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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특집] 북·미 정상회담, 최선·최악 시나리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야구로 치면 1회 시작, 9회 말까지 변수 많아 … 최악의 경우 경기 규칙 위반으로 몰수게임 될 수도

▎오는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만날 예정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 사진·연합뉴스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책을 44권이나 저술했다. 교수·전문가 등 직업 저술가 수준의 다작이다. 하지만 140자 트위터에 중·고등학생 수준의 문장을 구사하는 트럼프가 직접 책을 집필했다고 믿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정치가나 기업인처럼 전문 대필작가의 작품일 것이고 [MIDAS TOUCH(황금의 손)]와 같은 책은 재테크 전문가 로버트 기요사키와의 공저다.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는 버젓이 트럼프가 저자로 된 책들이 제법 판매된다.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 등 몇 권은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라 있다. 트럼프가 수익을 올리려고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책 집필은 시간 대비 비(非)경제적인 일이다. 책을 쓸 시간에 부동산 투자를 하는 것이 수십 배 이득이 된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2004년 7월 [성공하는 방법(The Way to the top)]이란 통속적인 제목의 책을 처음 발간한 이래 거의 매년 평균 3권의 책을 펴냈다. 본인이 베스트셀러 작가를 지망하는 것도 아닌데 지속적으로 책을 낸 데는 분명 특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책의 주제도 아동, 경제·경영에서 자기계발, 심지어 외국어 및 문학까지 다양하다. 도저히 일반 저술가나 특정 전문가조차 섭렵하기 어려운 광범위한 주제다.

미국에서 가장 비싼 건물과 지역은 대부분 트럼프의 손을 통해 개발됐다고 할 정도로 부동산을 보는 그의 안목은 탁월하다. 부동산으로 시작해 스포츠·오락 부문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미국적인 성공담의 상징이 됐다.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해 정치에 진출하는 데 있어 이미지 변신이 필수적이었다. 일단 방송에 진출해 지명도를 높였다. 트럼프는 NBC TV의 비즈니스 리얼리티 프로그램 [어프렌티스]의 진행을 맡으면서 미국 전역에 트럼프 배우기 열풍을 몰고 왔다.

그의 엄청난 카리스마는 쟁쟁한 출연자들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가 가차 없이 내뱉은 “너는 해고야!(You’re fired!)”라는 말은 유행어가 됐다. 2015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를 내걸고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돌풍을 일으켰다. 크루즈·루비오·케이식 등 이미 주지사를 지낸 기존 보수 정치판의 쟁쟁한 경쟁자를 차례로 제압했다. 유권자를 분리하는 선전·선동 전술과 경선 패배시 독자 불출마 서약 등의 전략으로 다양한 유권자를 사로잡았다.

역대 정상회담 성패 요인은 상대의 신뢰와 의지


▎북한에 억류돼 있다가 석방된 한국계 미국인 3명이 5월 10일 미국 워싱턴DC 앤드루스 공군기지를 통해 귀환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트럼프가 단번에 출마해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삼수(三修) 끝에 성공했다. 그는 2003년 개혁당 출마를 시작으로 2006년 출마 후 중도 포기했다가 2013년 100만 달러짜리 정치컨설팅에서 핵심 키워드를 포착했다. 메시지는 ‘중부지역(swing states)을 공략하라’였다. 13개 중부지역에 거주하는 청바지 차림의 지갑이 얇은 백인 노동자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대중과 소통이 필요했고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졸업생답게 책과 SNS라는 무기를 들고 그들을 자극했다.

