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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26)] '경국대전' 편찬한 사가정(四佳亭) 서거정 

여섯 임금 모신 조선 전기의 문장가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방대한 저작은 조선의 체제 정비하는 밑바탕… 계유정난에서 세조 쪽에 섰지만 정치색 옅은 관료

▎영남선비문화수련원의 서관태 사업팀장이 구암서원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지방이 ‘분권’이란 말과 함께 자주 거론되고 있다. 최근 헌법 개정이 논의되면서다. 문재인 정부는 국회가 헌법 개정안 발의를 머뭇거리자 청와대가 마련한 개헌안을 먼저 공개했다. 3월 21일 헌법 개정안의 지방 관련 내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수도(首都) 조항 신설이 눈길을 끌었다. 수도 관련 사항을 법률로 정하도록 해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법을 무너뜨릴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서울 편중이 헌법을 고쳐야 할 정도에 이른 걸까?

조선시대도 서울 집중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재의 쏠림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지방 대구를 떠나 서울에 터 잡고 조선의 ‘헌법’을 초안했던 한 문신의 행로를 돌아본다. 교과서에서 보았을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다. 호와 이름이 비슷하다. 호 사가는 외가가 있던 임진강 쪽 지명이자 매화·대나무·연꽃·해당화 등 좋아한 네 가지 꽃에서 유래한다. 그가 살았던 서울 몽촌토성 길은 지금 ‘사가정길’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대구에는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하천이 있다. 신천(新川)이다. 신천을 따라 대로가 놓여 있다. 자동차가 신천대로 고가(高架)를 따라 북쪽 경대교에 가까워지면 산격동 산머리에 기와가 겹겹이 정연한 서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길에서 만나는 대구의 작은 랜드마크다.

3월 20일 서원을 찾았다. 진입로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신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해발 134m 연암산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사인 ‘백인당(百忍堂)’에 ‘영남선비문화수련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이곳 소속인 서관태(50) 사업팀장이 서원을 안내했다. ‘문충(文忠)’이란 시호로 불천위(不遷位)인 사가정이 배향된 유일한 서원이다.

대제학으로 세조 시기 관학(官學)을 좌지우지


서 팀장을 따라 문루인 ‘연비루(鳶飛樓)’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자 강당인 ‘초현당(招賢堂)’이 나왔다. 거기서 더 올라가 서원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사당 ‘숭현사(崇賢祠)가 있다. 달성(達城)과 대구(大丘) 서씨 다섯 분의 위패가 모셔진 공간이다. 서씨의 본관 달성과 대구는 시조가 같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고증의 한계로 구분하고 있다.

1665년(현종 6) 숭현사에 가장 먼저 배향된 인물은 구계(龜溪) 서침(徐沈)이다. 조선 초기 대구 달성공원 땅을 나라에 희사하고 대신 대구부민이 한 섬에 5되씩 상환곡 이자를 덜 내도록 감세를 이끌어낸 사람이다. 세 부담이 줄어 사람이 모여들고 고을이 커지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다. 연비루에 ‘위민포덕(爲民布德) 박시제중(博施濟衆)’이란 입춘첩이 붙어 있다. 서 팀장은 “백성에게 덕을 펴는 것이 구계와 구암서원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구계 오른쪽이 사가정이다. 위패에는 ‘문충공사가서선생(文忠公四佳徐先生)’이라 적혀 있다.

사가정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19세에 과거에 급제해 25세에 벼슬을 시작한 뒤 69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관직에 있었다. 경력은 화려하다. 사가정은 조선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거치며 대제학이 된 48세 이후 20여 년간 과거 시험 출제위원장인 문형(文衡)을 맡은 문장가였다.

그는 조상을 잘 만났다. 사가정의 증조부와 조부는 고려에서 고위 관직을 지냈다. 증조부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고려 말기인 1362년 이들은 벼슬을 그만두고 난세를 피해 대구 인근에 은거한다. 은(殷)나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절의를 본받으려 한 것이다.

조선이 개국했다. 사가정의 아버지는 다시 벼슬로 나아갔다. 안주목사(安州牧使) 서미성(徐彌性)은 혼인으로 권문세가의 길을 연다. 부인은 안동 권씨로 조선의 초대 대제학을 지낸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딸이다. 사가정은 2남5녀 중 둘째 아들로, 7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넷째 자형은 최항(崔恒)이다.

