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총력특집 | 김영희 대기자의 한반도 워치] 6·12 북·미 정상회담과 한반도의 미래 

두 강대국(미·중)을 국익에 활용할 시점이다 

김영희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前 중앙일보 대기자)
한반도 주변 권력 구도와 기존 질서 전면 개편할 대변혁 ‘꿈틀’ … 보수와 진보 모두 눈앞의 현실을 액면 그대로, 초당적으로 읽어야

▎2월 9일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북한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은 살얼음판이요 가시밭길이다. 그 길은 일직선(linear)이 아니고 지그재그(zigzag)다. 5월 16일 열기로 합의된 남북 고위급회담이 밤새 북한의 일방적 통보로 취소된 것도 평화의 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북 협상의 문턱을 낮추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존 볼턴은 강경파 본능을 발휘해 문턱을 높였다. 비핵화의 절차를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한·미 연합 공중훈련에 지금까지 한 번도 동원하지 않은 F-22 랩터 스텔스 전폭기를 무려 8대나 참가시켰다. 어떤 형식으로든 북한의 반발은 예상된 것이었다.

문제는 6·12 북·미 정상회담이 무사히 열릴 것인가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암시를 던졌다. 그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건 아니지만 회담 분위기를 살리자면 서울-워싱턴-평양 정상들 간의 전화통화, 특사 급파 같은 분위기 반전의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본질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판단이 맞기를 기대한다. 한반도 평화는 남북한의 한국인이 역사의 객체에서 역사의 주체, 운명의 주인이 될 단군 이래의 기회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출발점은 평창이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판이 이렇게 커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작년 말까지의 한반도 위기가 너무 급박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의 북한 붕괴론자들이 때를 만난 듯 환호작약했다. 2월 평창에서 떠나 6월 싱가포르 김정은-트럼프 회담까지 가는 과정을 보면 북한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 정착의 과정이 얼마나 숨가쁘게 질주하고 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가 있다.

2월 9일 평창올림픽 개막→3월 25일 김정은-시진핑 회담→3월 31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당시는 중앙정보국장) 평양서 김정은과 회담→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5월 7일 김정은-시진핑 다시 회담→5월 9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김정은과 다시 회담, 북한에 억류됐던 3인의 미국인 석방, 트럼프 새벽 3시에 워싱턴 근교 앤드루스 공군기지서 그들을 파격 영접→5월 9일 도쿄 한·중·일 정상회의, 판문점선언 지지 성명→5월 22일 워싱턴서 한·미 정상회담→6월 12일 싱가포르서 북·미 정상회담→올가을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 예정.

지금 한국인 모두가 북한과 한반도 전문가가 됐다. 신문과 방송이 쏟아내는 뉴스가 한국인들의 눈과 귀를 잡고 놓아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술자리의 화제도 자연스럽게 김정은이요 트럼프다. 꼬리를 물고 열리는 회담들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우선 눈이 즐겁다. 판문점회담 때 남북의 두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남북으로 한 번씩 함께 넘는 장면은 한국 역사책의 어떤 기술보다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새벽 3시. 트럼프 대통령이 부인 멜라니아, 마이크 펜스 부통령 부부, 백악관 안보보좌관까지 대동하고 워싱턴 근교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김정은이 석방해 폼페이오가 데리고 온 3명의 미국인 억류자를 기내에까지 올라가 직접 영접했다. 그런 퍼포먼스는 어떤 탁월한 영화감독이 만든 영화의 명장면 못지않게 미국인과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들을 감전시켰다. 그것이 트럼프의 특유의 국내용 극장정치의 한 컷이었다고 해도 역사적 의미는 떨어지지 않는다.

북, 경제개발에서 정통성 찾다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그의 나라를 현실의 세계로 이끌어내고 싶어 한다, 그와 나는 세계 평화를 위한 아주 특별한 순간을 함께 만들 것이다.” 김정은도 폼페이오와의 회담을 마치고 트럼프의 새로운 대안을 “높이 평가한다, 만족한다”고 말했다. 자고 나면 달라지는 사태를 기승전결로 설명하는 것은 식상하고 지루하다. 그래서 핵심 포인트별로 현상을 진단해 보겠다.