드디어 힐러리를 제치고 백악관의 주인공이 됐다. 북·미 정상회담의 관전 포인트 분석에 앞서 트럼프의 저서와 소통 방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의 협상 스타일을 전망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4월 초 [뉴욕타임스]는 만평(漫評)에서 요즘 김정은 위원장이 밤늦은 시간에 침대에서 열심히 정독하는 책이 [거래의 기술]이라고 풍자했다. 이 책은 트럼프의 독불장군 스타일의 행보 뒤에 있는 ‘크게 생각하라’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 ‘지렛대를 사용하라’ ‘신념을 위해 저항하라’ 등 그만의 숨은 11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책은 재테크 귀재이자 거래의 달인인 저자의 전례 없는 성공 습관을 포착했다. 그의 책들은 부정과 긍정을 넘어 트럼프 증후군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열쇠를 제공해 줄 것이다. 김 위원장이 야밤에 정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되는 트럼프·김정은 간의 회담은 성공과 실패를 불문하고 세기적인 정상회담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것이다. 역사상 한 획을 그었던 정상회담은 아이젠하워-흐루쇼프(미국, 1959), 케네디-흐루쇼프(빈, 1961), 닉슨-마오쩌둥(베이징, 1972), 레이건-고르바초프 1·2차(제네바, 1985·아이슬란드, 1986), 부시-고르바초프(몰타, 1989), 부시-푸틴(슬로베니아, 2001), 오바마-카스트로(파나마, 2015) 등이 있다.

그중에 닉슨-마오쩌둥 회담은 죽(竹)의 장막 중공(中共)의 문을 여는 단초가 됐다. 키신저의 핑퐁 외교가 단초가 된 정상회담의 성공 사례였다.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인근 숲속 별장에서 개최된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 간의 48시간 정상회담은 핵무기 제거에 초점을 맞췄다. 레이건이 최종 순간에 고르비의 전략방어구상(SDI) 폐기 제안을 거부하면서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특별한 성과 없이 끝이 났지만 ‘레이캬비크 회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상회담 중 하나로 꼽힌다. 이후 소련이 몰락하고 냉전이 종말을 고하는 전주곡이었던 회담이었다. 회담의 교훈은 ▷상대의 아킬레스건을 공략했고 ▷완벽한 실무적인 준비가 있었고 ▷조급증 없이 회담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부시·고르바초프가 1986년 지중해 몰타 해역 선상(船上)에서 만났던 몰타 미·소 정상회담은 세계사의 큰 방향을 논의했다. 전략 핵무기 감축을 합의, 냉전의 종지부를 찍은 성공한 회담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정상회담은 양날의 칼이다. 고위험·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의 게임인 만큼 실패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1959년 케네디·흐루쇼프 회담은 흐루쇼프와 협상에 나섰던 케네디 대통령의 준비 부족으로 상대방에 대한 앙금만 남은 채 실패로 끝났다.

협상의 실패와 성공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은 협상 당사자들의 신뢰와 의지였다. 특히 케네디·흐루쇼프 회담은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불신의 시대에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연목구어(緣木求魚)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상대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배려보다는 공세적인 제로섬(zerosum game) 게임 방식의 정상회담은 냉랭한 분위기에서 어색하게 끝이 났다. 오히려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는 후세 사가들의 평가를 받았다. 실패한 정상회담은 자연스럽게 외교적 카드의 소진을 의미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흐루쇼프와의 회담이 실패로 끝난 뒤 일어난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에 강경 대응했다. 케네디의 일전 불사 의지에 흐루쇼프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함으로써 위기는 가라앉았다. 실패한 정상회담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 사례였다.

트럼프-김정은 회담은 역대 정상회담의 족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인물평에서 미세한 공통점도 찾아 보기 어렵다. 유사점보다는 이질적인 면을 찾기가 훨씬 용이하다. 거래의 달인으로 비유되는 비즈니스 대통령과 21세기 유일무이하게 3대 권력세습을 감행한 폐쇄국가의 젊은 지도자가 얼굴을 맞대는 정상회담이다. 외형상 물리·화학적 결합이 용이하지 않은 조합이다. 영화로도 연출하기 어려운 캐릭터 수준이다.