사가정은 어려서부터 시문에 소질을 보였다. 8세에 외할아버지 권근이 시제(詩題)와 운자(韻字)를 내자 다섯 걸음에 시를 지었다고 한다. 1444년(세종 26) 25세 서거정은 식년 문과의 을과로 급제한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던 무렵이다. 그는 집현전을 거쳐 28세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올라간다. 일찌감치 권력 핵심부로 진입한 것이다.

1452년(문종 2) 33세 사가정은 일생을 방향 지우는 ‘운명’과 맞닥뜨린다. 그해 겨울 후일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간 것이다. 사은사(謝恩使) 수양대군이 명나라가 관복과 고명(誥命: 황제가 국왕을 책봉하는 문서)을 하사한 데 감사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수행 중 모친상을 당해 중간에 돌아온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수양대군은 서거정을 눈여겨보았다.

박팽년과 가까웠지만 사육신의 반대편에 서다


▎1. 서씨 문중 모임을 기록한 족회비(族會碑). / 2. 서침·서거정 등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인 숭현사(崇賢祠).
수양대군은 당시 서거정의 노모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비밀에 부쳤다. 그런데 서거정이 한밤중에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동료들이 까닭을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꿈에 달이 구름에 가려지는 걸 봤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다. 그래서 슬퍼 우는 것”이라고 했다. 세조는 감탄하며 “서거정의 효성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했다. 세조는 즉위한 뒤에도 당시 꿈을 일컬으며 “내가 그대를 등용한 것은 비단 재주 때문만은 아니다”며 가상히 여겼다고 한다.

서거정이 일생에 겪은 대사건은 수양대군을 수행한 이듬해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일 것이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명을 살해 또는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일이다. 서거정은 절의를 지킨 사육신·생육신의 반대쪽인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권람(權擥)의 편에 선다. 알고 보면 그는 사육신 박팽년과는 정난 이전에 서로 시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서거정이 이런 선택을 한 배경은 무엇일까? 서관태 팀장은 “사가정은 정난의 주역인 권람·한명회와 동문수학한 사이인 데다 권람은 더욱이 양촌의 손자였다. 학연과 혈연으로 이들과 얽혀 있어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정난 이후 방랑 시인 김시습이 그를 욕하지 않은 것을 보면 사가정은 세조 쪽에 섰지만 정치색이 옅은 순수 관료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런 인연 때문일까. 세조는 서거정을 공조·예조·이조 참의, 형조·예조 참판, 형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등 주요 관직에 잇따라 발탁한다. 신병주(55)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 왕명을 전달하는 외교문서 대부분을 서거정이 찬술토록 했을 정도”로 신임했다는 것이다.

1469년 50세의 서거정은 나라의 문장가로 조선의 헌법과도 같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한다. 국가의 통치 규범을 담은 기념비적 사업이다. 이후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고 정난공신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승승장구한다.

57세에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고 59세엔 홍문관 대제학을 겸하며 130여 권의 방대한 [동문선(東文選)]을 펴낸다. 1483년 64세 사가정은 정승 반열인 종1품 의정부 좌찬성에 올라 다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한다. 엄청난 저작이다. 문장가 서거정의 멘토는 누구였을까.

[국역(國譯) 사가집(四佳集)]의 해제를 쓴 송희준 박사는 “서거정의 삶과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외조부 권근과 자형 최항, 그리고 스승 유방선(柳方善)”이라고 정리한다. 서거정은 양촌 권근이 간 길을 삶과 의식 모두 따르려 했다는 것이다. 최항은 서거정이 문과에 급제했을 때 대제학으로 있었다. 또 서거정이 대제학이 됐을 때 최항은 영의정이었다. 서거정은 열한 살 손위의 최항에도 의지했을 것이다. 시문을 직접 가르친 스승은 유방선이다. 권람·한명회도 같이 배웠다.

