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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5)] 중국 문화의 근원 유(儒): 유연함의 미덕 

흘리지 않고, 변화 도모할 수 있어야 

하영삼 경성대 중국학과교수
체제의 경직성 녹이고 새로운 시작 명하는 수행적 행위 지칭…‘중국몽(中國夢)’은 仁·和·禮 등 유교적 가치에 기반한 슬로건

▎유(儒)는 학자나 지식인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쓰였으며, 그러한 사람들의 집단을 유(儒), 그러한 학파를 유가(儒家), 그러한 학문을 유학(儒學)이라 부르게 됐다.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서 구용하 역을 맡아 열연했던 배우 송중기.
1. 유교의 시조(始祖),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살까?

거의 20년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도발적 주장이 온 나라를 휩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미 죽은 공자가 다시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5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죽은 공자의 유령이 지긋지긋하다는 작금의 현실에 대한 진단일 것이다.

이 주장은 차별과 타자를 배척하고 ‘우리’ 집단만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일부 뿌리 깊은 악습이 모두 공자가 대표하는 유교에서 나왔다고 본다. 물론 이 주장의 세부 내용을 살피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교의 시조인 공자 초상화.
임금을 신하의 근본으로 간주하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은 엄격한 신분질서로 고착화돼 상명하복과 같은 문화를 낳았다. 부부유별(夫婦有別)과 삼종지도(三從之道)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단순히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차별과 남녀 차별을 고착화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으로 이어졌다.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찬 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처럼, 윗사람에 대해 아랫사람이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문화로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때, 성차별, 신분차별, 나이차별의 근원이 과연 제도화된 유교의 탓일까? 아니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인(仁)·의(義)·예(禮)·화(和)와 같은 유가 사상의 핵심적 가치를 왜곡해 정권과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만 이용했던 때문일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은 1999년에 출판됐지만, 이웃 나라 중국에서는 개혁 개방을 표방했던 1987년께부터 공자가 오히려 부활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5·4운동에서 문화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유교의 전통을 뿌리뽑아야 할 악습으로 간주했다. 이 기간 동안 공자는 중국이라는 대제국을 망하게 한 망국의 기표(旗標)였고, 문화대혁명에서 공자는 타파해야 할 구시대 봉건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유교의 모든 전통과 급진적 단절을 꾀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중국의 유교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91년 장쩌민은 유가사상에 기초한 중국 민족의 우수한 전통 문화에 대한 재평가를 정부의 공식 방침으로 채택했다. 2004년부터는 공자학원을 전 세계에 짓고, 2012년 ‘중국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겠다는 ‘중국의 꿈’ 중국몽(中國夢)을 주창한 시진핑은 이듬해 산둥성에 있는 공자묘를 참배하기에 이른다.

약간 과장을 더한다면 “공자를 살려야 나라가 산다”가 중국의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중국몽(Chinese Dream)의 슬로건이 된 셈이다. 그것은 2015년 국가전략으로 채택된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도 더욱 구체화된다.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의 정신이 민주·자유·인권과 같은 개념이라면 중국의 최근 정권에서 표방하는 중국몽은 ‘인(仁)’과 ‘화(和)’나 ‘예(禮)’와 같은 유교의 대표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혹자는 공자를 중국 전통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설정함으로써 정치적·경제적 패권뿐만 아니라 문화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유가사상을 이용한다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공자를 죽이고 살리는 것이 나라의 흥망과 관계가 있을까? 공자와 그 제자들이 일군 사상의 유파가 ‘유(儒)’로 요약될 수 있다면 ‘유(儒)’란 국가나 민족이라는 경직된 틀 속에 가둘 수 있는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儒)’는 ‘결여’(lack)에서 출발하는 글자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구하고자 하지만 제도나 체제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구하고자 함을 반영한 글자다. 그것은 제도나 체제의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고, 체제의 경직성을 녹이고 새로운 시작을 명하는 수행적 행위를 지칭하는 글자로 보인다.