1. 김정은은 그의 비핵화 의지를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변했는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소식은 전 세계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다.
분명히 변했다. 그의 비핵화 의지가 이중, 삼중으로 확인되고 있다. 핵 문제는 미국과의 협상 대상이지 한국과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종래의 입장을 버리고 판문점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선언적 합의를 한 것은 김정은 변화의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다. 5월 23~25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는 김정은 위원장의 가시적인 선행 조치다. 그러나 핵·미사일 문제에 가려서 제대로 보도되지 않은 혁명적인 변화가 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지난 3월 김정은 체제를 떠받쳐 온 핵·경제 병진정책을 수정해 경제 개선에 노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김정은 체제는 핵과 경제의 두 바퀴로 굴러 왔다. 핵이 빠지면 경제라는 하나의 바퀴로 굴러가야 한다. 자칫 김정은 체제의 정통성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쌀밥과 고깃국”을 먹게 하는 경제 개선에서 정통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해서 없는 정통성을 산업화로 창출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자면 “빈집에 황소” 들어가는 규모의 달러가 들어와야 한다. 그리하여 경제를 10~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연평균 10% 이상 성장시켜야 한다.

달러는 어디서 조달하는가?

첫째, 남북 경제협력을 현실화해 한국 기업들의 대북 투자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북한의 인프라 분야는 한국 기업들의 잠재적인 블루오션이다. 합작 김치공장, 공동 어로, 임진강 하구 공동 모래 채취 등은 한국의 중소기업들에 새로운 먹거리가 될 전망이다.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개성에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것은 개성공단 재개를 시야에 둔 것이기도 하지만 더 광범위한 경제협력을 위한 조치다. 서해 경제 클러스터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선행 조치라고 하겠다. 2007년 10·4 공동선언에서 윤곽이 그려진 서해 평화 번영의 비전은 궁극에 가서는 인천~개성~해주를 잇는 경제벨트로 발전, 중국 산둥반도와 발해만을 끼고 한국과 중국의 지중해로 발전할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둘째, 비핵화가 성사되면 북·미 관계 정상화가 뒤따를 것이다.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면 한국과 중국의 지원으로 북한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 아시아 개발은행(ADB),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으로부터 거액의 금융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IMF와 세계은행은 미국이, ADB는 일본이, AIIB는 중국이 지배한다. 세 나라 모두 북한을 보통국가로 변화시켜 국제사회로 유인해 내는 데 적극 협조할 나라들이다.

돈은 이념도 국경을 모른다. 남북 경제협력으로 북한이 투자의 신천지로 떠오르면 미국·일본·유럽 기업들의 투자 러시가 일어날 것이다. 대동강변의 트럼프타워가 문제가 아니라 평양의 새 번화가 여명의 거리에 스타벅스와 맥도날드가 들어서는 것도 공상(fantasy)만은 아니다. 마셜플랜은 전후 유럽 복구의 기반이었다. 북한판 마셜플랜도 기대할 수 있다.

김정은, 상대가 트럼프라면 흥정이 성립된다는 자신감

셋째, 일본은 북·미 수교에 바짝 뒤따라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할 것이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박정희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아 가장 우선적으로 한 사업이 포항제철 건설이었다. 북·일 수교가 실현되면 북한은 일본으로부터 최소한 200억 달러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납치자 문제의 만족스러운 해결이다. 비핵화 같은 통 큰 결단을 내린 김정은이면 납치자 문제에서 일본에 양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정은은 2015년 8월 15일 북한의 표준시간을 갑자기 30분 앞당기는 기이한 조치를 취했다. 자주국가인 북한이 일본과 같은 시간을 쓸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던 김정은이 이번에 북한 표준시간을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 한국 시간과 맞췄다. 이것은 정상국가의 인상을 주려는 김정은의 노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다.

