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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12)] 화이트 데저트를 찾아서 

태고의 바다내음 머금은 열사(熱沙)의 땅 

김미루 사진작가
수천만 년 전의 자연 그대로 간직한 이집트 서부사막…고대 이집트의 전설 깃들어 모험가들 부르는 환상의 땅

▎화이트 데저트의 환상적인 배경이 마치 시계를 수천만 년 전으로 되돌려 놓은 듯하다. 이곳은 태고의 바다였다.
카이로라는 도시가 본래 일하는 낙타들의 편의에 맞추어 설계되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후로, 이집트는 내가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으로 나의 여행 리스트의 우선순위 꼭대기에 있었다. 로마가 이집트를 다스릴 동안(BC 30~AD 395년, 비잔틴제국의 지배는 AD 642년까지), 말이 끄는 수레들이 도입되었으나, 당시로서는 매우 ‘모던’하다고 여겨졌던 수레들은 곧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풍토에서는, 낙타가 바퀴 달린 수레보다 훨씬 더 운반의 도구로서 효용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관습에 따라 말수레를 위한 널찍하고 곧은 불러바드를 만들었으나 그런 도시계획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올드 카이로가 현대문명의 내연 기관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작고 꼬불꼬불한 비포장 골목길로 구성된 채로 남아 있던 이유였다. 낙타의 발바닥은 말발굽과 달리 부드러웠기 때문에 딱딱한 지표면은 적합하지 않았다.

피상적인 시대감각밖에 지니지 못한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아랍지역은 바퀴 달린 운송수단의 발전역사에서 매우 후진되어 있다고 기술할 뿐이다. 그래서 대체로 이들을 후진국가라고 규정해 버리곤 한다. 이것이 바로 ‘직선발전사관’의 폐해인 것이다. 서구식 발전방식이 곧 전 인류의 직선적인 발전의 이데아가 되어야만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서구식 운송수단을 채택하지 않는 것이 더 옳은 것이다. 서구식 운송수단은 불필요한 노동과 비효율성의 문제를 야기할 뿐이다. 낙타는 그 풍토와 기후조건 아래서는 가장 선구적이고 진보적인 방식으로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오늘의 자본주의 발전방식이나 인공지능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말하는 ‘발전’은 거부될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발전을 추구하는 자들의 강권이 너무도 강력해서 그 연계된 산업구조나 삶의 방식 전체를 컨트롤해 버리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인민대중은 그저 순응할 뿐이다. 대부분의 발전은 안 할수록 좋은 것이다.

대자연의 향수에 젖어 다시 사막으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실제 주인공인 헝가리 백작 래슬로 알마시. 영화에선 랄프 파인즈가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상념을 간직한 나는, 이집트에 잔존하고 있는 낙타에 의존하고 있는 문화형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화이트 데저트(White Desert: 카이로 서남쪽의 파라프라 지역)라는 숨 막힐 듯 충격적인 사막의 이미지를 만나게 되었다. 보통 우리가 백악(白堊)이라 부르는 석회질 암석의 우뚝우뚝 서있는 모습이 너무도 하얗게 빛나서 마치 그것은, 그 뜨거운 광활한 사막 위에 눈사태가 덮친 듯한, 결합되기 힘든 이미지의 변태적 광란처럼 보인다. 백악기의 지질변동이 이러한 절묘한 스펙타클을 지상에 창조해 놓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내가 요르단의 베두인들과 3주간의 공생 체험을 완료하고, 다시 3주가 지난 후에 일어났다. 때는 2012년 9월이었다. 나는 와디 럼에서 암만으로 돌아온 후, 그곳의 도시 엘리트들과 며칠간의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베를린에 가서 나의 몇 작품을 전시하는 아트 쇼를 했다. 그리고 베이루트로 돌아오는 길에 이스탄불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베이루트에는 나의 친구 패밀리에게 맡겨놓은 짐이 있었다.

베이루트에 돌아왔을 때쯤, 나는 완전히 도시사람으로 환원되어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사막을 체험하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이트 데저트의 이미지를 접하는 바로 그 순간 나의 행보는 결정됐다. 일주일 후, 나는 카메라 장비 일체를 패킹하고 카이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도시의 광경은 모조리 생략하기로 하고, 카이로공항에서 직접 ‘서부사막(Western Desert: 나일강 서부의 대사막을 일컫는 고유명사)’으로 직행했다.