따라서 이번에는 ‘유(儒)’의 어원과 그 파생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유가사상이 형성되기까지의 유(儒)가 왜 ‘결여’에서 출발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경직성과 상반되는 유연함과 포용의 정신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2. 결핍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


유(儒)는 人(사람 인)이 의미부고 需(구할 수)가 소리부로, 어떤 필요나 수요(需)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人)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人)의 의미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나머지 수(需)의 의미를 살피면 다음의 내용을 포함한다. 첫째, 수요(需要)나 필수(必需) 등의 단어에서 보듯이 수(需)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가지고 있지 않아서(lack),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거나 그것의 공급을 기다리는 상태 등을 의미한다. 둘째, 수(需)로 구성된 합성자로 살펴볼 때 수(需)는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부드럽고 유연한, 즉 쉽게 변화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유(儒) 외에도 孺(젖먹이 유), 濡(젖을 유), 嬬(아내 유), 燸(따뜻할 유), 擩(담글 유), 曘(햇빛 유), 襦(저고리 유), 糯(찰벼 나), 瓀(옥돌 연), 礝(옥 다음가는 돌 연) 등이 수(需)로 구성된 글자들이다. 이들의 의미에 철학적인 의미를 조금 더해보자면 유(孺)는 어린 아이인 ‘젖먹이’(infant)를 의미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유아의 개방성을 담아낸다.

또 “물로 적시거나 씻어낸 상태”를 의미하는 유(濡)는 오염과 대비되는 순수의 상태를, ‘아내’를 뜻하는 유(嬬)는 언제나 가정을 돌봄에 있어 포용의 정신을 발휘하는 부드러운 존재여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연안에 붙어 있는 땅이나 강물에 씻겨 무너지기 쉬운 땅을 의미하는 연(壖)은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허무는 탈경계의 의미를 담았다.


▎(왼쪽) 유(儒)의 예서체 / (오른쪽) 유(儒)의 원형인 수(需)의 갑골문 형태들
또 ‘불에 구워 휘어질 수 있다’는 뜻의 유(燸)나 유(曘)는 유연함을, 유(擩)는 물에 담가 부드럽게 만들다는 뜻을, 유(襦)는 부드러운 섬유로 만들어야 하는 속옷이나 아이들의 턱받이를 말한다. 나(糯)는 점성이 뛰어난 찹쌀로부터 ‘차지다’는 뜻이 나왔고, 옥돌다음 가는 돌을 의미하는 연(瓀)과 연(礝)은 모두 옥돌보다는 강도가 약한 부드러운 돌을 뜻한다.

그리고 耎(가냘픈 연)도 수(需)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수(需)의 윗부분인 우(雨)가 이(而)로 됐고, 아랫부분이 사람의 정면 모습을 그린 대(大)로 됐다. 그래서 연(耎)으로 구성된 글자들도 ‘부드럽다, 연약하다’는 뜻을 가진다.

예컨대 연(蝡)은 ‘애벌레’를 말하는데, 아직 성충이 되지 않은 피부나 몸이 부드러운 상태로서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유아기의 개방성을 담아내는 유(孺)와 연관된 글자다. 연(偄)은 공손하고 순한 것을, 연(愞)은 유연한 마음을, 연(輭)은 상여용 수레가 흔들리지 않도록 바퀴를 부드러운 천이나 가죽으로 싸다는 뜻을 담았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수(需)와 사람(人)이 합해진 글자가 유(儒)이다. 수(需)로 구성된 한자의 의미를 두루 살펴보자. 유(儒)는 죽고 없는 조상을 위한 제사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지내라고 명령하는 경직된 형식과 완전히 다르고, 사후 권력의 테크놀로지로 이용하기 위해 의례 속에 갇혀 버린 유교와 얼마나 다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儒)의 근간이 되는 수(需)에 왜 이런 뜻이 담겼을까? 갑골문에서 유(儒)는 사람(人)이 없고 수(需)로만 구성돼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떨어지는 물과 팔을 벌리고 선 사람을 그려 사람이 목욕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갑골문 당시 사회의 풍습을 감안할 때 아마도 제사나 제의를 올리기 전, 온 몸을 정갈히 하고, 혹여 세속의 이해타산이나 속세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물’은 다른 종교에서도 그러하듯 음이자 여성이며,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상징한다. 새 생명으로 열릴 세계를 표상하는 동시에 몸과 마음을 처음 태어났을 때와 같이 오염에서 정화하고, 세상으로 들어오며 생겨난 오염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내기 전에 하는 목욕은 단지 몸의 더러움을 씻어낸다는 일상적 의미가 아니다.