2. 무엇이 김정은을 변화시켰는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압박에 김정은 위원장이 위기의식을 높였다는 관측이 있다.
첫째는 경제다.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은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1차 회의에서 북한 인민들에게 지상낙원을 약속했다. “인민들 모두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고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살게 하겠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살아 온 북한인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수십만 명이 아사한 참상뿐이다. 2011년 말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김정은은 다음해 당 중앙위원회 제7기 2차 회의에서 할아버지가 못 다 이룬 꿈을 이룰 결의를 보였다.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

그러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매진해 강도 높은 국제 제재를 받는 상황에서 인민들이 허리띠를 풀고 먹고살 정도로 경제가 개선될 수는 없었다. 지난 2~3년 동안 장마당의 전국적인 확산과 낮은 수준의 시장경제 요소 도입으로 북한 경제가 현저하게 개선됐다는 것은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러나 점점 조여 오는 국제적 압박, 폭을 늘리는 중국의 국제 제재 참가,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끊는 나라가 속출하는 국제적 고립 속에서 경제를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20개가 넘는 경제특구를 만들었지만 투자자가 없다.

다른 한편, 한국계 학자로 북·미 물밑 접촉에 직접 참여해 온 토니 남궁 박사의 말도 경청할 만하다. 그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의 전략 전환은 경제 제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난 1년 동안 북·미 사이에 진행된 소통(communications)의 결과라고 말했다. “김정은은 상대가 트럼프라면 흥정이 성립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웠다.” 실제로 지난해 6월 북한에 억류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망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북한과 미국은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 경천동지할 거사를 벌이기 직전까지 갔었다. 표면에서는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면서 북·미는 북한의 변화와 북·미 관계의 빅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데에 국제정치의 스릴이 있다.

트럼프의 초강경파 전진 배치에 김정은 긴장

둘째, 미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8년 신년사에서도 “핵 단추가 내 책상 위에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북한은 핵탄두 소형화·경량화와 미국을 사정권에 둔 ICBM 개발로 대미 억지력도 확보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한 해, 특히 하반기에 들어와서는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 수위가 나날이 고조됐다. 지난해 말 중국으로부터도 미국의 선제공격 의지가 진지한 것이라는 경고성 메시지가 날아왔다.

김정은 위원장은 순발력 있게 평창 겨울올림픽에 착안했다. 평창올림픽을 민족적 대제전으로 만든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명분이었다. 그는 중국·미국·일본에서 최고위 인사들이 올림픽 개·폐막식에 참석할 것을 예상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평창에 보낸 것이다. 김여정이 가지고 온 김정은 위원장의 문재인 대통령 방북 초청은 판문점 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보고, 판문점 정상회담은 결국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3월 말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회담한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5월 9일 다시 평양을 방문,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 의제, 그중에서도 비핵화의 방법과 과정을 조율했다. 그 뒤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자세는 봄바람으로 바뀌었다. 3명의 억류 미국인을 석방해 폼페이오와 함께 귀국시킨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은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국민들에게 자랑할 최고의 선물이었다.

3. 김정은은 왜 시진핑을 40여 일 사이에 두 번이나 찾아갔는가?


▎2월 11일 서울에서 열린 북한예술단 공연을 관람 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 사진:연합뉴스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김정일은 김정은에게 중국을 너무 믿지 말라는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후 연달아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릴 때 중국 외교부의 고위 관리가 필자를 접촉했다. 그때 필자는 “제발 김정은 위원장을 중국으로 초청 좀 하라”고 말했다. 중국 관리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초청을 해도 오지 않습니다.” 친중파의 장성택 처형, 중국의 보호를 받는 김정남 독살이 북·중 관계를 더욱 후퇴시켰다.

그러던 김정은 위원장이 3월 말과 5월 초 40여 일의 시차를 두고 두 번이나 중국으로 가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났다. 시 주석의 연내 방북도 예상된다. 평창 때의 돌변과 닮았다. 가능한 추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안보 라인을 대북 강경파 위주로 개편한 데 김정은 위원장이 긴장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내의 대화파의 선봉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폼페이오로 교체했다. 김정은 위원장을 두 번 만나기 전의 폼페이오는 대북(對北) 강경파였다. 그는 중앙정보국장 때 참수작전과 정보 수집을 포함한 북한 문제를 전담할 한국임무센터(Korea Operations Center)를 신설, 김정은-폼페이오 회담에 동석한 한국계 앤드루 김을 소장에 임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파인 허버트 맥매스터 안보보좌관을 더욱 초강경파인 존 볼턴으로 바꿨다.