외형상 물리·화학적 결합이 용이하지 않은 회담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오른쪽)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역사상 성공한 정상회담으로 평가된다.
역대 정상회담 중에서 물리적으로 나이 차가 가장 많이 나는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1946년생(만 72세)과 1984년생(만 34세)의 동서양 지도자가 만나는 장면은 문재인-김정은의 군사분계선 악수보다 더 극적일 것이다. 양측 지도자 간에 막내아들 혹은 장손자 수준의 나이 차는 장유유서의 동양은 물론이거니와 나이 개념이 희박한 서양 사회에서도 시니어와 주니어의 개념으로 분명히 서열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21세기 3대 세습의 수령 독재국가의 지도자와 첨단 자본주의 국가에서 평생 비즈니스 기업가로 부를 축적하다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백인 골수 대통령과의 만남이다. 34년의 인생에서 특별히 본인이 돈을 벌 이유가 없었던 가난한 독재국가의 타고난 금수저와 냉엄한 비즈니스의 현장에서 부를 축적했다가 부도가 나기도 했던 산전수전의 백전노장이 한자리에 앉게 된다.

외국 정상이라고는 문재인 대통령 및 시진핑 주석과의 세 차례 만남이 전부인 초짜 지도자와 집권 1년 반 만에 최소 50개국의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한 세계 초강대국 리더가 통역을 사이에 두고 동상이몽의 대화를 나누게 된다. 아마도 통역들이 의미를 전달하느라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과정에서 일찌감치 이복형 김정남과 친형 김정철을 제치고 2008년 말 후계자로 확정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8년 8월 14일 뇌졸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뒤 후계자 선정에 매진했다.


▎실패로 끝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의 정상회담은 훗날 미사일 위기로 이어졌다.
김정은은 집권 후인 2013년 2인자를 자처하고 아직도 자신을 10대 조카로 생각하는 친중파 고모부 장성택을 전격 처형했다. 특히 2017년 항상 ‘포스트김(Post-Kim)’ 시나리오에서 자신의 대체재로 거론되던 이복형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했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폭발사건의 교훈을 얻어 북한 공작원이 직접 살해하기보다는 제3의 동남아 여성들을 동원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평양의 지도자는 집권 6년 동안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이라는 관영 언론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이 우상화 차원에서 보도됐다. 반면 워싱턴의 지도자는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비우호적인 언론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한다. 포르노 스타 스캔들과 러시아 게이트는 물론 백악관 내부의 권력투쟁을 둘러싸고 친보수 성향의 [폭스뉴스]로는 부족하다고 여길 때는 트위터를 통해 공개 설전을 이어 간다. 여론전을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반대 언론은 가짜 뉴스 프레임으로 비판에 대응한다. 상대를 다루는 데 있어 다양한 전술과 전략이 시시각각 변화를 거듭한다. 상대방이 의외의 기습에 허를 찔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이상 대미 외교 노하우를 축척한 일본 외무성(外務省)이 트럼프를 상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결코 통념적이지 않은 이들의 ‘부조화의 조화’


▎2013년 처형된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은 위원장은 장성택 처형을 통해 권력 기반을 다졌다.
굳이 외형적인 공통점을 찾으라면 양 지도자가 모두 거구(巨軀)라는 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4·27 남북 정상회담에서 도보로 이동한 후 서명 장면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모습은 그가 최소 110㎏에 육박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트럼프는 키 192㎝, 몸무게 107㎏으로 건강검진표에 나와 있다. 양 지도자를 포착하는 카메라 화면이 꽉 찰 수밖에 없다. 다른 공통점은 좋아하는 음식에서 찾을 수 있다. 2016년 6월 유세에서 트럼프는 김정은이 미국에 오면 테이블에 앉아 햄버거를 함께 먹으면서 핵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국빈만찬은 어렵고 햄버거 정도만 대접하겠다는 다소 푸대접의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4·27 정상회담에서 평양냉면에 의한 국수외교(Noodle Diplomacy)가 성공했고 아베 신조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11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일본의 수제 버거인 먼치스 버거(Munch’s Burger)를 대접했다. 이질적인 지도자 간의 극적 만남에서 공통의 음식은 최고의 언론 메뉴가 될 것이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은 스위스 제네바의 학교 식당에서 자주 접했던 햄버거 때문에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양 지도자가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은 ‘통념적이지 않다(unconventional)’는 점이다. 양 지도자의 이질적인 성장 경로와 집권 배경은 ‘부조화의 조화’를 찾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특히 양측이 승부사 기질이 강한 만큼 진검 승부로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담판이 오히려 가능하다는 추론이다. 협상의 3대 쟁점은 ▷사찰과 검증의 수준 ▷단계적 동시적 폐기와 보상의 거래 방식(trade) ▷비핵화 일정(time line)이다.