더구나 일찍부터 정착 농경을 위주로 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기우제(祈雨祭)를 자주 지냈다. 관개수로나 용수원이 오늘날처럼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서 비는 한 해 농사의 성패를 갈랐다. 농사의 실패는 바로 식량 부족으로 이어졌기에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제사를 지냈다.

기우제는 주로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지냈기 때문에 금문에 들어 물이 雨(비 우)로 바뀌었고, 이후 사람의 모습(大)이 而(말 이을 이: 수염을 그린 글자)로 변해 수(需)가 됐다. 이후 ‘제사장’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人(사람인)을 더해 유(儒)가 되면서 지금의 글자가 됐다.

제사장은 그 집단의 지도자였으며, 지도자는 여러 경험과 학식을 갖춘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후 유(儒)는 학자나 지식인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쓰였으며, 그러한 사람들의 집단을 유(儒), 그러한 학파를 유가(儒家), 그러한 학문을 유학(儒學)이라 부르게 됐다.

조선시대 때 쓰인 한국 속자에서는 이러한 인문성을 강조해 유(儒)를 인(人)과 文(글월 문)으로 구성된 유(伩)로 쓰기도 했다. 마치 ‘무인(武人)’과 대척되는 ‘문인(文人)’이 유학자 그 자체라고 선언하듯 말이다. 사실 ‘문인(文人)’만이 사회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는 발상은 위험해 보인다. 한자에서 ‘빛나다’는 뜻을 가진 빈(斌)은 문(文)과 무(武)가 합쳐진 글자인데, 문(文)과 무(武)를 함께 겸했을 때 완성된 인간이요 진정한 인격체가 됨을 웅변한 글자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처럼 말이다.

갑골문에 등장하는 유(儒)는 주로 제사를 주관하는 존재, 즉 술(術)과 무(巫)와 혼재된 제사장이 성격이 강했다. 그들은 기우제를 주관하는 제사장이기도 했고,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역할도 담당했다. 그러다 주나라 시기에 이르러 육경이 완비됐고, 그러자 유(儒)도 점차 제사장의 성격을 탈피하게 된다.

3. 무력 사용하지 않으면서 변화 도모해야


▎[제오유(第五游)]. 조선 후기 유학자 심유진(沈有鎮, 1723~?)이 쓴 한자 어원 해설서이다. 조선 유학자들의 관념을 강하게 반영한 독특한 해석이 많이 담겨 있다.
지식인의 지칭으로 변해갔고 그 전의 방사나 의사 등과도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유(儒)는 도(道)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다”고 했다. 여기서 도(道)는 [시경] [서경] [예경] [역경] [춘추경] [악경] 등이라고도 하고, 육예이기도 한데, 육예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을 말한다.

공자 시대에 이르면 유(儒)는 상당히 보편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논어] ‘옹야’에서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돼야지, 소인배 같은 선비가 돼서는 아니 된다(女爲君子儒,無爲小人儒).”라고 했고, 순자(荀子)는 유(儒)를 속유(俗儒)·아유(雅儒)·대유(大儒)로 구분하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자의 시대는 주대의 천하 질서가 무너지고 도덕과 윤리가 실종된 난세였다. 그 당시 유(儒)는 체재 유지를 위해 지켜야 할 질서가 아니라, 사람이 살 만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덕목이자 가치였다.