구암서원 아래 서당골은 지금도 서씨 집성촌


▎1. 숭현사의 내부. 왼쪽에서 둘째 자리에 서거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2. 구암서원에서 내려다본 대구 시가지. 왼쪽으로 신천이 보인다. / 3. 구암의 유래가 된 제일중학교 교정의 거북바위. 대구10경의 제3경에 해당한다.
서거정이 서침에 이어 구암서원에 두 번째로 배향된 것은 1718년(숙종 44)이다. 지금 대구초등학교 자리인 연구산(連龜山)에 창건된 서원을 성명여중 옆 동산동으로 옮기면서다. 구암서원은 2003년 산격동 현 위치로 한 번 더 옮겨진다. 100주년을 맞아 확장한 인근 대구제일교회가 주변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구암서원 향사는 지금 대구 유림이 주관한다.

연암산의 8부 능선쯤인 구암서원 사당을 나와 돌계단에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천을 가운데 두고 대구 시가지가 파노라마로 한눈에 들어왔다. 장관이다. 야경은 더 아름답다고 한다. 대구에서 경치 좋은 10곳(大丘十詠)을 선정한 사가정이 다시 돌아본다면 새로 포함시킬 풍광일 것이다.

구암서원에서 산격동의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일대는 ‘연암 서당골’이다. 약 400년 전 달성 서씨가 터를 잡아 지금도 100가구쯤 남아 있는 마을이다. 강학소로 건립된 체화당( 華堂)과 위 서당인 용담재(龍潭齋), 아래 서당인 일신재(日新齋) 등이 보였다.

서 팀장은 사가정이 고향의 풍광을 노래한 ‘대구10경’을 다시 안내했다. 사가정은 칠언절구 한시 10수에 당시 대구의 아름다움을 담았다. 금호강과 연구산·도동측백수림·동화사·팔공산·침산 등지다. 이 가운데 연구산 거북바위를 찾아갔다. 대구향교 인근 제일중학교 교정이다.

“거북뫼 음전할사 삼신산만 같을 시고/ 거기서 나오는 구름 무심한 듯 유심하이/ 온 백성 다 바라시니 단비 아니 주시리”

대구10경 중 제3경인 ‘거북바위의 봄구름(龜岫春雲)’이란 시다. 거북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원 이름 ‘구암’은 여기서 유래한다. 대구10경의 제1경은 동촌 해맞이 다리 일대로 추정되는 ‘금호강 뱃놀이(琴湖泛舟)’다.

서거정은 기록상 벼슬하는 45년 동안 대구를 단 6차례 방문한 것으로 나오지만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했다. 그는 대구10경을 노래한 데 이어 한양에서 고향 출신의 후견인 역할을 한다.

1458년(세조 4) 대구 출신 도하(都夏)가 사가정을 찾아간다. 세조가 입회하는 과거시험이 치러지기 며칠 전이다. 도하는 그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도하는 성균관을 거쳐 서거정이 있던 사간원으로 배치된다. 자리를 잡은 도하가 고향으로 급제 인사를 내려간다며 작별하자 사가정은 시를 짓는다. 서문은 이렇다.

“우리 고향 대구는 경상도의 큰 고을이다. 그 산천에 서린 기운으로 보면 의당 영재가 나와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수십 년 이래 문헌은 쇠락하고 습속은 투박하여 문인재사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 이제 도군(都君)이 내려가 온 고을 사람들이 와서 보고 감동하면 기필코 그와 같이 되려 할 것이다.”

도하는 사가정이 문과에 급제한 뒤 14년 만에 배출된 대구 출신이었다. 그때까지 유일한 대구 출신 당상관(정3품 이상)이었던 그는 고향 출신 급제자를 학수고대했다. 양희지는 도하 뒤 다시 16년이 지나 대구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다. 사가정은 이렇게 누구보다 지방이 열악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서관태 팀장은 “그래서 사가정은 고향 유림과 한양을 연결하는 경재소(京在所) 책임자를 맡아 대구 인재를 후원했다”고 말했다. 대구 출신 인재 기근은 상환곡 이자 감면으로 대구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점차 해소된다.

사가정의 대구 생가와 고향이 궁금했다. 직계 조상이 살던 곳은 대구 인근의 경산이다. 사흘이 지나 3월 23일 다시 사가정의 고향을 답사했다. 이번에는 대구 서씨 문중 일을 보는 서윤석(67)씨가 길을 안내했다. 대구한의대학교 부근 경산시 유곡동 새못 옆에 사가정의 조부와 증조부 묘소가 있었다. 비석에는 ‘대구서씨양세묘단비(大丘徐氏兩世墓壇碑)’라고 새겨져 있다. 묘 2기 중 어느 쪽이 증조부인지 고증을 하지 못해 단비를 세웠다고 한다. 묘역 건너로 재실이 있고 주변에 후손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서윤석씨는 “본래 사가정의 증조부는 벼슬하느라 개경에 머물렀다”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왔을 때 올라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가정은 그 뒤 아버지가 조선에서 다시 벼슬을 하자 일찍이 한양에 거처한다.