트럼프 재선의 ‘필요충분조건’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마주 앉을 때 그의 좌우에 폼페이오와 볼턴이 앉은 장면은 김정은 위원장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그림이다. 다행히 폼페이오는 두 번의 만남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이 듣던 것과는 달리 합리적인 대화 상대라는 인상을 받았다. 폼페이오의 호감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돼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김정은은 존경할 만한 훌륭한 인물이다. 그와의 만남은 세계를 위해 멋질 것” 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좋은 징조다.

둘째는 시진핑으로부터 트럼프와의 회담 전략의 조언을 듣고 중국을 업고 트럼프를 만나는 것이 회담 전략상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트럼프의 인간성, 스타일, 그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해서는 판문점 정상회담의 저 인상적인 도보다리 위의 단독 대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도 소상히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은 시진핑의 관점도 듣고 싶었을 것이고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 전개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중국의 큰 그림이 궁금했을 것이다.

특히 김정은-시진핑의 두 번째 회담에서 북·중 혈맹관계가 강조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시진핑으로서는 한반도 평화 정착 과정의 초기에 중국이 참여할 기회를 얻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이 여전히 북한의 후견국이라는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등한 입장에서의 협상을 위해 북한이 중국의 피후견국이라는 달갑지 않은 대외적인 이미지를 감수해야 한다.

4. 김정은을 폭군으로 매도하던 트럼프가 왜 김정은을 만나는가?


▎평양 대동강변의 미래과학자거리에 들어선 초고층 아파트. 북한 당국은 경제 개선에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 사진:노동신문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치러야 한다. 2020년 두 번째 임기에 도전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백인(poor white)들 말고는 믿을 만한 지지층이 없다. 그가 대선에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한 특검의 수사가 진행 중이다. 멕시코와의 국경선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공약으로 미국 내 소수민족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 이란과의 핵합의 파기는 유대계를 제외한 리버럴(liberal) 진영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냄새를 풍기는 미국제일주의도 미국 유권자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트럼프의 보호무역 정책은 미국 경제에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이런 이유로 인상적인 업적이 필요하다. 북핵 문제가 그에게는 고마운 존재다. 특히 2017년 11월 북한의 화성-15호의 성공적인 발사로 미국 본토가 핵을 탑재한 사정거리 1만3000㎞의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된 것은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정치적인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대선 유세 기간 중에도 김정은과 만나 햄버거를 먹으면서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다면 2020년 그의 재선은 거의 확실하다. 공명심이 강한 나르시시스트(narcissist), 자기도취에 빠진 과대망상증 환자(megalomania)에게 북핵은 맞춤형 이슈다. 그의 세 전임자들,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가 실패한 북한 비핵화를 실현해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까지 체결된다면 우리는 트럼프라는 충동적인 미국 대통령의 나르시시즘과 과대망상을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정상 간의 포괄적·선언적 합의→실무급의 단계적 해결로 타협

5. 비핵화의 과정은 어떤 것인가?


▎북한은 4월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을 결정했다. / 사진:조선중앙통신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리비아 모델이라고 하는 선(先) 비핵화, 후(後) 보상을 주장한다. 2011년 카다피가 맞은 처참한 최후를 본 북한은 핵 폐기를 먼저 하는 리비아식에는 경기를 일으킨다. 북한에 리비아는 반면교사다. 또 하나의 문제는 미국은 빅뱅식 일괄타결을 주장하고 북한은 단계적 해결을 주장한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두 번의 회담에서 쌍방의 대립되는 입장은 정상 간의 포괄적·선언적 합의→실무급의 단계적 해결로 타협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단계적이라도 미국은 단계의 수와 단계 간의 간격을 최소화하자고 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종전 선언, 북·미 수교, 평화협정에 합의했다는 발표가 나와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만큼 전조(前兆)들이 좋다.

1992년 남북 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비핵화의 참고 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아래와 같은 합의를 담고 있다.

-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는다.

- 남과 북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 비핵화 검증은 상대 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한 대상으로 한다. 비핵화 검증을 위해 선언 발효 1개월 안에 남북공동위원회를 구성한다.