[논어] ‘위정(爲政)’에 나오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이전의 주나라 질서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의 산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溫)은 옛 것의 부활이 아니라, 이전의 질서를 가열하고 변형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물의 변화에서 보듯, 가열해야만 분자운동이 일어나고 일정한 온도 이상이 되면 기체로 변한다. 속성이 완전히 다른 물질로 변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모든 공자 관련 서적을 불태운 분서갱유는 공자에서 맹자 그리고 순자로 이어지는 유(儒)가 그 시대에 얼마나 혁명적 사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유(儒)의 부드러움은 세상을 포용하는 정신에 있다. 누구나 포용할 수 있는 것만을 포용하는 것은 진정한 포용이 아니며, 누구나 용서할 수 있는 것만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제도나 체제가 쉬이 인정하지 않는 인정의 관계를 바꾸고, 이전에는 규범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을 규범으로 바꾸는 것, 피를 흘리지 않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서 이런 변화를 도모하는 것을 유(儒)의 정신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러한 관점이 과장으로 보이는 것은 유가가 한나라에 들면서 모든 학파를 물리치고 유일한 통치철학으로 채택됐고, 유학을 하는 지식인이 최고 권력 계층으로 등극하면서다. 한나라에 이르러 유(儒)는 이제 더 이상 제사장도, 방사도, 술사도, 의사도 아닌 진정한 완성된 인격체이자 모든 사람이 닮고 싶어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제오유(第五游)]. 조선후기 유학자 심유진(沈有鎮, 1723~?)이 쓴 한자 어원 해설서다. 조선 유학자들의 관념을 강하게 반영한 독특한 해석이 많이 담겨 있다.

물론 최초의 어원사전인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유(儒)는 유(柔)와 같아서 부드러운 존재이다. 술사(術士)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는데, 술사란 도술을 가진 자를 말한다. 한나라 때 편찬된 책이긴 하지만 어원 해설을 주로 했기에 이전의 원형적 의미를 담았다.

이 때문에 청나라 때의 단옥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허신이 독음이 비슷한 柔(부드러울 유)를 가져와 유(儒)를 설명했듯, 優(넉넉할 우)와 濡(젖을 유)를 가져와 이렇게 설명했다. “유(儒)는 우(優)나 유(柔)와 같아서 넉넉함으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부드러움으로 사람들을 설복시킨다. 또 유(濡)라고 풀이하는 것은 선왕의 도(道)로써 몸을 감화시켜 적셔 주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해설이 더욱 극적이다. “유(儒)는 큰 덕(碩德)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需世之人). 수(需)는 독음인데 의미도 겸하고 있다. 또 고금(古今)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제오유]에 나오는 해설이다. [제오유]는 조선 후기 유학자 심유진(沈有鎮, 1723~?)이 쓴 한자 어원 해설서인데,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관념이 담겼다는 점에서 연구해 볼 만한 자료다.

그에 의하면 유가와 대척점에 있었던 불(佛)을 “서방의 신 이름이다. 우리의 도에 위배되기 때문에(其道悖於吾道),불(弗)로 구성됐다”고 했다. 불(佛)을 구성하는 불(弗)은 ‘붓다’의 음역이기도 하면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존재’를 말했는데 유가의 도를 어그러지게 하는 존재로 해석했던 것이다.