3대 이슈를 중심으로 6·12 싱가포르 회담을 조망해 보자. 우선 ‘최상의 시나리오(The Best scenario)’다. 김 위원장이 진정성 있는 비핵화를 결심한 만큼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은 장밋빛 전망이 가능하다. 양측의 ‘통 큰 양보’에 의한 상생(win-win) 게임이다. ‘좋은 협상, 착한 이행’이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미국이 요구하는 남아공 방식이나 2003년 리비아 모델의 비핵화 방식도 논의될 수 있다. 남아공은 1989년 말부터 핵무기를 자진해체하기 시작해 1993년까지 2년6개월에 걸쳐 폐기를 완료했다. 정상회담에서는 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는 물론 영원한(Permanent VID) 비핵화도 논의할 수 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도 모두 수용,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상당 부분 해소시킬 것이다. 일정도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최소 1년, 최대 2년 안에 비핵화의 90%를 이행한다.

하지만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과 경제적 보상은 확실하게 제공된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벤치마킹해 한반도 전체 비핵화가 명문화된다. 귀납적으로 북한 비핵화는 물론 미국의 핵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와 핵우산 금지는 물론 주한미군 철수로 동북아 안보질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수반된다.

특히 비핵화 단계를 ▷사찰과 검증 ▷미래 및 현재의 핵무기 폐기 ▷과거에 제조된 핵무기 폐기 등 최장 3단계로 축소, 빅딜이 가능하도록 양측이 합의한다. 북한의 비장의 무기인 살라미 전술은 원천 봉쇄돼 협상의 이행을 촉진하도록 한다. 사실상 선(先) 핵 포기와 후(後) 경제적 보상의 리비아 방식을 부분적으로 변형 적용한다. 하지만 미국의 반대급부 제공도 분명하게 합의문에 명기된다. 우선 핵사찰을 수용하는 순간 대북제재의 최소 50%는 해제한다. 미국이 한반도에 배치한 전략자산도 철수한다. 주한미군의 규모 축소와 성격 변화가 논의된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이 재개된다. 당연히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 등 남북경협도 재개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는 2020년 11월 선거 이전까지 대략 2년6개월 동안에 북핵 문제가 완전 해결되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국제사회 사찰 정보와 북한 고백(confession) 간의 불일치


▎38노스가 공개한 풍계리 핵실험장 위성사진. 북한은 북·미 정상회담 전에 핵실험장 폐쇄를 공언했다. / 사진캡처·38노스
두 번째는 ‘그럭저럭 버티기 시나리오(The Muddle through scenario)’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018년 5월 9일 2차 방북에서 세 명의 미국인 억류자를 석방시켰다. 한·미 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참관단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현장을 둘러보는 등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마침내 싱가포르에서 양국 정상이 비핵화 이행 로드맵을 담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2018년도 가을 노벨상은 트럼프, 김정은 및 문재인 대통령으로 예측된다. 한국전쟁의 종전이 공식 선언된다. 남·북·미 및 중국을 포함한 평화협정도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2018년 10월 하순 가을이 깊어가고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평화상이 발표될 무렵부터 양측 언론에는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등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났다. 핵시설의 사찰과 검증 과정에서 추가적인 현장과 물질의 신고를 둘러싸고 북·미 양측의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한다. 국제사회의 사찰 정보와 북한 고백(confession)이 불일치해 양측의 신경전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필자는 정부 협상대표단장,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과의 세미나 등의 자격으로 북한을 10여 차례 방문했다. 가장 놀라운 경험은 국토의 80% 이상인 북한 산악지형이 알프스 산맥 수준이라는 점이다. 남한의 지리산은 동네 뒷산 수준이다. 북한의 솔직한 고백 없이 사찰과 검증은 수박 겉핥기 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 반미(反美)를 체제유지의 공식이념으로 70년 이끌어 온 평양정권에 서양인들이 북한 전역을 휘젓고 다니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도 불가하다. 검증의 실효성과 합의문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과 북미 양측의 선전전으로 감정의 골이 패이기 시작한다.