이 여행을 위해 그토록 짧은 시간에 세부계획까지 완결짓는다는 것은 실로 하나의 도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어디에나 관광산업이라는 것이 있다. 화이트 데저트는 2002년 이탈리아 환경기관의 도움을 받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주변의 오아시스 타운에 사는 주민들의 소득에 도움을 주는 에코관광 방식으로 개발됐다. 와디 럼에 갈 때처럼, 캠핑여행을 위한 로컬 투어 가이드를 온라인에서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와디 럼의 경우와 화이트 데저트의 상황은 눈에 띄는 차이가 있었다.

첫째, 가이드들은 와디 럼에서처럼 그 보호구역 내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보호구역 내에는 일절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호구역 내 광야에는 반영구적 캠프조차 일체 설치되어 있질 않다. 화이트 데저트 보호구역은 면적이 3010㎢에 이르는데, 그것은 와디 럼의 네 배나 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그곳에는 베두인의 정착지가 일절 없었다. 1년 강우량이 제로에서 15㎜에 불과한 극소량이다. 그리고 요르단과 이집트는 모든 것이 스케일이 다르다. 국토의 면적이 요르단의 11배가 되며, 사막도 전 국토의 3분의 2가 된다. 보이는 모든 것의 광활한 느낌이 아기자기한 요르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고대의 풍요 잠들어 있는 광활한 땅


▎카이로 나일강변. 주위에 우뚝 솟은 건물들이 서울의 한강변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집트의 광활한 사막 중 리비아 쪽으로 펼쳐진 것을 서부사막이라 부르는데, 사하라사막의 동쪽임을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만, 나일강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서부사막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일강에서 홍해까지 펼쳐진 사막은 동부사막(Eastern Desert)이라고 부른다.

방대하고 메마른 땅이지만 다양한 지질학적 형성층과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풍요로운 고고학적 유물들, 그리고 고대 이집트 문화의 색다른 질감의 어필 때문에, 이 서부사막은 헝가리의 귀족이며 탐험가이자 비행사인 래즐로 알마시(Laszlo Almasy, 1895~1951)와 같은 20세기 서구 탐험가들의 모험심과 환상을 자극했다. 알마시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는 미카엘 온다체(Michael Ondaatje: 1943년 스리랑카에서 태어난 캐나다 시인, 소설가. 캐나다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로 꼽힌다)의 소설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2년)의 주인공으로 둔갑했고, 그 소설은 1996년 안토니 밍겔라(Anthony Minghella, 1954~2008) 감독에 의해 소설과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져서 9개 부문의 오스카상을 획득하며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그 광막한 사막을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진입한다는 것은 진실로 깡다구 좋은 아이디어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요르단과 레바논의 친구들로부터 젊은 여성이 혼자서 이집트를 여행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는 경고성 이야기를 너무도 많이 들었다. 강간이나 여타 끔찍한 공포의 실례를 계속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유니크한 사막의 풍경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는데,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선 인터넷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개의 지역 관광회사를 접촉했다.

나는 우선 여행객들이 여행소감을 쓰는 리뷰사이트와 다른 온라인 가이드들을 세밀하게 한 줄 한 줄 읽으며 점검에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받아본 답장의 전문성을 평가하면서 결국 두 회사로 내 선택의 범위를 좁혔다. 여기저기 모색해 보면서, 스스로 회사를 꾸려서 온라인상에 자기 회사를 책임 있게 선전하는 로컬 가이드들은 아무래도 더 성실하며, 그들의 명성에 먹칠해 생계를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응답은 한 관광오퍼레이터로부터 왔는데, 그는 일반 관광객에게 매우 인기가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러나 그는 차를 스스로 몰지 않고, 운전수와 가이드를 따로 두고 있었다. 두 번째 응답은 하마다(Hamada)라는 남성이었는데 그는 명백하게 자기 회사를 가지고 있었고 모든 관광객을 본인 스스로 데리고 다니면서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하마다에 대한 이전의 관광객들 평을 읽어보고, 그와 수차례에 걸쳐 이메일을 교환해 본 결과, 안전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나의 프로젝트가 무엇이며, 왜 그 모든 것이 절대적 프라이버시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했을 때, 그는 나에게 프랑스 사진작가의 웹페이지를 연결시켜 주면서, 이 사진작가가 사막에서 세 명의 남성 누드모델과 ‘예술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을 자기가 도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마다의 이메일을 통해 그 링크를 클릭해 보니, 그가 말하는 ‘예술’이란 진짜 진지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위한 호모 에로틱한 누드사진의 상업적 컬렉션이었다. 이 어이없는 광경은 나를 한바탕 낄낄거리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라! 극보수적인 무슬림 마을 출신의 성실한 사나이가 세 명의 게이 모델을 데리고 나신을 가죽끈과 체인으로 휘감으며 엽기적인 사진을 찍고 있는 불란서 사진사를 돕고 있는 장면을! 계속 낄낄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장면이 그의 문화적 관념에서 너무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마다는 그가 무엇을 돕고 있었는지 전혀 감이 없었을 것 같다. 하여튼 나로서는 그의 체험과 내가 요구하는 것이 맞아떨어지는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마다는 자기야말로 나보다도 더 조심을 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방문객들은 그냥 지나칠 뿐이지만, 자기는 이곳에서 계속 생계를 꾸려야 하고 누군가 자기가 이런 사진작업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맥락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는 사단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말했다. “저는 결혼도 했고 아들 하나가 있으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우리 습속에서는 여성이 그런 예술을 할 수 없지만, 저는 여행객들을 많이 상대해서 그들의 문화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나는 당신을 판단하지 않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말은 어떠한 아름다운 말일지라도 쉽게 신뢰해서는 안되지마는, 나는 직감을 따랐다. 하마다? 오케이! 나는 그와의 여행을 예약했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시작된 모험