종손(宗孫)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사가정은 불행히도 적자(嫡子)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양자를 들이지도 않고 서자(庶子)로 이었다. 때문에 적서 차별이 심했던 조선에서 후손은 사실상 출세 길이 막혔다. 사가정이 만든 [경국대전]의 규정이 굴레가 된 것일까.

생전에 후진 양성에 소홀해 평가는 냉혹


▎경북 경산시 유곡동에 있는 서거정의 조부와 증조부 묘소. 어느 쪽이 조부인지 고증이 안 돼 단비가 세워져 있다.
서거정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다. 당대에도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성종실록]에 관련 내용이 있다. 방대한 업적만큼은 상당부분 긍정적이다. 다양한 학설에 능통하고 문장은 일가를 이루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 사관은 그가 도량이 작고 후진 양성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했다. 사가정은 성리학 분야의 글도 전무하다. 그가 간 길은 군자나 선비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쓰고 편찬한 여러 저작은 분명 조선 전기의 체제를 정비하는 밑바탕이 됐다. 서거정은 [경국대전]의 서문에서 “지금부터 자자손손 훌륭한 군주가 나와 모두 이 경국대전을 준수하며 어기지 않고 잊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문명이 어찌 주(周)나라보다 융성할 뿐이겠는가. 억만 년 무궁한 왕업이 마땅히 장구하게 이어질 것”이라며 조선의 헌법을 잘 따를 것을 피력했다. 앞으로 개정될 헌법에 사가정이 걱정한 지방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될까.

[박스기사] 한유 본받으려 한 다작의 음유시인 - 하루에 4∼5수지어 6500수 다작 남겨

사가정 서거정은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특히 다작(多作)을 했다. 시를 짓는 것이 일상이었다. ‘詩成自笑(시성자소)’란 시에 그런 분위기가 잘 남아 있다.

一詩吟了又吟詩(일시음료우음시) 한 수의 시 읊고 또 읊으니
盡日吟詩外不知(진일음시외부지) 종일토록 시 읊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네
閱得舊詩今萬首(열득구시금만수) 지금까지 지은 시 만 수가 되니
儘知死日不吟詩(진지사일불음시) 죽는 날에야 읊지 않을 것을 잘 아네


사가정은 일기 쓰듯 시를 하루에 4∼5수, 많게는 10수 이상 짓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상을 보면 생각나는 대로 쉽게 바로 쓰는 편이었다. 중국 사신 기순(祈順)이 시를 주고받으며 “우리 같은 사람은 밤새도록 짜내어도 겨우 한두 편을 지을까 말까 한데 공은 서서 이야기하는 사이 주옥 같은 시를 짓는다”고 감탄했다. 사가정은 또 시상을 떠올리느라 술을 즐겨 마셨다.

그가 남긴 시는 [사가집(四佳集)]에 전한다. 한시만 대략 6500수. [사가집] 서문을 쓴 임원준(任元濬)은 “규모의 방대함은 이백과 두보에 근원하고, 시를 짓는 민첩함은 한유와 백거이에 드나들었다”고 표현했다. 갑자사화 간신 논란이 있는 임원준의 아들 임사홍(任士洪)도 아버지에 이어 서문을 남겼다.

사가정은 그런 문재(文才)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훌륭한 글을 선별해 [동문선]을 편찬했다. 그는 [동문선]의 서문에 “우리 동방 문(文)은 삼국시대 시작해 고려에서 흥성하고 조선에서 최고에 이르렀다”고 썼다. 또 “문은 도를 꿰는 그릇”이라며 자신의 문장론도 밝혔다.

사가정이 문장으로 본받고 싶어 한 인물은 당나라 한유(韓愈)였다. [성종실록]에는 사가정이 “훌륭한 문장으로 당나라 한유·유종원과 송나라 구양수·소식만한 이가 없다”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는 “사가정의 저술 곳곳에 한유의 문장을 인용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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