4. 종교에 이르지 않은 유학

공자에 이르러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체계화한 유가도 출발부터 안정되고 공고한 사회 질서체계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가 주나라와 제후국 간의 봉건 관계가 와해되고,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전국시대의 시작이었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것은 서구의 철학이 우주와 인간의 관계, 혹은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 등에 관한 추구를 지향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순전히 사회나 국가의 체계, 구성원들 간의 질서와 윤리에 관한 학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강조했던 것은 이 세상, 내가 살아 생활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춘추 말기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가 주장했던 인(仁)과 예(禮)가 그랬고, 전국시대를 살았던 맹자가 주장했던 의(義)와 덕(德)도 그랬다. 한나라에 들어 동중서에 의해 음양오행과 결합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해 유일한 통치철학으로 지위가 올라갔다. 위진시대에 들어 노장철학과 결합하고, 송나라에 들어 불교와 결합한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과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 명말청초의 왕부지(王夫之)에 이르러 유물사상과 결합하는 등 종교적 속성이 더해지기도 했다. 또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했지만, 근본적 속성과 목표는 여전히 사회의 체계와 질서 및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유학(儒學)이나 유가(儒家)나 유교(儒教)라는 이름은 서로 달라 그 함의가 다르다. 그러나 유교(儒教)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기독교(基督敎)나 불교(佛敎)나 이슬람교 같은 그런 ‘종교’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대단히 장구한 세월 동안 한 민족의 사상을 지배한 가치체계라는 의미에서 ‘교(敎)’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마르크스 이념에 의해 나라를 세운 현대 중국의 시진핑도 최근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를 언급하면서 “덕(德)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문(文)으로 사람들을 교화해야 하며” “덕이 없으면 나라가 일어설 수도, 사람도 일어설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21세기 세계의 중심을 꿈꾸는 중국은 새로운 심학(新心學), 새로운 이학(新理學), 새로운 경학(新經學), 새로운 인학(新仁學)을 주창하고 있다. 이처럼 아무리 변신해도 과거나 지금이나 언제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가치를 맴돌고 있다. 그것이 유가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큰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자가 죽은 후 통치철학으로 변모한 유(儒)의 덕목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의 덕목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극단을 포용하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해서 가능한데 그러지 못 했기 때문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 속에 인의예지에 따라 가정을 바로 세울 수 있을 때, 세상에 나오라는 뜻이지, 집안 단속을 잘 하라거나 가족과 아내를 다스리라는 수직적 개념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수양은 쉼 없는 인내를 요구했다. 그런데도 통치자들은 자기 수양의 고통을 참아내기보다는, 그것에 갖가지 형식을 부여했고, 형식의 준수가 곧 유(儒)로 간주됐다. 아픈 부분이 아닐 수 없다.

5. 유(儒)와 선비의 임무


▎안토니오 그람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의 저항가로서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고, 마르크스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의 저항가로서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다. 또 마르크스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대항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했다.

유(儒)의 어원에서 봤듯 유(儒)는 ‘결여’에서 출발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함에도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구하고자 하는, 기존의 제도나 체제의 한계 ‘너머’를 보면서 체제의 경직성을 녹여내고 새로운 시작을 명하는 수행적 행위를 반영한 글자이다. 그래서 유는 출발부터 현실적이며, 현실에 바탕을 두되 그 언제나 ‘너머’를 지향하고 이끄는 존재였다.

목욕재계를 하면서 몸에 묻은 온갖 세속의 욕망을 씻어내 정결함을 유지해야만 자신에 갇히지 않는 개방적이고 객관적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야 세상에서 결여되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나아가 그 너머의 미래를 인도할 수 있다.

심유진의 해설처럼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유(儒)였고, 봉건사회를 살았던 조선의 선비들조차 대의명분과 정의로움 하나에 기대어 지식인의 본분을 다해 왔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를 만들었다. 역사의 변곡점 하나하나에 진실한 선비정신의 실천이 있었고, 그런 지식인들이 그래도 정치를, 현실의 삶을 바른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지금, 지식인은 무엇인가? 인공지능시대의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앞서도 말했듯, 유는 고체화되고 변화하지 않는 형식이 아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습관화된 경험이 지식의 전부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경험의 파괴를 수반한다.

수신제가(修身齊家)로서의 유는 습관의 파괴를, 진부한 일상의 반복으로 점철된 닫힌 세계를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고, 평천하(平天下)로서의 유는 세상의 몸들이 요구하는 것에 응답하는 덕목인 것이다. 마치 미세먼지로 가득 찬 세계에서 제대로 숨 쉬고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는 공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정말로 필요하지만 쉽게 구하지 못 하는 것을 구하는 것에 그 가치와 덕목이 있는 것이다.

지식만 가진 지식인이 넘쳐나고 진정한 지식인이 부재한 시대, 통유(通儒), 홍유(鴻儒)는 점차 사라져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더는 세상과 유리되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이 갈구하는 갈증을 앞서 풀어주고, 미래 사회를 예측하고 선도하는 그런 유(儒)가 되도록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할 것이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사)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고,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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