아오는데 따르는 호위기마(騶騎)가 길을 메웠다. 이때 어떤 사람이 권세가의 종들이 백성들로부터 조세를 수탈하는 내용의 광대 놀음판을 벌이자 이성림은 부끄러워했으나 염흥방은 그냥 재미나게 구경할 뿐 자기를 풍자함을 깨닫지 못했다. 후년의 염흥방에 대해 이색은 “시중 이성림은 조그만 집에서 생장하였는데 재상이 되자 전민을 많이 탈점하여 한꺼번에 큰 집 세 채를 지었다. 좌사 염흥방 역시 수탈을 일삼으니 나라를 그르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이라고 혹평했다.([이색전]) 무진정변 때 각도에 찰방(察訪)을 보내 임견미와 염흥방이 탈취한 전민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임견미 등이 점탈했던 전민의 현황을 조사한 후 안무사를 각 도마다 보내 1000여 명에 이르는 임견미 등의 가신과 악질 종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조반 사건은 당대 고려의 국가와 전제의 상황을 알려 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국가는 원래 정주형 도적집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다가 국가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천명론까지 순화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의 국가는 원시 형태로 회귀했음을 보여 준다. 국가가 합법적 폭력기구이자 수탈기구로 퇴락한 것이다. 이인임은 그 모습을 세련되게 은폐했다. 그런데 염흥방은 최소한의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수탈과 폭력이 민낯으로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반란은 폭정 자체보다도 자신이 걸치고 있는 위장조차 무시할 때 비로소 폭발한다. 14년간 이인임의 충실한 협력자이자 군사적 보호자였던 최영이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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