▎카이로 시내를 벗어나면 도로 주변으로 광활한 사막이 펼쳐진다. 바하리야로 가는 길.
2012년 9월 29일, 아침 늦게 카이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낡은 봉고차 앞에서 내 이름을 쓴 사인보드를 들고 있는 운전사를 발견했다. 하마다는 카이로의 운전사 한 명으로 하여금 나를 픽업하고 남서방향 사막으로 직행케 하고, 다음날 아침부터 바로 사진작업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나는 낙타들과 사막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그 근처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후에 바로 카이로로 직행해 도시와 관광명소를 구경하고 베이루트로 가서 내 짐을 모두 챙긴 후에 뉴욕행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예약해 놓았다.

촉박한 여정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때에는 이번 서부사막으로의 여행이야말로 사진 몇 컷을 건지기 위한 순발력 있는 단 한 번의 프로페셔널 트립으로 내 머릿속에 규정되어 있었다. 내가 이곳에 두 번이나 더 오게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내가 하나의 오묘한 낙타와 깊은 정이 들게 되어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그 낙타는 나와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슬픈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만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연상케 하는 이 기구한 비극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쓰게 될 것이다.

카이로에서 바하리야 오아시스(Bahariya Oasis: 서부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까지 가는 데 5시간가량 걸린다. 넓게 펼쳐진 어반 정글을 지나 나일강을 건너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광경은 매우 낯익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하다. 아하, 그랬구나! 나일강변의 광경은 한강변을 달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기자(Giza) 외곽을 지나는데 반쯤 지어진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아파트군 너머로 그 유명한 기자의 대피라미드군 세 꼭지가 내 시선을 자극한다.

말끔한 도시형 하이웨이가, 생명체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불모의 땅을 외롭게 달리는 한길로 변하기 전에 우리는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지구의 끝처럼 보이는 지역을 지나야 했다. 짓다가 만 거대한 빈민 아파트단지처럼 보이는 곳에서 쓰레기더미가 난무하고, 도둑개떼들이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모래바람만 휘몰아친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이러한 도시의 죄악이 ‘서구식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여기저기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판자촌을 무리하게 헐어 버리고 대형아파트촌을 짓는 대한민국의 모습도 결국 대동소이할 것 같다.

나는 텅 빈 미니버스의 패신저 시트에 조용히 앉아 이런 인류문명사의 페이지들을 넘기고 있었다. 드라이버는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데 영어를 하지 못했다. 나에게 주어진 특권은 침묵밖에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단 하나의 질문은 내 아이폰이 얼마나 되냐는 것이다. 아이폰이야말로 전 세계 젊은이들의 보편적 관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요르단의 베두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딜 가나 나는 이런 질문에 봉착했다.

자동차여행을 하는 긴 시간 내내, 나는 히잡을 쓰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것은 완벽하게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때는 여성 혼자서 이집트에 여행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나에게 공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히잡이라도 쓰면 변장의 효과가 있어 비무슬림 외국여자에게 덮치는 흉악범들에 대한 좋은 보호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들이 나에게 계속 들려준 호러 스토리들은 결코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질 못했던 것이다. 나의 행동을 더욱 어색하게만 만들었던 것이다. 요르단의 베두인들은 순박해서 내가 그들의 토속 복장이나 히잡을 쓰면 그냥 좋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무슬림이 아니라 할지라도 히잡을 쓰는 것은 그들과 친해지는 좋은 방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로와 같은 도시환경 속에서는 사람들은 히잡을 쓴 나의 모습을 혼란스럽게 바라보거나 경멸하는 듯했다. 무슬림도 아닌데 왜 베일을 쓰냐는 것이다. 어떤 이집트인들은 무슬림도 아닌 외국인이 자기네 나라에서 베일을 쓰는 것을 매우 언짢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외국인의 행위 자체가 자기네 문명에 대한 공포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개화된 도시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관광객이 왜 베일을 쓰지? 자기네 나라에서는 안 쓸 것이 뻔한데. 우리는 타국의 문화습관을 존중할 줄 알아. 저 관광객년들은 우리가 무식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뿐만 아니라, 이집트 인구의 10%가 콥트의 초대교회 전통을 고수하는 기독교인들이다. 그래서 이집트 여인 중 소수그룹은 아랍문화에서 벗어나 있고 베일을 쓰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들을 인지했을 때, 나는 히잡을 벗었다. 그러나 나의 상황은 그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다. 나의 히잡 솜씨는 너무 정교했고, 원주민들도 나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로부터 온 무슬림 여인이라고만 생각했지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로 향하는 시간여행