특히 과거에 제조한 20여 개의 핵무기, 즉시 제조가 가능한 현재의 핵물질인 수량 미상의 플루토늄과 농축우라늄 및 각종 실험장비와 설비 등 미래의 핵무기에 대한 사찰과 검증은 경계선이 불분명함으로써 비핵화 이행은 진척되지 못 하고 답보상태에 처한다. 그럭저럭 북한 정권은 검증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미국에 책임을 전가하고 워싱턴 정가는 합의가 휴지조각이 되고 있다고 분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군사적 옵션의 선택이 가능한 시점도 아니다.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로서 국제적인 지지와 높은 평가를 받은 합의문이 6개월 만에 미로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결국 북한은 부분적 핵을 폐기하는 핵군축 협상을 한 셈이다. 한편 북한의 전통 우방인 중국은 노골적으로 평양을 두둔하고 미국의 무리한 검증과 사찰 요구가 합의문의 이행을 어렵게 하고 있다며 6자회담 재개를 주장하고 나선다. 북한으로서는 급할 게 없다. 북한과 미숙한 협상을 했다는 미국 내 비난 여론이 트럼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 시간이 미국편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임기 중반부를 넘어서는 트럼프에게 이제 비핵화는 사실상 물 건너간다. ‘좋은 협상, 악한 이행’ 형식의 회담이 초래하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한겨울에 시작해 초여름에 끝난 비핵화 드라마


▎지난해 6월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스캔들 특검 수사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미국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 사진·연합뉴스
마지막으로 ‘최악의 시나리오(The Worst scenario)’다. 양측은 비핵화 조건과 방식을 둘러싸고 치열한 물밑 기 싸움 끝에 어렵사리 싱가포르에서 두 정상이 대면한다. 사전에 합의문 조율이 완료돼 마지막 단계에서 서명 장면 등 세리머니를 연출하는 남북 정상회담 형식은 실행되지 않는다. 북한과 미국 양측 협상 실무 총책인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은 평양에서 3차 접촉을 가졌으나 심각한 이견을 조율하지 못한 채 협상장에서 조우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핵과 미사일의 폐기는 물론 화학무기, 사이버 공격 및 인권 개선 등 북한의 아킬레스건 모두가 협상 어젠다에 포함돼야 하는 미국 조야의 입장을 북한이 수용하기는 어렵다.

신뢰를 구축한 후 단계적 동시적 절차에 의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으로 북핵을 포기하는 ‘평양 스타일’은 김정은-시진핑 간 두 차례 회담에서 공인된 금과옥조였다. 미국인 인질을 석방하는 등 신뢰 조성으로 분위기를 띄웠지만 비핵화 본질을 뒤집기엔 역부족인 사안이다. 특히 최소 1년, 최대 2년 안에 북핵 폐기를 완료하라는 미국의 일정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다. 제재 완화를 주장하는 북한의 요구에 미국은 검증과 부분 폐기가 이뤄질 때까지는 제재를 완화할 의향이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양측의 물밑 접촉은 평행선을 달리며 접점을 찾는 데 실패한다.