비핵화의 과정에서 가장 까다롭고, 그래서 협상 결렬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것이 검증 문제다. 검증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요원들뿐 아니라 미국의 핵 전문가들이 대거 동원되지 않으면 미국과 국제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검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미국 전문가들의 견해다. 북한은 5월 23~25일 악명 높은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한 뒤 콘크리트를 부어 폐쇄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그런 조치를 똑똑한 행동이라고 칭찬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핵실험장을 폐쇄하기 전에 시료를 채취·분석해야 북한이 지금까지 만든 핵무기의 수량을 계산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핵실험장 폐쇄는 사전 시료 추출이 없었어도 가장 가시적인 북한의 비핵화 선제 조치로 환영할 일이다. 미국은 아마도 전문가들을 동원한 물샐틈없는 검증에 협상의 초점을 맞출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과의 전략무기 협상 때 “믿되 검증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 검증은 “믿지 말고 검증하라”의 자세가 더 적절할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비핵화→북·미 수교→평화협정→한반도 평화 정착은 현실이 될 것인가?

앞서 설명한 김정은 위원장의 분명한 비핵화 의지와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 정치용 업적의 필요성이 접점(converging point)을 만나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20년까지는 평화 정착의 골포스트(goal post)에 당도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낙관한다. 그렇게는 안 될 것이라는 비관론에도 수십 가지의 합리적인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북한·미국·중국·일본, 전 세계가 북핵 미로감에 빠졌다.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는 이제 그렇게 된다, 안 된다의 현실론(Sein)보다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론(Sollen)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6. 포스트-평화(post-peace)의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


▎1.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오후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산책하고 있다. (왼쪽) 5월 7일 중국 다롄에서 만난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 / 2.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CIA 국장 시절인 3월 말 북한을 방문,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다.
남한과 북한은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의 다양한 혜택을 누릴 것이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비무장지대에 평화도시를 건설하고 그 안에 이산가족 면회소, 민족문화관, 학술교류센터, 상품 교역장 등을 설치하는 구상을 발표했다. 그때는 비전이었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미·중 4개 한국전쟁 당사국이 서명하는 그 비전은 문재인 대통령이나 그의 후임 정부에서는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 전문가인 재미학자 박한식 교수(조지아대)는 남북이 공동으로 개성에 종합대학을 설립하고 유엔을 설득해 도쿄에 있는 유엔대학과 유사한 대학을 세우자고 제안한다.([선을 넘어 생각한다] 263쪽) 이런 것들은 남북이 공동으로 펼칠 수 있는 많은 거대 프로젝트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국제연맹의 희비극이 한반도에서 재현되지 않아야

시야를 넓혀 동북아시아를 보면 그림이 밝지만은 않다. 한반도 문제는 미·중 대결의 구도 안에서 일어나고 해결된다. 한반도에 평화가 왔다고 미·일 대(對) 중국의 패권경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북한이 평화공존하면서 대외적으로 한목소리를 낸다면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한은 주체적으로 두 개의 강대국(G2)을 한국의 국익에 맞게 활용할 기회를 잡게 된다. 지금까지 저주였던 한국의 지리적 위치가 축복으로 바뀔 수 있는 기회를 맞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리적 결정론(geographical determinism)의 극복이요 청산이다.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지각판이 바뀌는 역사적인 대변혁(great transformations)을 정치쇼, 북한의 위장 평화공세라고 반대하는 일부 보수 진영은 우리 눈앞에 현실적으로 전개되는 단군 이래의 호기를 초당적으로, 액면대로 읽을 필요가 있다. 남북 합의와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의 국회 비준을 생각하면 보수 진영의 객관적인 정세 인식이 절실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강화회의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제안으로 창설된 국제연맹에 미국이 의회의 비준 거부로 가입하지 못한 희비극(tragicomedy)이 한반도에서 재현돼서는 안 된다.

※ 김영희 - 1958년 22세 나이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필자는 82세가 된 지금까지 현장을 누비는 영원한 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임원 등을 거치고 최근까지도 중앙일보 대기자 및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올해로 기자 활동 60주년을 맞는 그는 외교·안보·국제 뉴스의 한 우물을 판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201806호 (2018.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