▎하마다와 그의 자동차. 캠핑도구를 지붕 위에 싣고 다니며 날이 저물면 야외 노숙을 한다.
자동차로 4시간을 열심히 달릴 동안, 평평하고 단조로운, 바위와 모래와 먼지의 랜드스케이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갑자기 기적적으로 야자수의 푸른 숲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고대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착지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하리야 오아시스였다. 이름 그대로 그것은 오아시스였다.

영화나 만화에서 보아온 오아시스란 모래사막 한가운데 조그만 연못이 있고 주변에 종려나무들이 둘러 심어져 있는 광경이다. 물론 그런 광경 그대로이겠지만, 여기 오아시스란 대규모의 함몰지대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마을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엄청 큰 대규모 오아시스인 것이다. 바하리야 오아시스는 난형의 거대한 함몰지역인데 그 함몰의 규모가 길이 94㎞, 폭 42㎞에 전체 면적이 2000㎢나 된다.

이 함몰지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규모 화석수가 있다. 이 화석수를 누비안 사암대수층이라고 부른다. 화석수는 쉽게 말하면, 그 자체가 화석이라는 뜻이다. 6000만 년 전의 물이 그대로 화석화되어 존재하는 지하수다. 이 물은 석유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한번 퍼서 먹으면 사라지고 만다. 이 지하수는 매장량이 15만㎦ 정도 되는데, 옛날 우리나라 동아건설이 참여했던 대수로 공사라는 것도 이 화석지하수를 관으로 유통시키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에는 호수와 샘물이 여기저기 많아 여러 마을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마을이 바위티(Bawiti)인데, 바위티에만 인구가 2만 명이 넘는다. 이 바하리야 오아시스는 당연히 풍요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석기시대로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으며, 중왕조(BC 2040~BC 1650) 시절부터 이 오아시스의 기록이 나타나는데, 그 기록들은 이 지역에서 대추(대추야자의 열매인데 우리 대추와는 좀 다르다)와 같은 농산물이 재배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대추는 지금도 많이 재배되고 있다.

이 오아시스를 알렉산더 대제가 순행했다는 것이 상당히 근거 있는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는 금도금 미라의 계곡(Valley of the Golden Mummies)이라는 대규모 공동묘지가 있다. 이 묘지는 그레코-로망 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1996년 자히 하와스(Zahi Hawass: 이집트의 고고학자로 고고학청 장관을 지냈다)에 의해 최초로 발굴됐는데, 그의 팀이 발굴한 것은 250기 정도였지만, 약 1만 개의 미이라가 그 계곡에 은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레코-로망 시대에 이 지역에서 죽은 사람을 미이라로 만드는 산업이 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완벽하게 균형을 갖춘 미라가 되면 호루스가 망자를 데리고 가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만나게 해준다는 전설이 있다. 이 두 신을 만나면 이집트의 푸른 초원 파라다이스에 환생해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미라는 금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하여튼 이집트의 고고학적 발굴 가치는 무궁무진한 것 같다. 이 발견은 바하리야에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켰고, 더 많은 관광객이 이 사막으로 흘러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하리야 오아시스는 화이트 데저트 관광을 위한 베이스캠프 노릇을 하게 되었다.

눈 내린 사막 같은 환상의 이미지


▎마치 설산의 정상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화이트 데저트의 풍경.
하마다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아주 부드럽고 친절한 성향의 사람이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의 평균치에 비해 좀 통통한 느낌이 들었다. 바위티 입구로 그가 마중을 나왔다. 나는 아주 소박한 인사만을 나누고, 재빨리 미니버스로부터 그의 토요타 4륜구동으로 옮겨 탔다.