두 사람은 최종적으로 자신의 보스인 트럼프와 김정은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하지만 북·미 정상이 협상장에 가 보지도 않고 판을 깰 경우 모두가 패자인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보스들이 얼굴을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는 직접 담판 전략을 구사한다. 양측은 협상 테이블에서 미국은 PVID, 북한은 단계적 동시적 비핵화라는 문장을 반복하면서 각각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주력한다. 특히 비핵화 일정을 구체적으로 공동성명에 명기하는 데 대한 평양의 거부감이 심하다. 오전 회의를 지나고 오후 회의가 개최됐으나 양측은 물러서지 않는다. 양측 참모들이 회담 결렬을 선언하고 철수할 것을 보스에게 건의하는 등 회담은 파국 분위기다. 정상회담 파국(catastrophe)이 갖는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한 보스들의 요청으로 하루 더 회담을 갖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다음 날 오전 양측은 추가적인 논의를 계속한다는 미봉책 수준의 합의문을 발표하고 각자 회담장을 출발한다. 트럼프는 회담이 종료되기가 무섭게 트위터에 북핵 폐기에 대한 미국의 노력을 선전하고,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폄하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한다. 양측의 대통령 전용기가 각각 워싱턴과 평양에 내리자마자 양측의 상호 비난성명이 보도된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으로 시작된 한반도 비핵화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종료되지 않는다. 한겨울에 시작해 초여름에 끝난 비핵화 드라마는 주연 트럼프-김정은-문재인, 조연 시진핑-아베였다. 제목은 일장춘몽(an empty dream)이었다. 후세 사가들은 트럼프 역시 지난 25년간의 동북아의 고질적인 북핵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고 기록한다. 이후 한반도 상공에는 전략자산의 배치가 빈번해진다. 정상회담을 통한 외교적 노력의 실패가 내포하는 각종 군사적 옵션의 논의가 활발해진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의 발언이 자주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북·미회담은 북핵 폐기로 가는 첫걸음일 뿐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호에 실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저서 [협상의 기술] 광고와 지난해 1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만찬사를 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 / 사진·인스타그램, 연합뉴스
다양한 후유증이 장마가 그친 후 버섯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와 동시에 남북관계도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워싱턴에선 문 대통령에 대한 비난여론이 대두된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부족했는데도 한국이 미국을 들썩거리게 해 회담이 성사됐다는 칼럼이 [뉴욕타임스]에 등장한다.

한미 관계 역시 원활하게 가동되지 않는다. 기대가 실망으로 반전하면서 한국 내 보수·진보세력 간 책임 공방이 가열된다. 진보 세력의 반미에 의한 우리민족끼리 주장과 보수 세력의 한미동맹 강화 주장으로 국론분열과 갈등 양상이 심화된다. 진보는 미국의 무리한 요구로 북한 비핵화 협상이 파탄됐다며 미국대사관 앞에서 연일 시위를 전개한다. ‘양키 고 홈’이라는 주한미군 철수 구호까지 등장한다. 남남갈등이 절정에 달한다. 북한은 미국에 대한 비난과 동시에 북·중 우호관계의 강화에 나선다. 시진핑 주석의 평양 방문이 처음으로 이뤄진다. 양국의 전통적인 관계가 복원된다. 북핵 사태는 ‘나쁜 협상, 악한 이행’으로 6개월 만에 원점으로 돌아간다.

가장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는 ‘그럭저럭 버티기 시나리오’다. 양측이 판을 깨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렇다고 동상이몽의 스토리가 접점을 찾아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핵협정 탈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제정치의 합의문이 지도자에 따라 하루아침에 백지화되는 현실은 협상의 취약성과 모호성을 상징한다. 2015년 7월 이란 핵협정이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서명됐을 때 필자는 “이란은 되는데 왜 북한은 안 되는가?”라는 글을 작성한 바 있다.

하지만 3년 만에 미국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대통령이 교체됨에 따라 8t 트럭 분량의 합의문서는 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및 독일 등 나머지 국가가 고스란히 짊어지게 됐다. 이란 기업과 거래하는 기업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등으로 중동은 물론 세계 경제는 다시 한번 혼돈에 처하게 됐다. 미국의 이란 핵협정 탈퇴를 통해 북한이 습득한 학습효과는 “절대 선(先) 핵 포기는 아니다”라는 점이다. 결국 ‘그럭저럭 버티기 시나리오’가 가동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만드는 반갑지 않은 뉴스가 중동과 워싱턴에서 날아든다.

북·미 비핵화 회담은 시작이 반이 아니다. 뉴욕 양키즈 야구팀 포스 요기베라의 명언을 기억해야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until it’s over)’. 9회 말 쓰리 아웃이 돼야 게임이 끝난다. 회담 시작은 1회의 시작일 뿐이다. 9회 말까지 수많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경기 규칙 위반으로 몰수게임이 선언될 수도 있다. 매회 사찰과 검증 및 폐기가 착착 진행돼도 9회까지는 갈 길이 멀다.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시청자가 세기의 경기를 숨 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명승부를 기대한다.

-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201806호 (20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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