전 여행기간 동안 나는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요르단보다 더 거칠고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사람의 낯선 사람에게 모든 신뢰를 걸어야만 했다. 3일 밤낮을 이 한 사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무리 친절하고 예의를 갖추어도 나는 좀 초조했다. 혼자서 외롭게 여행하는 여성에게 보통 있는 과민증 같은 것이리라.

개인적 정보를 별로 나눌 기회도 없이, 우리는 오아시스를 지나 바로 사막으로 진입했다. 이미 해는 지기 시작했고, 문명의 간판들은 사라졌다. 나는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정적이 깔리기 시작하자 이유 모르게 편안해졌다. 나는 검은 현무암에 덮인 끝없이 펼쳐지는 바위산 위로 하늘이 점점 크림슨 색깔로 변해가는 황홀한 광경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지역민들이 수정산(Crystal Mountain)이라고 부르는 바위 앞에 차를 세웠다. 그 바위는 자연적으로 생긴 아치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한 사람이 걸어서 통과할 정도의 형상이었다. 캘사이트 크리스탈 조성물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기괴한 지질학적 기암이나 조성이 나타나는 광경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차로 들어가 전진을 재촉했다. 더 깊숙이 차를 몰자, 광경은 변화를 일으켰다. 현무암은 하이얀 백악으로 변해 갔다.

우리가 화이트 데저트에 도착했을 때 석양은 이미 떨어졌다. 모함메드라 불리는 낙타몰이꾼이 낙타 두 마리를 데리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낙타몰이꾼은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하려고 한 마리의 낙타를 타고 왔을 것이다. 원주민들은 이 화이트 데저트를 두 부분으로 구획한다. 옛 것과 새 것으로. 우리가 온 곳은 옛 화이트 데저트였다. 옛 것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백악조성이 대체적으로 작고 둥글고, 색깔이 베이지색이기 때문이다. 베이지색 백악은 새 화이트 데저트의 백설 같이 희고 큰 백악조성에 비해 좀 낡은 것처럼 보인다. 그 이름은 실로 형성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옛 것이나 새 것이나 모두 수천만 년 전에 생긴 것이다. 제 3기의 에오세(Eocene Epoch), 우리가 시신세(始新世, 약 6000만~3000만 년 전)라고 번역하는 시대의 산물이다. 이 시기에 이집트의 중부 전체와 북부 일부분은 대양의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이 대양이 말랐고 또 융기현상이 일어났다. 화이트 데저트는 퇴적암의 두꺼운 층인데, 백악과 사암이 주종을 이룬다. 미네랄과 바위 종류에 따라 침식이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고 바위형태도 기기괴괴한 모습으로 형성되었다. 백악기로부터 시신세에 걸친 유적의 장관을 여기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연에서의 아늑한 밤


▎하마다가 만든 지붕 없는 텐트. 반영구적 캠핑 시설을 설치할 수 없어 간편한 캠핑장비로 숙소를 대신한다.
하마다는 모래지역에 L자 모양의 매우 화려한 텐트를 세웠다. 천정을 세울 필요가 없으니까 L자 라는 것은 L자 형의 벽을 두른 것이다. 한 면은 차와 연결했고 돌아가면서 지지대를 세우고 화려한 천을 둘러 쳤다. 자동차에 한 면이 고정되어 바람이 불어도 안정성이 있었다. 천장이 없어도 L자형 벽만으로도 매우 따뜻하고 안온했다. 강우의 가능성은 전무했다. 마지막으로 하마다는 바닥에 양탄자를 몇 개 깔았다. 그리고 두 장의 폼 매트리스를, 하나는 바닥에 깔고 하나는 벽면에 세웠다. 궁둥이에 깔고 등을 기대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다리 접히는 상을 펴서 놓았다.


▎하마다가 직접 요리해 내놓은 사막의 성찬.
이집트의 오아시스 사람들이 사막에 임시처소를 만드는 방식의 기민성과 효율성에 나는 경탄했다. 요르단의 베두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텐트를 친 적이 없다. 와디 럼에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자연동굴이나 바위절벽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보호구역 내에도 관광객을 위한 반영구적 가설 텐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화이트 데저트에는 이 모든 것이 엄금되어 있었다.

하마다는 작은 프로판가스통을 꺼내서 그 위에 화로를 연결했다. 그리고 냄비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져온 채소들을 볶았다. 그리고 모하메드는 캠프 옆의 모래바닥에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양념에 젖은 닭을 굽고 납작한 빵을 데우기 시작했다. 요르단에서 내가 먹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빵이었다. 닭을 굽는 냄새가 어찌나 후각을 자극하는지, 실제로 배고픈 것보다 더 배고프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여우들이 우리의 식사를 공유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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